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자들'-한나라당 탄핵철회론자들을 보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이 있은 후 상상 이상으로 逆風이 거세다. 연일 탄핵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인파가 종로 거리를 메우자,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탄핵철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한나라당 대표경선에 나선 김문수 의원마저 그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들의 행태는 1868년 앤드류 존슨 美대통령에 대한 탄핵재판에서 부표를 던졌던 일곱 명의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행태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1868년 5월 16일 미국 上院은 앤드류 존슨 대통령에 대한 彈劾재판 표결에 들어 갔다 (미국에서는 하원이 탄핵소추를, 상원이 탄핵심판을 맡는다).
존슨 대통령이 탄핵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그가 스탠턴 육군장관을 해임함으로써 '상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된 모든 공무원은 상원의 동의 없이는 대통령이 파면할 수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공무원재직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른 정치적 이유가 숨어 있었다.

앤드류 존슨은 남부 민주당 출신 상원의원이면서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연방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북부측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북부 공화당출신인 링컨은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함으로써 지역간·정파간의 화합을 이루고자 했다.
링컨이 암살된 후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류 존슨은 링컨의 遺志를 계승하여 내전에서 패한 남부에 대한 화합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남부가 北軍의 軍政 下에 들어 간 것을 기화로 정치적 이익을 챙기고 있던 공화당이나 스탠턴 육군장관등은 그러한 그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했다. 少數派 출신 대통령과 의회간의 이러한 갈등이 결국 스탠턴의 해임을 계기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상원의 탄핵재판 당시 상원의원의 수는 54명이었다. 그 중 공화당이 42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탄핵안이 가결되기 위한 정족수인 재적2/3를 휠씬 넘어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앤드류 존슨에 대한 탄핵안은 가결되지 못했다. 민주당 상원의원 12명은 물론, 에드먼드 G. 로스, 윌리엄 피트 페슨던, 피터 반 윙글, 존 B.헨더슨, 라이언 트럼블, 조셉 스미스 포울러, 제임스 W.그림스 등 7명의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탄핵안에 대해 否票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이들 7명의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탄핵안에 부표를 던진 것은 그들이 앤드류 존슨이나 그의 정책들을 긍정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남북전쟁 이전부터 강경한 노예해방론자거나 연방주의자, 혹은 남북전쟁 참전용사로 존슨 대통령의 對남부 화합정책에 반대하는 강경파 골수 공화당원들이었다. 따라서 탄핵안이 상원에 회부될 때까지만 해도 누구나 그들이 탄핵안에 찬성하리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탄핵안에 대해 부표를 던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하나인 라이만 트럼블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성공한 후 그것이 의회가 흥분함으로써 불충분한 이유로 내려진 판단임이 입증된다면, 미래의 대통령이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법안에 대한 견해가 의회의 견해와 다를 경우 안전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주의 깊게 고안된 헌법의 '견제와 균형'은 모두 파괴되고 말 것이다.'

앤드류 존슨에 대한 탄핵재판은 1868년 3월5일부터 같은 해 5월16일까지 2개월여 동안 계속되었다. 그 동안 탄핵안에 대해 회의적인 것으로 알려진 7명의 공화당 상원의원들에게는 '黨命에 복종하라'는 압력과 함께 갖은 회유· 인신공격· 협박 등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명'에 따르기보다는 '헌법 정신'에 충성하는 길을, 회유·인신공격·협박에 굴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양심'에 복종하는 길을 택했다.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에드먼드 로스는 동료의원에게 '나는 공화당원이고, 존슨과 그의 정책에 반대하지만, 그는 피고인으로서 가장 공정한 재판을 받게 될 걸세'라고 말했다.
그의 지역구 유권자들이 대통령에 대한 유죄판결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보내자 로스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공정한 결정을 내리겠다는 선서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국가의 최고善을 위해서 내 판단에 따라서 투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부표를 던진 공화당 상원의원 윌리엄 피트 페슨던은 스탠턴의 확고한 지지자이자, 존슨 대통령에 대한 반대자였다. 그러나 그는 존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부당하다고 확신하게 되자 '나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운명이 다가오든지 간에, 내가 한 정치가로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든지 간에, 나는 내 양심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의 양심에 따라 부표를 던졌다.

1868년 5월 16일, 에드먼드 로스 등 일곱 명의 공화당 상원의원들은앤드류 존슨에 대한 탄핵안에 대해 부표를 던졌다. 이로써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한 표 차이로 무산되었고, 앤드류 존슨은 대통령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치뤄진 상원의원선거에서 이들 7명의 공화당 상원의원 가운데 단 한 명도 재선되지 못했다. 단 한명도!
하지만 후일 이들의 행위는 미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3권 분립의 원칙이 흔들렸을 때, 자신을 희생하여 헌정 위기를 극복한 행위로 높이 평가받았다. 존 F.케네디는 후일 '용기 있는 사람들'의 한 章을 이들에게 바쳤다.

공화당 의원들은 존슨을 혐오하면서도 그에 대한 탄핵이 헌법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부당하다는 확신에 따라 온갖 협박과 비방을 무릅쓰고 부표를 던졌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 선거에서 모두 낙선의 고배를 감수했다. 존슨에 대한 부표를 던졌다가 다음 선거에서 낙선한 제임스 W.그림스는 죽기 전 '존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던 그 소란한 날에, 많은 사람들이 黨기관지와 黨의 증오가 명령하는 대로 순종하여 그들의 판단과 양심을 포기했었다고 개인적으로 고백했을 때, 나는 내 서약과 양심을 꿋꿋이 밀고 나갈 용기를 지니고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술회했다.

반면에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의 행태는 어떠한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黨에서 공천 박탈과 黜黨운운 하더라도 자신의 판단과 양심에 따라 끝까지 맞섰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들은 지금쯤 탄핵에 반대하는 여론을 바탕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왕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에 찬성했다면, 아무리 逆風이 거세더라도 유권자들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해야 했다.
이제 와서 좌고우면하면서 '탄핵철회' 운운하는 것은 '나는 소신도, 철학도 없는 비겁자'라고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후일 누군가가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면(아마 쓸 사람도 없겠지만) '용기 없는 사람들' 혹은 '비겁자들'이라는 제목을 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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