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해안 삼팔교
갈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우리 일행은 하조대 쪽으로 내려갔다. 기사문리 가까운 곳에 도달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각각 바닷가 옆 빈집들을 하나씩 차지하고 쉬고 있는데 바닷가에 나갔던 한 아저씨가 뛰어 들어오면서 지금 해변 모래사장에 미역이 파도에 밀려 굴러 나오는데 굉장하다고 했다. 피난 도중 우리들은 해변에 나가 파도에 밀려오는 미역 두루마리를 보았다. 긴 백사장에 싱싱한 미역이 지천으로 굴러 나와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피난 간다는 생각도 잊고 미역을 한 아름씩 안아다 여러 차례나 빈집 마루에 쌓기 시작했다.
피난 짐 보따리 무겁다고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며 쉬던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이 미역을 한 아름씩 잘도 들어 옮겨 놓았다. 주워온 싱싱한 미역이 마당에 가득하고 집집마다 툇마루에 가득히 올려져 있는데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우리 일행은 짐들을 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금방 떠날 것이면 그대로 바닷가 모래사장에 뒹굴게 내버려두지 왜 저렇게 피난하느라 힘도 들 터인데 남의 빈집에 쌓아놓아 썩게 했던가를 나는 지금도 그때의 어른들과 우리들의 미역 욕심에 대한 추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 통 피난길 시절엔 웃어야 할지 어쩐지도 모를 일들이 많기도 하였다. 밤이 어두워서 길가 빈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런데 짐 보따리를 지고 먼저 내려간 피난길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해 먹고 떠나가고, 그 다음 사람들이 또 불을 지펴 밥을 해먹고 떠나간 다음 우리가 들이닥친 것이다. 우리가 들러 밥을 해 먹을 땐 빈 집 방구들이 사뭇 난로처럼 뜨끈하여 방안에서 자려다가 방바닥에 등을 대고 잠을 잘 수가 없어 모두 다 집 바깥마당에 나와서 하늘 쳐다보고 자는 형편이 생겼다.
할머니는 피난 떠날 때 짐 보따리가 너무 무거워서였는지 다리가 퉁퉁 붓고 고통이 아주 심했다. 빈집 아궁이에서 밥 짓느라고 나무 태운 재를 가져다 오줌에 재워 양다리에 붙이고서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우리들은 인구의 삼팔교에 도달했다(지금의 38선 휴게소가 있는 앞길 오른쪽). 할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찬수야! 이 다리를 봐라!”
하였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 다리를 지나는데 할머니가 이 다리를 밟아 없애야 한다면서 할머니께서 무거운 피난 짐을 진 채로 발을 높이 쳐들더니,
“에이! 이눔의 원쑤의 다리! 에이! 이눔의 다리!”
하면서 일본 스모 선수들이 다리를 번쩍 드는 동작처럼 삼팔교를 냅다 밟았다. 나 보고도 그렇게 하라고 하여서 나도 그렇게 했다.
“에이! 이놈의 원쑤의 다리! 에이! 이놈의 38선 원쑤의 다리!”
1951년 늦봄 11살짜리 까까머리 어린 내가 할머니를 따라 통일을 외치며 지나간 그 곳이다. 지금도 인구의 삼팔교를 지나칠 때면 피난 내려가면서 할머니와 밟았던 그 다리를 생각한다. 이제는 나무 난간의 옛날 다리는 흔적도 없고 새로 만든 커다랗게 새로 놓은 다리만 그 위치에서 옛날처럼 변함없는 동해의 거친 파도소리를 무심하게 듣기만 하고 있는 것 같다.
2. 전시의 강릉
우리 일행은 지친 걸음으로 동산항을 거쳐 남애리를 지나 그날 오후 주문진 항에 다다랐다. 날이 어두워지자 일행들은 커다란 방앗간에 무단으로 들어가서 짐을 풀고 하룻밤을 자고 가려 하였다. 그런데 이 방앗간 주인은 피난을 가지 않고 방앗간을 지키고 있을 때라 한밤중에 방앗간에 와서 노발대발하면서 우리들을 집 밖으로 몰아내었다. 방앗간 물건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사정사정 해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모두는 한밤중에 쫓겨나와 한참 이 집 저 집을 헤매다가 결국 주문진 항구 부둣가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노숙을 하였다.
그날 저녁 어찌나 춥던지 나는 그 방앗간에서 쫓겨났던 우리들의 거지같은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튿날 우리들은 강릉 시내까지 내려왔다. 뒤에 고향으로 올라오면서 들으니 그 방앗간 있는 곳도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리에 며칠 뒤 모두 남쪽으로 보따리 싸가지고 피난을 갔다고 하였다. 자기네도 똑같은 피난민 신세이면서도 먼저 온 피난민을 구박하며 내쫓고 큰소리나 치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들이라니…….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나의 할머니를 비롯하여 모두들 다리가 아파 쩔룩이는 사람들이 많았고 발등이 부어 신발을 신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의 할머니가 다리가 몹시 아파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친척 일행과 떨어져 강릉에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남쪽 더 멀리 옥계 방향으로 내려가고 작은댁 할머니와 머일 이모할머님 댁 그리고 할머니와 나는 경포를 지나 초당(지금 초당 두부로 유명한 곳)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은 6ㆍ25 전쟁 중이지만 비교적 안정된 듯한 곳이었다.
할머니와 나 그리고 작은집 할머니는 규모가 아주 큰 기와집에 들어가 피난 사정을 이야기하고 머무르는 동안 집일을 거들어 드리겠다고 사정했다. 그 댁은 그 일대에서도 가세가 아주 넉넉한 집이었고 수염이 허옇고 위엄 있는 풍채인 집 주인이 아주 후덕하여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직도 하인들 몇이 집안일을 돌보는 집이었다.
이모할머니 댁은 일곱 식구나 되었는데 집 주인이 친척집인 옆집을 알선해 주어서 그 댁에 머물렀다. 우리는 초당마을에서 피난 짐 보따리를 풀었다. 2월 중순에 인민군이 강릉까지 내려와서 이곳 주민들도 한동안 피난을 갔다가 들어왔다고들 하는데 우리가 머무르는 동안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주인 집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니, 강릉도 엄청나게 고통을 받은 곳 이었다.
6·25가 일어난 뒤 곧바로 인민군이 밀물 듯이 몰려들어 강릉 북쪽 주문진과 사천, 연곡에서 국군과 나흘 동안이나 무서운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인민군에 밀린 국군이 후퇴를 하자 즉시 공산주의자들이 설쳐대며 미처 피난 못 간 주민들을 괴롭혔다. 고통과 공포심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여기저기서 죽어 나자빠지는데, 그 광경이 처참하고 무섭기 한량이 없었다. 주인집 친척들이 밤중에 몰래 도망을 쳐 강릉 경포대 쪽으로 피신해서는 전해준 이야기라 했다.
연곡 사천 전투에서 전사한 시체더미가 산같이 쌓였다는 소리에 나는 또 양양 남대천 모래밭에서 본 우리 국군들의 끔찍한 시체들이 모래에 묻혀 여기저기 살짝 비어져 나와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6가 나고 석 달 뒤 9월 하순 이후부터 늦가을 아주 추울 때쯤 해서 7월에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가 국군과의 싸움에서 된통 얻어맞아 패잔병이 된 인민군들이 모여 올라오다가 바람같이 북진한 국군들과 도처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곳 강릉에서의 주민들에 대한 인민군 패잔병의 행패가 너무 악랄해서 모두들 몸서리를 쳤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친척 누구 네가 죽고, 어떤 동네가 몰살을 당하고, 수많은 반공 청년학생들이 총살을 당하는 둥 끔찍스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런 이후까지도 대관령 부근에는 미처 이북으로 따라 올라가지 못한 무장 인민군대들이 곳곳에 숨어서 아직도 주민들을 괴롭히고 또 국군과 맞닥뜨리면 무섭게 총질을 해대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진다고 그 쪽으로는 얼씬도 말아야 한다면서 모두들 두려움에 떨었다.
3. 경포대에서의 한여름
할머니는 그 댁에서 작은댁 할머니와 주인집 삼베 일을 해 주었다. 밤낮으로 삼베를 삶아 껍질을 베끼고 베낀 껍질을 가느다랗게 찧어 무릎을 세우고 실과 실을 오른쪽 무릎을 세운 맨살 위에 대고 비벼 잇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이은 것을 실타래를 만들어 방안 구들에 쌓아 놓고 그 위에 두터운 덮개를 덮고 아궁이에 불을 떼어 뜨끈뜨끈하게 익히는 등 삼베가 나오기까지의 그 많은 과정을 할머니 혼자 계획하고 진행하였다.
나는 할머니가 삼베일 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는 둥 마는 둥 하였고 피난 온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경포호에 나가곤 했다. 호숫가 바닥에서 잡은 조개를 빈 깡통에 넣고 불을 지펴 끓인 다음 벌어진 조개 속에서 조갯살을 빼먹기도 하고 얕은 물가에서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며 평화롭게 놀았다. 그때 인상적인 것은 왕골 같은 자리를 만드는 줄기가 굵은 부드러운 풀이 있었다. 우리들의 키보다 두 길이나 길었는데 경포 호 주변을 돌아 가득히 자랐고 노 저어오는 작은 배가 그 왕골 숲에서 미끄러지듯 나왔다. 아주 평화로운 경포호수였다.
내가 내 또래의 아재, 형제들과 같이 초당에서 경포대 호수 가로 놀이 나갈 때에 기억되는 일 한 가지가 생각난다. 우리가 경포 호수에 가까워질 무렵 금강송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나무숲을 지나려면 웬 낡은 커다란 기와집이 오솔길 오른쪽에 보이는데 보기에도 으스스했다. 그곳에선 밤낮없이 귀신이 나오곤 해서 살금살금 걸어서 지나가야 된다고 했다.
우리는 낡은 기와집 근처를 지나칠 때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고 발뒤꿈치를 들고선 맨발로 소리 없이 지나가곤 했다. 요즈음 그곳을 지나다 보니 그 낡고 거미줄이 가득히 얽힌 흉흉한 옛날 기와집은 바로 조선조 중엽 이후의 여류 시조시인 허난설헌의 집이라 했다. 허난설헌은 소설《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다.
멀리 북서쪽으로 경포대가 그림같이 우뚝하게 건너다 보였다. 지금의 경포대 해수욕장 쪽은 물이 깊고 파도가 세차기 때문에 나가지 말라고 어른들이 신신당부를 했다. 아직 양양 일대에서는 우리 국군이 치열한 전투 끝에 양양을 재탈환하고 5월 말엔 간성 쪽을 넘어 고성, 금강산 쪽으로 진군한다 했다.
하루는 할머니를 따라 강릉시장 구경을 나갔다. 촌에서만 자란 나는 커다란 도시의 시장 구경을 처음 한 것이다. 넓은 길에 마차가 철거덕거리고 지나가는 것도 볼 만하였고 길 양옆에 오가는 시장 사람 행렬이 볼 만하였다.
할머니는 주인집에서 받은 돈으로 나에게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사주었다. 나는 그 고무신이 너무도 소중해 신지도 않고 한동안 맨발로 다니면서 새 고무신은 들고만 다녔다. 할머니가 저자거리 한구석으로 가더니 점을 보는 할아버지 앞에 앉아서 부모님 생년월일과 어린 두 여동생 생년월일을 대며 원산에서 난리를 겪는 가족의 생사를 잘 봐 달라고 하였다.
한참 눈을 감고 손가락을 꼽던 점쟁이 영감이 가족들은 모두 살아있다고 하면서 원산 북쪽으로 피신해 갔다고 했다. 그리고 통일이 언제 되겠는가 하고 할머니가 물으니 “한 내후년엔 반드시 통일이 된다”라고 쉽게 말했다. 그 할아버지 말대로라면 지금부터 54년 전에 벌써 통일이 되었다는 얘기다. 허무맹랑한 일이다. 다른 한곳에 들렀는데 이번엔 여자 점쟁이가 점을 본다 하여 할머니가 또 복채를 내고 점을 부탁하니 그 무당 같은 여자가 손바닥과 손가락을 묘하게 비틀더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부모님은 살아있는데 두 어린 여동생은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하도 답답하여 점을 본 것인데 안 본 것만 같지 못한 셈이 되었다. 나의 할머니는 평생 점이라는 것을 믿지도 점쟁이를 찾지도 않는 분인데 난리 통엔 그러하였다.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주인집 할아버지의 손자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많았다. 전쟁 통이었는데도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뽀얗게 귀티 나는 아이였다. 양반집 몇 대 독자라 하였다. 그런데 그 댁 어른들이 너무 오냐 오냐 하고 키워서인지 집안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늘 있는 일이고 우리 피난민을 깔보기가 내 어린 눈에도 대단하였다.
우리 또래인데 밥투정을 하면 그 집 할머니가 밥그릇을 들고 쫓아다니면서 허연 이밥을 먹이는 걸 여러 번 보았다. 특히 그런 그가 나를 구박하면서 호령호령하는데 못 견딜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 하랴, 남의 집에 피신 와서 어른들도 일을 해 주면서 참고 견디는데 나라고 불편하다고 대들 수 있는 그런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저 그 애가 나를 구박을 주는 대로 참고 다 받았다. 무척 아니꼽고 분했다.
한 달을 훨씬 넘긴 어느 날, 할머니는 주인집에 감사를 드리고 고향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다. 주인집 어른과 아주머니는 우리를 가지 못하도록 극구 말리면서 지금 난리가 끝나지 않고 양양은 아직 불바다인데 어떻게 가려느냐고 펄쩍 뛰었다. 그 사이 주인집 식구들과 내 할머니, 이모할머니 댁, 그리고 작은집 할머니 등 피난 온 우리들과는 정이 들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할머니는 베틀에 올라 나머지 베를 마저 짜 주고 고향 쪽으로는 싸움이 멈췄다는 소식만 믿고 주인집과 작별했다. 7월 들어 한참 더울 때 큰 길을 따라 숨어 내려올 때와는 전혀 다르게 탄탄대로로 고향 길에 올랐다. 고향집엘 간다니까 어찌나 좋던지…
강릉에서 벌어진 人民軍 패잔병의 행패
- 김찬수(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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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04, 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