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삼베를 훔쳐간 군인도둑

내가 겪은 6.25 ⑫ / 전쟁놀이로 변한 운동회
1. 전방 신병 전투훈련소가 된 복골

고향에 돌아온 우리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관덕정 넓은 곳, 나의 증조할아버지의 누이동생 되는 대왕고모 할머니의 아들 이왈수 할아버지의 집 과수원과 그 넓은 논밭이 모두 사단 사령부와 연병장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그 서쪽 정승골 쪽으로는 신병 훈련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밤낮으로 언덕 위로 치달으며 내리뛰면서 고함치는 소리와 사격하는 소리가 매일 이어졌고, 군가소리가 온 고을에 우렁차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새벽이 되면 불어대는 기상나팔도 인상적이었고 밤 10시에 울리는 취침나팔은 너무도 숙연하고 애잔하게 들렸다. 낮에는 신병훈련 중 박격포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그 포탄이 터져 연기가 자욱한 쪽을 뚫고 고함을 지르면서 돌격하는 군인 아저씨들의 기백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군용자동차가 마을 여기저기에 왔다 갔다 하고 이쪽 길 저쪽 길 할 것 없이 훈련받는 군인들이 너무 많아 강릉시장에서 사람 많이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매일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제주도에서 신병훈련을 간단히 마치고 이곳 최전방에 와서 실전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훈련 중 오발사고로 많은 군인들이 죽었다는 얘기도 가끔 들려왔고, 박격 포탄이 사람이 지나가는 한가운데 잘못 떨어져 터지는 바람에 친구 몇 명과 지게 지고 밭에 갔다 오던 동네 아저씨 등 열세 명이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모두 목숨을 잃어 우리 아래 윗동네 할 것 없이 동네 전체가 깊은 슬픔에 젖은 사건도 있었다.

그때는 운 나쁘게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족들에게 무슨 보상 그런 것이 없을 때이니까. 우리들은 매일같이 실제로 전쟁 훈련을 구경하는 셈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마을은 남쪽 멀리 포항 쪽으로 피난 내려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집들이 있었다.

여름 조금 지나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나는 3학년을 다시 다녔다. 1년을 묵은 것이다. 학교 가는 길 왼쪽으로는 사령부 연병장이 있고 오른쪽 야산은 바로 송암산 중턱까지 이어지는 신병훈련장이었다. 우리학교에서 짐미(장산리) 쪽으로 가면 동해바다까지 이어지는 그 넓은 벌판이 모두 ‘쌕쌕이’ 등 여러 가지 비행기가 내렸다 떴다 하는 비행장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속초비행장이다.
비행기가 한번 뜰 때면 그 요란하고 웅장한 소리가 강현 들판 온 마을을 울렸다.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다리같이 생긴 비행기가 멀리 장산리 비행장 위에서 떠 배회하면 비행기 옆에서 염소 똥 떨어지듯이 공수부대 아저씨들이 낙하산지고 아래 벌판으로 똑똑 떨어졌다. 그 훈련과정이 아슬아슬하지만 구경스러웠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훈련을 받다가 낙하산 줄에 휘감겨 죽는 일까지 있다 하여 쳐다보던 우리는 몹시 조마조마했다.

어떤 때는 사다리 비행기가 한꺼번에 세 대씩이나 떠서 훈련을 할 때도 있었는데 장산리 일대 비행장 꼭대기 하늘이 온통 동글동글한 낙하산으로 덮여 있었던 기억도 난다. 우리는 이렇게 환경이 갑자기 변한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넘은들 벌판을 넘어 속초는 이미 국군이 다시 수복하였고 간성 건봉 쪽에서 진부령으로 이어 이어지는 북쪽에서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여름 지나서는 거진, 대진까지 밀고 올라가서 김일성 별장이 있는 화진포까지 진격하였다고 전방에서 우리 동네로 내려온 국군 아저씨들이 말해 주었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원산엔 언제 쳐들어가 올려 미느냐고 지나가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묻곤 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그때 우리 학교에 임시 교장으로 친척 집안의 나에게 형뻘 되는 사람이 추대되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그 형은 깊은 학식이 없는 분이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어색하기가 짝이 없었다. 농사만 짓다가 갑자기 학교 교장이라니…… 매일 아침 조회 시간이 되어 우리가 운동장에 모이면 운동장 구령대 위에 그 교장 형이 올라서서 학생들에게 훈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령만 붙이고 군인들처럼 호령만 하였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아주 커다란 목소리로 목에 힘을 주어 뻐겨가면서 “차렷―! 열쭈웅 쉬어―!” 그러고는 다시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차렷! 열중 쉬어!” 이렇게 여러 번 구령을 붙이다가 한 마디의 말도 않고 훈화도 없이 멀쑥하게 천천히 구령대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들은 하도 우스워서 복도나 길거리에서 교장 형만 지나치면 속으로 “차렷! 열중 쉬어! 차렷!” 하면서 그 형이 멀리가면 키득거리고 깔깔대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한 달 조금 지나 그분은 교장자리를 그만두었다. 전쟁 통에만 있음직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장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전혀 모르고 남이 추대하니 남의 위에 올라서 보고 싶어 분별없이 잠깐 동안 교장자리에 앉아 여러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평생 이야깃거리 남기며 두고두고 무안당하는 지울 수 없는 처신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나 이때나 책임질 자리는 함부로 명예만 혹해 탐낼 일이 전혀 아니다.

가을에 우리 학교에서는 운동회가 있었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백군과 홍군으로 갈라져 달리기 등 여러 가지 순서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은 당연히 운동회 때마다 있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마지막에 전교생이 백군 홍군으로 갈라져 전쟁놀이를 하였다.

그때 우리들은 동네 형들을 따라 총알을 가지고 장난감 만지듯이 하면서 놀았다. 나무로 총의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 그 나무총 위에 탄피 길이만큼 홈을 약간 파서 빠져나가지 않을 만큼 한 뒤에 철사로 동그스름하게 탄피 양끝을 감싸게 하고 나무총신 옆으로 꼭 채운다. 그렇게 탄피 껍데기가 앞뒤로, 또는 위로 튀어나가지 않게 한 뒤(탄알을 장전하는 곳을 만든 뒤) 총신 옆에 고무줄을 양 옆으로 걸고. 커다란 못을 구부려 뾰족한 곳은 뇌관 있는 곳으로 향하게 하고 ‘ㄴ’ 자로 구부린 못의 머리 부분은 고무줄에 걸어 옆으로 제쳐 못에 걸면 바로 안전장치가 겸해지도록 되었다.

오른쪽에 건 구부러진 못(방아쇠 역할)이 잘 나가도록 장치를 하고 오른쪽 엄지를 왼쪽으로 튕기며 바로 세우면 쇠못은 고무줄 탄력에 의해 앞으로 나가면서 날카로운 끝이 장전된 총알 껍데기 뒤쪽 뇌관을 치게 만든 우스운 총이었다. 반드시 총알 끝을 돌에 두드리거나 나무 사이에 끼워 흔들어 총알을 빼고 그 속에 있는 화약을 모두 제거하고 뇌관만 살아있는 빈 껍데기 탄피로 그 나무총에 장전하게 한 것이다.

한번 쏘면 딱하고 단발 음이 나지만 여럿이 모여서 일시에 쏘면 제법 전쟁하는 것과 같은 흡사한 총소리를 연상할 수 있었다. 우리 어린이들은 중부전선 양군이 대치한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 들어 총싸움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았기에 운동회 때 이런 희귀한 백군 홍군의 어린이 전쟁놀이가 있었던 것이다.

전교 남자 어린이들이 백군 홍군으로 갈라서서 “와!” 하고 소리 지르면서 운동장 한복판으로 나가 총을 쏘면 흡사 처절한 전쟁을 보는 것 같았다. 화약 연기가 교정에 자욱하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결과는 백군이 이기도록 결말이 나 있었다. 그 지긋 지긋한 전쟁 통에 온갖 아픔과 슬픔을 다 경험한 우리들인데 학교가 문을 열자마자 운동회에서 전쟁놀이를 먼저 하다니…….

실전훈련을 마친 신병들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투입되어 죽어라고 버티는 인민군을 물리치려고 고성 금강산께로 계속 올라갔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국방군이 어서 빨리 북으로 쳐 올라가 원산과 함경북도 청진을 해방시키고 우리 가족과 청진에 있는 나의 외갓집 식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2. 전선야곡(戰線夜曲)

1951년 가을이 되면서부터 할머니는 되찾은 우리 집의 텃밭을 정리하고 농사지을 준비를 하였다. 할머니는 손바닥만 하다지만 “빼앗겼던 텃밭을 되찾으니 일하는 데 힘이 드는 줄도 모르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작은 키였는데 우리 집 지게는 아주 커다랬었다. 할머니는 그 지게에 거름 짐을 지고 밭에 날랐다.

그 해부터 나도 거의 땅에 끌릴 듯한 할머니가 쓰는 지게를 난생 처음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한번은 동네 친구들과 나무를 하러 가서 지게에 너무 많이 싣고 내려오다가 지게 뿌다구리(지게 다리)가 땅에 닿는 바람에 기우뚱하며 옆으로 쓰러져 언덕 아래로 내리 굴러 하마터면 목이 부러져 크게 다치거나 죽을 뻔도 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키에 알맞은 지게를 지고 다녀 좋았는데 나는 어른 지게를 지고 다녀서 아주 불편하고 위험하였다.

우리 고장은 예로부터 가을이면 송이가 많이 나는 곳이다. 한번은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오다 지게를 벗어놓고 쉬고 있는데 앉은자리 옆 손이 닿는 곳에 무엇이 잡혀 집어 냄새를 맡아보니 송이였다. 커다란 송이를 몇 개 따 온 경험도 있다. 밤이 되면 할머니는 어유 등잔불을 켜 놓고 구해온 삼을 삼았다. 많은 분량의 삼이었다. 난리가 끝나면 우리 집 온 가족이 만나서 입을 옷감으로 삼베옷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텃밭과 자그마한 뒷산을 넘으면 집 넘어 밭이 두 자리 있었는데 그곳에도 거름을 만들어 날랐다. 할머니는 그 해 회갑의 나이인데도 그렇게 엄청나게 농사일을 하였다.

1ㆍ4 후퇴 직후 윗마을 고모할머님 댁에 다녀오다가 갑자기 비행기가 낙산사를 폭격하는 바람에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윗 개울에 있는 우리 집 밭 돌담 쪽으로 급히 피신했었던 그 먼 곳 밭까지도 거름을 지게에 져 날랐다. 내년을 위한 농사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로는 베틀에 올라앉아 밤늦도록 북을 좌우 손으로 받으면서 바디집을 잡아내려 베를 짜시는데 삐이꺽 철거덕, 삐이꺽 철거덕 소리를 내었다. 내가 지금도 생각하지만 나의 할머니는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노력으로 공을 들여 그 노력의 결과로 우리 집을 지켜 나갔으니…….

나도 저녁이 되면 낫과 부엌칼을 숫돌에다 갈아 날을 세워 내일 학교 다녀온 뒤에 일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때 훈련한 때문인지 그 이후 도시에 사는 지금도 우리 집 식칼 등 아무 칼이나 칼을 가는 것은 나의 몫이고 지금도 낫이나 칼날 세우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쟁은 간성을 지나 해금강 남쪽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서로 겨누고 있으면서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은 군사령부가 주둔하는 곳이고 전방의 신병훈련소였기에 어떨 때는 야간훈련까지 하였는데 신기한 것은 조명탄이란 것을 공중에 발사하면 온 천지가 대낮처럼 밝아 땅에 기어가는 개미새끼들까지도 다 보일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군인들은 밤에도 훈련을 하였다. 관덕정과 정승골 간곡리, 회룡리, 둔전골에는 군인들의 잠자리인 벙커가 만들어져 순식간에 그 속으로 피하면 겉으로는 그 많은 군인들이 주둔한 것 같지를 않고 그저 산과 벌판만 보이는 그런 모양이었다.

무슨 신호만 있으면 갑자기 그 참호나 벙커에서 뛰쳐나오는 군인들을 볼 때엔 참으로 어마어마한 수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관덕정 우리 5대조 할아버지 산소와 정승골의 4대조 3대조 할아버지 산소에는 벌초고 뭐고 마을사람들까지 모두 그 근처엔 얼씬도 못하였다.

우리 동네는 매일같이 총성과 포화 속에 군인들이 “돌격 앞으로! 와―!” 하는 함성이 밤낮으로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생활하는 처지였다.

송암산 밑에는 지금도 사격장이 있는데 그 사격장 지나 산 중턱까지 개울말로 나가는 좀 넓은 달구지 몰고 가는 길에서 박격포를 쏠 땐 우리도 지나가면서 군인들의 박격포 훈련을 직접 구경도 하였다. 처음 쏠 땐 군인들이 박격포탄을 짧은 포신에 집어넣고는 서너 명의 군인들이 포신 옆에 납죽 엎드리면 ‘탱!’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나고 하늘을 보면 박격 포탄이 날아간 얼마 뒤에 포탄의 꼭뒤를 볼 수가 있었다.
높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하늘에 올랐다가 멀리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는 그 포탄이 보이지를 않다가 갑자기 먼지가 풀썩 일고는 조금 있다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꾸왕!” 하고 온 송암산 아래 동네를 울렸다. 쏠 때의 “탱” 하는 그 소리도 너무 커서 발사하는 순간은 발사대를 등지고 돌아서서 양쪽 귀를 다 막아야만 고막에 충격이 가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런 훈련 장소 옆을 지나다니면서도 호기심만 가득하였지 훈련 상황에 만성이 되어 점점 무서운 것도 모르고 지나치면서 놀았다. 박격 포탄이 날아가서 떨어지는 송암산 밑엔 우리 동네 먼 친척 된다는 범수 형네 등 몇 집이 살았다. 1ㆍ4 후퇴 이후엔 신병훈련장 맨 꼭대기 대포알 떨어지는 곳에 동네가 있어서 아주 위험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송암(우리 동네에서 수암이라고 한다) 마을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1951년 겨울과 이듬해 3월 초까지 그 해 겨울에도 눈이 아주 많이 왔다. 설날인데도 이웃에 세배 갈 길이 나지 않아 동네에서 눈 가래로 눈을 치우느라고 법석이었다. 나의 키보다 훨씬 많이 왔었다. 모처럼 지나는 설 명절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틈만 나면 들판에 나가 농사를 짓고 총소리나 포탄 소리만 나면 벌판에 엎드려 숨죽이고 때로는 쟁기까지 내던지고 산 속으로 들고 뛰어 도망가고, 심지어 온 동네가 피난 보따리 들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객지까지 나가서 천대받고 다니면서 피난하던 우리 동네는 잠시나마 평화롭게 설을 쇠는 마을이 된 것이다.

우리 친구들은 몰려다니면서 이웃 친척집에 모처럼 세배 드리러 다녔다. 부대 안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도 조용하고 나팔소리도 조용하였다. 모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방에 전쟁 중에 평화가 온 것이다. 밤 10시가 되면 취침나팔 트럼펫 소리가 한밤중을 고요히 그리고 애잔하게 울리는데 군인아저씨들이 잠들기 전에 고향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많이 일어날까도 생각해 보았다. 집에 각자의 할머니도 계실 텐데.


3. 내 고향 진달래 피는 마을

나의 할머니는 담배를 피웠다. 젊을 적에 많은 자식들을 홍역 등으로 잃고 속을 달래느라고 담배를 입에 대었다고 한다. 긴 대나무 대롱으로 만든 담뱃대의 끝에는 놋쇠로 된 담배 꼭지가 있어서 거기에 담배 잎을 꼭꼭 담아 피웠다. 1950년 6ㆍ25 전 한번은 나의 바로 아래인 해방둥이 어린 여동생을 안고 담배를 피우다가 담배꼭지가 여동생 목덜미 조금 아래 한가운데에 닿아서 데인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 흉터가 5백 원짜리 백동전만큼 크게 나 있었다.

담배 이야기가 나오니 또 빼 놓을 수 없는 기억 하나가 있다. 내가 장티푸스로 숨어 있던 큰 쉴집 아저씨가 큰아들 민태형 내외와 같이 빨갱이 물이 심하게 들어 이북으로 모두 다 도망을 갔는데 그때 그 집은 동네에서 비교적 큰 기와집이었다. 그 댁 아저씨가 6ㆍ25 나고도 1ㆍ4 후퇴 시 온 가족이 이북으로 없어질 때까지 거의 매일같이 한 차례 우리 집에 들러 담배 말아 피우는 손바닥보다 작은 빈 종이를 들고 문간 앞에서 창호지를 흔들면서 할머니를 멀거니 들여다보곤 했다.

나는 처음엔 매우 의아해하였는데 할머니 말이 밭에서 기른 담배를 말려 엽초를 썰어 만든 담배를 좀 얻어다 피우기 위해서 저러고 처량하게 서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저씨가 6󈸩 나기 전 우리 집에 담배를 얻어 피우러 오는 또 하나의 목적은 행방이 묘연한 나의 아버지가 혹시나 우리 집에 왔는지 어떤지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고들 하였다. 지금도 90이 가까운 어머니가 당시를 회상 할 때 그 집 새로 장가간 민태도 그 아버지처럼 얄미울 정도로 우리 집을 감시하였다고 하며 마음속으로 미워서 죽을 뻔했다고 하였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군인들이 훈련받으면서 행군 시 잠시 휴식하던 곳이나 지나다닌 길에서 피우다 버린 무수히 많은 화랑담배 꽁초를 주우러 다녔다. 나도 자주 주우러 다녔는데 할머니는 그 주워온 꽁초를 전부 까서 펴 말린 다음 두고두고 담뱃대에 담아서 맛있게도 피웠다.

어느덧 우리 동네 형들과 우리들은 모여서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어 뻐끔 담배를 몰래 피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연기만 풀썩 내며 “캑캑.” 거리며 피웠으나 나중에는 목구멍 숨통으로 한참 들이마신 뒤에 두 콧구멍으로 재주를 피우면서 자랑삼아 허연 연기를 능숙하게 내뿜어 댔는데 어떤 아이들은 아예 인이 박혀 주머니에 담배꽁초들을 넣고 다니면서 피워댔다.

인지와 중지 사이에 종이로 만 담배를 어른처럼 흉내 내며 멋을 부리며 담배를 피워 양손가락에 담배 연기가 노랗게 쐬어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7~8세부터 16세 정도의 사내아이와 청소년들의 담배질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관인 것이다. 훈련장이나 부대 앞길에만 가면 화랑담배 꽁초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도 아이들의 흡연에 한 가지 원인이었다. 나도 두어 번 호기심으로 피워 보았는데 콧구멍이 맵고 목이 콱 막히고 기침이 터지는 바람에 피우지를 못하였고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하여서 친구들과 어울려도 피우지를 않았다.

봄이 되기 전이다. 할머니가 짠 삼베가 아주 큰 두루마리가 되었다. 할머니 말씀이 이만하면 앞으로 우리 식구의 옷은 문제없이 해결된다 하며 아주 좋아하였다.

어느 날 사단 사령부 소속의 군인 한 사람이 우리 집에 하룻밤을 묵고 가겠다고 하였다. 그는 후방으로 출장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밤늦도록 할머니와 내가 있는 데서 전쟁 이야기를 재미있게 다정스럽게 하였다. 그리고는 신세 한탄도 하면서 가지고 온 철모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빨리 전쟁이 끝나야 된다고 얘기하다가 나와 같이 윗방 베틀 있는 데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이 되었을까 갑자기 할머니가 나를 급하게 부르면서 윗방으로 건너왔다. 예감이 이상하고 갑자기 섬뜩하여 윗방 고리를 열고 올라온 것이었다. 그리고 등잔불을 켰는데 내 옆에 자던 그 군인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베틀을 보고 크게 놀라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랠 일은 베틀에 초가을부터 겨우 내내 할머니가 짜 놓은 삼베가 장도칼로 날카롭게 끊듯이 흉측스럽게 몽땅 끊어져 텅 빈 모습으로 있었다. 바디집 위의 실만 너덜거렸다. 베틀 밑이 아주 흉하게 보였다.

군인은 할머니가 작년 피난 갔다 온 뒤에 겨우 내내 짜놓은 삼베를 우리가 잠들기를 기다려 무참하게도 몽땅 도둑질해 간 것이다. 할머니는 힘없이 나를 끌어안으면서

“그 망할 놈의 군인이 날카로운 칼로 삼베를 끊을 때 네가 일어났다면 더 큰 일이 일어났을 터인데 하늘이 도왔다.”

“나는 네가 다친 줄 알고 놀랬는데 삼베만 없어져 다행이다.”

하고 맥없이 말했다. 그 전쟁 통에도 도둑놈이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할머니는 허탈해 하였고 나도 분하기가 짝이 없었다.

1950년 6ㆍ25가 나던 그해 봄, 야산마다 큰 산까지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볼 만하였었는데 1952년 봄에도 진달래꽃이 온 산비탈에 붉게 물들었다. 6ㆍ25가 나던 해는 김일성 간부 앞잡이들이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진달래가 저렇게 많이 핀 것을 보니 통일이 될 징조라고 하였다.

그렇게들 떠들면서 6월 25일에 남쪽에 쳐내려갔다가 여름이 지나 반격하는 국군에게 혼쭐이 빠져 통일은커녕 큰코다친 모습을 우리는 날마다 보았다. 볼 때마다 당시의 이북의 나라꽃이라고 내세우던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면 필수록 이북은 빨리 망한다는 말이 마을 여기저기서 퍼졌었다.

1952년, 국군의 최전방 신병 훈련장인 우리 마을 앞산에는 진달래꽃이 참으로 아름답게 피었다. 산야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 우리가 나무하러 갔던 마을 뒷산에도 진달래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었다. 깨끗한 진분홍빛 진달래꽃을 한 움큼씩 따서 수시로 먹기도 하였고 많이 먹으면 얼굴색이 빨갛게 된다고들 하였는데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새큼한 맛에 많이도 따 먹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우리들은, 진달래꽃이 저렇게 아름답게 피었으니 김일성의 인민군대는 모두 다 국방군에게 패해서 도망가고 김일성도 곧 죽을 것이다, 라고 모두들 한 마디씩 하였다. 그때부터 진달래꽃은 이북 김일성 신봉자들에게는 별 볼일 없는 꽃으로 여겨졌다는 국방군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피면 필수록 흥망이 뒤바뀌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동네는 기쁜 이야기보다 매일 슬픈 이야기만 돌아다녔다. 군인 아저씨들에게서 들었다면서 동네 할아버지들이 슬픈 말을 하였다. 관덕정에서 훈련을 받던 신병 두 사람이 훈련 중 약속을 하고 어느 으슥한 골짜기에 숨어서 서로 상대방의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총으로 쏘아 자르는 사고를 내었다 한다. 그 손가락이 잘리면 총을 쏘지 못해 후방 병원으로 이송된다 하여 그렇게 사고를 당한 것처럼 했는데 이 사실이 발각이 되어 그 신병 두 사람은 모두 군법에 의하여 즉시 총살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적군과 싸우다가 죽은 것도 아니었다. 불명예스럽지만 끔찍하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난겨울 전투에서 동상이 심하게 걸린 다리 때문에 썩어가는 다리걱정보다 전쟁을 않고 후방으로 이송된다는 바람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군인들도 있었다 하였다. 모두 다 마음 아픈 전쟁 안에서의 애처로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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