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여행하다가 보면 도처에서 바이킹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스칸디나비아는 바이킹의 고향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프랑스의 노르망디, 영국, 시실리, 나폴리, 말타에까지 바이킹의 발자취를 보게 된다. 퀸 엘리자베스 2세 영국왕이 바이킹 출신의 정복왕 윌리엄 1세의 22대 후손이란 사실, 런던 탑이 그 윌리엄 왕이 세운 것이고, 시실리의 수도 팔레르모의 유수한 건축물들이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 정복시절의 작품이며,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 또한 스웨덴系 바이킹이 세운 도시임을 알고 놀란다.
12세기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을 자랑한 곳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영국, 그리고 시실리 왕국이었다는 사실, 이 세 곳의 선진국들이 모두 바이킹 후손인 노르만들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그 바이킹 출신들이 세운 나라가 지금은 超(초)일류국가로서 先進化 통계에서 늘 최상위권을 차지한다.
바이킹들은 문명의 파괴자인 동시에 문명의 건설자로서도 유능한 집단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지금은 바이킹 국가들이 세계최고 수준에 있지만 10세기에 그런 통계를 냈으면 最下位(최하위)였을 것이다.
서기 1000년을 기준으로 삼으면 유럽에서 가장 後進國이 바이킹들의 고향인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였다. 기독교가 들어가지 못한 지역이고, 주인이 죽으면 종들을 죽여서 함께 묻는 殉葬(순장)제도가 시행중이었다. 이런 바이킹들이 8세기 말부터 11세기 말까지 300년간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이스탄불, 러시아, 바그다드까지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이들은 또 아이슬랜드, 그린랜드를 발견, 정착하고 콜롬버스보다 500년 앞서 北美대륙에 건너가 정착하였다.
바이킹들은 싸움과 무역과 탐험이 特技(특기)였으나 일단 정착하면 정치와 행정을 잘하였다. 현지사정을 감안,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관료제도와 통치방식을 채택하였다. 특히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다 아울러 공존공영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안정과 관용 속에서 자연히 문화와 예술도 꽃피었다.
바이킹은 기독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으나 그 후손들이 세운 나라들은 1517년에 일어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먼저 수용, 新敎(신교)국가로 변모하였다.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뒷받침한 것이 종교개혁이고 新敎였다.
1066년에 프랑스 노르망디를 다스리던 윌리엄公이 영국으로 쳐들어가 이를 정복, 오늘의 영국, 그 母胎(모태)를 만든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노르망디 출신의 바이킹 후손들이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 150년간 다스리면서 이 시실리 王國을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일부 역사학자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국가라고 부른다)로 만든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노르망디에 살던 노르만인들은 戰士들이었으므로 유럽과 비잔틴 제국에서 傭兵(용병)으로 인기가 있었다. 10세기 이들은 이탈리아 남쪽의 여러 왕국에 傭兵으로 취직하여 갔다. 노르만 용병들은 그들끼리 정보망이 발달하였다. 좋은 일자리가 있으면 고향인 노르망디에 연락하여 동료들을 불러왔다. 바이킹들은 영웅적인 기질로 인해 용병에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용병을 하다가 영주나 지도자가 되는 노르만인들이 생겼다. 그들중 하우트빌 家門(가문) 출신의 로저가 1073년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시실리를 정복하였다. 이 세력은 그 前後 이탈리아 반도의 약 3분의 1이나 되는 남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차례로 정복, 시실리와 함께 한 왕국으로 다스렸다. 노르만의 시실리 왕국은 지중해의 말타와 지금의 트리폴리와 튀니시아 해안 등 아프리카 北岸(북안)의 몇 개 도시도 정복하였다. 노르만 세력의 꿈은 시실리를 근거지로 하여 이탈리아를 통일, 지중해 帝國(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에 가면 노르만 정복시절에 만들어진 城, 궁전, 교회들이 많다. 팔레르모의 노르망 궁전, 세팔루의 성당, 바리의 聖니콜라 교회, 몽레알의 두오모(성당) 등. 그 양식은 로마네스크이다. 로마네스크식은 로마제국이 망한 이후 全유럽에 퍼진 최초의 건축 양식이다. 半圓式(반원식) 아치, 큰 탑, 두꺼운 성벽, 대칭형, 단순한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 이 양식은 12세기부터는 고딕식으로 바뀐다.
시실리 왕국의 지배층이 프랑스의 노라망디 출신이었으므로 프랑스에서 발달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에 도입, 현지의 비잔틴, 이슬람 양식에 접목시켰던 것이다. 노르만 문화 예술의 특징은 북유럽의 전통을 로마, 비잔틴, 아랍문화와 접목시킴으로써 활기 있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너그러운 매력을 만든 점이라고 한다.
당시 시실리 王國은 다양한 문화, 종교, 언어가 뒤섞여 활기가 넘쳤다. 시실리는 문명의 교차로에 자리잡이 옛날부터 여러 문화가 混在(혼재)된 곳인데, 노르만 정복자들은 이런 地政學的인 조건에 잘 적응하였다. 시실리의 종교는 이슬람, 기독교, 그리스 正敎(정교), 유태교, 인종적으론 이탈리아인, 유태인, 아랍인, 그리스인, 게르만인, 노르만인이었다. 바이킹 후손들인 노르만인들은 백성들에게 자유를 많이 주었다. 종교적, 인종적 차별을 하지 않았다. 노르만인들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를 잘 만들어 法治를 세우고 관습을 중시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공존공영하게 하였다. 王은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직속 관료제도를 강화하였다. 안정과 관용 속에서 풍성하고 풍요로운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실리 王國이 유럽에서 등장한 최초의 근대 국가라는 것이다.
1112년부터 팔레르모가 시실리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지금은 마피아의 본거지로 악명을 떨치고 있지만 당시엔 유럽에서 가장 활기 있는 도시였다. 노르만 정복 王朝는 그리스, 로마, 비잔틴, 아랍사람들을 골고루 등용하고, 이들의 문화를 활용하였으므로 지배를 받는 이들도 탄압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르만 왕들은 수상 자리엔 노르만인이 앉지 못하게 하였다.
12세기 후반에 바이킹 후손 노르만인들은 영국·프랑스의 노르망디와 보르도 지방, 그리고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에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다스리고 있었다. 이들 노르만 왕국과 公國은 동류의식을 공유하여 외교적으로 협력하기도 하였다.
北極圈(북극권)에 가까운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해양민족이 아프리카와 가까운 시실리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것이다. 그 비결은 현지 사정을 존중하고, 종교적 인종적 차별을 하지 않고,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발전시킨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바이킹족의 인간적 사회적 우수성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이들은 수많은 전쟁과 무역을 통하여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민족성을 갖게 되었으며, 사회구조가 평등하고, 公會(공회)와 法治를 중시하였다. 이런 특징은 성공한 인간, 조직, 국가의 공통점이다.
시실리가 바이킹 국가였던 적이 있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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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06, 2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