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아이들·임산부·노인 학살이 일상적으로 일어나?”

브루스커밍스 ‘김정일코드’의 거짓과 날조 그리고 왜곡
◎[서평 : 김정일코드(브루스 커밍스 著. 남성욱 譯)]-(2)
위로부터 김정일 코드 표지. 저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역자인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4. [앞에 이어]

‘김정일 코드’가 가장 집중한 분야 중 하나는 소위 ‘김일성이 항일투쟁과 6·25당시 미군의 양민학살’이다. 이 책은 민족사적 정통성은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정권이 갖는 것이 옳고 미군철수를 비롯한 반미주의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식으로 몰아간다.

6·25사변에 대해서는 브루스커밍스가 주장해 온 미국의 ‘南侵誘導說(남침유도설)’은 나오지 않지만 김일성의 ‘南侵(남침)’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의 공습은 북한을 철저히 파괴했다”, “미국인들의 야만적인 공습”, “미국인들이 저지른 파괴와 끔찍한 살해”, “미군은 모든 것에 재미삼아 총을 쏘아댔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이 생명을 잃었다”며 “북한이 병영국가”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 미국이 한국전쟁 동안 대학살(holocaust)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브루스커밍스의 주장대로라면 6·25당시 국군과 미군은 잔인한 학살자이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미군 소속 5만4000여 명의 전사자와 10만 명의 부상자도 마찬가지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그들도 “재미 삼아 총을 쏘아댄” 자들일 뿐이다.

김일성은 6·25 南侵(남침)으로 300만 명을 죽게 하고 15만 명의 민간인을 납북했으며 ‘인민재판’ 등을 통해 12만 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김일성은 마치 피해자처럼 등장한다. 브루스커밍스는 특히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경찰에 의한 “지독하고도 무서운 보복”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학살”, “총살”, “처형”, “살해”, “몰살”, “중세 마녀사냥”, “킬링필드” 등이 “전방 전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브루스커밍스가 인용한 소스는 북한이나 헝가리 등 공산권 자료도 있지만 익명의 미군 장교나 남한 사람, 완전한 未詳(미상)의 인물도 있다. 저자는 다양한(?) 출처를 동원해 남한 장교들에 의한 “아이들·임산부·노인에 대한 처형도 있었다”, “300명의 여성 공산주의자들과 부역자들이 매음굴에 갇혀 남한과 미국 군인들에게 ‘밤낮없이’ 강간을 당했다”는 식으로 적고 있다.

브루스커밍스는 정작 부인할 수 없는 북한의 ‘인민재판’식 양민학살에 대해 “물론 북한사람들도 전쟁 중에 대량학살을 저질렀다”고 인정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바로 남한의 행위가 북한보다 더 심했고 미국은 동맹국이 저지른 범죄를 50년 넘게 숨겨왔다는 사실이다”며 학살자는 김일성이 아니라 국군과 미군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다. 일부를 인용하면 이러하다.

<“아이들·임산부·노인에 대한 처형도 있었다?”>

“북한은 왜 병영국가인가? 무엇보다 한국전쟁 동안 대학살(holocaust)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60p)”

“맥아더의 문제점은 승리를 대신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한계 또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마지막 승리에 만족하지 못했고 매번 승전할 때마다 또 다른 전쟁을 갈구했다.(62p)”

“신무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도-당시에는 네이팜탄이 최신무기로 통했지만-미국의 공습은 북한을 철저히 파괴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이 생명을 잃었다. 북한 사람들은 3년 동안 매일 네이팜탄에 불타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92p)”

“1952년 한반도 북부와 중부는 거의 다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窟(굴) 속으로 숨었다. 북한 주민들은 주택·학교·병원·공장 등 모든 생활을 지하에서 영위해야만 했다.(93p)”

“2차 대전 당시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이 적들의 저항을 더 증폭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관리들은 공습을 심리적·사회적 전투의 하나로 이용했다(94p)”

“미국인들의 야만적인 공습의 마지막 단계에서 북한 식량의 75퍼센트를 생산하는 지역에 물을 대는 대형 대들 댐들을 파괴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공격 행위들이 세인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94p)”

“헝가리인 티보 메라이는 1986년 런던의 한 텔레비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전쟁에서 남북한 가운데 어느 쪽이 얼마나 더 잔인했든지 간에 ‘미국인들이 저지른 파괴와 끔찍한 송해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북한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군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내가 받은 인상이란 조종사들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모든 것에 재미삼아 총을 쏘아댔다는 것’이라고 그는 증언했다. 메라이는 1951년 8월 압록강을 건넜는데 ‘압록강에서 평양까지 완전히 쑥대밭이었다.’ 문자 그대로 ‘북한에 더 이상의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96p)”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측과 협력했던 사람들은 지독하고도 무서운 보복을 당했다. 영국 소식통들은 그것을 경찰에 의한 ‘중세 마녀사냥’이라고 표현했으며 남한 출신의 한 한국인은 그 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비유하기도 했다(102p)”

“한 미국인 해병대 군종 신부는 남한 장교들이 약 1백 명 가량의 부역 혐의자들에게 처형당하기 전 자신들의 무덤을 파게했다고 증언했다. 그 가운데는 아이들·임산부·노인도 있었다. 이런 일은 전방 전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다(102p)”

“북한 당국이 작성한 내부용 비밀 자료에는 서울에서 일어난 만행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만9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남한 당국에 의해 ‘총살’당했고 2만1천 명은 감옥에서 처형됐으며 나머지는 경찰과 ‘반동’단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전 가족이 몰살당했다. 사형들 당하지 않은 부역자들은 가족까지 남한과 미국에 의해 ‘노예’취급을 당했다. 대한민국 도민증을 소유할 수 없었고 각종 강제노역에 동원되기 일쑤였다.(···) 300명의 여성 공산주의자들과 부역자들이 매음굴에 갇혀 남한과 미국 군인들에게 ‘밤낮없이’ 강간을 당했다. 이 보고서들이 틀렸을 수도 있으나 북한 관리들이 상부에 보고하는 내부 기밀문서에 거짓말을 할 이유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103p)”

“미군 고문단은 국군이 학살을 계속한다면 북한 전역이 남한 당국의 출입통제구역으로 설정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103p)”

“미국은 남한당국이 조사나 재판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이와 여자를 포함한 적들을 죽이고 있는 동안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런 행위를 승인하는 허가서까지 발행했다(104p)”

“평양을 재탈환한 두 북한 소식통들은 평양에서만 1만5천 명이 학살됐다고 보고했다.(105p)”

“1950년에서 51년으로 넘어가는 혹독한 겨울, 그들 가운데 5만 명 내지 9만 명 정도는 남한 통제 하에 있으면서 구타·고문·유기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106p)”

“물론 북한사람들도 전쟁 중에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그들이 공산주의자임을 감안할 때 그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바로 남한의 행위가 북한보다 더 심했고 미국은 동맹국이 저지른 범죄를 50년 넘게 숨겨왔다는 사실이다(106p)”


<加害者와 被害者 뒤바꾼 섬뜩한 날조>

브루스커밍스는 6·25에 대해 미군의 학살 전쟁과 국군의 야만적 보복이 뒤엉켜 저질러진 “킬링필드”로 서술한다. 그러나 이는 加害者(가해자)와 被害者(피해자)를 뒤바꾼 섬뜩한 왜곡이다.

실제 6·25사변 중 민간인 학살의 주체는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과 ‘바닥빨갱이’로 불리는 남한 좌익들이었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좌익들이 이른바 人民裁判(인민재판)을 통해 경찰과 군인 가족을 잡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증오를 흉기로 만들어 놓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6.25사변 중 북한군과 좌익들이 학살한 민간인은 총 12만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에 이른다. 이 수치는 남경대학살, 바르샤바 게토(Warsaw Getto)의 유태인 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바닥빨갱이들은 대개 총이 없었으므로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무장했고 곡괭이와 삽으로 우익인사들을 찔러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자행했다. 전쟁사학자들은 6.25사변 당시 ‘12만 양민학살’이 세계적 학살로 기록되는 이유는 피해자 수는 물론 그 殘酷性(잔혹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바닥빨갱이에 대한 ‘12만 양민학살’은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 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1950년 6월26일)”,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 김일성 보고)”는 발언에 나오듯 김일성이 주도했다.

開戰(개전) 초기 남한 정부 역시 좌익에서 전향한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인원과 행태는 좌익의 ‘양민학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左(좌)편향된 역사해석으로 물의를 빚어 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委, 위원장 안병욱) 조차 2009년 11월26일 “6.25 직후 국민보도연맹원 등 4,934명이 국가기관에 의해 집단 학살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었다. 진실화해委는 이날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방첩단)와 경찰, 헌병, 해군 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연행-구금된 후 집단 학살됐다”며 “확인된 희생자는 4,934명”이라고 발표했었다.

12만 명 對(대) 4,934명. 이것이 6·25 당시 이른바 좌익과 우익에 의해 죽은 민간인 데이터 비교이다. 6·25전쟁 중 左右(좌우) 사이 報復(보복)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9·28 서울 수복 이전은 좌익의 인민재판이 전부였고 9·28 이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구속·재판이라는 公的(공적) 처벌을 통해 이뤄졌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브루스커밍스가 말하는 남한당국의 “학살”, “총살”, “처형”, “살해”, “몰살”, “중세 마녀사냥”, “킬링필드”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강간”과 “노예화” 는 사실이 아니다.

양동안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9·28 서울 수복 이후 소위 우익들에 의한 좌익 보복 역시 국회에서 私刑(사형)금지법령이 만들어지면서 금지됐을 뿐 아니라 살해당한 우익들의 가족들 역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어서 보복을 하기도 어려웠다. 人民裁判(인민재판)으로 양민학살을 주도한 좌익들은 이후 재판을 통해 수감돼 처벌을 받았다”며 이른바 군인·경찰·우익에 의한 양민학살의 허무맹랑함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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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6·25 사변 당시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

■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 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출처: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출처: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 『숨어 있는 반동도배들이 자수하기를 기다리면서, 그 반동분자들과 투쟁하지 않는 경향이 당일꾼들에게 만연되고 있는 현상은 극렬히 비판해야 한다.』 (1951년 1월 21일, 『적에게 일시 강점당하였던 지역에서의 반동단체에 가입하였던 자들을 처리함에 관하여』라는 군사위원회의 결정 3개항을 설명하면서)

■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한반도 분단의 재인식』-신일철 著)

<계속. ‘김정일 코드’의 6·25남침 옹호 등에 대한 기사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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