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양군 남대천 하류
인민군과의 대치상태는 소금재 고개 너머 넘은들 벌판에 설치한 철조망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설악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쌍천 물과 넓은 벌판이 전장이 되었다. 밤낮으로 군인들의 외치는 소리이고 주민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이런 가운데 군인 아저씨들이 시간만 나면 조금 전에 겪었던 전투 무용담을 재미있다는 식으로 너털웃음 웃고 익살을 떨어가면서 이야기를 하다니…….
1951년 4월 하순 도문 쪽에 주둔한 인민군과 강현 우리 동네에 주둔한 국군과 대판 싸움이 일어난다는 말이 자주 오갔다. 이번에 국군이 밀리면 우리가 마을에 머물러 있다가는 인민군에게 다 죽는다고 하였다. 우리 마을과 인근 마을 여기저기에서 이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국군이 오래 주둔한 가운데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대들어 정성으로 국군에게 밥을 해먹이고 편의를 제공하면서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기 때문이란다. 또다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난 보따리를 싸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대대적으로 피난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1ㆍ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가지 못한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 인민위원장 사건 때문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마을마다 너무 참혹한 보복을 당했기에 다시 그들이 들어오면 이제는 모두 죽는다고 공산당들의 악질적인 모습을 피해 개미새끼 하나 없이 모두 모두 남쪽으로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이제 피난가면 영영 집에 돌아오지를 못할 것이라 하면서 장정들도 지고 가기 어려운 무거운 피난 짐 보따리를 쌌다. 동네 한 아저씨가 할머니더러,
“아주머니! 이렇게 무거운 것을 어떻게 지고 가려고 그러시우?”
하고 말하면서 짐을 줄이라고 얘기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나도 조그마한 배낭에 보리쌀 몇 되 옷가지 몇 점 정도를 넣었다.
이때 남쪽으로 피난가지 않은 집들은 동네마다 두서너 집 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젓번에 공산주의 이북 간부들과 이북으로 뒤따라간 친인척들이라 했다. 조상대대로 한 마을에서 평화스럽게 오순도순 같이 재미있게 살다가 어느 집은 남쪽으로, 어느 집은 북쪽으로 갈라지는 이 비운 속에 마을의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슬프게도 무참하게 산산조각 깨지고 말았다. 사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들을 슬프게만 하고 무섭게 다가와야만 하는 것인가.
5월 초 강현 일대에는 모든 농촌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 마을 사람들이 떠난 빈 집 고을엔 국군만 진지를 구축하고 쳐 내려오는 적군을 계속 막고 있었다. 아저씨들은 우리를 지키려고 싸움터에 남아 있고 우리들은 살기 위해 남쪽나라 강릉 쪽으로 보따리를 들고 이고 지고 떠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도 이별이라고 군인 아저씨들은 집을 떠나는 우리 마을 사람들 손을 붙잡고 엉엉 울면서 이별하는 모습도 보였다. 적군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지키겠다고 의연히 집을 떠나올 때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 부모 가족들과의 이별 모습을 생각해서 그러하였으리라. 잠시 동안이지만 헤어진 그 이후 그 아저씨들은 며칠 뒤 벌어졌다는 무섭게 치열한 전투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우리는 모두 다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저씨들이 밤잠을 자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전방을 적으로부터 처절하게 지키며 버텨 놓았기 때문에 나나 동네 사람들이 살아서 옛날이야기를 하고 이제껏 사는 것이다. 아저씨들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 미안하기가 짝이 없다. 나라 구하겠다고 적군과 마주보면서 생명을 걸고 싸워 이긴 그 덕택에 우리 국민들과 국가는 무사했던 것이다. 참으로 국군들의 훌륭한 나라 위한 몸 바침에 감사와 송구한 마음 가득하다.
우리들은 군인 아저씨들과 이별하고 일제시대 1919년 3월 중순 어느 날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현 사람들과 같이 모여 일본 놈들에게 대들어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라고 힘차게 불렀다던 물치에서 정암리 큰 길을 택하여 왼쪽으로는 무심한 동해 바다의 일렁이는 파도가 백사장에 밀려 오르며 부딪치는 모양을 낙산사 뒷산 쪽 후진(뒷나루, 지금의 설악 해수욕장)까지 길게 바라보면서 넓은 길 가득히 피난민 행렬은 끝이 없이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소달구지에 짐을 실은 집들은 빨리도 지나갔고 우리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 머리 꼭대기에 이고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서 내려갔다. 나 역시 조막만한 하얀 배낭 하나를 지고 일행을 부지런히 뒤따랐다. 동네 기율담당 격인 종렬 아저씨는 장티푸스에 걸려 늘어져 고생하는 막내아들 정수 형(나보다 네 살 위이고 우리 또래가 제일 좋아하여 따르던 동네 집안 형)을 지게에다 싣고 지고 내려갔다. 우리가 내려가면서 길 양쪽에 있는 집들을 들여다보니 이미 피난을 떠나서 모두 텅텅 빈 집들이었다.
2. 남대천 하단 모래밭에 묻힌 시체
양양 읍내 쪽으로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벌써 한계령 아래 오색 쪽으로부터는 인민군이 내려온 것 같아 언제 총질이 날지 몰라 위험하다고 했다. 바닷가 옆 낙산 해수욕장을 지나 남대천 하류 백사장에서 갈벌이라는 동네를 건너가기 위해 우리 피난민 행렬은 잠시 멈춰 쉬면서 점심을 해 먹기 시작하였다.
연어가 올라오는 남대천 하류의 물 깊이는 어른의 가슴 정도 되었고 물살은 그다지 세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주먹밥 보따리를 풀어 모두 빙 둘러앉아 밥을 먹으려는데 하필이면 나는 오줌이 마려워서 상류 쪽으로 한 2, 30m 쯤 떨어진 곳으로 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 떨어지는 곳을 내려다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 때 내 오줌이 곡선을 그리면서 모래에 떨어지니 오줌이 모래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모래가 떨어지는 오줌에 밀려 나면서 모래 밑으로 물체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흡사 도랑에 죽은 쥐가 껍데기가 벗겨져 허연 살이 보이면서 검은 털가죽이 벗겨진 형태의 물체가 나타나 내 눈에 보였던 것이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사람 뒤통수였다. 머리카락이 꽤나 길었는데 나는 너무 놀라 오줌도 누는 둥 마는 둥 긴장한 정신으로 발을 뒤로 하려는데 내 신발 밑창으로 갑자기 꿀렁거리고 물컹거리지 않는가? 나는 사람이 죽어 엎어져 모래에 덮인 시체 등 위에 올라서서 오줌을 눈 것이다. 옆으로 비켜서니 그곳도 죽은 사람이 묻혀서 모래가 약간 덮여 있었고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니 그 모래벌판 전체가 사람 죽은 시체가 묻힌 곳이었다.
그때의 짐작으로 그 넓은 남대천 하류 백사장 일대(지금 연어가 회귀해 올라오는 곳)는 전부가 죽은 지가 얼마 되지 않는 청년들의 시체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나중 이야기지만 남대천 하류는 우리 국군이 강을 등지고 남대천 둑에서 낙산사 쪽으로 공격해 남하하는 인민군들을 결사적으로 막으려고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희생된 그런 곳이라 했다.
피난민 일행이 자리하고 있는 곳부터 상류 쪽으로 어마어마하게 널려져 모래로 살짝 묻혀 있는 시체, 시체들! 나는 갈 때는 의식하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는 밟을 데가 없을 정도로 널려진 시체들을 피해 간신히 마을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장소로 돌아와 할머니 옆에 앉았다.
사색이 다 된 상태로 얼이 다 빠졌었다. 할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하는데 밥이 넘어갈 리 없다. 어렸을 때지만 그렇다고 다들 밥을 먹고 있는데 저기 사람 죽은 게 있다고 할 수도 없어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또 어린 마음에 너무도 놀라서 고개만 숙이고 죽은 듯이 있는데 할머니가 또 말하기를, 앞으로 많이 걸을 터인데 지금 먹어두어야 된다고 하였으나 나는 요지부동이었다. 보다 못한 머일 이모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호통을 쳤다.
“저눔의 자식은 아무델 가던지 밥을 먹지 않아 제 할미만 맨날 굶게 만든단 말이야! 저 버릇 언제나 고칠 텐가! 아이 놈이 저렇게 고집이 세서야, 원 내 참!”
하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할머니 치맛자락만 붙잡고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엔 무서운 아까의 장면만 생각하면서……. ‘할아버지는 남의 속도 모르면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맛있게 밥을 먹었다. 강릉까지 내려가서야 나는 남대천 건너기전 그 시체 널린 사실을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할머니도 그때서야 크게 놀랬다.
사실 나는 머일 이모할아버지가 지적한 대로 아주 고집스런 버릇이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 여섯 살이 넘어서인가 우리 집 식구가 밥을 먹을 때마다 이웃집 어린애가 우리 집 밥 먹는 것을 늘상 문지방 앞에서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가,
“찬수야! 저렇게 남의 집 밥 먹는 데 가서 거지처럼 밥을 얻어먹으려는 모양은 나쁜 것이란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의 이 한 번의 가르침을 무조건 지키는 것이 아주 잘하는 것인 줄 알고 그 이후부터 고집스럽게 받들면서 반드시 명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분별력 없이 꼭 지켰던 것이다. 어린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보고 싶은 아버지에 대한 약속 이행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다른 집에 가서는 절대로 밥을 먹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러니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다른 집에 갔다가 끼니때가 되어도 내가 먹지 않으면 할머니도 따라서 식사를 하지 않고 손자 따라 굶는 것이 태반이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내가 야단을 맞은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대단히 병약했었는데 어디를 가면 하도 먹질 않아 할머니도 그것이 안타까워서 같이 울며 당신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웬만큼 커서도 그러했으니 나도 할머니 속을 어지간히 썩여 드렸다. 훗날 거제도 피난생활 이후는 그러하지 않았고 남대천 사건은 경우가 다르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이 다시 짐을 지고 남대천 하류로 도강하기 시작했다. 모두 건너 갈벌까지 갔는데 그곳에도 우리 집안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예전에 할머니와 한번 왔을 때는 머리를 길게 치렁치렁 땋은 총각들이 아주 많았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긴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어른들이 많은 동네여서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보지를 못하였다. 이미 모두 피난을 가서 우리 일행은 빈 집에 들어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쉬어 갔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피난 짐이 너무 무거워서 절반 이상을 빈집에 덜어놓고 이튿날 출발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도 나는 그 시체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3. 비목(碑木)
내가 성장하면서 그 장면은 항상 내 마음 안에 있었는데 점차로 전쟁의 참혹함과 그때의 사실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교직 생활 30여 년간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볼 때마다 가끔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의 아까운 젊음의 원통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울먹거렸다. 이들을 죽게 한 그 무모한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분노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소중한 남의 집 귀한 자녀들을 외부로부터 소중하게 보호하고 때가 묻지 않게 아름답게 키우고 가르쳐야지!’ 하는 생각이 나의 교단에서의 교육 목표, 즉 신념의 출발점이 되었다. 특히 현충일 10시에 경적이 길게 울리면 묵념을 한다든지,「비목」이라는 가곡을 부를 땐 그 애잔한 가사 내용과 그 때의 모래사장에 묻힌 꽃피우지 못한 청춘과 반드시 연결되어 주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눈물을 마구 흘리는 버릇이 지금도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아내와 등산 도중 가끔 지나치는 산비탈의 외로운 묘소를 보면 반드시「비목」을 부른다. 그러다가 그만 울컥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며 노래를 마저 부르니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웬일이냐고 하여 나는 내 심회의 자초지종을 다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의 장인도 6ㆍ25 전쟁이 난 해 8월에 당시 대한민국 강원도 농산물 원종장의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인민군에 끌려가서 어느 골짜기에선지는 모르지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풍문에 들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도 나의 눈물 흘리는 연유를 알고부턴 같이 손을 붙들고 눈시울을 적실 때가 많다. 그 이후「비목」을 부를 때 내 아내는 으레 내가 눈물을 흘리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기다려 주었다.
내가 차차 세상의 이치를 의식할 나이가 되니 지나간 일 중 그 주검 등 위에 올라서서 오줌을 누웠다는 사실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 숭고한 젊음의 정신! 그 애절함, 아름다움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두고 온 고향 부모 가족을 그리다가 장렬히 전사한 사실과 그 초연이 쓸고 지나간 전쟁터! 목숨이 달아날 경각에서도 펼쳐지는 젊음의 우정들, 애국의 몸부림! 처절히 모래에 묻혀 있으나 묻혀 있는 임들의 엄숙함 앞에 나는 54년이 지나도록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에 국립 현충원에 가면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눈물이 흐른다.
재직 시에 6월6일이 가까이 오면 학생들을 인솔하고 영령들 앞에 흰 국화꽃을 놓으러 여러 차례 간 적이 있다. 주변을 깨끗이 청소도 한다. 이것으로 살아남은 우리들이 이들의 숭고하며 애절하고 엄숙한 희생에 대한 감사의 도리를 다 하고 있었는가 하며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왔다. 이 땅의 젊은이! 남과 북의 이념을 떠나 생각해 보는 그 젊음과 안타까운 희생! 그 희생으로 이 땅에 살아남은 우리들은 과연 생명의 존엄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몸 바쳐 싸운 國軍 용사들을 향한 감사와 송구함
- 김찬수(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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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0-27, 09: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