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소년 이승복을 지켜낸 이야기
written by. 최경선
이동욱 기자가 밝힌 이승복의 진실, “부실한 기록 관리에서 역사의 왜곡과 파괴가 시작된다",..올바른 역사 기록과 보존 강조
  “역사는 부지런한 사람에 의해 기록되고 남겨진다.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부지런하면 선한 사람의 역사는 지워지고 악한 사람의 역사만 기록된다”
29일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152회 조갑제 기자의 현대사 강좌’에서는 1992년 ‘저널리즘’ 가을호 기사를 발단으로 시작된 이승복 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에 대한 오보 주장에 대해, 사건을 재취재한 前 월간조선 이동욱 기자가 자신이 직접 재확인한 이승복 군(당시 9세)의 진실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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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 사건은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무장공비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대검으로 잔인하게 학살당한 이승복 군에 관한 내용이다.
이 기자는 이승복 기사 조작설의 근거로 “△ 유일한 목격자인 형 이학관(당시 15세)씨와 기사를 작성한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는 서로 만난 적이 없다. △ 그럼에도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는 이승복 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했다는 말을 인용했다. △그러므로 조선일보 보도는 작문이며, 이승복 군의 말은 신빙성이 없다” 라고 설명했다.
이 기자는 이승복 오보설 전파경로의 의문점을 “이승복 군이 참살된 것은 1968년 12월9일 저녁 6시~7시 사이였고, 형 이학관 씨는 다음 날인 12월10일 09:00 헬기로 후송됐으며, 강인원 기자는 10일 낮 12시 경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기자는 현재 생존하고 있는 당시 목격자와 증언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내용을 정리해 설명했다. 이 기자의 강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68년 1월21일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김신조가 체포됐다. 당시의 생존자를 만나 68년 당시의 북한 정세를 물어보니, 인민군 정찰국장 김종태가 비정규전부대인 124군부대를 창설했고 이 부대원 중에서 8개조(1개조 15명) 120명이 10월중 출동지시를 받았다.
 
먼저 10월30일 2개조 30명이 침투했고, 11월1일 2개조 30명이, 11월2일 4개조 60명이 원산에서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가다가 울릉도가 바라 보이는 곳에서 90°로 꺾어 울진과 삼척에 도착했다. 이곳이 무장공비 침투로다.
그들은 고포리 해안에 도착했지만 당시 해안 경계근무를 섰던 초병이 공비를 보고 숨었다가 그들이 육지로 간 후 중대장에게 신고를 했고, 중대장을 빈 해안에 사격을 가한 후 다음 날인 11월3일 14시 30분 경에야 상부에 실제로 보고가 됐다.
아군은 최초 무장공비 침투 규모를 30명~40명 정도로 파악했으나, 11월27일 오후에서야 규모가 120명 임을 파악했다. 1968년에만 해도 127회의 북한군의 도발이 있던 상황에서 11월3일부터 12월8일까지 36일간 무장공비들은 19명의 민간인을 참살했다. 이 과정에서 90명의 공비가 궤멸됐다.
 
그러나 산에서 나물을 캐던 할머니가 돌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행방불명 된 우체부가 사체로 발견되는 등 무장공비에 의한 학살이 끊이지 않자 사건 전날인 12월8일 이승복의 담임선생은 신문 기사들을 보여주며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마라, 낯선 사람을 주의해라’ 등의 교육을 했다.
사건 당일인 12월9일 저녁, 이승복 군의 할머니와 아버지는 그 지역에 내려진 소개령으로 이삿짐을 싸는 아랫마을 사람을 도와주러 내려갔고, 집에는 안방에 이승복 군의 어머니와 건넌방에 이승복 군(숙제 중)과 형 학관씨(옥수수 알을 까고 있었음), 그리고 6세, 4세의 동생(잠자고 있었음)이 있었다.
이때 공비 2명이 어머니의 방으로, 3명은 아이들의 방으로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왔다. 이들은 한 달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침투할 당시의 여름 옷이 낡아 민가의 옷들을 훔쳐 입은 까닭에 거지행색 이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의 말을 빌면 이승복 군은 또래의 어린들과 남달랐다고 한다. 눈동자는 붉은 빛이 돌았고, 용맹하고 지는 법이 없어 6살 위의 형과 싸워도 형을 이겼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잘 듣는 성격이 강건한 어린이였다고 한다.
이런 이승복 군의 눈에 신발을 신은 채로 방에 들어 온 공비가 불쾌하게 느껴졌겠지만 숙제를 계속했다. 그런데 공비가 ‘이 책 미국에서 준 거냐?’라고 묻자 ‘아니오’라고 답했다. 공비가 다시 ‘이 공책은 미제냐?’라고 묻자 ‘우리나라 거’라고 답했고, ‘이 연필은 미제냐?’라는 질문에도 ‘우리가 산 거다’라고 대답했다.
공비가 다시 ‘너는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라고 묻자 ‘나는 북한이 싫어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답했는데, 이 말이 공비의 뇌관을 때렸다. 공비는 승복 군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려 대검을 입에 넣고 좌우를 갈랐다. 그러자 나머지 2명의 공비들도 당성이 강한 공산당원임을 입증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학살에 가담했다.
형 학관 씨가 놀라 튕겨 일어서니 공비 1명이 개머리 판으로 쳐서 쓰러뜨렸고, 잠자던 두 동생도 죽임을 당했다. 학관 씨의 기억에 의하면 잠자던 두 동생은 공비들이 손으로 두 다라를 집어 거꾸로 들어 벽에 내쳤다고 한다. 이어 어머니 방에서도 살려달란 비명이 들렸고 이들의 학살극은 3분 정도로 계속됐다. 학관 씨는 나중에 확인해 보니 36군데의 자상을 입었다.
 
공비들은 시체들을 밖으로 끄집어 냈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승복 군은 마당에서 다시 돌로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 나중에 시체를 수습한 이장의 말을 들어 보니 승복 군의 두개골이 다 깨져 있었다 한다. 이들은 승복 군과 두 동생의 시체를 마구간 옆 오지랖 통에 넣고 덤불로 덮었고, 어머니와 학관 씨는 퇴비장에 버렸지만 이때 학관 씨는 의식이 있어 공비들이 나누는 말을 모두 들었다고 한다.
그런 후에 공비들은 닭을 잡고 옷가지와 식량을 챙기고 있었다. 학관 씨는 얼굴도 모르는 할어버지가 ‘일어나지 말고 가만 있으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서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밤 8시쯤 승복 군의 아버지 이석우 씨(37세)가 돌아와 사립문 앞에 서자 공비 5명이 나타자 얘기 좀 하자며 방으로 안내했다. 석우 씨가 빈 지게를 진 채로 방에 한 발을 내 딛는 순간 피냄새를 맡고는 공비를 밀치고 부엌으로 도망쳐 뒷문을 열고 하천이 있는 절벽으로 도망쳐 몸을 날렸다. 이 와중에 엉덩이에 칼을 맞았지만 2km 정도의 아랫마을로 도망쳐 신고를 했다.
석관 씨는 아랫집 주민들과 함께 밤 11시쯤 2km정도 떨어진 친척 아주머니 최순옥 씨 집에 도착해 도움을 청했고 잠에서 깬 최씨는 이불 호청을 뜯어 지혈을 했다. 그리고는 ‘승복이는?’하고 묻자 석관 씨가 ‘죽었을 것이다. 공산당이 싫다고 말해 공비가 칼로 입을 찢어 죽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다음 날인 10일 수색대와 경찰 국군이 순옥 씨 집에 도착했고 학과 씨는 후송됐다. 순옥 씨는 걱정이 돼 군인들과 함께 계방산에 있는 승복 군의 집으로 올라 갔는데, 이때 기자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가 사진기자 노형욱 씨와 함께 도착했다.
최순옥 씨가 시신을 수습하면서 ‘아이구, 악독한 놈들.. 저희도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입을 찢었노..’ 라고 말하자 장교가 ‘왜 입이 찢어졌을까요?’라고 물었고, 순옥 씨가 ‘큰 아이 말이, 우리 큰 아이가 왔는데, 야가 공산당이 싫다고 하기에 입을 저렇게 찢었대요’라고 답했다”
 
즉 강인원 기자는 학관 씨를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학관 씨의 말을 전해 들은 순옥 씨로부터 다시 전해 들었던 것이다. 이 오보 논란으로 인해 전국의 초등학교에 있던 이승복 동상은 철거됐고, 1997년에는 교과서에서도 아예 삭제됐다. 이승복 이야기는 사건 다음 해인 1969년 과서에 실렸고, 84년에는 14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소개됐지만 1990년에는 축소돼 간략히 실렸었는데, 오보논란을 계기로 교과서에서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기자는 “조선일보는 민사, 형사소송에서 모두 일관되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한 말이 사실이었음을 확정판결 받아 소송 10년만에 사실 확인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오보설을 제기하며 오보전시회까지 열었던 김주언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92년 저널리즘에 오보설을 최초 제기한 김종배 씨는 무죄, 이승복 동상을 모두 없애야 된다는 기사를 쓴 경남매일신문에는 벌금형, 기타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며 허탈해 했다.
 
또 이 기자는 지난 30년간 이승복 기념관의 위상 변화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1985년 24명이었던 정원은 2001년에 18명으로, 2003년에는 12명으로, 2006년에는 11명으로 축소됐고, 2005년에는 강원도 교육청 소속에서 평창군 교육지원청으로 이관됐으며 예산도 1/2로 축소돼 기능직이나 청원경찰을 빼면 기념관 유지나 홍보를 할 수 있는 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보수·애국세력이 지켜 내야 할 가치관이 진실, 정직, 용기라는 것을 남긴 이승복 기념관이 휴게소보다 못한 203평의 초라한 기념관으로 유지됨에 반해, 12만평의 대지에 3,820평의 건물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기념관 안에 대한민국은 없는 제주 4.3평화기념관, 1,000평 건물의 5.18기념관을 비교하면서, 올바른 역사의 기록과 보존, 오도된 역사의 재복원을 강조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