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著名(저명)한 학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유명한 웨이크 섬 회담 때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이 따로 탄 비행기가 거의 동시에 섬 상공에 도착, 선회하면서 서로 늦게 내리는 경쟁을 하였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일부러 뒤에 착륙, 미국 대통령이 자신을 마중하게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화가 난 트루먼 대통령이 機上에서 맥아더의 先着을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그건 神話이다. 맥아더 장군은 전날에 이미 웨이크 섬에 와 있었다"고 했더니 그 학자는 "트루먼이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한 책이 있다"고 했다.
밀러라는 기자출신이 트루먼과 나눈 대화를 死後에 출판한 책이 있다.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과연 트루먼이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밀러가 윤색한 것인지는 애매하다. 분명한 것은 사실이 아니란 점이다.
1950년 10월15일 태평양상의 웨이크섬에서 역사적인 회담이 이뤄진 것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토의하기 위함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접하고 걱정이 되었다. 10월2일, 중국 周恩來 총리는 밤중에 北京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르를 불러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가만 있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인도 대사의 말을 들은 미국 관리들은 그가 평소 親中的인 사람인 점을 감안, 이 정보를 무시하였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불안하였다. 직접 맥아더를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다.
도쿄에 주재하던 맥아더는 北進을 지휘하는 사령관을 '정치적 목적'으로 불러낸다고 불평하면서 하루 전에 웨이크섬에 갔다. 트루먼 일행을 태운 전용기는 호놀룰루에서 이륙, 15일 새벽 6시30분에 웨이크섬에 도착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30분 전에 비행장에 나와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元老 외교관 해리만은 다른 비행기로 먼저 도착, 맥아더와 함께 서 있었다. 해리만은 사령관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최종적으로 허가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작전이 실패하였더라면 대통령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고 귀띔해주었다.
트루먼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맥아더는 몇 가지 불손한 행동을 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正裝(정장)인데, 맥아더는 작업복 차림이었고 윗옷의 단추를 다 채우지 않았다. 모자도 낡은 것이었다. 맥아더는 육군 장관 프랭크 페이스에게 경례를 붙이지 않았다. 육군장관은 서열상 모든 육군장병의 우두머리였다. 더 놀라운 것은 맥아더가 최고사령관인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 팔을 잡고 악수를 하였을 뿐이다. 트루먼은 그런 결례에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였다.
웨이크 섬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의 개입은 없다. 있어도 소규모일 것이다. 이는 쉽게 섬멸될 것이다. 한국전은 사실상 끝났다"고 斷言하였다. 그 순간 毛澤東은 수십만 명의 중공군을 압록강이 보이는 만주에 집결시켜놓고 있었다. 사흘 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북한지역으로 들어온다.
트루먼은 웨이크섬 회담 이후에도 맥아더로부터 여러 차례 抗命사태를 겪으면서 골치를 썩이다가 1951년 4월 해임하기에 이른다. 트루먼은 당당하고 솔직하고 短氣였다. 이런 사람이 맥아더로부터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오래 참은 것은 그 또한 맥아더의 神話에 영향을 받아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살아서 神話的 인물이 되어버리면 과장과 美化에 둘러싸이게 되고 상황을 오판하게 된다. 한국은 맥아더 神話로부터 得도 보고 손해도 보았다.
맥아더 神話: 웨이크섬 회담의 俗說과 진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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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21, 12: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