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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고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다"고 말하였다.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죽음의 의미를 잊으면 그렇게 된다. 6.25 전쟁 때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준 16개국에 감사할 줄 모르는 이는 독재자의 마음을 가진 셈이다. 아래 통계표를 인쇄하여 자녀들에게 나눠주든지 공부방 벽에 붙여놓도록 하자. 감사할 줄 모르는 민족이 잘 된 경우는 없다.   1. 6·25 전투부대 파견 16개국 참전 규모
※ 참전 규모의 병력은 전쟁 말기 최대 수준을 유지한 병력(1953.7.) ※ ()의 병력은 전쟁 말기가 아닌 최대 수준을 유지한 병력   2. 6·25 참전 16개국(전투부대 파견) 사상자 통계
※ 현재 인구는 CIA의 2009년 7월 통계를 기준으로 함 ※ 원자료 출처 국방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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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이후에도 4712명 戰死
 
전쟁 기념관의 핵심은 회랑에 새겨진 戰死者의 이름들일 것이다. 이런 통계표가 붙어 있었다.
 
  *한국군 戰死者
 
  6.25 전 創軍期: 8824명
  6.25 전쟁기: 152,279명
  월남전: 4770명
  휴전 이후: 4712명
  합계: 170,585명
 
  이 표는 천안함 戰死者 46명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 통계는 한국이 아직 金正日정권과 전쟁중이란 현실을 잘 보여준다. 1953년 7월27일 휴전 이후 국군 4712명이 침투하는 북한군과 전투를 하다 죽었다. 이라크戰에서 죽은 미군 숫자와 비슷하다. 한국은 휴전기에 다른 나라의 전쟁기보다 더 많이 싸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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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전쟁기념관 복도 벽면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 복도 벽면 동판엔 戰死者 명단이 새겨져 있다. 미국 군인은 약5만4000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죽었다. 10만 명 가량이 다쳤다. 전국 병원의 전체 병상수는 약30만 개이니 그 반을 채워야 할 만한 死傷者를 낸 것이다.
 
  전쟁기념관 벽면엔 미군 戰死者들 명단이 출신 州별로 분류돼 있다. 미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주는 서부의 와이오밍이다. 약50만 명이다. 하원의원은 한 명, 상원의원이 두 명이다. 이곳 출신 戰死者 명단을 세어보았다. 58명이었다. 시골 마을 여기 저기서 초상이 났다는 이야기이다. 와이오밍이면 미국 국립공원 1호 옐로우 스톤 파크가 있는 奧地이다. 그곳 젊은이들이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와서 목숨을 잃은 것은 힘이 약해 공산군을 혼자 힘으로썬 물리칠 수 없었던 우리의 책임이다.
 
  미국에서 인구 기준으로 두번째인 텍사스 출신 戰死者는 2000명을 넘었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참전, 異國에서 목숨을 버린 미국인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이들은 그 희생의 代價를 한국에 요구한 적이 없다. 參戰의 보상으로 제주도를 달라고 한 적도 없다. 오히려 전쟁 후의 한국이 부흥하도록 돕고, 요사이는 한국보다 더 열심히 北核 해결에 나서고 있는 것이 '어리숙한' 미국이다. 1988년 무렵 한창 反美운동이 일어나던 때 한 미국인은 나에게 "우리가 한국에 와서 바보짓을 한 적은 있지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하듯 했었다. 한국군이 이라크戰에 참여하여 수천 명의 戰死者를 내었다면, 그런데도 이라크 사람들이 한국을 저주한다면 한국인은 이라크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는가?
 
  오늘의 미국은 1950년대의 미국과 다르다. 1950년대의 미국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외국戰線에서 5만 명 이상을 죽게 하고도 버틸 수 있었다. 월남戰 이후 징병제가 폐지되고 지원병제를 채택하면서 미국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이 5000명 정도의 戰死도 견딜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의 한국도 생존투쟁을 벌이면서 실존적 문제로 고민하던 1950년대의 한국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 군대를 보내면서 한 사람의 군인도 희생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복무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인기사업이 되고 애국심과 봉사, 그리고 희생을 강조하는 교육은 전교조 등의 발호로 거의 사라졌다.
 
  문제는 이런 한국과 미국이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김정일 집단을 지금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백만 명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는데다가 핵무기, 생화학 무기까지 갖고 있는 북한과 살 빼는 데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한국이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 신무기를 많이 갖고 있던 월남 군대가 거지 같던 월맹군과 베트콩들에게 당한 경우, 잘 살던 아테네가 못 살던 스파르타에게 먹힌 경우, 그리고 화려한 백제가 악착 같은 신라에게 먹힌 경우가 있다.
 
  근검 절약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인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방향의 국민교육이 절실하다. 그런 교육장으로서 가장 큰 것은 軍大이다. 군대라는 대학이다. 재학생이 70만 명, 매년 30만 명이 졸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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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플리트 장군 아들의 戰死 전 편지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주력이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전선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 복도 벽면 동판엔 戰死者 명단이 새겨져 있다. 미국 군인은 약5만4000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죽었다. 10만 명 가량이 다쳤다. 전국 병원의 전체 병상수는 약30만 개이니 그 반을 채워야 할 만한 死傷者를 낸 것이다.
 
  전쟁기념관 벽면엔 미군 戰死者들 명단이 출신 州별로 분류돼 있다. 미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주는 서부의 와이오밍이다. 약50만 명이다. 하원의원은 한 명, 상원의원이 두 명이다. 이곳 출신 戰死者 명단을 세어보았다. 58명이었다. 시골 마을 여기 저기서 초상이 났다는 이야기이다. 와이오밍이면 미국 국립공원 1호 옐로우 스톤 파크가 있는 奧地이다. 그곳 젊은이들이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와서 목숨을 잃은 것은 힘이 약해 공산군을 혼자 힘으로썬 물리칠 수 없었던 우리의 책임이다.
 
  미국에서 인구 기준으로 두번째인 텍사스 출신 戰死者는 2000명을 넘었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참전, 異國에서 목숨을 버린 미국인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이들은 그 희생의 代價를 한국에 요구한 적이 없다. 參戰의 보상으로 제주도를 달라고 한 적도 없다. 오히려 전쟁 후의 한국이 부흥하도록 돕고, 요사이는 한국보다 더 열심히 北核 해결에 나서고 있는 것이 '어리숙한' 미국이다. 1988년 무렵 한창 反美운동이 일어나던 때 한 미국인은 나에게 "우리가 한국에 와서 바보짓을 한 적은 있지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하듯 했었다. 한국군이 이라크戰에 참여하여 수천 명의 戰死者를 내었다면, 그런데도 이라크 사람들이 한국을 저주한다면 한국인은 이라크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는가?
 
  오늘의 미국은 1950년대의 미국과 다르다. 1950년대의 미국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외국戰線에서 5만 명 이상을 죽게 하고도 버틸 수 있었다. 월남戰 이후 징병제가 폐지되고 지원병제를 채택하면서 미국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이 5000명 정도의 戰死도 견딜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의 한국도 생존투쟁을 벌이면서 실존적 문제로 고민하던 1950년대의 한국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 군대를 보내면서 한 사람의 군인도 희생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복무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인기사업이 되고 애국심과 봉사, 그리고 희생을 강조하는 교육은 전교조 등의 발호로 거의 사라졌다.
 
  문제는 이런 한국과 미국이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김정일 집단을 지금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백만 명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는데다가 핵무기, 생화학 무기까지 갖고 있는 북한과 살 빼는 데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한국이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 신무기를 많이 갖고 있던 월남 군대가 거지 같던 월맹군과 베트콩들에게 당한 경우, 잘 살던 아테네가 못 살던 스파르타에게 먹힌 경우, 그리고 화려한 백제가 악착 같은 신라에게 먹힌 경우가 있다.
 
  근검 절약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인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방향의 국민교육이 절실하다. 그런 교육장으로서 가장 큰 것은 軍大이다. 군대라는 대학이다. 재학생이 70만 명, 매년 30만 명이 졸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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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호 月刊朝鮮
 
6·25 학도병 戰死者가 가장 많은 학교는 군산중학교(現 군산고교)로 63명! 
2위는 경북中(現 경북高) 53명, 이어서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現 서귀포 산업과학高)·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등이다. 
 『낙동강까지 밀려왔는데 우리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느냐는 생각밖에 없었지 뭔 생각을 해요. 애국심이 끓어오른 거지. 기사에 「애국심」이라는 단어는 쓰지 마소. 6·25를 北侵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에 사람들이 웃습니다, 허허…』(6·25 학도병 출신 의사)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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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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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집 연령도 아닌데 자원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1950년 8월 포항 전투에서 숨진 어느 소년병의 글에서)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1950년 낙동강 전투에서 숨진 소년병의 편지에서)   학도의용군 가운데 일부 포함되는 15~17세(1933~ 35년생)의 소년병들(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에 대해선, 戰史(전사)는 따로 소년병이라는 용어로 이들의 참전과 전투, 戰死(전사)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당시 국가비상동원령에 의한 징집대상 연령은 만 18~30세. 만 17세 이하의 소년지원병들이 자기 키만한 총을 들고 조국을 구하겠다며 어른들의 전쟁에 참전하여 2464명이나 목숨을 바쳤다. 이는 '6·25 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회장 朴泰承)가 2000년에 국군 전사자 명단을 조사하여 처음으로 밝혀낸 숫자다. 군번도 없이 죽어간 숱한 소년병 전사자를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짐작된다.   1950년 10월 하순, 소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朴泰承씨는 육군본부 직할 수색대원으로 평북 박천까지 북진했다가 후퇴하던 중 어느 야산 골짜기에서 그날 처음 보는 다른 부대의 한 소년병과 함께 대오의 꽁무니를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소년병은 열일곱 살인 朴씨보다 한두 살은 어려보였다. 잠시 인민군의 총소리가 뜸한 틈을 타서 말을 걸었다.   "너는 어디서 왔노?"   "청도에서 왔어예"   무거운 M1 소총과 탄띠를 어깨에 멘 소년병은,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몇 끼나 굶었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군복은 물이 빠지고 해져서 너덜거렸고, 운동화는 다 떨어져서 그야말로 거지 행색이었다.   "는 진량에서 왔는데…" 하며 고향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엎드렸다가 일어나 보니 방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었던 소년병이 쓰러져 있었다. 복부에서는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총상을 입은 소년병은 배를 움켜쥐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적병이 뒤를 바짝 쫓아오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다시 총알이 날아올 것만 같아서 朴씨는 오금이 저렸다.   날도 점점 저물어 가고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데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소년병이 朴씨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가려거든 나를 쏘고 가라"며 울기 시작했다. 복부에서는 창자가 삐어져 나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오면 어차피 자기는 죽을 목숨이니 제발 자기를 쏘고 가라고 애원했다.   朴씨는 순간적으로 소년병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그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M1 소총으로 소년병의 이마를 겨냥해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소년병은 "어매야"하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르고는 숨을 거두었다. 朴씨는 눈물을 훔치면서 골짜기를 내려가 我軍의 뒤를 좇아 달리기 시작했다.   전쟁 참전 4년 후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朴씨는 그때 이후 자기 손으로 총을 쏘아 눈을 감겨주었던 그 소년병을 잊을 수 없어 20년 전부터는 집안에 소년병의 冥福을 기리는 작은 法堂을 마련하고 이날 이때까지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14세 소년병의 죽음       연일 血戰이 벌어지고 兵力손실이 늘어나 戰力이 모자라게 된 국군은 충원을 위해 후방에서 募兵(모병)을 했다. 군은, 1950년 8월 초 대구에서 교육대라는 명칭으로 신병모집 훈련소를 차렸다. 사단이나 연대를 재편하거나 新編(신편)할 때는 병력이 모자라 거리에서 길을 막고 공모하기도 했다. 비상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트럭에 스피커를 단 지원병 모집대를 각 마을과 학교로 보내 호소했다.   "사랑하는 학도 여러분. 지금 조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조국은 학생 여러분에게 총을 들고 나와 북한 괴뢰군을 무찔러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피끓는 애국학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공산 괴뢰군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공산도당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나가 괴뢰군을 물리칩시다."   수업 중인 교실에까지 들려오는 지원병 모집대의 스피커 소리는 수많은 학생들의 피를 끓게 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자칫 온 나라가 북한 공산군에게 먹힐지 모른다며 은근히 軍입대를 권했다. 소년들은 책가방을 교실에 던져두고 교복 차림의 까까머리 그대로 戰線으로 나갔다. 많은 소년들이 집에도 알리지 않거나 부모님의 손을 뿌리치고 전선으로 나갔다. 당시 중학교(6년제) 학생들은 일제치하를 조금이나마 겪은 세대여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선에 투입된 소년병들은 말이 지원병이지 거의가 '병사'라고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격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나마 광목에 국방색 물감을 들인 군복을 지급받고 1~2주간 약식 군사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나중에 8월 격전이 벌어지고 난 후부터는 훈련도 받지 못한 채 교모를 쓴 교복 차림 그대로 전선에 나가는 경우도 非一非再(비일비재)했다. 일반 학생과 구분하려고 교모에 흰 띠를 두른 것이 고작이었다.   나이 겨우 15~17세의 소년들은 한참 성장기에 있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지금의 10代들처럼 영양상태가 좋아 키가 1m 80㎝에 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소년들은 큰 키라고 해야 1m70㎝ 정도였고 대체로 1m60㎝를 조금 넘는 소년이 대부분이었다. 키 작은 소년병들이 M1 소총, 탄약과 수류탄 등 약 20kg에 달하는 무장을 하고 산골짜기를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낑낑거리며 어른 군인들을 따라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몹시 힘드는 일이었다. 군복을 얻어 입은 소년병들일지라도 옷이 너무 커서 옷과 몸이 따로 놀았다. 어린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꼴이었다. 이런 소년병들은 절대 다수가 경북·대구 출신이었다.   소년병 權道文(당시 14세, 경북 군위중 2년)의 큰형수인 崔在彦(76)씨는 어린 시동생에 대한 기억을 어제일처럼 생생히 말한다.   "시동생은 내가 시집갔을 때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어린아이였는데, 얼마나 영특하고 인정이 넘쳤는지 모두들 우리 도련님을 칭찬했지요. 어린 나이에 군대 간다고 해서 온 식구들이 말리느라 난리가 났었어요. 그런데도 나라를 위해 싸워야 된다면서 어찌나 고집을 부리던지 아무도 붙들지 못했습니다."   崔씨가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시동생이 치열한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北進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되었을 때 고향집에 왔었는데, 그때 눌러 있지 않고 몸이 회복되자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가 戰死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아주 잘했으니까 전쟁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공부를 계속해서 훌륭한 인생을 보냈을 터인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지만 아무도 어린 소년병의 죽음을 기억해 주지 않잖아요. 시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이제 나마저 죽고 나면 누가 우리 시동생을 기억이나 해주겠어요?"   눈가에 이슬을 반짝이며 큰형수 崔씨는 말을 더듬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은 우리 도련님이 정말 가여워요. 그래서 6·25만 다가오면 눈물이 나요."     ,,,,,,,,,,,,,,,,,,,,,,,,,,,,,,,,,,,,,,,,,,,,,,,,,,,,,,,,,,,,,,,,,,,,,,,,,,,, |
 朴正熙 대통령: "或者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나는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波濤(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1966년 2월15일 대만 방문시 蔣介石 총통 주최 만찬회 인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