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총기사고
4월이 지나서이다. 학교가 개학을 하였을 때인데 어느 날 오후 나는 동네 형 두 명을 따라 내 친구 셋 이렇게 다섯이서 정승골로 놀러갔다. 그곳은 군인들이 신병훈련을 받느라고 총을 쏘며 오르는 훈련장 옆인데 길바닥이나 숲 속을 들여다보면 녹이 슬지 않은 새 실탄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말인즉 군인들이 훈련 받느라 힘이 들어 오르막으로 오를 땐 무거운 실탄 꾸러미를 버리면서 언덕을 뛰어오른다 하였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국방군들의 M1, 칼빈 총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집 텃밭 대나무밭 비탈 쪽 감나무 아래엔 인민군 장총인 소위 ‘딱쿵총’ 탄알과 ‘따발총’ 탄알도 한 가마니씩 묻혀 있어서 우리들이 국군에게 알려 국방군들이 수거해 간 적도 있었다. 우리들은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려있는 실탄을 많이도 주워다가 돌에다 총알 끝을 두드려 탄알과 탄피 사이가 느슨해지면 총알과 탄피 속 화약을 모두 다 빼버리고 운동회 때 쓰던 나무로 만든 모의총에 탄피를 걸고 사격놀이를 하곤 했다.
그런데 같이 놀러갔던 친척 기명이 형이 탄피에서 총알만 빼고 화약을 넣은 채로 쏘면 소리가 아주커서 더 멋있다고 하면서 화약이 들어 있는 탄피를 장전하였다. 일이 잘못 되느라고 장전된 탄피 방향을 내 얼굴 앞에다 대고 고무줄에 걸린 방아쇠 격인 못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나는 그 총구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 형이 방아쇠를 안전장치에 잘못 걸어 고무줄이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뇌관이 “탕!” 하고 터지면서 정통으로 내 얼굴에다 대고 불붙은 화약이 발사되었다.
피하라는 예고를 반드시 하게 되어 있었는데 예고 소리가 없어 무심코 들여다보던 나는 순간적으로 “쨍!” 하는 얼음 깨지는 소리와 “탕!” 하는 소리가 겸하여 나는 것만 기억하고 그 화약불이 터져 나가는 위력에 그만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고 기절하고 만 것이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얘긴데 축 늘어져 죽은 것 같았다고 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참 지나 정신이 어슴푸레 드는 것 같았다. 총을 쏜 형과 다른 친구들이 늘어진 나의 네 팔다리를 들고 언덕 아래 물이 흐르는 도랑으로 데리고 가서 피범벅이 된 얼굴과 한도 없이 콧구멍으로 쏟아지는 피를 닦아주는 과정에서 나는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눈을 떴는데도 앞이 보이지를 않았고 소리만 들렸다. 총을 쏜 형은 그날 새로 입고 와 우리들에게 자랑하던 셔츠를 훌떡 벗어 나의 얼굴을 씻기고 닦았다고 하는데 나는 몰랐다. 언덕 위에 다시 올라온 그 친척 형이 나에게 말하였다.
“찬수야! 오늘 저녁 날이 다 어두워진 다음 집에 데려다 줄 터이니 그리 알고 집에 가면 할머니에게 네가 혼자 밤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고 해라. 내가 그랬다고 하지 마, 알겠니?”
하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 경황에도 나는 그 형에게 또래들의 의리를 지키느라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날이 어두워진 뒤 내 집까지 데려다 준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갔다. 밥도 먹지를 못하고 베틀 있는 방으로 올라가 할머니를 등 뒤로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았다. 기미가 이상해 할머니는 자꾸 고개를 돌리는 나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새빨갛게 된 것을 본 것이다. 뒷날 할머님 말씀이 눈알은 양쪽 다 새빨갛고 온 얼굴도 새빨간 것이 사람 같지가 않았고 무슨 빨간 저승아귀 같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다그쳐 물었다.
“찬수야! 어떻게 된 일이냐?”
나는 그 형 말대로 밤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때는 밤이 나는 가을철도 아닌데 엉뚱한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무를 잘 타기로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할머니 말씀을 빌리자면 다람쥐처럼 나무를 잘 탄다 하여 항상 걱정을 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한 말이 사실인 줄 알고 갑자기 회초리를 해 오더니 노발대발하면서 나를 세워 놓고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무섭게 매를 맞았다.
“네 이놈! 다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갈 테냐, 올라가지 않을 테냐!”
하면서……. 할머니 생각으로는 이참에 나무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훈계하느라 그렇게 했다 하였다. 나는 두 손을 싹싹 빌며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내 온 얼굴과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고 밤새도록 울며 밤을 지새웠다.
2. 쌍천(雙川)
그 이튿날부터 나는 학교엘 갈 수가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약도 눈에 넣지 않은 상태에서 생짜로 앓았다. 보름 정도 집안에서 앓았는데 어느 날 햇빛이 들어오지 않을 때 나는 오른쪽 눈을 실눈같이 뜨고 오른쪽 귀 있는 쪽으로 옆으로 보니 옆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할머니에게 오른쪽 눈 옆으로 조금 보인다고 말했더니 이제 낫는구나 하면서 좋아하였다. 하루 다르고 이틀 다르고 한 달쯤 지나니까 드디어 양쪽 눈을 뜰 수가 있었고 환한 곳은 눈이 시려 볼 수가 없고 빛이 흐린 쪽으로 시선을 돌려 물체를 볼 수가 있었다. 왼쪽 눈은 손으로 약간 가린 채로 오른쪽 눈은 반쯤 뜬 채로 나는 바깥출입을 할 수가 있었고 한 달 반 뒤에는 하늘을 쳐다볼 수는 없었지만 학교를 오갈 수가 있었다.
다른 애들은 내 얼굴만 보면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우르르 몰려와서 구경하였는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전체는 그때 화약 하나 하나가 불덩이가 되어 얼굴에 박힌 것이 까맣게 되어 얼굴 전체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매일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다녔는데 두 달 뒤엔 얼굴 전체가 제대로 되었고 신기하게도 약 하나 바르지 않고 내 눈은 원상대로 회복되었다. 참으로 전쟁 통에 총알 가지고 장난하다가 죽거나 크게 장애를 가질 뻔했던 것이다.
그 해 할머니는 소금재 고개 너머 넘은들에 문중 논까지 얻어 부쳤는데 날이 가물어 나도 논둑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면서 차례 물을 대어 가면서 벼와 찰벼 농사를 지었다. 넘은들 한복판에 서쪽 설악산께로부터 쌍천 하류 바닷가까지 쳐 있었던 철조망들이 모두 다 걷히고 벌판은 농사짓기에 장애물이 없었다. 그 해 초여름으로 치달을 때 몹시 가물어 논에 차례 물대기를 하느라고 온 벌판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차례 물 대느라고 나는 할머니와 여러 번 벌판 논둑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에 우리 차례가 되어 논에 물을 댄 적도 있었다.
장잿터(장자터) 마을 위쪽으로는 농사를 짓다가 미처 제거치 못한 지뢰를 윗동네 아저씨가 밟아 크게 다치고 다행히도 목숨은 건진 일도 있었다. 차례 물을 대고 난 뒤에는 도랑 웅덩이에 옹고지(미꾸라지 종류)가 하도 많아 삼태기로 퍼 올리던 생각도 나고, 특히 벼메뚜기를 많이 잡아 구워먹던 생각이 난다.
벼논에 많이 나서 핀 피를 뽑아다가 핀 피의 끝만 남겨 놓고 모두 훑어낸 다음 그 남겨 놓은 피 끝에 침을 가득 뱉어 벼 고랑에 드리우면 개구리가 피 낚시질에 걸려 피를 물다가 피대궁을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면 그 개구리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지는걸 보고 재미있어 했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면서 넓디넓은 벼논 벌판에서 내가 혼자서 놀았던 그때의 추억이다.
1952년 여름은 비가 오지 않아 아주 가물었다. 중복인가 해서 복숭아가 잘 익을 계절이었는데 우리 동네 농사짓는 어른들이 모두 다 소금재 고개 너머 넘은들 벼락바위 옆으로 흐르는 쌍천 아래께로 가서 천렵을 하였다. 쌍천은 설악산에서 흐르는 아주 맑고 시원한 큰 개울이다. 벼락바위 먼 발치서부터는 설악동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흘렀다. 그래서 쌍천이라 부른다.
설악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이라 맑기도 하려니와 한여름인데도 아주 시원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예전 병자년 포락(홍수)때까지는 바다에서 연어가 많이도 올라오는 곳이라 하였다. 이런 쌍천에서 한여름 물줄기가 가늘어질 때를 놓치지 않고 아저씨들은 쌍천 한 갈래 저 아래에다가 그물을 기다랗게 건너 쳐 놓고는 그 위에서부터 내려가는 물을 가로질러 막기 시작하였다.
여럿이 지게에 흙을 져다가 연이어서 퍼다 부으니 한나절도 못되어 쌍천 지류 하나는 물이 내려가지를 않고 다른 한쪽으로만 내리 흘렀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물이 다 빠진 뒤에 고인 웅덩이와 굵은 돌을 들추고는 여러 가지 민물고기 뚝저구, 기름종갱이, 빼둘가지, 옹고지 심지어 뱀장어까지 잡았다. 나는 그때 천렵 가서 고기 잡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지금도 설악산 신흥사 쪽으로 올라갈 때면 잠시 멈추어 길 왼쪽 아래로 힘차게 흐르는 전쟁 통에 천렵하던 맑은 쌍천을 내려다보곤 한다. 그때 쌍천 바로 옆은 싸움이 치열한 뒤 양쪽 군대가 대치할 때 쳐놓은 철조망도 미처 다 걷히지 않은 상태였다.
어른들은 지고 온 커다란 검은 솥을 걸어 놓고 잡은 고기들을 거기에 솥에 쏟아 부어 설설 끓이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는 막걸리를 마시고 민물고기 탕국을 즐겁게 들면서 놀았다. 우리들은 복숭아 한 덩어리씩을 손에 들고 고기가 갇혀 있는 여기저기 물웅덩이만 찾아 다녔다. 가재 같은 것은 돌만 들추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뱀장어를 잡을 때는 여러 친구들과 손에 모래를 한 움큼씩 움켜쥐고 미끄러운 뱀장어를 잡느라고 법석을 떨었다.
전쟁과 평화! 무엇이 전쟁이고 무엇이 평화란 말인가? 나의 슬픈 가슴 안고 이웃과 친척들의 한을 잠시 잊고 지나간 사람들을 잠시 동안 염두에 두지 않으며, 우리 동네 어른들과 아주머니 그리고 어린 우리들은 그렇게 한여름 복날을 해가 설악산 대청봉으로 넘을 때까지 늦도록 즐겼다.
1952년 여름이 지날 때 나는 UN군으로 참전한 미국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관덕정 군부대에서 지프차를 몰고 우리 집 앞 양지마을 도로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이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이나 기억이 없는(사실은 해방될 때 소련의 로스께들을 많이도 보았다 하였으나 그때는 너무 어려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괴상하게 생긴 외모의 사람이었다. 코가 우뚝하고 뭐라고 쏼라대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지나가고 조금 있으니 같은 쪽 저 아래쪽에서 또 지프차가 올라오는데 역시 앞서 지나간 사람들과 외모가 똑같았다.
마을 보호수 오래된 굴참나무. 이 옆에 6때 임시 로 지은 우리 집 집터가 있다
이상한 장면이 벌어진 것이다. 쌍둥이 군인들인가 하고 갑자기 나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그들도 쏼라대는데 역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번엔 뒷좌석에 얼굴이 새카만 군인이 탔는데 나는 그 검은 사람이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미국에서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었음을 나중에서 알게 되었고 우리 마을에서 물치 내려가는 강선리 강현천 건너께 짐미(장산리) 비행장에 그들이 주둔하는 군부대 막사가 있었다.
한번은 친구들과 물치 장거리에 갔다 오는데 물이 많이 고인 강현천 하류에서 체격이 어마어마하게 큰 미군들 20여 명이 옷을 홀딱 벗고 깊은 물에서 물놀이를 하고 노는 것을 보았다. 서로 편을 갈라 하얀 비누를 서로 던지고 받으면서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수구 같은 게임을 편 갈라 하였던 것 같다.
우리들은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천변 강둑에 줄줄이 늘어앉아 미군들이 수영하면서 노는 것을 구경했다. 군인들도 우리들이 보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뭐라고 저들끼리 떠들면서 재미있다고 웃어가면서 노는데 전쟁 통에도 저런 한가함이 있었구나 하고 지나간 날의 그 장면을 회상해 본다.
여름이 다 지나갈 때 나는 혼자서 집 앞 보호수 굴암나무(굴참나무) 아래에 앉아 수수대궁을 가지고 장난감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동차 경적 울리는 소리가 내 앞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수수대궁을 가지고 노는 나를 지프차 타고 지나가던 미군이 본 것이다. 그들은 자동차를 세우고는 나를 보고 차 앞으로 오라고 하였다. 갑작스런 일이라 주춤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그들은 또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나는 수수대궁 껍질에 손가락을 베어 피가 나는 곳을 다른 손으로 꼭 잡고 있었을 때였다. 그렇지만 자꾸 오라는 외국 군인 아저씨들 앞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을 맞잡고 지프차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이상하게 생긴 미군 아저씨는 커다란 손으로 사탕을 한줌 쥐어 나의 작은 손에 얹어 주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에게 어께를 토닥여 주면서 여러 색깔이 든 사탕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손을 베어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내가 문제였다. 어색하게 사탕을 받았는데 어른 손으로 한줌 집어주는 사탕을 땅에 흘리지 않고 다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꾸벅 절을 하였고 그들은 손을 흔들면서 “붕―.” 하고 떠났다. 그 이후 지금까지 손가락 베지 않았으면 두 손으로 더 많이 받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운 감정이 남아 있다. 저녁때 할머니 앞에 사탕을 내놓았다. 그 사탕은 참 맛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사탕은 두 번 다시 맛보지를 못하였다.
3. 전쟁중 거제도에서 온 아버지의 편지
어느 날 저녁, 동네 어른들이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이라고 했다. 구호물자가 왔으니 집집마다 배당이 있어 타 가라는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바로 옆집 안기혁 아저씨 댁엘 갔는데 구호물자라는 것이 옷가지들이었다. 그런데 그 옷들이 너무나 커서 체격이 왜소한 시골사람들이 입을 수가 없었다. 미국사람들이 전쟁이 난 우리나라에 원조물자로 모아서 보낸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옷가지이니까 아주머니들이 서로 골라가면서 이 집 저 집 배당을 주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할머니에게는 이상한 옷이 배당된 것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고르는데 뒷전에 앉아 처분만 기다리는 나의 할머니에게 배당 준 옷이 아무도 가지려 들지 않는,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이상한 물건이었다. 흡사 머리에 쓰는 모자 같다고 생각했는데, 모자 두 개가 이어져 있었다. 다른 쓸모 있는 옷가지들은 모두 동네 젊은 아주머니들이 서둘러서 차지했고 그 물건은 밀리다 밀리다 개밥의 도토리가 되어 나의 할머니 몫이 되었다.
그리고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의 할머니에게 배당준 것이 하도 이상하고 어디다 쓰는 옷인지도 몰라 어리둥절해 가면서 의견을 모았는데, 여자들 가슴을 싸매는 옷이라 하였다. 그러고서는 이 아주머니 저 아주머니가 돌아가면서 한 번씩 입어보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고는 집안이 떠나갈 듯이 깔깔대고 웃었다.
내 할머니에게 배당된 아리송한 옷은 여자들이 입는 브래지어였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들고 있는 그 옷을 들고서 보니 엎어 놓으면 흡사 산소의 커다란 무덤 봉우리 두기처럼 보였다. 아주머니들이 방바닥에 엎어 놓은 걸 보니 너무도 큰 것이어서 앙상한 나의 할머니에게는 전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할머니 품속에서 자랐었고 열두 살 될 때 까지도 갈비뼈만 집히는 앙상한 할머니 품에서 잠들었던 나였기에 나의 할머니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옷이라 생각했다. 미국에서도 아주 몸집이 큰 여자가 보내 준 가슴 싸매기 옷이었던 것 같다. 필요한 옷가지 나누기가 다 끝난 뒤 할머니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였다.
“내 같으면 손수건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것을 어디에다 쓰랴! 나는 필요 없으니 너 옥화나 가져라.”
하면서 이웃집 시집 안 간 누나에게 주니 그 누나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부끄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8월 말쯤인가 할머니와 내가 밭에 갔다가 돌아오니 동네사람들이 야단법석이었다. 사단 사령부에서 김상사라는 군인이 이 마을에 찬수란 아이와 그 할머니가 사느냐고 묻고 갔다고 야단들이었다. 할머니는 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한참 궁금해 있었다.
그런 뒤 9월 20일쯤 우리 집 앞에 군인 지프차가 와 서더니만 찬수란 아이가 있느냐고 하면서, 있으면 잠깐 사령부 헌병대 권상사가 만나보고 싶어 하니 이 차에 타고 가자고 하였다. 할머니는 영문도 몰라 의아해 하였고 나도 겁이 덜컥 나서 망설이기만 하였다.
그 서씨라 하는 일등중사 아저씨(후일 거제도에서 다시 만났는데 연초면 한내리라는 곳이 고향이었다)가 웃는 얼굴로 나에게 이상한 경상도 말로,
“야야―! 니, 가 보먼 알긋지만 디―게 좋은 일이 있을 끼다. 마 퍼뜩 가자!”
하지 않는가. 그제야 할머니는 나를 보고 차타고 갔다 오라 하였다.
난데없이 나는 생전 처음 지프차를 타고 군 사령부 앞에 지금의 나의 6대조 할아버지 묘소 위쪽에 위치한 땅 속 진지 벙커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얼굴이 둥글둥글하면서 아주 잘 생긴 체격이 큰 헌병상사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나오면서,
“네가 찬수냐?”
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내가 권오홍이다!”
하고 소개했다. 이때부터 권오홍(權五弘) 상사는 우리 집안의 은인이 되었다. 내가 얼떨떨하면서,
“네!”
하고 대답하니 그 헌병상사가 갑자기 나를 와락 껴안아 들어 올리면서,
“찬수야! 네가 찬수로구나!”
하면서 몇 바퀴 돌더니만 나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건네주며 뜯어보라고 하였다. 어리둥절했지만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데 호기심이 일어나 나는 편지의 겉봉투 글씨를 찬찬히 보았다. 눈에 익은 글씨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립고 보고 싶은 내 아버지의 독특하고 다정한 글씨였던 것이다.
“찬수야! 네 아버지가 지금 경상도 거제도 연초중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다.”
하고 말했다. 경상도? 거지도(거제도)? 교장? 나의 머리 속은 갑자기 종잡을 수 없게 혼란스러워졌고 또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북쪽 원산에 있는 아버지의 편지를 이 군인들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남쪽의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말인가?
겉봉투에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중복리 찬수 받아 보아라.’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고, 뒷면엔 ‘경상남도 거제군 연초면 하청중학교 연초 분교장 김종권 씀’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흥분하여 한참동안 내 정신이 아니었다. 아저씨들을 두리번거리면서 보다가 아버지 편지를 들어 겉봉투를 보다가…….
한참 이러고 있는데 권상사 아저씨가 재미있다는 듯이,
“찬수야! 어서 편지를 펼쳐 보아라.”
하였다. 나는 그래도 너무 좋고 흥분하여 꿈인지 생시인지를 구분 못하여 어쩔 줄 몰랐다. 할머니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폭격으로 원산에서 잘못된 줄로 알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의 편지가 친필로 온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니! 그때의 감격스러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러 아저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나는 아버지의 편지 겉봉투를 뜯어보았다. 여러 장이 겹쳐 있는 아버지 편지를 꺼내어 펴 보니 그립고 보고 싶은 아버지의 글씨 모양이 와락 내 눈으로 들어왔다. 보고 싶고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와 두 귀여운 여동생이 모두 원산이 폭격을 받아 재가 된 가운데에서 살아났고 또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도 하지 못하는 저 머나먼 남쪽 끝에 가 있다 하니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편지지 다섯 장의 앞뒷면 가득히 오른쪽으로부터 내려 쓰신 종서였는데 나는 단숨에 다 읽었다.
찬수 받아 보아라!
찬수야! 할머님 모시고 잘 있었느냐? 이 애비를 용서해 다오. 네가 할머님을 모시고 이 참혹한 전쟁 속에서 살아 있다는 소식 들으니 이 기쁨을 어찌 표현하랴! 장하고 장하다. 내 아들아…….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잉크로 씌어진 글인데 얼룩진 흔적으로 말라 있었다. 당신의 오늘이 있게 하신 어머님과 어린 아들인 나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 처음부터 눈물을 흘리며 썼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눈물이 담긴 편지…그리고 사랑
- 김찬수(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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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17, 09: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