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最大 무갈帝國 이야기

무갈제국은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를 포괄하였다. 이 네 개 나라의 현재 인구는 13억의 중국을 훨씬 넘어서는 약16억이다.
17세기의 세계최대, 무갈 帝國 이야기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父系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쪽 혈통으로는 칭기즈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에도 詩를 지었으며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族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 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명의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구축한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失地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가 고향 페르가나를 못 잊어 한 것은 땅이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512년 北進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방향을 돌렸다. 파키스탄, 인도 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南征의 피날레는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의 敵을 섬멸했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再現, 스스로를 달랬다.
이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교양 있는 영웅이었다. 47세에 죽은 그가 남긴 회고록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겨울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하들과 눈보라 속을 헤쳐 나가다가 동굴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굴은 너무 작았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삽으로 눈을 파고 앉았다. 몇 사람이 나만 동굴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 부하들이 눈보라를 맞고 있는데 나만 동굴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남자답지도 못하고 동지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페르샤의 속담이 생각났다. "친구와 함께 하는 죽음은 축제이다." 눈보라는 계속되었고 나의 등과 귀는 눈에 덮였다. 귀는 동상에 걸렸다. 이때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부하가 소리쳤다. "동굴이 아주 큽니다. 모두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눈을 털고 부하 戰士들을 불러 모아 굴속으로 들어갔다. 40-50명이 편하게 앉을 만한 넓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식량과 휴대품을 갖고 들어왔다. 심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을 발견하다니!>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重病(중병)으로 死境을 헤매자 매일 그 病床(병상)을 돌면서 알라神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소원대로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代 황제 후마얀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王의 보호 속에서 延命(연명)하기도 했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약320만 평방킬로미터를 정복, 너그럽게 다스렸다. 전성기인 17세기 무갈제국의 인구는 약2억으로 중국보다 많았다. 國力과 인구 면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무갈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투르크-몽골族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었으나 이 제국을 다스린 세력은 페르샤 관료들과 이슬람 文化였다. 순니파 이슬람을 믿었던 무갈의 왕들은 힌두교 등 他종교를 존중하고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정착시켜 수많은 종족들을 잘 다스리면서 다양성이 풍부하고 활력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무갈제국의 전성기는 아크바르 大王 시절부터 약150년간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만든 샤자한은 4代 王이다. 그는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세 번째 부인을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호화판 무덤인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건물이다. 눈부신 돔은 지름 35m, 높이 35m이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공된(1653년) 직후 아들에 의하여 廢位되어 2.5km 떨어진 아그라 요새의 한 건물에 幽閉되었다. 발코니에서, 사랑한 王妃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어 왕비 옆에 안장되었다.
파키스탄의 古都(고도) 라호르에도 무갈제국의 城 안에 궁전과 모스크가 있다. 궁전은 동시대의 베르사이유에 못지 않은 규모이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건설한 바드샤히 모스크도 장대하다. 주황색 砂岩으로 만든 이 모스크는 1678년에 완공되었다. 정원은 170×170m의 정사각형으로서 10만 명의 수용능력을 가졌다. 1986년까지 313년 동안 세계 최대의 모스크였다. 지금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파이잘 모스크가 가장 크다.

인도의 타지마할과 파키스탄의 라호르城이란 2대 볼거리를 만든 나라의 이름이 몽골(무갈)제국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17세기 세계 6大 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몽골계 북방유목민이 건설한 오스만 투르크, 淸, 무갈제국이었다. 몽골계 騎馬(기마)군단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소총이 발명되고 艦船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해양세력의 대표인 영국이 19세기 중반 무갈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다. 그때부터 중국, 인도가 100년 이상 서양 제국주의의 東進으로 온갖 수모를 겪는다. 이제 30억 인구를 가진 두 巨大 국가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惡人에게 善行을 베푸는 것은 善人에게 惡行을 하는 것처럼 나쁘다."
"Doing good to the evil is as bad as doing evil to the good."
(무갈 제국의 창설자 자히루딘 무하마드 바부르의 회고록에서)

그러니 金正日을 도와주는 것은 쓰나미 피해자에게 惡行을 하는 것과 같이 나쁜 짓이다.

"당신을 배신하는 자는 운명에 맡겨주어라. 운명은 당신의 복수심 가득한 忠僕(충복)이거늘."
(Entrust to fate him who does you ill, for fate is a vengeful servant of yours.)
바부르는 자신이 카불을 비운 사이에 반란을 일으킨 자를 체포했으나 그가 親族이라서 풀어주었다. 이 반역자는 고마움을 모르고 바부르에 대한 악담을 하고 다니다가 다른 영주에 의해 처형되었다. 바부르가 회고록에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1483년 바부르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서 티무르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권력투쟁에 밀려났다. 그는 충성스러운 1만2000명의 기병을 데리고 南征 길에 오른다. 그는 지금의 타지크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차례로 평정하면서 드디어 인도의 북부지방에까지 진출하여 1526년엔 무갈제국을 연다. 약332년간 계속된 무갈제국은 19세기에 영국에 멸망할 때까지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를 통치했다. 무갈은 몽골이란 뜻의 이란語이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자신들이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무갈제국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문명과 國力과 생산력을 자랑했다. 인도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이 무갈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영토가 가장 컸을 때는 320만 평방킬로미터였다. 1600년에 인구가 약1억5000만 명. 당시 세계최대의 제국이었다.

이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과 견줄 만한 교양 있는 영웅이었다. 47세에 죽은 그가 남긴 회고록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이슬람 문명권에서 최초로 나온 회고록이라고 한다.
이 회고록은 그의 생애를 건 大長征의 기록인데 군데 군데 감동적인 장면과 詩가 발견된다. 겨울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하들과 눈보라 속을 헤쳐나가다가 동굴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굴은 너무 작았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삽으로 눈을 파고 앉았다. 몇 사람이 나만 동굴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 부하들이 눈보라를 맞고 있는데 나만 동굴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남자답지도 못하고 동지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고통이 크더라도 나는 부하들과 함께 그 고통을 견딜 것이다. 페르샤의 속담이 생각났다. "친구와 함께 하는 죽음은 축제이다." 눈보라는 계속되었고 나의 등과 귀는 눈에 덮였다. 귀는 동상에 걸렸다. 밤 기도 시간에 동굴 속으로 들어가 조사를 하고 나온 부하가 소리쳤다. "동굴이 아주 큽니다. 모두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나서야 나는 눈을 털고 부하 戰士들을 불러 모아 굴속으로 들어갔다. 40-50명이 편하게 앉을 만한 넓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식량과 휴대품을 갖고 들어왔다. 심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을 발견하다니!>

金正日은 인민들을 눈보라 속에 내버려두고 자신만 혼자 동굴 속의 안락한 장소를 차지하고 앉아 술과 여자와 좋은 요리를 즐기면서 인민들에게는 "가는 길 어려워도 웃으며 가자"고 사기를 쳤다. 500년 전의 몽골족 지도자 바부르보다도 훨씬 못한 21세기 惡人의 더러운 모습이다.

무갈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투르크-몽골族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었으나 이 제국을 다스린 것은 페르샤 엘리트들과 페르샤的 이슬람 文化였다. 순니파 이슬람을 믿었던 무갈의 왕들은 대체로 힌두교 등 他종교에 너그러웠다. 아주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정착시켜 수많은 종족들을 잘 다스렸다. 무갈제국은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를 포괄하였다. 이 네 개 나라의 현재 인구는 13억의 중국을 훨씬 넘어서는 약16억이다.

무갈제국의 전성기는 바부르의 손자 아크발 大王 시절부터 약150년간이다. 타지마할을 만든 샤 자한은 4代王이다. 그는 열 네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세번째 부인의 무덤으로 20년에 걸쳐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보석 같은 건물이다. 몇년 전 新세계7대 불가사의로 뽑혔다. 타지마할의 돔이 가장 눈부신데 지름 35m, 높이 35m이다.

샤 자한은 1653년에 타지마할이 완공된 직후 아들에 의하여 廢位되었다. 그는 2.5km 떨어진 아그라 요새의 한 건물에 幽閉되었다. 발코니에서 사랑한 王妃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어 왕비 옆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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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 紀行

1996년 7월18일 기자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두 번째로 찾아가 카리모프 대통령과 인터뷰를 마친 뒤, 20일에 인도 뉴델리 공항을 거쳐 파키스탄 라호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가에 앉아 내려다 본 地形은 雪山, 돌산, 사막, 인더스江, 평야, 취락, 대도시로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로 내려간 비행기의 南下 경로는 500년 전 바부르라는 20대 젊은이가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페르가나에서 小王國을 지배하고 있었다. 바부르는 父系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쪽 혈통으로는 징기스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몽골-투르크系의 합성이었다. 바부르의 소년기 교육은 그의 위대한 人格을 키워낸 토양을 만들었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에도 시를 지었으며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몽골系)族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명의 몽골-투르크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둔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失地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가 고향 페르가나를 못잊어 한 것은 그 지방이 중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1512년 우즈벡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바부르는 北進을 단념하고 파키스탄, 인도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했다. 이 南征의 막장은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의 敵을 섬멸했다. 그는 몽골기병을 좌익과 우익의 맨 끝에 배치하여 전진하는 敵의 주력을 배후로 돌아서 포위, 등 뒤에서 공격하게 하는 한편, 중앙에 배치한 총포부대는 일제사격으로 정면을 치케 했다. 포위 섬멸된 적은 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친 수많은 희생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추억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파키스탄-인도는 10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1000년간 이슬람化된 몽골-투르크族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인들은 무갈제국의 5代王이 먼저 죽은 아내를 추모하려고 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타지마할은 잘 알지만, 그것을 세운 王朝가 한국인과 인종적으로 연결되는 몽골-투르크族이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기자의 파키스탄-인도 취재는 따라서 무갈제국에의 탐험이었다.

다니 박사의 역사 이야기

7월21일 기자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아하마드 하산 다니 박사(76)를 인터뷰했다. 중앙아시아-서남아시아-실크로드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역사·고고학자로서 수많은 저서를 남긴 다니 박사는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아주 곱게 늙은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大學者답게 재미있고 간략하게 파키스탄-인도와 유목민족의 관계사를 설명해 갔다. 다니 박사는 서기 5세기에 북쪽에서 쳐들어온 훈族이 20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지배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들(훈族)은 쿠샨王朝를 무너뜨리고 후나(HUNA)제국을 건설하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북부를 통치했습니다. 터키학자들은 이 훈族을 투르크族이라고 분류합니다. 서양학자들은 이들을 파괴자로 말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봉건영주제도를 우리나라에 소개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분리된 것은 18세기였으니까요.
훈族은 수많은 부족의 연맹체였습니다. 우리나라를 점령한 뒤엔 각 부족에게 땅을 나눠주어 독자적인 통치를 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봉건영주 제도로 정착하였습니다. 1996년 현재까지도 파키스탄엔 봉건제도가 남아 있습니다. 大地主들이 각 지방에서 사실상 행정을 장악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회의원들도 地主출신이고 군대도 地主들의 아들들이 장교가 되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게 모두 5세기에 훈族이 정착시킨 제도입니다』

다니 박사는 계속했다.

『8세기에는 투르크族이 중앙아시아쪽에서 쳐들어와 200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는데 이들은 이슬람교도가 아니었습니다. 10세기에 비로소 이슬람 교도가 된 투르크族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쳐내려와 우리나라와 인도 사람들 중 일부를 이슬람화시켰습니다. 이때는 非이슬람 失住 투르크族과 이슬람 투르크族이 서로 싸웠습니다』
다니 박사는 아랍인들은 海路를 통해서, 투르크族은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여 파키스탄-인도 대륙에 이슬람敎를 전해주었다고 했다.
『아랍인들은 아랍語와 상업, 중앙아시아인들은 이슬람 성직자(수피)제도와 페르시아語를 갖고 왔습니다. 파키스탄과 북부 인도는 10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문화를 닮게 되었습니다. 10세기에서 18세기까지 우리나라의 공용어는 페르시아語였으니까요. 몽골-투르크族이 건설한 무갈제국조차도 공식어로는 페르시아語를 사용했습니다』

파키스탄人의 피의 62%는 투르크系

같은 문화권이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된 것도 파키스탄이 투르크族에 의해 이슬람화된 데 대해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다수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 박사는 파키스탄人 피 속의 62%는 투르크人의 피로 본다고 말했다. 몽골의 세계 정복에 대해서 다니 박사는 재미있는 설명을 했다.
『그들의 힘은 호스파워(Horsepower=馬力)에서 나왔지요. 말을 전쟁에 처음 쓴 사람들은 아리안系로서 4000년 前부터였습니다. 서기 前 2세기경에는 아리안系의 스키타이 유목민이 발걸이(金登 子)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안장과 발걸이 등 馬具를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은 몽골族이었습니다. 이 馬具를 바탕으로 독특한 군사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몽골人들은 말을 번식시키는 데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말의 숫자가 많아야 전투력의 원천인 馬力이 증가할 것 아닙니까. 種馬를 아주 귀하게 여겨 족보까지 만들어 관리했습니다. 이 種馬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唐나라에까지 들어가서 힘세고 지구력이 강한 몽골 말이 확산되었습니다』
다니 박사는 징기스칸의 西征 이후 몽골族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많이 들어와 지금도 파키스탄의 라호르 근방, 캐시미르, 페샤와르 지방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갈」(몽골族이란 뜻)이라고 부른다. 징기스칸의 몽골군대는 서기 1229년과 1241년 두 차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 북부 푼잡지방까지 침공하여 1270년까지 주둔하였다. 인도대륙이 1000년간 이슬람化된 투르크族의 지배下에 있었다는 것은, 몽골-투르크族의 지배지가 넓이에서 뿐 아니라 피지배국의 인구수에 있어서도 항상 중국(인도와 인구가 비슷)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규모였음을 뜻한다.

신기루

7월22일 지프차를 타고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하여 大宇건설이 닦고 있는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구간 6차선 고속도로(334㎞)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길은 20세기말에서 中世 봉건사회로의 회귀였다. 깨끗한 이슬라마바드만 보면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평화로운 田園국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슬라마바드에 모여 있는 이 나라의 파워 엘리트들도 그런 자기 최면에 빠지지 않을까. 인간은 자신이 체험하는 범위 안에서 사고(思考)하는 버릇이 있다. 이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기득권을 버리는 자기 혁신이다. 이 자기 혁신이 어느 나라의 지배층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파키스탄의 정치·행정 엘리트들이 빈곤과 바닥에 있는 파키스탄의 현실과는 절연한 채 신기루 같은 이슬라마바드에서 과연 민중을 위한 정책을 구상하고 추진할 수 있을까?
大宇가 1992년 4월1일에 착공, 1997년 12월31일까지 완공하기로 돼있는 고속도로 공사는 9억8700만 달러짜리. 이 공사대금의 33.7%만 파키스탄 정부가 대고 66.3%는 大宇가 댄 뒤 상환을 받게 돼 있다. 외환이 부족한 파키스탄은 이런 BOT(Build·Operation·Turnover) 방식의 공사를 선호하고 있다. 2512대의 각종 차량과 중장비가 상시 동원되고 있는 이 공사현장에서는 약 6000명이 매일 일하고 있다. 95.6%가 파키스탄 노동자, 2.9%인 169명이 한국인, 필리핀人이 1.4%, 영국사람도 4명이 일하고 있다.
현장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金光洙 상무는 『하청공사分까지 포함하면 파키스탄 사람 10만 명(가족 포함)이 이 공사 덕분에 먹고산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파키스탄 건설 노동자들은 현장 부근에 천막을 쳐놓고 합숙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월급을 받으면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갔다가 오고 일요일도 없이 거의 쉬지 않고 일한다. 金상무는 『이들의 노동효율은 한국 노동자의 80%쯤 된다』고 했다. 임금은 한국건설노동자의 약 20분의 1이다. 대체로 성실한 편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을 뽑을 때 간부후보로 軍에서 제대한 하사관들을 찾아내 많이 채용했다고도 한다.
기자의 짧은 파키스탄 취재 인상은, 순박한 파키스탄 민중을 이 나라의 대다수 엘리트들이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와 경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파키스탄에서 일하는 한국 기업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정치인·관료들이 너무 애국심이 없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기술자들을 연수 보내 주겠으니 계획을 짜달라고 해도 별 무반응입니다. 이 나라에는 아무래도 朴正熙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발전할 겁니다』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고속도로는 장차 중앙아시아와 카라치(파키스탄의 인도양쪽 항구)를 연결시켜 주는 더 긴 고속도로를 위한 첫 단계 사업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에 평화가 와야 가능한 사업이다. 5시간에 걸쳐 이 공사현장을 달렸는데 이 도로는 푼잡 평야를 관통했다. 푼잡이란 인더스江의 지류인 다섯 강이 흐르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파키스탄과 인도에 걸쳐 있는 이 평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로 꼽힌다. 인도 인구 9억5000만과 파키스탄 인구 1억3000만을 합쳐 약 11억의 인구가 이 평야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소년·여자·당나귀

이 평야지대를 달려보니 定型化된 풍경화가 반복되었다. 넓디넓은 논·밭 사이엔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 나무 그늘에서 윗통 벗고 한가롭게 쉬는 것은 남자들이고, 그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땡볕 농토에서 열심히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었다. 작은 당나귀가 집채만한 짐을 지고 요령부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뒤에서 나무 작대기를 휘둘며 쫄쫄 따라오는 것은 소년들이었다. 끙끙대는 당나귀의 표정은 한국의 가난한 할머니들 인상처럼 슬프기도 고맙기도 했다.
이곳 당나귀는 자기 집을 찾아가는 데 능력이 발달돼 있어 짐을 싣고 혼자서 하염없이 길을 걷는 당나귀들도 많이 보였다. 金光洙 상무는 『파키스탄에서 제일 고생 많이 하는 게 당나귀, 어린이, 여자들이다』라고 했다. 시골의 초등학교들을 몇 군데 지나쳤다. 학교 사무실만 있고 교실은 없었다. 교실은 큰 나무 밑 그늘이었다. 문맹률 약 70%의 현장이었다. 학교 취학률이 낮으니 어린이들이 노동현장에 많이 고용된다. 파키스탄의 어린이 노동 문제는 지금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자가 이곳에 있을 때도 EU(유럽공동체)에서 조사관을 보냈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다.

노예와 봉건영주

어린이들은 손길이 섬세하기 때문에 카펫 제조공장에 특히 많이 고용된다고 한다. 파키스탄 언론에서도 이런 어린이를 「노예」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키스탄의 英子신문들은 지방 토호(〓地主)를 「봉건영주」란 의미의 「Feudal lord」라고 표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문턱에 있는 나라, 원자폭탄을 제조한 나라, 그리고 金泳三 전 대통령이 「동지적 민주투사」로 칭송했던 부토 여사가 총리로 있던 나라, 5·16직후엔 한국이 본받고 싶어한 나라, 最高의 인류문명과 最大의 곡창지대를 가진 나라에서 아직도 中世的 용어가 예사로 쓰여지고 있다.
1945년 이후 파키스탄 현대사에서 파키스탄 민중에 대한 동정심을 깔고 진정으로 개혁을 하려고 했던 거의 유일한 지도자로서는 아유브 칸을 꼽는 파키스탄인들이 많았다. 그는 1958∼69년 사이 집권했다. 평민출신 장군 아유브 칸은 파키스탄의 정치가 대혼란에 빠지자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며 집권했던 사람이다. 그는 1965년 캐시미르를 둘러싼 인도와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뒤 알리 부토를 비롯한 직업 정치인의 도전을 받았다. 反정부 시위로 행정기능이 마비되자 1969년에 정권을 후배 장군 야하 칸에게 이양하고 하야했다. 그는 하야 직전의 술회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파키스탄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나라이다. 아마도 나는 우리나라를 너무 세게 근대화 쪽으로 밀어붙인 것 같다. 나는 정권을 이양하려고 민간정치인들과 접촉했으나 가장 큰 실망은 단 한 사람도 이기심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 정치권이 선량한 지도자를 장기간 활동하도록 내버려둘지에 대해선 의문을 가진다. 그래도 우리가 군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내가 이 나라를 10년간 통치해온 것은 한 바구니에 여러 마리의 개구리들을 넣고 들고 가는 기분과 같았다. 두 개의 파키스탄에는 희망이 없다. 東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은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守舊세력과 군대

아유브 칸의 30년 前 절망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가 守舊세력으로서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地主계급은 그 엄청난 농업소득에 대해 세금을 면제받아왔다. 농지세를 내도록 하려는 압력이 일어나 4개 주 가운데 두 군데에서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최대 곡창 지대인 푼잡州 정부는 거부하고 있어 사실상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地主계급이 정치뿐 아니라 아들들을 장교로 보내 군대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5·16쿠데타와 같은 개혁 지향적 군사 개입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파키스탄은 네 번의 軍政을 겪었으나 한국처럼 경제개발을 이루지도 못했다. 이곳 정치인들은 민중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상태에서 단순히 정치인을 위한 정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1996년 7월20일자의 영자신문 돈(DAWN)紙에 실린 기사들은 파키스탄의 상황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의사들, 그들의 소득에 물품세를 과세하기로 한 데 반발하여 스트라이크 결의.
·야당, 내일 총파업 호소.
·EC관리, 어린이 노동 문제 논의하기 위해 방문.
·봉건영주들(Feudal lords), 다두 지방의 수사에 압력.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났던 다니 박사는 『인도는 독립 직후 네루가 농지개혁으로 地主계급의 권력을 축소시켰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고 한탄했었다. 문맹률을 70%대로 유지하는 것도 地主계급이 민중들을 다스리기 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이들이 많다. 파키스탄의 초등학교 중 2만4750개가 건물이 없는 야외수업 학교이다. 문맹률은 특히 여성에서 심한데 약 80%나 된다. 파키스탄은 인구가 약 1억6000만 명으로서 세계 8위인데 인구증가율은 약 3%로서 세계 최고수준이다. 23년 내에 인구는 배로 늘 것이다.

라호르城

7월22일 오후 섭씨 40도의 불볕 더위 아래에서 라호르市內에 있는 무갈제국 유적을 둘러보았다. 전성기의 성(Fort)과 모스크는 그 규모와 예술성에 있어서 이 제국의 물리적 크기와 정신적 깊이를 짐작케 하는 대건축물이다. 성(城) 안에는 무갈제국 제3代 황제로서 인도와 그 주변 국가들을 통일하여 인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아크바르의 궁전들이 많이 있다. 아크바르는 15세기말에 수도를 인도의 아그라에서 지금은 파키스탄에 있는 라호르로 옮겼다가 14년간 뒤 아그라로 돌아갔다.
아크바르의 성은 시내를 내려다보는 대지 위에 건설되었다. 허물어지고 퇴색된 그대로 방치되고 있지만(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무상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성장(盛裝)했을 때는 동시대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못지 않았을 규모이다. 이 궁전의 돔 모양도 유목민족의 천막을 본뜬 것이다. 회랑에 난 돔의 내부천장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모방한 장식이었다. 무갈제국의 왕족들은 草原에 드러누워 청명한 밤하늘을 구경하던 시절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이 궁전 바로 옆에는 아크바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 황제가 건설한 바드샤히 모스크가 있다. 주황색 사암(砂岩)으로 만든 이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17세기말에 건설된 이 모스크는 인공 垈地(대지) 위에 세워진 170×170m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한복판에 난 운동장 같은 공간은 기도자들이 모이는 곳인데 10만 명의 수용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건설 당시엔 세계 최대의 모스크였다.
무갈제국의 역사를 읽고 유적을 답사한 뒤 학자들과 만나 궁금증을 풀면서 기자는 이 제국의 예술적이고도 관대하며 때론 무자비한, 그리하여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황제들의 인간상에 빠지게 되었다. 창건자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병에 들어 死境을 헤매자 매일 그 병상을 돌면서 알라神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바부르의 소원대로 되어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代 황제 후마얀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王의 보호 속에서 연명하기도 했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당시로서는 인구수나 면적에서 세계 제1의 제국이었다. 아크바르는 인도 역사 교과서에도 불교왕 아쇼카와 함께 2大 賢君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였을 뿐 아니라 예술가와 건축가를 우대하여 무갈제국을 文化大國으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자항길은 자신의 명령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부하 장군의 미망인 눌 자한과 연애에 빠져 딸을 가진 이 과부와 결혼했다. 눌 자한은 대단한 미모와 용기, 그리고 정치적 능력을 소유했다. 남편을 도와 그녀는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빛낸 여자로 꼽힌다. 자항길 황제의 아들 샤자한은 아버지에게 반항,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한 적이 있었다. 눌 자한은 샤자한을 용서해 주도록 했다. 살벌한 유목민족제국사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타지마할의 비극

샤자한은 愛妻 뭄타즈 마할이 죽자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20년에 걸쳐 타지 마할을 만들었다가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쿠데타를 당했다. 그는 딸과 함께 아그라 城에 갇혀 8년간 유폐생활을 하다가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74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타지마할 안에 있는 아내 무덤 곁에 묻혔다. 무갈의 궁정秘史는 오스만 투르크처럼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배반과 용서, 순정과 열정, 그리고 관용과 예술성이 느껴진다. 역사 이야기라기보다는 소설 줄거리 같기도 하다. 등장 인물이 모두 독특한 개성에 따라 생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갈제국의 유적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동행한 大宇건설 직원이 휴대 전화를 받더니 『라호르 공항에서 폭탄이 터져 10여 명이 죽고 100여 명이 다쳤다』고 전해 주었다. 이틀 전에 기자가 도착했던 바로 그 공항이었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인도가 사주한 테러일 것이라고 말했으나 테러 범인을 제대로 잡은 적이 없어 설(說)로만 그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캐시미르 지역에 사는 이슬람 교도들의 자결권 문제를 놓고 독립 이후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캐시미르 지방에는 회교도가 더 많기 때문에 주민들의 자주적 결정에 의해 파키스탄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파키스탄쪽의 주장이다. UN 안보리의 결의도 주민의 자결권을 지지하고 있다. 인도는 이곳에 많은 군부대를 파견하여 이슬람 저항조직을 분쇄하려 한다. 인도의 스위스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캐시미르는 사실상 軍政下에 있다.
관광지로도 쓰이지 못한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캐시미르의 무장조직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파키스탄 신문 지면에는 거의 매일 캐시미르에서 일어난 충돌 기사가 실리고 있었으나 워낙 인구가 많아 사람값이 싼 탓인지 이곳 분쟁은 국제적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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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와 평화가 정통성의 근거

무갈제국은 이슬람을 믿는 몽골-투르크族의 군사집단이 토착국가를 점령하고 인도에 건설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에서도 무갈帝國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식민지 시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은 많지만 몽골(무갈)의 식민지였던 시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인도인은 만날 수가 없었다. 이교도의, 이민족의 지배를 왜 그리워하고 자랑하는가.

1996년 7월24일 오후 인도 뉴델리 시내 네루대학의 무갈제국 전공 역사학자 하즈반스 무키아 교수를 만나 물어보았다.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의 창건자 바부르는 「원래 우리 할아버지 티무르大帝가 인도를 점령했었는데 그 뒤를 이어받아 내가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3代 아크바르 황제는 정복이 아닌 문화적인 기반에 제국의 정통성을 뿌리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正義, 화목, 평화가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원래 무갈제국의 지배층은 57%의 몽골-투르크族과 나머지는 이란人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아크바르는 지배층을 확대 개편하면서 어떤 종족도 4분의 1이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슬람을 힌두교도에게 강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힌두교의 문화와 관습을 궁정에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인도를 통치했던 前 왕조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현지화(現地化)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통합과 폭넓은 참여 위에서 문화가 꽃피게 되었습니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시인이자 작곡가로, 또 작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名文입니다. 그를 이은 무갈제국의 황제들도 문학-학술-그림-건축에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교양인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경쟁적으로 건축한 놀라운 모스크, 정원, 기념물들이 지금도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런 文化的 건설이 또한 무갈제국의 정통성을 강화시켰습니다. 영국통치 시절인 19세기에 인도에서 反英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정신적인 지주는 무갈王祖였습니다. 그때는 허수아비가 돼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文化的 번영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서만 보장된다는 점에서 무갈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몽골-투르크의 전통을 이어 받은 기마군단에다가 바부르는 오스만 터키에서 도입한 총포부대를 별도로 편성했습니다. 군대조직도 10진법으로 잘 돼 있었고 전술도 독창적이었습니다. 바부르의 1만2천 기마군단은 10만이나 되는 적을 예사로 무찔렀습니다.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앙 이외에 항상 예비대를 편성해놓았습니다. 적과의 정면 충돌은 피하고 기습·매복·유인전술로 적을 피로에 지치게 한 뒤 생생한 예비대를 최후에 투입하여 전투를 끝장내는 식이었죠』

무갈제국 인구 2억 추정

무키아 교수는 『초대 황제 바부르는 몽골族의 용모였지만 3代 아크바르는 어머니가 이란 여자였으므로 서양인의 용모를 다소 닮았다』고도 했다. 바부르는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을 늘 그리워했는데 특히 우즈벡의 맛있는 과일을 먹고싶어 했다고 한다. 전투를 한창 하고 있을 때 부하가 사마르칸트에서 수박을 갖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투를 잠시 중단시킨 뒤 수박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무키아 교수는 전성기인 16∼17세기에 무갈제국의 國力은 오스만 터키나 어느 유럽나라들보다도 충실하여 사실상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무갈제국의 인구는 1억∼2억명 선으로 추산된다. 경제력이 충실해진 것은 무갈제국이 상인들을 지식인보다는 위에, 武士 다음의 제2계급에 놓을 정도로 우대하여 무역이 번창했고 인도 북부의 농촌이 높은 생산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유럽의 거의 열 배나 되었습니다. 6월에 땡볕이 내리쬘 때 유기물을 태운 뒤 비가 오니까 부패가 일어나 땅이 기름질 수밖에 없지요. 17세기에 유럽 나라들이 앞다투어 인도로 몰려 온 것은 무갈제국의 경제적 번영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은 인도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하게 하게 하는 역사적 근거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인도는 자연的, 人的 자원이 풍부하므로 무갈제국과 같은 좋은 조직경영자를 만나면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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