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命에 돌아가신 성근 아저씨 이야기

내가 겪은 6·25 ⑩ / 전쟁의 와중에도 피어나는 전우애
1. 소금재 고개

전황은 다시 국방군의 진격으로 인민군들은 우리 마을에서 완전히 북으로 물러갔다. 1951년 이때 4월 중순쯤인가 하여 멀리 남쪽으로 내려갔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1950년 9월 말 그때처럼 아주 지친 모습으로 꾸역꾸역 또 밀려 올라왔다. 그때 우리 집 텃밭 대나무 옆 언덕 쪽으로 빨간 뙈기복숭아(개복숭아) 꽃이 아름답게 피어 한참 볼 만하였다.

패잔병 인민군들이 줄을 지어 다친 몸을 이끌고 소금재 고개를 넘어가다가 모두들 쉬는데 인민군 한 사람이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여 우리 텃밭 쪽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나무 밑에 총을 내려놓고 복숭아나무에 기어 올라가 아름다운 꽃가지를 여러 개 꺾어 갔다. 기진하여 걷다가 쉬는 한 여자 인민군에게 건네주는데 그 반색하던 여자 인민군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죽음이 왔다 갔다 하는 패잔의 행렬이 그렇게도 초라한데 잠시 동안이겠지만 복숭아꽃을 건네받은 그 여자 인민군의 좋아하는 표정이란!

4월 중순 넘어서 엄청나게 많은 국방군이 우리 동네 앞 관덕정 공터 넓은 곳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개울말 정승골 넘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작은 서당집의 커다란 기와집에 사령부 사무실이 들어섰다. 우리 동네 소금재 고개 너머 북쪽 넘은들,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쌍천을 경계로 도문 속초 쪽으로는 인민군이 주둔하여 쌍방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양상으로 전황이 형성되었다. 넘은들 한복판에 철조망이 설악산 입구 핏골에서부터 내려와 상도문 그리고 장잿터 마을, 쌍천 남쪽으로 바닷가 기차 철교 있는 데까지 이어져 무시무시하고 삼엄하게 쳐져 있었다.

이때 우리 동네 개울 말에 슬픈 일이 또 벌어졌다. 내친구 심동갑·심동각 육촌 형제가 살았는데 동갑이 아버지 성근 아저씨가 물치 장거리에 국군 환영 만세 부르러 갔다가 강선께로 올라오는데 하필이면 마침 국군장교들이 전투 작전을 짜느라 지도를 들여 다 보는 곳에 가서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마음에 같이 머리 디밀고 같이 들여다 본 일이 있었다. 성근 아저씨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순간적으로 “너 정탐군이지!” 하며 오해를 해 아저씨가 변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백주 대낮에 바로 앞에 흐르는 강 현천 강둑으로 끌고 가서 총으로 사살해 갑자기 비명으로 목숨을 잃었다. 울고 불고 하는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의 말로는 아저씨가 평소 남이 뭘 하면 꼭 참여하려는 성격이 있어서 그날도 반가운 마음에 기웃 거리며 비상시 군대 수칙도 모르고 장교들 틈에 고개를 들여 밀었다가 난데없이 변을 당한 것이라 했다. 그런 뒤에 군인들은 전투명령을 받고 삽시간에 모두 소금재 고개 너머로 진군했다. 그 이후 동각이 동갑이네 가족들은 맥이 빠져 기운을 잃고 살았다. 양쪽으로 대치한 군인들이 이리진격하고 저리 진격하는 바람에 가운데 백성들만 죽을 지경이었다. 전쟁이란 이렇게 착한사람 나쁜 사람 구분도 없이 처신 잘못하면 이유도 모르고 모두 비명에 죽는 경우가 수두룩 했다.

이 무렵 국군들이 커다란 밥통에 밥을 담아 두 사람이 앞뒤로 하여 어깨에 메고 뒷산 참호로 나르던 모습을 많이 보았다. 어떤 때는 고지의 참호 진지로 밥을 나르던 군인 둘이서 무슨 의견 차이가 있었는지 싸움이 붙어서 앞뒤로 장대를 어께에 매고 맞들고 가던 커다란 밥통은 길옆에 내려놓고 피가 나도록 서로 주먹질을 하던 모습을 친구들과 같이 구경했던 때도 있었다. 서로 생명을 지켜주어 가며 전선에 같이 있는 전우들이 무슨 원수 졌다고 저렇게 아무도 없는 골짜기 안에서 단둘이 주먹질하며 코피 터지게 싸운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9월 고향 선산에 벌초하러 갈 때마다 다 성장하고 군 복무도 오래 전에 마친 내 자식들과 며느리들에게 그때의 사실들을 들려준다. 소금재 고개를 넘어 차를 몰고 달리다 멈춰 세우고 그리고 모두 내리게 한 뒤 당시 이 벌판 양쪽에서 치열하게 총을 쏘며 대치하던 때를 떠올리며, 옛날 할머니가 나에게 옛날얘기 들려준 것처럼 나도 자식들에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때의 끔찍했던 전쟁 이야기를 해 주곤 한다.


2. 1951년 최전방 국방군 주둔지 강현면

우리 동네에도 집집마다 군인들이 주둔하였다. 우리 집 아래윗집으로 일개 소대원이 같이 있었는데 젊은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은 모두 군인들을 피해 따로 모여 다른 집에 있게 했다. 동네 아저씨들은 누나들과 젊은 아주머니들이 다칠 새라 신경도 많이 썼고 주민 마을은 또 다른 의미의 비상이 걸리다시피 한 기억도 난다.

나는 개울 마을을 지나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많은 군인들이 집집마다 주둔하였는데 하루는 전쟁 통에 어디서 왔는지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닌 이상한 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개울말 동네 마을 회당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군인 아저씨들이 그 회당집 앞에서 줄을 서 있었고 한 아저씨가 집안에서 나오면 또 다른 아저씨가 들어가는 걸 보았다.

이런 이상한 모습을 동네 아주머니들도 보았는지 우리 집에 모여서 끼리끼리 쑥덕거리며,

“뭐이 그렇너? 정낭간(양양 사투리로 변소)에 간다면서 조짱(종이)도 없이 들어가고, 대낮에 웃티(옷)도 입지 않고 방에서 나오쟎우!”

하면서 킥킥거렸다. 한 아주머니가 우습다는 듯이 입을 가리면서 말하였다.

“어떤 군인이 고함치기를 어서 빨리 나와! 나도 소변이 마려워 못 견디겠다! 이러지 않우! 그래 가지구서야 햇아(갓 난 어린아이)가 생기겠너?”

하면서 손바닥을 치며 모든 아주머니들이 까르르 웃던 일이 생각난다.

나의 생각에도 통상적으로 우리 마을엔 정낭간이 집 앞 마당 건너편에 있는데 무슨 용변을 집 방안에서 본다는 말인지? 내일이면 소금재 고개 넘어 큰 전투가 벌어진다고 총기를 닦으면서 곧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인데 그 개울말에서의 이상한 장면은 도저히 우리 동네와 전쟁터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기억이었다.

동네 수염이 허연 어른들이 망조 들렸다고 야단들이 났었다. 특히 규율 부장격인 종렬 아저씨는 장비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혀를 끌끌 차면서 해괴한 일 났다며 노발대발했다. 이 때문에 인민군이 마구 들어왔다든지 국군이 엄청나게 몰려온다든지 하면 어른들이 젊은 아주머니들이나 누나들을 밖으로 나돌지 못하게 하였고 모두 골방에 숨게 하는 지경이었다. 나는 그 때는 잘 몰랐으나 커서야 그 정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듯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여름까지 강릉 쪽으로 모두 다 피난을 갔다 온 그 이후 우리 동네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방 신병 훈련소가 생겼는데 그 이후엔 그런 소문이 없었다. 분대장들은 실탄이 들어있는 권총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분대장 중에는 일등중사도 있었고 이등중사도 있었다. 내가 군에 입대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병장 상병에 해당되는 사병 계급인데 그 분대장에게도 전시에는 총살권이 있다고 무시무시한 말을 하여 어린 우리들은 그 권총을 보고 겁이 나 은근히 두려워했다.

그때 어린 나이지만 군인들의 눈초리를 유심히 보았는데 커서 생각해 보니 그 때의 군인들 눈빛은 보통이 아니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고 빛나기가 샛별 같았다. 얼굴에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어른들이 말하기를 전투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이란다. 하기야 그 무서운 전투를 수도 없이 겪으며 무수히 총을 쏘며 밤낮 잠도 못자고 때로는 한밤중에 양쪽 군이 맞부딪쳐 총칼로 치고받는 육박전까지 겪었으며 뒷산 너머에서 계속해서 적군과 싸우려고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그들이니 과연 그 눈빛이 어떠했겠는가 짐작이 가는 일이다.

낙동강 전투와 다부동 전투에서 이긴 기세로 영덕을 지나 삼척 강릉으로 진격해 치올라올 때 그때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 반드시 이겨야 하고 심지어 한밤에 기습을 받아 육박전이 벌어질 땐 적군인지 아군인지가 분간을 할 수 없어 가까이서 상대의 머리를 더듬어 보고 머리카락이 길면 ‘국군’이고 짧으면 ‘적군’이라고 구분하여 싸울 때도 있었다고도 하였다.


3. 전우애

매일 저녁 군인들의 암호가 바뀌고(나는 군인들의 암호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앞에 있는 상대에게 암호를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하면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즉시 발사하여 사살한다고 하였다. 너무나 무서운 공포 분위기였다.

옛날 시골 농촌은 끼니때가 되면 집집마다 밥을 짓느라고 부엌 아궁이에서 나무를 태워 초가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일제히 하늘로 올라가는데 동시에 약속한 것처럼 이 집 저 집에서 하늘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모습은 요즈음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다. 때마다 굴뚝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어느 집은 비어 있고 어느 집은 손님들이 많이 왔다는 것을 가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주둔하고 나서는 산 너머 넘은들 벼락바위 쪽의 적군에게 노출된다고 연기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게 해서 한동안 집집마다 또 다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옆집과 우리 집에도 일개 분대가 숙식을 같이 했는데 고지 참호 속에서 지키다가 교대하러 내려온 아저씨들과 또 맞교대하며 분주히 올라가던 무장한 아저씨들 복장이 생각난다. 양쪽 앞가슴 위엔 수류탄이 각각 하나씩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허리엔 M1 누런 실탄이 번쩍번쩍하게 둘러져 있었다. 머리엔 화이버만 쓰는 것이 아니고 위장망까지 씌운 무거운 철모도 항상 같이 쓰고 다녔다.

산 고지에서 내려오는 아저씨들 철모엔 나뭇가지가 가득 꽂혀 있었다. 나는 아저씨들이 철모를 벗어 던지고 쉬는 시간에 이야기하는 전투 무용담을 아주 재미있게 듣곤 하였다. 어떤 아저씨들은 내려오자마자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며 세상이 떠나가도 모르게 잠에 취하곤 하였다. 머리에 쓴 철모에 구멍이 뽕 하고 뚫어졌는데 앞서 전투에 총알이 정통으로 날아오지 않고 약간 빗나가 요행으로 살아났다고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랑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철모에 실탄을 맞고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핑 돌다가 조금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느 전투에서는 산 아래로부터 공격해 올라오는 적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는데 참호 속에서 아래쪽으로 사격을 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머리를 숙이고 엎어졌다고 한다. 이것을 본 다른 분대장 아저씨가 보기에 총에 맞아 죽은 것 같아 순간 몸을 날려 바람같이 빠르게 넘어진 아저씨의 등위로 뛰어 내리니 엎드렸던 아저씨가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쳐다보니 멀쩡한 상태여서 씨익 한번 서로 웃고 다시 고지 아래로 사격을 하면서 그 전투를 이겼다고 했다.

그 때 엎드려서 비명을 지른 아저씨가 분대장 아저씨에게,

“제가 총알을 재 장전하느라고 엎드린 사이에 분대장님이 제 등 뒤에 떨어지는 바람에 등 뒤에서 바위가 무너지는 줄 알고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니 분대장 아저씨가,

“네가 죽은 줄 알고 네가 쏘는 자리가 비면 큰일이기에 그 자리를 지키려고 몸을 날려 급히 뛰어 총을 쏘려 했지. 그런데 아! 이 새끼가 살아 있잖아!”

하며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분대원들 앞에서 껄껄거리며 손뼉을 치는데 철없는 나는 그 무용담이 그저 재미있게만 들렸었다.

총알이 비 오듯 하는 싸움터에서 여기저기 옆의 전우들이 쓰러지는 가운데에서 이런 한가한 농담이 나오다니……. 그 전투에서 이겼으니 지금 그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니 인생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된다.

전투가 벌어진다든지 적의 기습을 받는다든지 할 때면 전광석화같이 동작을 취하게 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그러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면 제일 무서운 적이 잠이라 했다. 포탄이 옆에 떨어지고 굉음이 고막을 울리면 그 순간 엎드려 있지만 그 상태에서 바로 잠이 온다는 것이다. 행진이 계속될 때도 고지를 치달으면서 고함을 지를 때에도 조금만 멈추어 서면 잠이 쏟아지는데 정말 못 견디겠다고 하였다. 심지어 포탄이 옆에 떨어지는데도 지금 죽어도 좋으니 잠 좀 한번 실컷 자 보았으면 하는 심정이라 했다.

내가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 이웃을 사랑하고, 친구 간에 의리를 지키고, 직장에서는 상하간의 예의를 지키고 하는 것이 아주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며 생활했다. 의리를 지킨다는 점에서, 또 이웃간에 서로를 위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나의 성격을 다잡아 주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어렸을 때 전쟁 통에서, 촌각을 다투는 급박함 속에서 보고 느낀 국방군 아저씨들의 ‘전우애’ 바로 그것이었다. 나라를 사랑하며 의로운 일에 서슴없이 먼저 나서며, 옳지 않는 일에 단호히 떨쳐 버리려 했던 일들, 이런 사례 모두를 통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비 오듯 퍼붓는 포격 속에서 누가 다치면 서로 보듬어 주고 하는 당시의 일들이 나에게는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단순한 일들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를 위할 때라든지, 소대장 분대장이 부대원들을 호되게 질책을 한 뒤 곧이어 질책당한 부하를 격려해 주는 것이 바로 형제애요 부모 공경이요 나라사랑의 순수한 사나이들의 엉킴이었던 것이라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평소 미워했던 전우가 적군으로부터 위협을 받아 생명을 잃을 지경이 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를 희생해 가며 적진으로 돌격하는 전우를 엄호하며 먼저 구하려 나선다는 사실들이었다. 생명을 내 놓고 내 조국을 같이 지키자고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는 것이다.

전투가 승리로 끝나면 살아 돌아온 아저씨들이 우리 집 좁은 방구석에 빼곡히 들어앉아 만면에 웃을 띠고 더러는 서로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면서 적군을 물리쳤을 때의 짜릿했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또 손뼉을 치면서 마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고서는 언제 싸웠드냐는 식으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순식간에 잠에 빠진다.

그때의 이런 모습들은 말하자면, 상관은 곧 자애로운 부모요, 선임병은 나를 엄호해 주는 믿음직한 형님이요, 전우들은 생사를 같이하는 서로 다정스런 친구들이었다. 생사를 같이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지켜주는 이런 형제애의 울타리가 세상 또 어디에 있겠는가.

1962년도 초가을, 내가 육군에 입대하여 중부전선 산악지대 최전방 양구에서 총을 들고 참호 속에 엎드려 11년 전 그 때의 생각을 해보니 생명이 경각에 달리고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잡는 것보다 더 쉽게 생각하는 끔찍하고 슬픈 때에도 짐작도 못하는 그런 웃음이 있었구나 하고 회상해 본 적이 있었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