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의 은인, 60년 전의 탈북자



중학교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부산으로 부임하신지 4년만에

아담한 집을 사게 됐을 때 집값에 6만5천원이 모자라 애를 태우셨다.



고향 읍내에서 사업을 해 성공한 외사촌 형에게 편지를 하니

오라고 해서 가시니 마음이 변하여 평생에 처음 빌리는 돈도 못 구하고

재취댁인지 첩인지 형수의 구박만 받고 돌아오셨다고 한다.



제일제당 뒷길 대추나무집 울산영감님 댁에 전세로 살던 때였는데

터가 넓어 블록집 두 채를 지어서 세가구를 들여놓았는데

맞은편 집에 살던 집 아주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어머니 하소연을 듣고

빌려달라 소리도 안했는데 남편이 퇴근하면 의논해 보겠다고 하시더니

다음날 아침 은행통장을 건네 주면서 필요한 만큼 찾아 쓰라고 하셔서

32평짜리 집값 잔금을 치르고 이사하자마자 방 둘 전세놓아 갚을 수 있었다.



김씨 성을 가진 아저씨는 6-25 때 이북에서 피난오신 분으로

서면시장 건너편 부속품상가에서 작은 가게를 하고 계셨는데

우리를 볼 때마다 인자한 눈빛으로 대해주시던 분이었고

나보다 네댓살 위인 형도 욕설이나 거친 행동을 전혀 하지 않고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과 사이좋게 지내던 게 생각난다.



그때가 65년이니 휴전 후 불과 13년.

이북에서 홀홀 단신 피난와서 전포동 도랑가에 친척도 살고

하여튼 아저씨로선 피땀흘려 모은 돈을 덜컥 맡긴 셈이니

그 집에서 6남매가 다 대학을 잘 마치고 지금도 어머니가 계시니

올 가을 주렁주렁 달린 감이 너무나 탐스러워 감탄하다가

그 어른 생각이 나서 이야기를 다시 추스려 보았다.



어른들 성함은 생각 안 나고

복진 복순 복희 그리고 막내 다들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아저씨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에 찡하게 남아 있는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건달친구들과 어울려 부속품 가게 앞을 지나는 나를

멀리서 걱정스럽게 지켜보시던 표정이었다.



웬지 부끄러워 인사도 못하고 비실비실 왔는데

이 사건이 마음을 추스리고 바른 길을 걷게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연평도 포격 이후 부쩍 잦아진 탈북민들의 북한 실상 강연을 들을 때마다

복진 씨 아버지한테 입은 은혜를 북한동포들에게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인한 생활력으로 피난살이 정착에 성공한 그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상공업이 더욱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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