설악산 전투에서 희생된 국군장병들

내가 겪은 6.25 ⑨ / 역질에 걸린 손자를 간호하는 할머니의 정성
1. 눈이 많이 온 해 1ㆍ4 후퇴

1951년 1월 4일 다시 말하지만 그 유명한 1ㆍ4 후퇴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인민위원장을 패버린 동네 아저씨들은 모두 남쪽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이틀 뒤 인민군이 우리 동네에 또 들어왔다. 그해 설날은 눈이 아주 많이 왔지만 명절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래 동해안 지방 우리 고향은 음력설 전후하여 보름이 지날 때까지 함박눈이 많이 와 쌓이는 곳이다. 설악산에서 동해안 벌판까지 흰 눈으로 가득 덮여 그 눈경치가 아주 볼 만한데 전쟁이 한창인 그 해에도 어김없이 그러했던 것 같다.

‘쌕쌕이’가 연신 하늘에 굉음을 내며 수시로 날아다니고 여기저기에 폭탄을 떨어뜨려, 한번 터졌다 하면 천지가 진동했다. 그 때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방공호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눈이 많이 온 어느 날, 개울말 머일 이모할머니 댁에서 머일 이모할아버지와 나는 짚신을 삼고 있었다. 머일 이모할아버지는 짚신 잘 삼기로 고을 안에서 소문나신 분이다. 할아버지에게서 짚신을 잘 삼는 방법을 정신 차려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허리에 새끼로 허리띠를 두르고 배꼽께 줄을 이어 양쪽 엄지발가락으로 집신에 들어갈 가느다란 새끼줄을 접어 늘이고 짚신을 반 이상을 삼고 있는데 갑자기 양양 읍내 쪽 하늘에서 ‘방구 비행기’ 소리가 “뿌―웅” 하고 났다.

방구 비행기가 떴다 하면 2, 3분 뒤에 어김없이 제트기가 날아오게 되어 있다. 머일 이모할머니 댁 온 식구들은 모두 두터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이불이란 이불은 모조리 우리들 머리꼭대기에 덮어 놓았다. 그 바람에 방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던 우리들은 산소 공급이 차단되어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이불 속에서 공기를 쐬려고 발버둥을 치곤했다.

그런데 나는 불편하더라도 그곳에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겁도 나고 갑자기 할머니 얼굴이 떠올라 이모할아버지가 붙드는 것도 듣지 않고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할머니가 있는 양지마을 방공호로 가고자 함이었다. 어느 결에 날아왔는지 양양 하늘 꼭대기에는 여러 대의 ‘쌕쌕이’들이 날아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무서운 기총사격을 하면서 공습을 하는 중이었다.

개울말 동네는 낮은 쪽이어서 괜찮았는데 나는 언덕에 올라 양쪽으로 논만 있는 달구지길 허허벌판을 죽어라고 뛰어가는데 항공에서 보면 노출이 다 된 셈이어서 금세 발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양양 읍내에서 ‘쌕쌕이’ 몇 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공습하는 소리고 뭐고 다 아랑곳하지 않고 죽어라고 할머니 있는 방공호 쪽 산으로만 들이뛰면서 치달았다.

방공호 쪽에 다다르니 내가 벌판에서 혼자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던 동네 어른들이 들어오기 무섭게 야단을 치기 시작하는데 그때 나는 혼이 많이 났다.

“그곳에 가만히 엎드려 있어야지 저놈의 자식이 동네사람 다 죽이려고 한다.” 하고 야단을 쳤는데 특히 우리 동네 규율 담당격인 종렬 아저씨가,

“너 이놈! 그러다가 기총사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하고 호통을 칠 때는 총소리 들을 때보다 더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내가 벌판을 뛰어 들어오는 모습에 방공호에 숨어서 밖을 내려다보시던 동네 어른들이 더 놀랬던 것이다.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으며 종렬 아저씨에게,

“그만 하시게나! 아이가 너무 놀라고 있지 않나! 무사했으면 됐지!” 하였다.

한숨을 돌리고 난 뒤 나는 내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짚신 삼다가 그대로 들고 뛰어 반쯤 넘게 삼던 짚신이 아랫배 아래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이후 우리 동네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나 인민군대가 주둔해서 흰 가운을 길게 하여 등 뒤에 매달고 다녔는데 비행기만 떴다 하면 그 자리에 흰 가운을 뒤집어쓰고 납죽 엎드렸을 땐 눈인지 사람인지를 육안으로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어린 나는 하마터면 인민군에 총살을 당할 뻔 했던 일도 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어디 가고 작은집 할머니가 나와 함께 집에 있었는데 마침 우리 집에 인민군 두 명이 묵고 있었다. 작은댁 할머니는 인민군으로 입대한 두 아들 종각, 종숙 아저씨 이야기를 하면서 소식이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나를 가리키면서,

“얘가 국방군이 올라왔을 때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있는 내 앞에서 큰 소리로 빨갱이들은 모두 다 죽여야 돼! 하면서 여러 번 말하는 바람에 나는 섭섭해 견디기 어려웠다.”

하고 말을 했다. 졸린 듯 가만히 듣고 있던 인민군 두 사람은 작은댁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종전의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독이 바짝 오른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째려보았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세워 놓은 따발총을 잽싸게 잡더니만 작은댁 할머니를 보고 나를 가리키면서,

“야가 할머니와 어드렇게 됩네까?”

하고 물었다. 이 기색을 살핀 작은댁 할머니도 심상치 않았던지,

“얘가 바로 내 손지(손자)라우!” 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인민군이 나를 독하게 노려보다가 다시 따발총을 벽에 세우더니 나를 보고,

“앞으로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총살이야!” 하였다.

나는 갑자기 총살한다는 말에 너무 놀라 숨도 잘 쉬지 못하면서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때 따발총을 들었던 인민군의 눈초리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듯하다. 작은댁 할머니가 말 한번만 더 잘못했으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때였다.

2월 중순경, 어른들은, 공습 후 양양 읍내까지 국방군이 들어왔는데 다시 강릉 쪽으로 후퇴했다고 조용히 말했다. 3월 말 가까이까지 우리 마을엔 인민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두워진 뒤 갑자기 동네에 주둔하던 인민군들이 모두 철수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동네에서 제일 친한 친구이자 친척 집안의 나보다 한 살 아래 동생인 중수와 개울말 인민재판 때 다리를 크게 다친 아저씨 댁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사람 소리가 웅성거려 문틈으로 밖을 빼꼼이 내다보니 논밭 위로 하얗게 덮인 눈에 달빛이 비쳐 인민군들이 동네 소들을 모두 몰고 군인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소금재 고개께로 넘어가는 행렬이 보였다. 소를 급히 몰고 가다가 아저씨네 앞길 아래 논 쪽 비탈에 쌓인 눈에 미끄러져 내리 굴러 아우성 소리가 요란히 나기도 했다. 그 이튿날 어른들이 말씀하는데 그 동안 동네에 남아 있던 빨갱이와 빨갱이 비슷한 자들은 몽땅 그 인민군대와 같이 북으로 다 넘어갔다고 했다.

이때 소금재 인민군들이 눈이 덮인 고개를 넘어간 그날 이후 윗복골 마을과 우리 마을 그리고 회룡리 일대엔 또 슬픔의 이야기가 마을마다 퍼졌다. 인민군들이 후퇴하며 마을을 떠날 때 마을마다 남아 있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만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 사람들 중 힘깨나 쓴다는 남자들은 모두 불러 앞세우고 짐을 지고 가게 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인민군 총부리 위협에 못 이겨 짐을 지고 갔는데 그 일행들이 넘은 들을 지나 벼락 바위께 쌍천을 넘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캄캄한 밤 뿌연 눈길에서 짐을 내려놓고 쉬는 동안 일행 중 이북으로 가기 싫은 사람들이 서로 눈치 약속으로 짜고 있다가 출발하고 얼마 있지 않아 중도문으로 들어서기 전 인민군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갑자기 짐을 벗어 던지고 다시 벼락바위 쪽 소금재 고개께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한다.

한밤인데도 이 낌새를 알아차린 인민군들이 따발총과 장총을 쏘면서 도망가는 일행 뒤통수를 쫓아오는데 장잿터께로 도망한 사람들 몇은 무사하고 소금재 고갯길로 다시 넘으려 도망치던 사람들이 따쿵 총으로 드르륵 하고 쏘아대는 사격에 맞아 아까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기진하고 공포에 젖어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눈에 눈물이 다 마를 지경이었다. 나의 친구 아버지들 몇이 이때 안타깝게 희생되었다.


2. 설악산 전투

5월 말쯤 설악산 대청봉 아래쪽에서 치열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대낮에도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그 유명한 설악산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전투가 일어난 곳은 화채봉 골짜기와 능선 그리고 대청봉 동쪽 골짜기 쪽이라고 했는데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 소리를 우리 동네에서 밤낮으로 들었었다.

다시 생각해 보지만, 어디에 포탄이 어떻게 떨어졌고 어디에서 양쪽 군대가 총을 쏘았는지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무섭게 터지던 포탄 소리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콩 볶듯 하는 소총 소리와 동해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함포소리 그리고 지진이라도 난 듯한 포탄 터지는 소리만 저 계곡에서 있었겠지 하고 내 마음에 아른거릴 뿐이다.

멀찍이 떨어진 동해바다에서 UN군 전함이 함포사격을 하는데, 비유하자면 소북과 대북으로만 형성된 타악기 연주단의 연주소리와 같았다. 리드미컬하게 장단을 맞추어 규칙적으로,

“쿵닥 쿵닥 쿵닥 쿵닥……. 쿵다닥 쿵다닥 쿵다닥 쿵다닥……. 쿵 쿵 쿵 쿵……. 슈잉 슈잉 솨아아…….”

하고 소리가 나면 조금 있다가 우리 동네 상공으로,

“슈아악 슈아악… …. 씨잉 씨잉……. 후아악 후아악…….”

하며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로 밤에 났는데 이 소리는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해상에서 설악산 내륙을 포격하는 함포소리가 그렇게 났던 것이다.

이렇게 일어난 설악산 전투는 우리 국방군이 진군하는 북쪽으로 확산되었다. 강원 북동부 태백산맥의 모든 능선을 포함하여 그 아랫동네 서쪽으로는 인제, 서화, 그리고 지금의 양구군 해안 면과, 동쪽으로는 간성과 고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줄기차게 벌어진 인민군의 공격과 우리 국군의 방어와 공격전이었다.

1951년 늦봄 내내 동해에서 올라오는 함포소리가 끊이지를 않았고 설악산 일대 전역에서 포탄의 굉음이 밤낮 없이 산천초목을 진동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휴전이 될 때까지 오랜 동안 쉼 없이 밀고 밀리는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어른들의 말로는, 바로 북쪽에 금강산을 두고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은 더더욱 지독했다고 하였다. 또한 설악산 전투에서 함포의 지원사격이 없었으면 우리 국방군이 도저히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시간이 지난 뒤 어른들이 말했다. 바다에서는 함포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튿날부터는 하늘도 먹구름으로 덮여 장대비가 주룩주룩 밤낮으로 내렸다.

이런 미군 전차부대 가운데 민간인이 거주하는 우리 동네와 이웃동네에서도 큰 일이 있었다. 동네 기운께나 쓰는 청년들이 숨어서 지내다가 주동이 되어 상복골, 둔전리 석교리 등지에서 설악산 전투에 투여된 국방군 식량보급을 우리 강현에 사는 사람들이 지원하였던 것이다. 식량 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송암산 뒤로하여 가파른 화채봉 골짜기 쪽으로 올려 나르고 둔전리 쪽과 간곡리 청년들도 대청봉 아래 골짜기로 올라가 우리 국군 진지에 식량을 날랐다.

사흘 낮밤을 그렇게 쉬지 않고 날라다 국방군이 전투에 이기도록 자발적으로 힘을 썼으니 민간인들의 애국적인 성의도 대단했다. 공산 치하에서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서러움을 받았으면 생명을 걸고 국방군을 돕자고 그 가파르고 높은 설악산 골짜기까지 식량 가마니를 지고 오르내렸겠는가. 그런데 설악산 전투에서 진 인민군이 금강산 쪽으로 모두 도망을 가고,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국방군에게 패한 패잔병들이 후발대로 잠행해서 북쪽으로 쫓겨 갈 때 마을마다 들렀는데 이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밀고로 쌀가마니 지고 나르던 청년들이 많이도 납치를 당했다.

이들은 인민군들에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윗복골 서울집, 밀양집, 큰고성집, 작은고성집 형제분, 오석집, 안산집, 밤나무집, 작은 가랫핏집 등 그리고 둔전리의 추씨 아저씨 석교리의 김씨 아저씨 등등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납치당해서 총살당했다 하는데 지금도 슬픔을 안은 아주머니들과 후손들은 마을을 지키고 산다.

세월이 지나 그때의 우리 또래는 70세 안팎이 되었고 아주머니들은 할머니가 되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 납치당한 사람 중에 후손이 없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 마을 안에서 서로의 갈등과 오가며 교차하는 남북 군인들 틈바구니에서 밀고 당한 사람들이 붙들려가고, 그런 뒤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면서 경계하며 지내고, 참으로 전쟁이란 이렇게 온천지의 평화를 박살내고 휩쓸어 무너뜨렸던 것이다.

설악산으로 날아가는 포탄이 오발되어 송암산을 넘지 못하고 산 아래 떨어져 불발탄이 된 것이 있었다. 이것을 윗마을에서 주워다가 마을 공회당 앞마당에 뇌관을 밑으로 하고 길이별로 일렬로 주르륵 땅바닥에 세워 놓았는데 작은 것도 있었지만 큰 것은 웬만한 사람이 들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무거운 것들이었다.

마을 형들과 우리들은 그것들을 겁 없이 들어가며 기운 자랑들을 하였다. 불발탄이라고 위험하지 않은 게 아닌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후에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주워온 포탄을 가지고 놀다가 포탄이 터져 마을이 둘러빠지고 또 죽은 사람도 많았다.

나의 왕고모 할머니의 큰아들 안동석 아저씨, 즉 내 아버지의 고종사촌 동생 되는 아저씨가 겨울에 낟가리에서 검불을 한 아름 안아다가 소여물을 끓이느라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었다. 그런데 한참 타들어가던 아궁이 속에서 갑자기 수류탄이 터져서 커다란 소여물 통과 부엌 전체가 굉음과 불똥으로 난장판이 된 일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사상이 다른 나쁜 사람이 아저씨 몰래 수류탄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어 휩쓸려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아저씨도 폭음과 화염과 파편으로 온 몸을 크게 다쳐서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했는데 겨우 실명은 면하였으나 그 이후 평생 동안 그믐날 밤 야경을 보는 느낌으로 거의 맹인같이 살았다.

그 이후 눈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구해 복용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고 특히 생 뱀만 있다면 그것을 구하려고 불원천리하고 가서 구해서 복용하였다. 몸의 다른 곳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눈에는 효과를 보지 못한 것 같았고 그 폭발 후유증으로 50을 조금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저씨의 아버지 즉, 나의 왕고모 할아버지는 양양 일대에서 제일 기운이 세어 안장사라 불리어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땅바닥에서 수 맷돌 짝에 뾰족이 나온 쇠를 앞 잇빨로 깨물어 땅바닥에서 머리 위까지 하늘로 쳐들어 올렸다 하니 힘이 얼마나 센지 짐작을 할 수가 있겠다.

1967년도 동석 아저씨는 돌아가기 얼마 전 서울 성북동 우리 집에 다녀갔는데 그때 나는 아저씨를 안내하여 창경궁과 비원 구경을 시켜 드렸다. 아저씨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안내하는 나에게 “이 코스는 어디로 가는 곳이고 저 코스로 가면 어디로 가는 길이야?”라고 방향을 코스라고 영어로 말하면서 나의 손을 잡고 수도 없이 묻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저씨의 큰아들 광혁은 나의 6촌 동생이다. 삶의 자세가 아주 성실해서 지금도 양양 일대에서는 신의 있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이웃들과 손을 잡고 농촌마을을 잘 일으켜서 부농의 마을로 이끄는 성실한 그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든든한 느낌이 든다.

1ㆍ4 후퇴 이후 국군이 다시 전세를 뒤집어 북상할 때 어느 저녁 무렵 나는 할머니와 같이 왕고모 할머님 댁에 갔다 왔다. 내려오는 길에 낙산사 위로 갑자기 비행기가 떴는데 절간에 포탄을 투하해서 낙산사에 불길이 올라 시커먼 연기와 함께 하늘을 찌르던 장면을 보고 아랫동네 우리 집으로도 못 내려가고 할머니와 밭둑에 웅크리고 숨어 오들오들 떨던 생각도 난다. 전시라 갑자기 일어난 사건들은 이런 끔찍하게 무섭고 놀라운 구경거리뿐이었다.


3. 전쟁 유행병 장티푸스

3월쯤 되어 우리 동네에 역질이 돌았었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전쟁 통 한가운데 들었던 동해안 전체에 역질이 돌았다. 장티푸스가 온 것이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소리 없는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감염된 환자들은 고열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정신을 잃어 대부분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은 회복된 다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누구누구 집 아이가 죽었다. 누구 집 아저씨와 누구 집 할머니가 돌아갔다…….

매일같이 슬픈 얘기만 들려 왔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 뒤에 찾아오는 괴질에 죽어가고 있었다. 전쟁은 이렇게 또 다른 아픔을 낳았던 것이다.

얼마 후 나도 장티푸스에 걸렸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데 나는 금방 인사불성이 되었다. 한 열흘도 넘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전혀 몰랐다. 방공호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친척이고 뭐고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유행병 앞에서는 인정사정도 없는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방공호에서 쫓겨났다. 할머니는 축 늘어진 나를 업고 길가에 있는 우리 집은 위험하여 내려가지 못하고 방공호 아래 있는 큰 쉴집 대청마루 밑에서 자리했다.

이 집은 그때 큰아들 민태 형과 형수가 극렬한 공산주의자로 월북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나에게 친절하던 그 형이 우리 집 전담 감시자였다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월북한 민태 형이 결혼할 때가 생각난다. 늦은 봄쯤이었는데 그 집 화단에 온갖 꽃이 피어 참 아름다웠다. 특히 노란 꽃이 키가 큰 여러 대궁에서 무더기로 깨끗이 피었는데 멋있어서 가끔 유심히 쳐다보던 생각이 난다. 형이 장가를 가는 잔칫날 마당에서 시집살이 온다는 형수를 봤는데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도 아니고 줄곧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그 눈감은 모습이 하도 이상하고 답답해 보여 그날 저녁 어두컴컴할 때 동네 형들과 누나들 뒤꼭지를 따라 그 집 사랑방 앞으로 갔다. 나는 툇마루 끝에 매달려서 꼬마들은 저리 가라는 누나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호기심 가득하여 형들이 뚫어 놓은 창호지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잔치할 때와 마찬가지로 집안 형수는 방안에서도 여전히 귀신처럼 눈을 내리깔고 꼼짝 않고 있었다.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양 볼과 이마엔 연지곤지를 찍어 바르곤 그 예쁜 여자가 쥐 죽은 듯이 앉아 숨도 쉬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신부가 말도 않고 있어 귀신처럼 보였다. 형들과 누나들은 연신 키득거리며 무엇이 좋은지 서로들 힐끔힐끔 쳐다보고 손바닥을 비벼가면서 법석을 떨었다. 다음날도 그 집 마당을 어슬렁거렸는데 그 새 신부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역질에 걸린 나는 할머니와 같이 텅 빈 큰 쉴집 대청마루 밑에 웅크리고 숨었고 불도 피우지 않은 상태에서 할머니는 나를 간호하였다. 보름 가까이 오들오들 떨고 지냈으니 이왕 정신을 못 차리고 늘어져 투병하는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간호하는 할머니의 고생은 오죽하였으랴. 할머니는 당신 생명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손자를 살리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전쟁 통에 무슨 예방약이고 치료약이 있었겠는가? 전통 한약재 하나 없는 그때의 상황이다. 생짜로 앓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대책 없이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방공호에 있는 동네 친척들은 얼씬대지도 상대하지도 않았다. 감염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열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였다. 보름 동안 두 차례인가 어떻게 희미한 기억이 생각날 뿐 그 외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때 할머니가 하얀 무를 잘게 썰어 빨간 실고추를 띄워 만든 물김치 국물을 내 입에 떠 넣어 주었다. 나는 그 이후 지금까지 평생 그렇게 시원하고 입맛이 도는 물김치 맛을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었다.

서서히 회복하는 나를 보던 할머니는 매일 울다가 다 말라 버렸을 눈물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흘리며,

“찬수야, 이제 됐다! 네가 살아났으니 내가 네 애비 에미에게 너의 손목을 넘겨 줄 수 있게 되겠구나! 이제 됐다! 이제 됐다!”

하면서 기뻐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할머니는 나를 간호하는 중에도 그 무서운 장티푸스에도 전혀 전염되지 않았던 것인데, 지극한 사랑의 일념에는 맹위를 떨치는 전염병도 감히 우리 할머니를 범접치 못하였으리라!

요즈음 나는 손녀딸을 돌보고 있는데 가끔 아들 내외가 손녀딸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친정집을 다니러 갈라치면 2~3일 간은 집안이 텅 빈 것 같은데 하물며 그 옛날 나의 할머니는 어떠했겠는가. 또 홀로 살아난 나의 아버지 한 분만 쳐다보고 살아왔으니 나에 대한 집착이 어떠하였겠는가.

51년 그 해가 할머니의 회갑이 되던 해였다. 난리 통에 무슨 회갑이고 설이고가 있겠는가. 장티푸스를 거뜬히 이기고 일어선 나를 보고 동네 친척들은 우리를 다시 방공호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장티푸스를 앓고 난 사람들은 모두 머리털이 몽땅 빠지는데 이상하게도 나의 머리털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