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한반도의 核게임

原爆 제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지의 문제이다.
우리도 원자폭탄을 만들자!
核에는 核: 自衛的 핵무장론


1. 朴正熙의 核개발



"원자력을 개발하라."


李承晩 대통령은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4월26일에 下野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났다. 그해 2월2일 국무회의 기록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5. 군사와 경제의 근본정책에 관하여
○김정렬 국방: “미국은 그 원조에 있어서 무기(비행기)나 별식(別食)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어오고 있는 형편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명년도 예산에 우리 세입에서 300억의 국방비를 더 부담하여 가야 할 것인 바 금반 제출된 산업개발 3개년 계획에는 이것이 고려되고 있지 않으니 차제에 국방력 강화냐, 경제부흥이냐의 근본문제를 결정하여야 할 것인 바 만일 前者를 택한다면 後者를 희생하여야 하며 따라서 현 심의 중의 3개년 계획은 휴지로 화할 것이라”고 보고.
○이승만 대통령: “日人들은 外援(외원)을 거절하고 자립하여 나가고 있으며 잠수함 기지 무기를 自家 생산하는 현재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아내기 위하여 시작한 對韓원조이지만 이것을 언제까지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가 自立하지 못하면 노예밖에 될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원자력을 개발하고 군비에 관한 위원회라도 만들어서 이순신 장군의 代를 이을 만한 기술자를 기르고 그를 위하여 필요하면 돈을 좀 쓰도록 할 것이며 현재 잘 안 되고 있는 조선공사 시설을 잘 조작하여 무엇을 만들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는 분부.
○김정렬 국방: “일본은 자가생산 무기를 자유로 사용하여 평화선을 침략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미국인의 눈치만 보고 있어야 할 형편이니 중대한 문제이며 이런 중요한 정책은 국방위원이 논의하기에 앞서서 全국무위원이 논의하여 보아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구신.
○이승만 대통령: “말로만 할 것이 아니고 실지에 하도록 하라”고 분부.
○신현확 부흥: “원자기술자 양성에는 目下 주력하고 있으며 국방과 경제의 어느 쪽에 치중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에서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보고.>
미국의 對韓원조가 끊어지는 날에 대비하여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 말은 원자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李 박사는 1950년대에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하고 원자력원을 설립했으며 서울工大에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 한 목적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기술축적이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대목이다.


吳源哲 보고서


朴正熙 대통령이 추진한 핵폭탄 개발은 증언자에 따라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 마치 朴대통령이 핵폭탄을 만들기 직전에 피살된 것처럼 소설을 쓰기도 한다. 이 비밀 핵개발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문서는 月刊朝鮮이 발굴했던, 吳源哲(오원철) 당시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작성한 ‘原子核연료개발계획’이란 9페이지짜리 문서이다. 이 문서는 核彈(핵탄) 개발의 방향과 전략을 쓴 것인데, 그 뒤의 추진과정과 맞추어보면 朴 대통령이 이 문서대로 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문서는 2급 비밀로 분류되었다가 해제된 것으로서 정부기록보존소에 있었다.
吳 전 수석은 자신이 이 문서를 작성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일체의 설명을 거부했다. 그는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 그리고 무기개발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核개발에 있어서도 실무 책임자였다.
이 보고서에서 吳 수석은 플루토늄 核彈을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우라늄 核彈을 만들 경우에는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투자액은 약9억 달러, 건설기간은 8년이 들고 이를 가동하는 데는 200만kw가 소요된다고 했다.
플루토늄彈의 경우에는 재처리 시설에 3900만 달러, 건설기간 6년이 소요되고 대규모 電力이 필요하지 않으며 ‘약간의 기술도입으로 국내개발이 가능하다’고 했다. 吳 수석은 재처리 시설에 공급할 사용後핵연료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도 검토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만드는 重水爐(중수로) 원자로를 이용하면 연간 200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플루토늄 생산을 전문하는 硏究爐(연구로)를 도입할 경우에는 플루토늄 생산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다. 吳 수석은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로 지을 때 캐나다 CANDU型 중수로를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1980년대 초에 가면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吳수석은 결론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과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彈을 개발한다.
*1973년도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核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한다.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한다.>


프랑스 재처리 회사와 교섭

原爆의 원료 물질 생산을 뜻하기도 하는 '핵연료 재처리'라는 이 민감한 낱말이 우리 정부 문서에 처음 의미 있게 등장한 것은 1969년 5월 제172차 원자력위원회가 확정한 원자력 연구개발 장기이용 계획서였다. 원자력 연구소가 작성한 이 계획서는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2∼76년)에 재처리 체제에 관한 기술적, 경제적 검토를 한 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7∼81년)에 재처리 시설의 설치를 추진한다'고 했다.
1971년 1월 당시 원자력청 산하에 있던 원자력 연구소는 재처리 사업계획서를 원자력 청에 제출하였다. 1974∼80년을 건설기간으로 잡고 경남 온산공업단지 인접지역에 하루에 1t을 처리할 수 있는 대단위 공장을 만든다는 요지였다.
1972년 7월에는 영남화학(주)이 핵연료 재처리 합작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하였다. 미국의 스켈리 석유나 NFS사(Nuclear Fuel Services), 일본의 미쓰비시 석유가 국제합작 하여 1978년 가동목표로 고리 원자력발전소 인접지역에 年 처리능력 900t 규모의 재처리공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에는 핵확산금지와 관련한 국제적 규제 강화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전에 기득권을 확보한다는 전략적 고려가 있었던 것 같다.
원자력연구소는 1972년 원자력 연구개발의 최우선 과제를 핵연료 週期 기술의 확립으로 설정, 그 핵심 거점 기술인 재처리기술과 핵연료 가공 기술의 연구를 위한 시설 도입 교섭에 들어갔다. 미국측은 냉담했다. 원자력연구소와 자매 관계에 있던 알곤 국립연구소도 재처리 분야의 기술훈련 협조요청을 거절하였다.
정부는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1972년 5월 崔亨燮 과학기술처장관은 프랑스 영국을 공식 방문했다. 원자력 협력, 특히 재처리 기술도입에 관한 협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이해 10월에는 프랑스 원자력 청(CEA)의 장피에르씨 등이 한국에 왔다. 핵연료가공 및 재처리 사업에 관한 양국간의 기술협력 문제를 의논하였다. 1973년 3월 프랑스의 원자력청과 그 산하의 재처리 시설 용역회사인 SGN사(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 대표단이 와서 원자력연구소와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였다.
SGN사는 재처리 기술이 세계에서도 가장 발달된 프랑스에서도 이 분야의 대표회사였다. 프랑스 원자력청 산하의 國營(국영)회사로서 1952년부터 가동되었다.
원자력연구소는 일단 SGN社에 시험용 재처리 시설의 개념 설계를 요청, 용역계약을 맺었다. 1973년 9월 尹容九 원자력 연구소장은 CEA와 SGN社를 방문하였다. 재처리사업과 발전소용 핵연료 가공사업의 협력 방안을 의논한 끝에 정부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 건설계약을 체결하자고 합의하였다. 1975년 4월에는 원자력 연구소와 SGN社 사이에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이때 핵연료 사이클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에서 독립시키겠다는 自立전략을 설정, 재처리 이외에 핵연료 제조기술의 도입도 시도하였다.
제1 핵연료 가공 시설인 핵연료 成型(성형)가공 시험시설의 도입선은 프랑스의 CERCA社로 정했다. 1975년 1월 원자력 연구소와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에 의해 분리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原電 핵연료로 재순환시키는 데 필요한 혼합핵연료 가공시험시설(제2 핵연료 가공시설)의 도입에 대해서는 벨기에의 핵연료 주기기술 용역 전문업체인 BN사(Belgonucleaire)와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1974년 1월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장 李炳暉(이병휘)씨는 벨기에를 방문, 플루토늄 가공기술 및 연구시설의 도입을 위한 벨기에 정부차관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해 9월에는 崔 과기처장관이 벨기에를 방문, 기술용역 및 기술훈련 협의를 거쳐 11월에 혼합 핵연료 가공 시험시설의 개념설계를 BN사에 맡기는 계약을 했다.


인도의 개발 모델에 관심


이것은 미국을 따돌리고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원자폭탄의 폭약에 해당하는 플루토늄 분리 및 그 취급 기술을 종합적으로 손에 넣으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었다. 핵 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재처리 사업은 崔亨燮 과기처장관, 朱載陽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金哲 원자력연구소 大德 분소 공정개발실장을 축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뒤에 원자력 연구소의 재처리 사업과 연구로 개발사업, 그리고 국방부산하 국방과학 연구소의 핵폭탄 설계와 유도탄 개발사업을 통합 조정하여 朴대통령을 보좌한 것은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담당 수석비서관이었던 吳源哲씨였다.
핵폭탄 개발은 플루토늄을 생성시키는 연구로와, 연구로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에서 그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재처리 공장, 그리고 플루토늄을 폭약으로 하여 核폭탄을 설계·제조·시험하는 시설 및 운반수단인 미사일 연구의 종합 시스템이다.
재처리 사업 실무책임자 朱載陽씨는 미국 MIT 대학에서 化工분야를 전공한 뒤 핵연료 관계의 연구를 했던 在美학자로서 1973년 3월1일에 원자력 연구소 특수사업담당 부소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우선 과제는 人力확보였다. 그때는 국내외 어디를 찾아보아도 재처리 공장에 근무했거나 재처리를 전공한 학자가 없었다. 그는 그해 5월23일부터 7월12일까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 젊은 한국학자들을 찾아내 이 특수사업에 끌어들이기 위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金哲씨의 경우는 서울대 화공과 출신으로서 뉴욕 주립대학(스토니 브룩 소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년간 매사추세츠주의 나티크 육군연구소에서 근무중 朱載陽씨에게 설득 당하여 귀국하였다. 金 박사는 美 육군 연구소에서 폐기 문서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보안상의 목적으로서, 종이를 분해, 셀루로즈 성분을 포도당으로 변화시키는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재처리 사업을 위하여 해외로부터 유치된 과학자들은 약 20명이었다. 거의가 화공·화학전공자였다. 재처리 과정이 기본적으로 용매 추출에 의한 플루토늄 분리라는 화학 공정이기 때문이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金哲씨 밑에서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 李哲洙씨를 비롯한 유치 과학자들의 과반수는 서울工大 化工科(화공과) 출신이었다. 서울대 화공과의 입학점수가 전국에서 가장 높던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상반기에 입학했던 이들이었다. 유치 과학자들은 주택 제공, 많은 월급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캐나다서 NRX 연구로 도입추진

朱載陽씨는 재처리 기술도입뿐 아니라 연구로 확보의 실무 책임자이기도 했다. 朱 부소장은 1973년 11월9일에 재처리 사업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프랑스의 SGN사 등을 한 달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만과 인도를 보름 동안 방문하였다. 朱 부소장 외 2명의 대만, 인도 방문 사유를 "원자력 연구소 20년사'는 'NRX 원자로 도입에 따른 기술문제 협의차'라고 적고 있다. 이 짧은 기록은 朴대통령의 핵폭탄 개발전략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던지고 있다. 1974년 3월23일 朱부소장은 드디어 NRX 원자로 도입 사업 추진차 프랑스와 캐나다를 24일간 방문한다. 프랑스의 재처리 공장과 캐나다의 NRX연구로 도입이란 두 개의 기본축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인도는 캐나다의 NRX연구로를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핵폭탄 제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朱 부소장 등 실무 책임자들을 인도에 보내 인도의 개발전략을 우리의 모델로 배워 오도록 했던 것 같다. 당시엔 핵폭탄용 플루토늄은 상업용 原電이 아니라 군사용 원자로와 연구용 원자로에서만 생산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고리에 있는 경수로 原電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이 생기는데 여기에는 핵폭발에 방해가 되는 플루토늄 240이 23.8%나 들어있다. 핵폭발용이 되려면 플루토늄 동위원소들 중 플루토늄 240이 7% 이하, 플루토늄 239가 90% 이상이어야 한다. 경북 월성에 있는 캐나다 중수로의 경우에는 플루토늄 240이 26.6%로서 이 역시 폭탄용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商用 原電의 사용후핵연료에서 핵폭발용 플루토늄 239가 순도 미달이 되는 것은 핵연료가 3년간이나 타기 때문이다.
군사용 원자로나 연구용 원자로는 핵연료의 연소시간을 짧게 함으로써 핵분열성 플루토늄을 90% 이상의 순도로 생산할 수 있다. 북한을 포함하며 지금까지 핵폭탄을 개발했거나 개발을 시도했던 나라는 모두 연구로에서 폭발용 플루토늄을 얻었다. 따라서 어떤 형의 연구로를 확보하느냐가 핵폭탄 개발전력의 제1관문이 된다. 웨스팅 하우스 자료에는 1977년 현재 핵무기 개발용으로 돌릴 수 있는 연구로는 인도, 이스라엘, 캐나다(3개), 대만, 노르웨이, 서독, 이탈리아, 스위스 등 8개국에 11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인도는 캐나다로부터 NRX연구로를 도입, 인도에서 채굴된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집어넣어 태운 사용후핵연료에서 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였다. NRX연구로는 중성자 감속재로 重水(중수)를 사용하는데 이 重水제조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여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 핵실험의 충격

朴 대통령은 연구로 가동에 필요한 중수와 천연 우라늄 공급선도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확보해야 했다. 朴 대통령의 핵개발 의지와 한국이 처한 이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선 것이 이스라엘 巨商(거상)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1950년대부터 한국에 거점을 마련하여 턴 키 베이스의 기간산업 건설과 이에 따른 외자 알선으로 떼돈을 벌었던 아이젠버그는 1969년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 고위층에 캐나다의 重水爐(중수로) 원자로를 소개하였다. 핵개발을 위해서 편리하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朴대통령은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에 대하여 미국이 화끈한 대응을 하지 않고 1969년에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핵폭탄 개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상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72년11월에 아이젠버그가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와 독점 대리인 계약을 맺으면서부터였다. 1973년4월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존 그레이 사장은 한국에 와서 청와대, 상공부, 과학기술처, 韓電 등을 차례로 방문, 월성에 세워질 60만㎾짜리 원자력 3호기 건설 계획에 참여할 뜻을 비쳤다. 1973년 11월에 호주 대사에서 韓電 사장으로 임명된 閔忠植씨는 상공부와 韓電의 일부 실무자의 반대를 꺾고 직접 朴대통령의 意中(의중)을 받들어 원자력 3호기 主계약자로 AECL을 선정하는 쪽으로 밀고 나갔다. 이때 우리 정부는 캐나다로부터 중수로 원자로 이외에 3만㎾짜리 NRX연구로를 같이 수입하기로 하고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NRX연구로에 쓸 중수와 천연우라늄 연료는 한국에 지어질 캐나다製 중수로(CANDU)에도 공급되므로 미국의 간섭을 피해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형 중수로는 연료의 일부를 매일 교체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미국제 경수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을 중단시킨 뒤 연료를 바꾸는 데 비해 중수로는 수시로 사용후핵연료를 끄집어 낼 수 있다. 국제 원자력 기구에서는 핵개발 야심을 가진 나라가 중수로를 가지면 사용후핵연료를 몰래 빼내 플루토늄을 재처리해 내기가 쉽다고 판단하여 경수로보다도 훨씬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다.
1974년 5월에 인도가 핵폭발 실험을 했다. 라자스탄 사막의 L자 모양 참호속에서 이루어진 핵실험 장치는 나가사키 투하 원폭보다 약간 작은 15kt짜리였다. 인도가 핵폭발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출신인 핵물리학자 호미 바바 박사의 집념 덕분이었다. 그는 1945년에 벌써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 평화 목적의 이용이란 명분을 내걸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 자금은 초기에 인도의 재벌들이 부담했고 네루 수상이 적극 뒷받침했다. 바바 박사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 核 선진국의 기술 협조를 받는 데도 폭넓은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핵폭발용 플루토늄이 생산되었던 캐나다製 NRX형 연구로 사이러스(4만㎾)는 캐나다가 경제원조의 일환으로 인도에 공급한 것이었다. 사이러스 원자로에서 태워진 사용후연료에서 플루토늄을 뽑아낸 재처리 공장은 미국 회사의 기술적 도움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미국이 비밀분류를 해제한 휴렉스 방식의 재처리 공장이었다.

原爆제조 막을 길 없다

이들 국가가 인도에 核관련기술을 마음 턱 놓고 넘겨준 것은 세계 평화를 부르짖으며 비동맹 외교를 선도해 온 인도를 믿었던 때문이었다. 인도도 핵폭발 실험의 목적을 건설 등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인도는 핵확산금지 조약이 평화목적의 핵폭발까지 금지하고 있는 데 반발하여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인도의 핵폭발 실험 이후 뒤늦게 낭패한 캐나다는 NRX연구로에서 생성된 플루토늄을 앞으로는 핵폭발물 제조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인도에 요구, 거절당하자 인도에 대한 원자력 기술협력을 두절시킴으로써 캐나다 회사가 짓고 있던 중수로 1기는 완공되지 못하였다. 인도 핵실험은 가난한 나라도 정치 지도자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으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함으로써 核보유국을 놀라게 했다.
核보유국들은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단결하여 핵폭탄 개발과 관련 있는 연구로, 농축-재처리 기술 및 이와 관련된 주요 기자재의 對外 판매나 이전에 따른 규제를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인도 방식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한국이었다.
인도 핵실험 이후 개발도상국에 의한 핵개발이 국제 문제가 되었을 때 미국 의회 자료실(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은 뉴욕의 폴리테크닉 연구소 원자력공학 부장인 존 R 라마쉬 박사에게 의뢰하여 개발도상국 및 小國의 비밀 핵폭탄 개발 가능성에 대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라마쉬 박사는 이들 나라가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를 원자력 선진국의 도움 없이 만들 수 있느냐에 대해 "어렵지 않은 일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小國 및 개발도상국에 의한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의 건설에 관하여'란 對의회용 보고서에서 "1년에 10㎏의 플루토늄(20kt급 원폭 한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는 1300만∼2600만 달러를 들이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재처리 시설도 쉽다

라마쉬 박사는 또 "설계에 필요한 정보는 이미 공개된 문헌에 다 있으며 건설에 필요한 부품과 자재는 공개된 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 우라늄은 세계 도처에 부존돼 있어 큰 부담 없이 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핵확산의 금지를 위한 국제적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가 핵폭탄 개발을 추진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오히려 핵개발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라마쉬 박사에 따르면 핵폭탄 하나를 만들기 위한 최소량의 플라토늄은 4㎏이다. 농축 우라늄 핵폭탄의 최소량은 우라늄 11㎏이라고 했다.
라마쉬 박사는 (북한처럼)원자력 발전소가 없는 나라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연구로는, 천연우라늄을 그대로 연료로 쓸 수 있고, 흑연을 감속재, 가스를 냉각재로 쓸 수 있는 원자로라고 분석했다. 이런 원시적 원자로는 1942년에 原爆 제조의 선구자 페르미가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원자로와 같은 型이다.
이런 초기 형식의 원자로는 그 상세한 설계도가 이미 공개돼 있어 이를 모방하여 만들기는 간단한 일이다. 라마쉬 박사는 건설 기술자 1명, 전기기술자 1명, 기계 기술자 2명, 금속 기술자 1명, 核공학자 3명만 있으면 그 설계와 건설을 지휘·감독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건설 시작 후 4년 뒤에는 원자로가 가동될 것이고, 1년 뒤에는 그 핵연료 중에 작은 핵폭탄 하나를 만드는 데 충분할 정도의 플루토늄이 생성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라마쉬 박사의 이 보고서를 베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비슷한 연구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 원자력 연구소가 자체 기술로 완성한 다목적 연구로(K-MRR‥Korea Multi-Purpose Research Reactor)의 사업단장인 金東勳 박사는 1990년 기자에게, "북한의 연구로는 지독하게 간단하다. 그런 것을 짓고 싶었으면 벌써 전에 만들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 K-MRR에 비교하면 공학적으로 형편없는 저수준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硏究爐(연구로)가 고도의 기술로 만들었지만 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데 대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북한 것은 플루토늄 생산에는 적합하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라마쉬 박사는 개발 도상국의 재처리 능력에 대해서도 검토 보고서를 냈다. 그 결론도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의 경우와 같았다. 개발 도상국들이 이미 공개된 문헌과 공개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부품으로 어렵지 않게 재처리 공장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폭용 플루토늄을 재처리 방법으로 뽑아내려면 연구용 원자로에서 1년쯤 태운 연료를 꺼내 재처리 공장에 걸어야 한다.
2만5000㎾짜리 연구로의 천연 우라늄 연료는 약 60t이고, 여기에서 생성되는 플루토늄이 9㎏이다.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후핵연료는 물 속에서 129일간 저장하여 방사능을 감소시킨다.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경우 120일이 지나면 방사능은 t당 5만5000 큐리 정도이다. 이것은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방사능 1t당 200만∼300만 큐리의 50분의1 쯤이다.
재처리의 가장 큰 기술적 문제는 방사능이 강한 사용후핵연료를 차폐시설 속에 집어 넣어놓고 원격 조종으로 운반, 해체, 절단, 분석, 용해, 분리시키는 일이다. 여기에 필요한 방사능 차폐 시설과 원격 조종장치의 제작 및 설치와 운영이 재처리 과정의 핵심적 사항이다. 핵무기용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재처리 시험시설은, 상업용 原電 재처리 시설보다 훨씬 약한 방사능을 취급하므로 제작이나 운전면에서 훨씬 쉽다는 얘기이다.
플루토늄 재처리 공장 설계도 공개된 것이 많다. 라마쉬 박사에 따르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반웰의 재처리 공장 설계도는 도서관에서 구할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마쉬 박사는 재처리 시설을 설계, 건설, 감리 하는 데는 고급인력도 필요 없고 다음과 같은 7명의 엔지니어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化工 기술자 2명과 건축 기술자, 전기 기술자, 기계 기술자, 금속 기술자, 핵공학 기술자 1명씩. 그는 작은 플루토늄 추출용 재처리 시설을 미국에서 만든다면 2500만 달러쯤 들 것이라고 계산했다.


미국, 核개발 저지 결심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들은 核彈(핵탄) 제조에 쓰일 기술과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에 뻗어 있는 정보망을 동원하여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가 '항공공업계획'이란 위장명칭하에서 地對地 미사일 개발에 착수한 사실과 함께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캐나다와의 수상한 거래를 주시하게 되었다.
1974년10월28일, 駐韓미국대사관은 국무부로 보낸 電文에서 '대사관은 현재 한국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분석중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地對地(지대지) 미사일 개발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측은 한국이 개발에 착수한 地對地 미사일이 核彈 운반용이라고 판단했다는 이야기이다.
1975년2월4일 美 국무부는 백악관의 대통령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우그로프트 중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단정한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미사일뿐 아니라 핵무기의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는 한반도 정세에 대단히 심각한 전략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그해 3월4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서울, 오타와, 파리, 도쿄, 빈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긴급발송한 電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의 정보기관들은 한국이 향후 10년안에 제한된 범위의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한국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직접 관련되는 이 지역의 가장 큰 불안정 요인이 될 것이다. 이는 분쟁이 생길 경우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지원토록 만들 것이다. 韓美동맹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개발계획은 미국의 對韓 안보공약에 대해서 한국측의 신뢰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朴 대통령은 對美군사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우리의 근본적 목표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그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거나, 핵무기 또는 그 운반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多者間(다자간) 협력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최근 프랑스에 대해 한국에 재처리 시설을 제공할 것인가의 여부를 묻고 있는 상태이다. 가까운 시일내에 한국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정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1975년3월4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은 망해가는 월남 대책에 바쁜 가운데서도 서울, 캐나다, 프랑스, 일본, 오스트리아 주재 미국 대사 앞으로 電文을 보내 한국 정부의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지시한다. 이 훈령은 구체적으로 이런 정책들을 제시했다.
〈1. 미국은 핵기술 공급 국가들과의 共助(공조) 속에서, 한국이 민감한 기술과 장비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국에 대한 원자로 판매에서 완전한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물론, 한국이 자체 핵무기 개발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민감한 기술과 장비들의 판매를 제한한다. 현재 마련된 법령들 외에도, 향후 무기로 轉用(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물질들의 이전을 금지하는 방안을 연구중이다. 우리는 한국이 캔두(CANDU)형 원자로를 획득하는 것이 재처리 기술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2. 한국으로 하여금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토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캐나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은 우리의 이런 초기 요구들에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캐나다 정부와의 협력 아래 추가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3. 한국의 핵시설에 대한 우리의 첩보 및 감시능력을 높이고, 관련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적 상태에 대한 정보를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核에너지 관련 기관들에 대한 정기적 방문조사를 더 자주 할 계획이며 훈련된 기술자들로 하여금 사찰회수를 늘리도록 할 생각이다.〉
駐韓(주한) 美대사관도 1975년 3월12일 국무부에 보내는 다음의 電文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며, 한국의 지도자들도 핵무기 개발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0년이 훨씬 안 될 것으로 판단하며, 설령 10년 가까이 걸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판단에 기초하여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확보한 여러 정보들에 따르면, 한국의 지도부는 핵무기 개발에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으며 1980년대 초에 그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저돌적 추진력과 그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높은 기술 수준, 그리고 외국의 전문人力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상부로부터의 강한 독려 등을 감안할 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제3국으로부터 핵무기 관련 장비와 기술을 도입할 한국의 구매력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핵무기 개발에 따른 정치적 경제적 비용 문제가 한국의 움직임을 저지할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한국이 제3국으로부터 (관련 물질과 기계) 구입을 선택할 경우, 한국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국과 접촉할 때 하나하나의 구체적 행동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본다. 이 분야에 관한 한 한국은 아주 위험한 목적을 가진, 끈질기고 거친 고객이다. 한국은 최근 NPT의 비준 문제를 놓고 대단히 신속하게 움직였으며 캐나다와 프랑스와의 안전규칙 수용에 대해서도 아주 신속한 태도를 취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들에게 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려 한다는 조짐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은 필요하다면 이중적 자세도 不辭(불사)하려는 듯하다. 이 계획의 중요성, 그들의 거친 추진력, 우리의 깊은 우려를 감안할 때, 우리가 조기에 확고하게 행동하는 것만이 최상의 성공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原電 건설 어려워질 것"


朴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 용의가 있음을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밝힌 직후 작성된 美 국무부의 정책 건의서도 수년 전 공개되었다. 이 문서에는 한국의 핵개발 의지에 대한 美 정부의 불안감과 대책이 들어 있다. 이 문서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는 물론 프랑스(재처리 시설 도입 대상국)와 캐나다(NRX연구로 도입관련)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1975년 7월2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대통령 안보보좌관에게 보내는 로버트 잉거솔 국무장관 代行의 정책 건의서 요지.

〈배경: 한국 정부는 핵무기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하기 위해 소규모 실험용 재처리 시설을 프랑스로부터 도입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중간 삭제됨). 한국의 핵무기 획득은 극도로 위험하며 미국의 주요한 이해관계에 대해 직접적 타격을 줄 것이다. 만약 한국이 플루토늄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거나 아니면 조만간 갖게 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이같은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재처리 시설 및 플루토늄을 보유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앞으로 상당 기간 한국은 원자력 발전 분야에서 재처리 작업이 필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이 미국 및 캐나다 등과 협상중인 원자로들이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두 번째 원자로인 고리2호기를 도입하기 위해 미국 수출입은행에 1억3200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고, 추가적으로 1억1700만 달러의 신용을 요구했다. 우리는 이 차관들과 미국의 원자로 수출이 한국 경제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우리의 비확산 정책 목표(필자 注-한국의 핵무기 개발 저지)를 달성키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수출입은행의 케이시 총재는, 한국내 사용후 핵연료의 문제에 우리가 만족하고 있다고 통보할 때까지 이 차관에 대한 청문회를 연기하기로 의회와 합의했다. 우리가 의회에, 한국이 재처리 시설 계획을 포기했다고 확인해주지 않는 한 이 차관을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캐나다와 프랑스의 태도: 지난 3월의 정책 지침에 따라 우리는 캐나다 정부와 접촉했다. 캐나다는 향후 한국에 대한 원자력 지원 문제에서 우리와 긴밀히 협의키로 했다. 우리는 또 최근 런던에서 열린 (핵관련 기술 및 장비) 공급자 회의에 앞서 프랑스와 접촉했다. 우리는 프랑스측에,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알려주었다.
프랑스는 우리의 관심에 이해를 표시했고, 재처리 시설 판매는 큰 상업적 이해가 걸린 것은 아니며, 만약 프랑스 회사가 계약 종결에 따른 비용을 보상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계약 포기 요구에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한국에 대한 접근: 우리는 현재 진행중인 한국측 원자력 분야 인사들과의 협의에서 미국이 제공한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거부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확인을 다시 요청했으며, 그들의 확인을 들은 후에라야 고리 1호 원자로에 대한 美 핵통제위원회의 수출허가를 요청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우리의 우려에 대해 아주 유연하게 반응해 왔다. (일부 삭제) 우리는 따라서 한국이 자체적인 재처리 시설 확보 계획을 포기할 가능성이 꽤 있다고 믿는다. 한국은 지역적인 재처리 시설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재처리 시설은 한국의 바깥에 위치할 것이며, 그들의 향후 재처리 수요를 경제적이면서도 안전하게 충족시킬 것이다.
향후 행동 지침: 1. 우리는 한국의 자체적 재처리 시설 확보계획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밝히고, 이같은 상황은 고리 2호기 原電 도입에 필요한 차관 제공 등 미국의 원자력 기술 지원을 매우 어렵게 할 것이며, 2. 한국 측에 현재 계획중인 실험용 재처리 시설 계획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3. 동북아를 대상으로 한 다자적-지역 차원의 재처리 시설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는 방침을 취한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취할 외교적 수단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일 필요는 없으며 또 多者的 재처리 시설은 한국 바깥에만 위치하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禪문답 같았던 朴·슐레진저 회담


위의 문서는 미국이 국가적인 의지를 실어 한국에 대해서 핵포기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우선 고리 2호 원자로 건설계획과 관련하여 한국측이 신청한 약 2억5,000만 달러의 미국 차관 및 신용대출을 약점으로 잡아 묶어 두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이와 함께 프랑스와 캐나다에 압력을 넣어 핵무기 개발에 이용될 것이 뻔한 再처리 시설과 연구용 원자로 판매를 중지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미국측은 또 韓美 원자로 협정에 의거하여, 한국에서 미국 회사가 지은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後핵연료를 再처리할 경우의 모든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런 법적 권한에 대해서 한국측의 확인을 받고 나서야 당시 건설 중이던 고리 원자력 1호기에 대한 미국측의 사용승인이 떨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미국은 2중, 3중으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朴 대통령에게 직접 압력을 넣으면 오기가 센 대통령의 반발을 부를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래로부터 계통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원자력 기술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과기처 장관·외무 장관을 만나고, 金正濂 실장에게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청와대의 관례에 따라 스나이더 대사를 주로 상대한 사람은 金正濂 실장이었다. 金 실장은 정기적으로 스나이더 대사의 관저에 가서 점심을 들면서 韓美 간의 공통 관심사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다.
스나이더 대사는 核개발 포기를 위한 설득의 창구로 金正濂 실장을 활용했다. 金 실장은 “스나이더 대사로부터 핵폭탄이란 말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다만 프랑스로부터 사용後핵연료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는 것을 취소해 달라는 요구만 했다고 한다. 再처리 시설이 없으면 아무리 원자력 발전소가 많아도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없다. 그래서 스나이더 대사는 ‘핵개발’이란 직설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再처리 시설 포기만 요구했던 것이다.
스나이더 대사의 핵개발 포기 설득 작전을 지원하러 나선 것은 포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1975년 8월26일, 27일 양일간 서울에서 열린 韓美 연례 안보협의회에 참석했다. 美 국방장관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1971년 이후 처음이었다. 슐레진저 장관은 8월27일 徐鐘喆(서종철) 국방장관과 함께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언급을 했다.
“駐韓미군의 地上軍이 막강하므로 핵무기를 쓸 기회가 없겠지만 핵무기를 최후 수단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朴 대통령이 걱정하는 미국의 핵우산이 건재함을 밝히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언명이었다.
8월2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42분까지 거의 네 시간 동안 슐레진저 장관은 청와대에서 朴 대통령을 만났다. 朴 대통령은 처음 한 시간 20분 동안은 소접견실에서 슐레진저 장관, 스나이더 대사, 브라운 美 합참의장, 스틸웰 駐韓 유엔군사령관, 위컴 군사보좌관, 徐鐘喆 국방부 장관, 盧載鉉(노재현) 합참의장, 金正濂 비서실장, 崔侊洙(최광수) 의전수석과 환담했다. 이들은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직후 슐레진저 장관과 스나이더 대사는 朴 대통령과 40분간 만나 심각한 이야기를 나눴다.
슐레진저는 朴 대통령과 일종의 禪(선)문답을 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비밀 핵개발 계획을 인정하지 않았고, 슐레진저는 한국의 핵개발 계획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슐레진저는 그러나 “朴 대통령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듯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슐레진저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한 것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 韓美관계가 와해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
이해 가을과 겨울에 걸쳐서 워싱턴에서는 필립 하비브 東아시아·태평양 담당 국무차관보가 咸秉春(함병춘) 駐美 한국대사를 통해서 압력을 넣었다. 하비브는 스나이더의 전임 한국대사였다. 하비브는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취소해 줄 것을 요구했다. 咸 대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은 ‘국가적 신의에 관한 문제’라면서 미국측의 요구를 거절했다.


全方位 압박


다음은 1975년 10월3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駐韓 미국대사관의 電文.
〈한국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실험용 再처리 시설의 구입을 취소하라는 우리의 요구를 두 번째로 거절했고, 현재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곤경에 처해 있다. 한국의 이 같은 거절은 朴 대통령의 주관下에서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로 하여금 계약이 최종적으로 체결되기 전에 판매 계획을 중단토록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1) 더 이상 추가적인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부로 하여금 원자력(原電 등) 분야에서 미국의 지원 없이는 일 추진이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방안.
(2) 재처리 시설의 판매 문제는 묵인하고, 국제적 사찰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쌍무적 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한국의 방안을 허용하는 방안.
(3) 再처리 시설 구입 계약의 일시 중단이라는 중재안을 가지고 다시 한번 朴 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
(4) 非타협적 태도로 계속 朴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방안.

(1)案과 (2)案의 경우, 계산된 부담을 감수하면서 상황을 방치하면, 그 결과 미국에서는 한국에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美 의회는 군사원조의 삭감은 물론 고리 2호기 건설을 위한 차관도 부결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압력을 받게 되면 한국은 결국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런 여론에 시달릴 것이며, 그것은 한국에서 우리의 이해관계에 적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再처리 시설 확보가 기정사실화됨으로써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워질 것이다.
(2)案은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용도 변경을 막기 위해 査察을 굳혀 나가는 방안이다. 그러나 (2)案의 약점은 한국이 NPT 또는 IAEA의 사찰이나 제3국의 사찰을 거부하려 들 경우 확실한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韓美 양국 사이에 심리적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장차 이곳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3)案과 (4)案, 즉 朴 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만이 성공의 전망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카드가 있으며, 朴 대통령도 결국은 현실주의자다. 따라서 우선은 朴 대통령을 접촉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 문제는 그에게 도전장을 던질 것이냐, 아니면 중재안을 갖고 그를 만날 것이냐이다.〉
고리 2호기 차관 중단, 군사원조 지원 중단 등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던 한국 정부는 1975년 12월부터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소개되는 駐韓 미국 대사관의 電文들은 한국 정부가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관련 협력을 받는다는 代價를 선택, 미국의 요구에 응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1975년 12월10일, 국무부로 보내는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의 電文.
〈워싱턴에 있는 咸秉春 駐韓 한국대사를 가급적 빨리 우리측의 고위급 인사가 만나 우리의 관심 사항을 전달해 주기 바란다. 그 만남의 내용이 朴 대통령에게 충분히 전달된 후 나는 다음 주에 朴 대통령을 만날 것이다. 나는 金鍾泌 국무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만약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강행할 경우 韓美 관계에 미칠 엄청난 악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따라서 咸 대사와의 면담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단지 원자력 분야에서의 협력만이 아니라, 美 의회의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에 대해서도 부정적 행동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방향과 목표도 함께 제시함으로써 韓美 양국의 관계를 유지, 강화시키기 위해 협력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같은 날,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미국대사의 또 하나의 電文.
〈12월 10일 南悳祐 부총리는, 12월 9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총리 주재의 고위 대책회의가 있었으나, 자신은 국회 출석 관계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제안에 대한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한국이 우리의 요청을 거부할 경우 초래될 부정적 영향들에 대해 언급했고, 그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총리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金鍾泌씨는 최근 “朴 대통령은 이때 핵개발을 강행하면 韓美관계가 결딴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핵무기를 당장 만들지 않되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연구, 비축해두는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1975년 12월16일,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미국대사관의 電文.
〈국무총리의 지시로 과기처 장관 대신 과기처 차관 등이 스나이더 대사를 면담했다. 이들은 만약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할 경우 미국이 원자력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협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는가를 문의했다. 그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생략)
스나이더 대사가 “한국의 이런 질문에 대한 미국의 구체적 답변이 있을 때까지 한국은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문제에 대해 결정을 미룰 것이냐”고 묻자, 과기처 차관은 “한국은 공식적으로 再처리 시설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과기처 차관은, 미국의 기술적 지원이 아주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기술적 지원을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가 앞으로는 그 기술 제공자를 多元化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원 내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좀더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 나는 金正濂 대통령 비서실장을 접촉했는데, 현안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은 우리 측 답변이 도착할 때까지 연기되리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접촉한 사람들의 보고를 받았다며 朴 대통령도 이 사안의 정치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답변이 도착하면 朴 대통령의 주관下에 문제를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내가 朴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것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책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의 빛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나는 물론 이 문제를 놓고 金東祚 외무 장관과도 접촉해 왔다. 그는 이 문제의 정치적 중요성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계획이 취소되는 쪽으로 大勢가 굳혀짐에 따라 駐韓 미국대사관은 비교적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포기는 했지만...

1976년 1월 한국 정부는, 프랑스의 SGN와 맺었던 재처리 시험 공장 건설계약의 파기를 프랑스 정부에 요청하였다. 프랑스 정부도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한 잡지는 "한국이 핵기술 도입선을 다변화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미국의 私有地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한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캐나다 정부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중수로 1기와 함께 한국에 끼워 팔기로 돼 있었던 NRX연구로 판매 협상을 중단하였다. 캐나다의 중수로를 사줌으로써 플루토늄 生成用 연구로 등 여러 가지 민감 기술을 얻으려던 한국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월성에는 캐나다製 중수로 두 基를 지을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계속된 압력으로 1호기 도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7년 11월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벨기에 BN사와 추진하던, 플루토늄을 재사용한 제2핵연료 가공 사업도 취소되었다. 핵폭탄 개발에 필수적인 연구로, 재처리 사업이 문서 작업 단계에서 움도 터보지 못한 채 죽어 버린 것이었다.
1976년 1월5일, 국무부로 보낸 駐韓 미국대사의 電文.
<요지: 한국의 프랑스 再처리 시설 도입을 취소시킴으로써 核확산을 막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목표는 朴 대통령과의 정면 대립을 불사하거나 또는 그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달성될 수 있다. (중간 부분이 대거 삭제됨) 따라서 나는 본부의 훈령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
(A) 미국 정부는 한국이 프랑스와 맺은 계약에서 再처리 시설 도입을 再검토키로 한 결정을 높이 평가하며 환영한다.
(B) 우리는 한국이 미국의 깊은 우려감을 인식하고, 이 문제가 향후 韓美관계 전반에 갖고 있는 중대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한다.
(C) 미국의 희망은 바로 이 시점에서 再처리 시설 계약의 완전한 취소이다.
(D) 이 계약이 완전히 취소되지 않을 경우 美 의회와 미국인들의 의혹은 더욱 더 증폭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고리 2호기의 차관 문제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E)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우리의 합의 도출 능력을 신뢰한다면 미국은 상호 협력의 범위에 대해 조속히 합의한다는 목표 아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킬 태세가 되어 있다.
(F) 따라서 우리는 한국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韓美 양국의 상호협력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미국의 대표단을 파견할 태세가 되어 있다. 또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한국·프랑스·캐나다 사이의 협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인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이란 책에서 “이 에피소드는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남한 정부가 아무리 완강한 의지력으로 추진하는 일이라도 능히 저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사태가 일단락된 후 스나이더 대사는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에게 보낸 電文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여 독자적인 생존을 추구하고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朴 대통령의 열망과 의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朴 대통령이 이런 모험을 하게 된 데는 미국 측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1975년 6월 미국 정부에 대해서 韓美관계를 전면적으로 再검토하여 새로운 관계 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는 12 페이지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미국의 불확실한 태도 때문에 朴 대통령은 언젠가 닥쳐올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서 남한內에서 반대자 탄압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었다.
柳炳賢 당시 합참본부장은 “朴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깔끔하게 했다. 관련 서류나 시설을 숨겨놓고 비밀개발을 계속하라는 식의 지저분한 지시가 아닌 깨끗한 단념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그 뒤 朴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의 기술 사이클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핵무기 개발에도 쓰일 수 있는 관련기술을 개발하고 미사일 발사에도 성공하지만, 핵폭탄을 직접 제조한다든지 플루토늄을 밀수입하는 식의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 미국측도 플루토늄 再처리 시설이 없다면 핵무기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핵개발 문제는 이로써 종결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2. 원자력 大國의 길


NRX연구로 도입 좌절


미국 버클리 대학의 피터 헤이즈는 '한국에서의 미국 核 딜레머'라는 논문에서 朴 대통령이 1971년에 병기 개발 위원회를 조직,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1∼72년에 있었던 주한 미군 7사단의 철수에 자극 받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정부는 장비 현대화 5개년 계획(1971∼75년)을 위한 無償(무상) 원조액을 한국의 人權상황에 연계시켜 삭감하기 시작, 당초 약속한 액수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다.
1988년에 미국 콜럼비아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핵 폭탄 없이'(Without the Bomb)란 책에서 영국 전략문제 연구소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저자 미첼 라이스는 한국 핵개발의 경과를 한 章으로 다루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의 재처리 시설 도입에 대해 압력을 넣은 상황을 이렇게 썼다.
<한국은 1975년 4월에 핵확산 금지 조약을 비준했다. 이것은 美 국무성과 의회의 압력이 있은 뒤였다. 美 의회는 수출입 은행에 대해 고리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 지원을 보류하도록 결의했던 것이다. 1975년 가을에 프랑스는 한국측에 재처리 시설의 機材를 20년 동안 복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이자고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제 원자력 기구, 한국, 프랑스 3자간의 안전조치(원자력 시설에 대한 사찰의 규정)협정도 맺어졌다.
1975년 말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원자력 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을 중단할 것이며 캐나다도 중수로 판매를 유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 대통령은 한국이 核개발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미군과 핵무기를 남한에 붙들어 두려고 했던 것 같고 그런 작전은 성공한 것 같다.>


朴 대통령의 우회전략


朱載陽 원자력 연구소 부소장 밑에서 재처리 사업 담당 실무 책임자였던 金哲 공정개발 실장(아주대학 교수 역임)은 프랑스와의 계약을 파기할 당시 SGN사와 개념 설계를 끝낸 상태였고 기본 및 상세 설계의 용역 계약을 완성한 직후였다고 회고했다. 1990년에 기자는 모 연구기관에 보관돼 있는 SGN사의 개념 설계서를 볼 수 있었다. 1974년 10월1일에 작성된 개념 설계서는 두 권의 큰 책으로 돼 있었다. 재처리 공장의 규모는 1년에 200일간 가동하는 것으로 잡고 하루 처리량을 사용후핵연료 20㎏(우라늄 기준)으로 했다.
1년에 우라늄 4t을 재처리한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추출되는 핵분열성 플루토늄 239는 약 20㎏으로서 나가사키 투하 원폭(20kt짜리: TNT 2만t의 폭발력과 같음) 두 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었다. 이 제조 시설은 시험 공장 개념으로서 캐나다에서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던 NRX연구로와 경수로 및 중수로의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가동 목표일은 건설 확정일로부터 5년 뒤로 잡았으며 건설 설비는 약 3900만 달러였다. 이 시설은 그 중요성에 비해서 건물 자체는 소규모였다. 길이 54m, 너비 46m, 높이 27.5m, 하루에 소요되는 냉각수는 80㎥, 食水는 50㎥, 증류수는 20㎥으로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이 공장 운영에는 15명의 책임자급 엔지니어, 165명의 기술자, 74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었고 6∼12개월의 훈련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개념 설계에는 '핵분열성 물질의 회수'(Fissile Material Recovery)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이것이 핵무기 제조용임을 분명히 했다.
1976년에 미국의 압력으로 플루토늄 관련 사업은 포기된 듯하였으나 朴 대통령은 재처리를 맡고 있던 원자력 연구소의 특수 사업 담당 부서를 大德 공학 센터로 분리시킨 뒤 1976년 12월1일에는 그 자신이 설립자가 되어 한국 핵연료 개발 공단을 발족시켰다. 핵연료 개발 공단은 포기한 재처리 사업을 우라늄의 정련·변환 시설, 조사후(照射後)시험 시설, 방사성 폐기물처리 시설 도입 사업으로 대체하여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화학 처리代替사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재처리代替사업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인데 재처리 때문에 워낙 미국인들로부터 시달려 화학처리란 말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그 뒤 우리나라의 원자력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재처리란 말은 禁忌語(금기어)가 돼 버렸다.
金哲 교수는 화학 처리 대체 사업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재처리 기술을 우회적으로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재처리와 연관된 여러 가지 기술을 따로 따로 배워 놓았다가 나중에 하나로 통합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체 사업은 照射後(조사후) 시험시설이었어요.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연소 상태나 變形(변형) 상황 및 방사성 물질 조성비 등을 검사하는 것을 照射後(조사후) 시험이라고 합니다. 이 일을 하자면 사용후핵연료를 水槽(수조)와 방사능 차폐 시설 안에 두고 바깥에서 원격 조정 장치로 해체, 절단, 측정하고 용해, 분리시켜야 합니다. 이런 과정은 재처리 과정의 핵심 부분과 같은 성격으로서 재처리 기술의 일부를 익히는 일인 것입니다. 재처리를 하면 강한 방사능을 가진 폐기물질이 생깁니다. 대체 사업에는 방사능 폐기물 처리 기술과 시설도 도입하게 돼 있었습니다."
金哲 교수는 "대체 사업시설 도입은 재처리 사업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프랑스 정부 차관 2000만 달러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업을 '佛차관 사업'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했다. 시설 및 기술 도입선은 프랑스의 SGN社 그대로였다. 관련 기자재는 金哲 실장이 프랑스에 가서 구매했다. 핫셀(Hotcell: 방사능 차폐시설), 글로브 박스(Glove Box) 등 照射後시험시설과 방사능 폐기물 처리시설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核工團은 또 20여 명의 우수 인력들을 핵 재처리 시설이 있는 유럽 여러 원자력 연구소로 보내 재처리 관련 기술을 연수해 오도록 했다. 출발시킬 때는 "재처리 기술 관련 정보나 자료를 많이 얻어 오고 가능한 한 재처리 관련 연구를 하도록 해 보라"고 지시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던 金康鎭(고려대 화학과 교수) 박사의 경우 벨기에의 BN연구소에서 다른 두 연구원과 플루토늄 定量 분석법을 1년간 연구하였다. 이런 정량 분석법은 재처리 과정을 추적, 감시하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金 교수에 따르면 BN사는 재처리 시설 등 민감 기술분야에 대해서는 한국 연구원들을 접근시켜 주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그레노블 원자력 연구소에서는 박현수(원자력 연구소 사용 후 핵연료 관리부장 역임), 박헌휘 연구원(원자력 연구소 방사성 폐기물 관리부장 역임)이 연수를 했다. 이 두 사람은 재처리 관련 부문의 국내 권위자가 되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수시로 과학관 로버트 스텔러씨를 핵공단으로 보내 연구상황을 점검하곤 했다.
그는 미국 국기를 단 승용차를 타고 나타나 핵공단의 시험실과 사무실을 샅샅이 조사했다는 것이다. 일반 사무실까지 열어 보라고 하여, 한국 연구원들의 감정을 건드리기도 했다. 스텔러씨 등 주한 미국 대사관의 歷代 과학관들은 모두 핵기술에 관한 교육을 받고 부임, 장기 근무하면서 한국의 핵연구 상황을 감시하는 役을 맡았다. 朴 대통령은 두번 핵공단을 방문했다고 한다. 유도탄 개발을 맡고 있던 국방과학연구소에 들르는 길에 핵공단을 찾았는데 이때 朴 대통령의 주된 관심은 국방과학연구소에 쏠려 있었다고 한다.


미국, 核公團 수시로 감시


핵공단은 화학처리 代替사업 이외에 핵연료 成型가공시험 시설 도입을 프랑스의 CERCA社로부터 추진, 성공하였다. 外資 280만 달러, 內資 9억 원으로 핵연료 가공 기기를 구매하고 1200 평의 시험시설을 이용하여 중수로 핵연료의 제조기술 개발을 시작, 1980년대에 성공하게 된다. 정부 일각에서는 한때 파키스탄 방식으로 핵개발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핵 재처리사업이 벽에 부딪치자 유도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는데 미국의 감시를 피해 제3국으로부터 유도탄을 公海에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自力 개발에 고심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방식의 핵무기 제조는 주로 지하 공작과 산업 스파이식 접근법이었다.
압둘 칸이라는 파키스탄 기술자는 네델란드의 우라늄 농축 회사 와렌코社에 遠心분리 기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의 기술 상담역이 된 것을 기회로 삼아 와렌코로부터 농축기술의 핵심인 遠心(원심)분리법에 대한 극비자료를 수집, 1975년 말에 파키스탄으로 달아났다. 파키스탄은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자체적인 농축공장 건설에 나서서 스위스 등지에서 부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핵개발에 필요한 기자재가 '트리거 리스트'란 이름의 국제 금수 품목에 들어 있긴 했지만 파키스탄 정부는 유령 회사들을 통해서 이것들을 사 모았다. 1980년대 초에 파키스탄 정부가 카후타에 세운 농축공장에서 순도높은 우라늄을 생산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1987년 2월 칸 박사는 인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이 원자 폭탄을 이미 만들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그 발언을 부인하였다.
당시 대덕의 국방 과학 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 연구 책임자로 일한 이는 서울공대 원자력과 교수 출신인 李모 박사였다. 그는 미국의 알곤 연구소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연구부장 직책을 맡았던 그는 핵폭탄의 부품 재료를 구하는 일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핵폭탄 뇌관용 HMX 폭약을 미국에서 수입하긴 했는데 미국측이 이를 그리셀린과 섞어 수출해 HMX를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朴 대통령의 집념을 등에 업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던 화학처리代替사업은 1978년에 朱載陽(주재양) 소장이 물러나고 1979년에 朴 대통령이 피살된 뒤 후견인을 잃었다. 1980년에 핵공단이 원자력 연구소에 통합돼 에너지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사업은 일단락 돼 버렸다.


레이건, 全斗煥에 핵개발 중단 부탁


全斗煥(전두환) 정권은 출범초기에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全 대통령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핵개발을 하지 않을 것과 통일교를 지원하지 말 것. 全 정권은, 핵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 이름에서까지 원자력이라는 말을 떼버렸다. 영문 약어 표기는 KAERI를 그대로 썼다. 여기서 A는 Atomic이 아니고 Advanced를 뜻했다. 1979년 당시 핵 공단의 핵심 연구원들을 보면, 물자관리 실장 金康鎭, 개발 제2 연구부장 金哲, 機電과장 南章洙(원자력연구소 정책부장 역임), 안전관리실장 魯聖基(원자력연구소 안전시험 해석부장 역임), 개발 1연구부장 朴元玖(인하대 교수 역임. 핵연료성형 가공담당), 품질관리 기술실장 徐庚壽(원자력연구소 핵연료 사업부장 역임), 물리 제2 연구실장 徐斗煥(원자력연구소 원자로 관리실장), 화학 3연구실장 李哲洙(고려대 화학과 교수 역임)씨 등등이었다.
1980년 12월19일 핵연료 개발 공단이 에너지 연구소에 통폐합되었을 때 人力은 266명, 그해 예산은 45억4800만 원이었다. 예산의 대부분은 시험시설 건설비였고 순수 연구비는 보잘것 없었다. 한편 인도 핵실험의 여파로 캐나다製 NRX연구로의 도입이 불가능하게 되자 원자력연구소는 1970년대 후반에 자체 개발 설계에 의한 연구로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이 사업의 책임자는 金東勳 박사였다.
金 박사팀은 4만㎾짜리 재료 시험로 설계에 착수, 5년 만인 1979년에 상세 설계까지 끝냈다. 연구로의 이름은 TFTF(Thermal Flux Testing Facility)였다. 제작에 옮기려면 중요 부품 및 기재는 외국에서 조달해야 하고 重水 등 몇 가지 품목은 국제 원자력기구가 정한 규제품목에 걸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국 정부는 이때도 한국이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를 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신경을 곤두세우더니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이 사업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1982년에 에너지 연구소와 韓電은 사용후핵연료 관리의 문제점을 보고서로 만들어 韓美 원자력공동 상설 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측은 재처리 시설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요지는 이러하였다.
<서기 2020년에 가면 한국의 原電은 25기(시설 용량 6천만㎾)로서 더 이상 늘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라늄 原鑛 확보의 가능성을 분석해 볼 때 2000년대에 고속 증식로의 도입은 불가피하다. 고속증식로의 도입이 지연될 경우 우라늄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서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가 필요하다.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시설이 1990년대에 부족해 질 것이다. 1991년부터는 사용후핵연료가 한 해에 360t씩 생기며 1992년부터는 고리 1호기의 저장조가 한계에 달해 고리 2호기의 저장조로 옮겨 보관하면 1995년까지 임시 조치가 가능하다.
1992년부터 年처리능력 250t 규모의 재처리 시설을 가동시키고 이를 단계적으로 늘려 1995년에 500t, 2천년에 1000t 규모로 확장한다면 한국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이 공장을 미국측과 기술 제휴로 운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한국측은 2000년대에 가면 고속 증식로의 도입이 불가피하고 고속 증식로의 핵연료는 재처리 시설에서만 생산되므로 어차피 장기적으로는 재처리 시설을 갖출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서 중·단기 전략으로서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묘안을 찾고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측은 '非分離 처리'(Coprocessing)라는 아이디어를 미국측에 던졌다.
비분리 처리란 아이디어는 1977∼80년까지 한시적으로 가동했던 국제 核週期(핵주기) 평가위원회(INFCE)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재처리, 농축 등 민감 기술의 도입에 핵보유국이 심한 제동을 거는 데 개발도상국들이 반발하자 정치성을 배제한 과학 기술자 중심의 국제회의체를 만들어 代案(대안)을 연구하도록 했던 것이다.
비분리 처리는 경수로의 사용후핵연료에 함유돼 있는 플루토늄을 분리하지 않고 중수로의 핵연료로 재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경수로에 들어가는 핵연료에는 우라늄 235가3.3%이다. 이것이 타고 나오면 우라늄 235는 0.9%로 줄어들고 플루토늄이 0.6% 생긴다. 미국이 이 플루토늄의 분리에 의한 핵무기 개발을 자꾸 의심하니 아예 결백증명으로서 이 플루토늄을 분리하지 않는 상태에서 처리하여 우라늄 235농도를 0.7%로 줄이면 중수로 연료로 재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는 경수로와 중수로가 공존하고 있고 이런 비분리 처리를 하면 경수로 4기의 사용후핵연료에서 중수로 1기의 핵연료를 만들어 낼 수 있으므로 중수로 연료는 따로 사올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해결된다는 얘기였다.


미국, 한·캐나다 협력 방해


한국측은 핵공단 시절에 이미 이 아이디어를 개발, 미국의 바텔 연구소에 공동 개발을 제의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1982년에 다시 미국에 공동 연구를 제의한 것이었다. 미국이 신통치 않는 반응을 하고 있는 사이 韓電과 에너지 연구소는 캐나다의 원자력공사(AECL)와 협의하기 시작했다. 캐나다로서는 이 기술이 개발되면 캐나다의 중수로를 국제 판매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에너지 연구소 기술자들이 AECL 산하 연구소를 방문, 이 문제를 협의하는 단계에서 미국쪽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미국製 경수로에서 태운 사용후핵연료의 이동, 변형, 저장에 대해 사전 동의권을 갖고 있는 미국은 한국과 캐나다 정부 양쪽에 압력을 넣어 이 공동 연구 계획을 무산시켰다. 한국과 캐나다는 密會를 꾀하다가 질투심 많은 애인의 훼방을 만난 격이었다. 미국은 캐나다측에 한국이 非分離(비분리) 처리 연구를 통해서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얻으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한국의 원자력 기술자들은 미국측의 반대 이유는 멀쩡한 거짓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하에 있고 플루토늄 생산용 시험로도 없는데 완전한 재처리 기술도 아니고 비분리 처리 기술 도입까지 봉쇄하려는 것은 미국측이 캐나다측의 原電 판매 전략에 쐐기를 박고 한국에 대한 핵연료 공급 루트를 계속 틀어잡아 두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한국측은 그 뒤에도 6년간 이 비분리 처리 문제를 가지고 미국 국무성, 에너지성, 군축위원회 등을 끈질기게 설득해 왔다. 한국, 미국, 캐나다의 세 당사국이 공동 연구하되 그래도 관련 연구시설을 한국에 들여오는 것이 미덥지 못하다면 미국 연구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개발도상국에서 硏究爐(연구로) 설치는 연구 목적 이외에 핵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심을 사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1962년부터 가동한 250㎾급 미국제 트리가 마크(TRIGA MARK)2, 1972년부터 가동한 2000㎾급 트리가 마크 3호기를 갖고 있었다. 이 두 개는 출력이 너무 낮아 연구 수준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원자력연구소는 1970년대 초에 캐나다로부터 NRX연구로를 도입하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포기했었다. 70년대 후반에는 자체 설계를 꾀하다가 역시 미국의 압력을 받고 유보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이 계획은 다시 추진된다. 연구로 건설에는 많은 돈이 드는 대신에 뚜렷한 생산품이 없어 예산 관료들을 설득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월성 1호기(중수로)의 핵연료 국산화 계획을 추진하던 1982년 試製品(시제품)의 성능을 검사하기 위하여 캐나다까지 가져가 40만 달러의 시험료를 지불하면서 NRU 연구로에 집어넣어 갖가지 항목의 체크를 한 적이 있어 국산 연구로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연구소가 서울에서 대덕으로 옮기면 트리가 마크 연구로는 서울에 두고 가게 되어 연구로 없는 연구소가 될 판이었다.


국산 硏究爐 건설 급진전


원자력연구소는 과학기술처의 검토를 거쳐 1984년 4월의 제207차 원자력 위원회에 다목적 연구로 사업계획을 상정했으나 심의조차 받지 못하였다. 희미했던 이 연구로 사업은 1984년 9월경 급진전되었다. 경제기획원은 1983년에 에너지 연구소가 타당성 연구에서 제안했던 추진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사업예산을 확정하였으니 85년부터 사업에 착수하라고 과기처에 통보함으로써 급히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확정된 건설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위로부터의 결정에 의하여 추진되게 된 것은 정부 고위층이 그때 진행되고 있던 북한의 연구로 건설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적 의도로 밀어붙인 덕분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압력으로 취소되었던 1970년대 후반기 연구로 건설계획에 참여하였던 기술진은 에너지 연구소에 남아 있었다.
金東勳 박사가 실장으로 있던 원자로 계통 연구실의 연구원 20여명은 이 다목적 원자로의 모델을 캐나다의 메이플X 연구로로 정했다. 캐나다 원자력 공사는 NRX를 폐쇄하고 메이플X 라는 새 연구로를 설계하고 있었다. 1985년 1∼2월 에너지 연구소 설계팀은 캐나다 원자력공사 팀과 공동으로 K-MRR로 이름이 붙여진 연구로의 개념 설계를 했다. 설계를 한국측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이 연구로를 국산으로 부르는 것인데 부품은 캐나다 차관에 의해 주로 캐나다 원자력 공사로부터 수입하였다.
한국-캐나다에 의해 K-MRR건설 계획이 급진전되자 그 동안 두 번이나 연구로 건설 계획을 저지했던 미국 정부는 이번에는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기본 설계가 시작되는 1986년부터 매년 20명씩을 연구소에 파견하여 설계 내용을 검토해 주겠다는 제의였다.
한국측에서는 미국 정부의 이 제안이 K-MRR연구로 건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다는 의도로 파악했던 것 같다. 혹시 군사용 의도가 숨어있는지 아닌지를 설계 검토 단계에서 탐지하여 설계변경 요구를 하는 식으로 귀찮게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연구소에는 오해를 막기 위해 핵연료를 20% 농축 우라늄으로 못박아 놓고 있었다. 북한처럼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쓰면 군사용 플루토늄을 생성시킬 수 있지만 20% 농축 우라늄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K-MRR은 동위원소 생산, 原電건설에 쓰이는 각종재료의 성능시험, 핵연료의 건전성 확인 등등의 다목적 용도인 것이다. 이 K-MRR을 설계 건설 운영하는 과정에서 핵 폭탄 제조나 재처리에 원용될 수 있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비상시에 구조를 변경하면 플루토늄을 생성시킬 수도 있으나 이런 것까지 의심하고 막으려는 것은 "화약고에 불을 지를지 모르니 성냥을 긋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과기처의 한 간부는 말했다.


照射後 시험시설의 역할


한국측은 미국의 지원 제의에 대해서 설계가 완성된 후에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실제로는 1년에 4명 정도의 미국 기술자를 불러 검토를 시켰고 미국측도 이를 통해서 K-MRR의 성격을 파악한 것이다. 당초 500억 원 예산으로 출발하였던 K-MRR 건설사업은 700억 원으로 늘었다.
1989년 3월25일에 대덕 원자력 연구소 내에서 기공식이 있었다. 2만3000 평의 대지에 연건평 6322평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1995년에 3만kw짜리 연구로가 준공,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연구로 자체는 품에 안을 정도이지만 갖가지 부대시설이 붙어 원자로 건물은 높이가 33m, 건평은 1800평이다. 연구소는 이 원자로 건물에 덧붙여 기존 시설보다 확대된 照射材(조사재) 시험시설 (건평 1137평)을 지었다. 이 시설에 약 400억 원이 들어 K-MRR건설은 부대시설까지 합치면 약1200억 원 공사가 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1976년에 재처리공장 건설계획이 취소된 뒤 핵연료개발 공단이 대체 사업으로 추진한 것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照射後 시험시설이었다. 원자력연구소 안에 있는 이 시설이 제대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였다. 1990년에 기자가 만난 과기처의 한 간부는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이 시설이다"고 했다. 국제 원자력 기구의 사찰 팀은 세 달에 한 번씩 이 시험시설을 찾아와 조사를 벌이고, 주한 미국 대사관, 미국 에너지성, 미국의 군축위원회 사람들도 수시로 들린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微量(미량)이지만 플루토늄이 취급되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험실은 고리 1호기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를 갖고 와서 연소상태, 연료의 변형, 설계 성능과 실제 연소성 등을 검사하고 비교함으로써 원자로와 핵연료의 건강도를 진단하는 일을 하여 핵연료 병원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原電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가 바깥으로 반출되는 경우는 이 시험실이 유일하였다. 韓美 원자력 협정에 따르면 미국제 원자로에서 쓰인 핵연료나 미국이 공급한 핵연료의 事後처리는 반드시 미국정부의 허락을 받아 하도록 돼 있다. 고리 1호기의 사용후핵연료 중 극히 일부를 이 시험실로 가져오는 데는 한미간에 몇 년에 걸친 협의가 있어야 했다.
1985년 5월24일에 서명된 韓美 합의서에 따라 원자력 연구소는 고리 1호기의 사용후핵연료를 12개 다발까지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한 다발에는 길이 4m의 연료봉 179개가 들어 있다. 이 합의서는 한 다발 당 20개 이하의 연료봉만 꺼내 검사할 수 있고 검사시는 4m짜리를 15㎝이하로 잘라야 하며 이 15㎝짜리를 다시 3㎝씩 5개로 잘라 試料(시료)로 쓰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시료로 각종 시험과 검사를 한 뒤에는 파편 등을 다시 모아 중간 유출이 없었음을 입증해야 했다.
사용후핵연료 다발이 이 시험실에 들어오면 세 개의 水槽(수조)를 거치면서 水中 원격 조종 작업에 의해 해체, 절단된다. 작은 시료로 잘려진 것은 핫셀(Hotcell)이라고 불리는 여섯 개의 차폐시설 속을 거치면서 갖가지 검사를 받는다. 핫셀은 두께 85㎝의 방사선 차폐벽으로 격리돼 있다. 바깥에는 원격 조종용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 손을 써서 핫셀 안에 있는 기계 손을 움직여 작업을 한다. 기계손이 느끼는 중량감이 이 조종용 손을 타고 조작자도 그 무게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작동에 실수가 없도록 하고 있다. 이 핫셀은 재처리 공장에 있는 것과 비슷한 설계로 돼 있다. 이 照射後 시험시설은 200억 원짜리다. 프랑스 차관에 의하여 SGN사로부터 도입한 시설·기재가 90억 원어치고 나머지는 국내외에서 조달한 것이다. 고압수 제염(除染)장치 등 국내에서 설계, 제작한 것도 많다.
사용후핵연료 試料(시료)는 용매 추출 방식으로 처리하여 ppb((10억분의 1)정도의 極微量 플루토늄을 정략 분석하기도 한다. 액체 속에 용해된 이 플루토늄을 분리, 회수하지는 않으므로 군사용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시험용 사용후핵연료는 국제기구의 엄격한 감시하에서 시험시설 水槽 속에 저장된다. 이런 照射後시험시설의 건설 운용은 핵무기 제조 기술개발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지만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의 건설 운용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미국이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라크는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하면서 재처리 시설을 짜집기 식으로 만들려 했다. 그 주요 부품인 핫셀을 조사후시험시설용 핫셀로 代用하려고 이를 이탈리아의 SNIA사로부터 수입했었다. 1980년에 SNIA사 건물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탄 테러를 당했다.

원자로 설계기술 국산화

100만㎾짜리 원자력 발전소의 1년간 출력을 일순간으로 모아 폭발시키면 40개의 원자폭탄과 맞먹는 파괴력이 생긴다. 原電은 이런 원자폭탄의 폭발적 에너지를 장기간에 걸쳐 인간의 통제하에서 안전하게 빼 쓰도록 고안한 장치다. 즉 핵분열이 빨리 일어나면 原爆이 되고 서서히 일어나면 原電이 된다. 따라서 공학 기술상 상업용 원자로 설계가 原爆 설계보다 수십 배나 어렵다. 힘을 폭발시키는 것보다 그 힘을 제어하는 장치가 더 정교할 수밖에 없고 인간을 죽이는 기술보다는 인간을 이롭게 하는 기술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보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원자력 기술의 최고봉은 원자로 설계 기술이다.
설계된 원자로의 제작이나 그것을 담을 건물의 건설은 개발도상국에서도 할 수 있지만 원자로 설계를 할 수 있는 나라는 1990년 현재 미국, 소련, 영국, 캐나다, 프랑스, 서독, 일본뿐이었다. 영광 3, 4호기 건설이 미국의 CE(Combustion Engineering)사에 낙찰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CE가 원자로 설계의 主계약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원자로를 만든다는 것은 원자로를 설계한다는 의미다. 한국電力은 1990년에 발주된 울진 3호기의 원자로 설계자로 원자력 연구소를 선택하였다. 한국이 원자로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한국 정부는 영광 3, 4호기의 원자로 설계자로 CE社를 선택한 다음 원자로 설계(원자로 설계란 기술용어로는 핵증기 공급계통의 설계라고 불린다)에 원자력 연구소가 1 對 1의 관계로 공동 참여하도록 했었다. 공동 설계인 셈인데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CE가 책임을 졌다.
원자력 연구소의 전략은 공동 설계를 진행하면서 CE社로부터 극비자료와 기술을 이전받아 자체 설계기술을 확립하고 그 바탕에서 100만㎾짜리 한국형 표준 원자로(KSN1000)의 설계 개념을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울진 3호기 건설 때는 원자력 연구소가 93%의 원자로 설계 자립율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설계를 하고 그 제작을 한국중공업이 맡았다. 이 공동설계 작업의 실무 책임자는 원자력 연구소 발전로 계통 사업부장 金炳九 박사였다.
金 박사는 "이런 큰일은 과학기술자로서 평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다"고 말했다. 金 박사는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박사학위(기계공학 전공)을 받았다. 1972년부터 미국 우주항공국(NASA) 산하의 제트기관 연구소(Zet Propulsion Laboratories)에서 화성 탐색선 바이킹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金박사는 미국시민권까지 포기하고 1975년에 귀국, 원자력연구소에서 일해오고 있었다. 1990년에 필자가 만난 그는 197명의 연구원 人力을 지휘, CE와의 공동설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설계된 부분은 창원의 한국중공업으로 넘겨져 동시 제작되었다. 金박사는 1986년 12월에 92명의 기술전수팀을 조직 100여 명의 가족과 함께 CE 본사가 있는 미국의 코네티컷주로 보냈다. 그들은 작은 마을에 한국인 집단촌을 이루고 CE 기술진과 한 덩어리가 돼 공동설계 작업을 벌였다.
이 공동설계를 통해서 원자력 연구소는 4308점의 설계도면, 특허자료 등과 201개의 극비 전산프로그램을 입수할 수 있었다. 원자로의 가장 중요한 컴퓨터 코드는 핵연료와 原子爐心 계통에 관한 것이다. 원자력 연구소는 중수로 및 경수로 핵연료 설계·제작·사업을 통해서 또 영광 3, 4호기 원자로 공동 설계를 통해서 이 중요한 코드를 확보하였다. 한 원자력 공학 전문가는 "그런 코드는 핵폭탄의 설계 및 실험 제작에도 원용될 수 있다"고 했다.
국가간 협정으로서 韓美 원자력 협정처럼 主權을 무시한 불평등 협정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1974년 6월16일부터 발효된 이 협정은 미국이 한국에 수출한 원자로의 핵물질이 군사용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미국 정부기관이 한국을 미국 땅처럼 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관련 시설을 조사하고 핵 물질의 이동·변형을 감시할 수 있도록 보장한 장치다.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용 핵연료인 농축 우라늄의 對韓 수출 상한선을 '시설 총량 5000 메가와트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을 초과하지 않도록 한다'고 까지 정해 놓기도 했다(뒤에 개정됨). 원자력연구소가 큰 용량의 美製 컴퓨터를 도입하려고 해도 미국 정부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몇 년 전 연구소는 콘트롤 데이터社에서 만든 사이버 17-875 컴퓨터를 도입했는데 미국 국방성, 에너지성, 군축 위원회, 상무성의 허가를 다 받아야 했었다.
슈퍼 컴퓨터를 과학 기술원에서 수입하면 문제가 없지만 원자력 연구소에서 수입하려면 제동이 걸릴 것 같다고 한다. 가동중인 9基의 원자로와 건설중인 2基의 원자로 등 모두 11기의 원자로 가운데 8基는 미국 회사가 지었고 그중 6基는 웨스팅하우스가 主공급자였다. 웨스팅하우스는 한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를 지은 이래 우리 원자력 기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으나 한국의 자체 기술력이 성장함에 따라 기술 이전에 인색해 하는 등 견제가 심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1980대 들어 한국정부는 원자력 부문에서 미국과 웨스팅하우스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방향으로 일해 왔다. 미국의 정권 교체기인 1980년에 울진 1, 2호기 건설을 프랑스의 프라마톰에 맡긴 것이라든지 영광 3, 4호기의 主계약자 선정에 있어서도 기술이전을 더 많이 해주기로 한 後發업체 CE사를 선정, 웨스팅하우스를 제외시킨 것이 그런 움짐이의 대표적인 사례다.
원자력기술 自立이라고 하면 원자로 설계기술 확립, 핵연료 설계 및 제작기술, 농축·재처리 등 민감기술을 확보, 原鑛에서 방사능 폐기물 처리까지의 핵연료 공급주기의 완성, 운전기술 확립 등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원자력 발전소의 운전기술은 이미 확립되었고 핵연료 설계 및 제작기술의 국산화는 1990년 2월에 끝났으며 원자로 설계기술의 自立은 1990년대 중반에 이뤄졌다. 아직 전망이 서지 않는 것이 재처리 시설로 대표되는 핵연료週期기술의 완성이다. 재처리 문제야말로 한국원자력 기술自立의 마지막 관문인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 원자력 산업이 상당한 自立체제를 갖출 수 있었던 공의 큰 몫을 朴正基 전 한국전력사장과 韓弼淳 전 원자력연구소소장에게 돌리는 이들이 많다. 돈줄을 쥔 朴사장과 두뇌 집단을 가진 韓소장이 원자력 自立이라는 목표에 의기투합했었다는 것이다. 핵연료 국산화나 영광 3, 4호기 공동 설계 같은 일은 사용주인 韓電의 자립의지와 원자력연구소의 기술력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사가 되었던 것이다.

핵연료기술 전수작전

韓 전 소장은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공군사관학교 물리학과 주임교수로 있다가 1970년에 국방과학연구소로 옮겼다. 제3사업단장으로 일하다가 1982년에 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소장 84년부터는 연구소 소장직을 맡았다. 그는 공군대령 출신답게 원자력을 전략적 차원에서 다루려 하였다. "에너지 自立은 自主국가·自主경제·自主국방의 원동력이다"고 주장한 그는 "석유 파동이 5년 내에 닥치기 전에 원자력 기술자립을 이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韓 소장 취임 이후 에너지 연구소란 이름을 버리고 다시 원자력연구소란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국제 원자력 시장이 원자로나 핵연료 공급자가 큰소리치는, 파는 자의 시장(Seller's market)이었다. 1977년에 카터 대통령이 재처리·농축 등 민감한 원자력 기술의 국제간 이전을 금지하기 위한 新에너지 경제정책을 발표하고 1979년에는 미국에서 스리마일 아일란드 原電의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하자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었다. 다 지은 원자력발전소도 까다로운 규제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 형편이 되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뜸하게 되자 자연히 사는 쪽에서 큰소리칠 수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었다.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말까지 한국은 8基의 원자로 건설에 착공함으로써 이런 변화를 適時에 이용하였다. 짓는 쪽에서 큰소리 칠 수 있는 상황을 활용하여 우리는 핵심 기술을 이전 받는 自立전략을 폈던 것이다. 그 한 예가 1990년 2월 고리 원자력 1호기에 장전된 경수로 핵연료의 국산화 전략이었다.
한국에너지연구소와 그 산하의 한국핵연료주식회사는 1984년 8월 경수로 핵연료 설계기술 도입 및 機器 구매를 위한 입찰 안내서를 여러 회사에 보냈다. 응찰회사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CE 및 엑슨, 프랑스의 프라즈마, 서독의 지멘스社였다. 韓 소장은 에너지연구소 전문가들로 40명의 평가반을 구성, 이들 회사가 제출한 조건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도록 하였다. 평가의 기준으로는 기술성과 경제성을 6 대 4로 하여 기술이전 가능성에 더 비중을 두도록 하였다. 기술 중에서도 설계기술을 제조기술보다도 7 대 3의 비율로 더 중시하도록 했다.
이런 도입선의 결정에는 정치적 압력이 들어오기 쉬우므로 결정권을 평가팀에 맡겨버린 것이었다. 연구소에서는 입찰회사에 대해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자료를 요구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평가에 의하여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웨스팅하우스와 지멘스였다. 연구소에서는 핵연료 설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인 전산 프로그램까지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웨스팅하우스에서는 그것만은 안 된다고 반발하다가 마지 못해 제공의사를 밝혔다. 결국은 서독의 지멘스社가 기술도입先으로 낙찰되었다. 한국의 원자력산업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웨스팅하우스로서는 역습을 당한 셈인데 그 뒤 영광 3, 4호기 입찰에서도 패배를 맛보게 된다.
경수로용 핵연료 설계에 있어서 원자력연구소는 지멘스 기술진과 연구소 기술진이 공동 설계하는 조건을 붙였었다. 설계를 같이 하게 되면 장기간 양쪽 기술진이 붙어다녀야하고, 지멘스의 자료와 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므로 한국은 공업 소유권료를 지불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설계 기술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농축-미국과 프랑스가 독점


1990년대, 한국의 원자력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쓴 말은 '핵연료 週期의 자립'이란 말이었다. 핵연료 週期의 자립 없이는 원자력自立은 불가능하다고 할 때의 진짜 의미는 농축 및 재처리 공장을 國內에 건설하지 않고서는 미국에의 종속성을 탈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핵연료 週期란 핵연료의 순환 사이클을 뜻하는데 우라늄 原鑛에서 시작된다. 한국전력이 1990년에 수입한 우라늄 원광은 약 1300t이었다. 이 가운데 100t은 중수로 연료로서 간단한 가공 과정을 거쳐 바로 월성 1호기 연료로 들어갔다.
韓電은 우라늄 原鑛을 캐나다에서 40%, 호주에서 33%, 나머지는 가봉과 니제르에 있는 프랑스 회사에서 구매하고 있었다. 韓電은 또 미국, 호주, 캐나다의 우라늄 광산 개발회사에 자본 참여를 하여 원광을 확보하였다. 韓電은 원광을 미국과 프랑스의 농축 공장에 맡겼다. 공장에선 천연 우라늄 235의 농도 0.7%를 3.3%로 올려 경수로 핵연료의 원료 물질로 만든다. 이때 무게가 8분의 1로 줄어든다.
미국 에너지성 산하의 농축 공장에서 55%, 프랑스 농축 공장에서 45%를 농축해 왔었는데 1989년 무렵엔 소련으로부터도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기로 하였다. 소련으로부터의 도입량은 年20t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경수로 연간 소비량(150∼60t)의 약 8분의 1이었다. 韓電의 1990년도 핵연료 구입비는 약 1500억 원인데 原鑛 값이 약 500억원, 농축비가 약 500억원, 핵연료의 형태로 만드는 가공비가 약 400억원, 기타 공정비가 약 100억 원이었다.
즉 핵연료 순환 사이클에서 농축 공정은 약 40%의 부가가치를 점해 가장 이문이 많다. 당시 농축 공장을 상업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나라는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뿐이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본, 남아프리카가 농축공장 건설을 추진중이었다. 농축 공정에서 천연 우라늄 235의 농도를 90% 이상으로 만들면 이게 바로 우라늄 핵폭탄의 폭약이 되므로 재처리 기술과 함께 아주 민감한 부문이다.


사용된 핵연료 보관에 골치


농축 우라늄은 成型加工 과정을 거쳐 핵연료 다발로 변형돼 경수로 원자로에 들어간다. 1990년, 한국에서 가동중인 9基의 원자로 중 월성 1호기(중수로)를 뺀 8기가 경수로였다. 세계적으로 경수로형 原電이 가장 많다. 3년간 경수로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는 원자로 속에 있는 저장 水槽에서 6개월 이상 머문다. 그 사이 방사능이 많이 줄어든다. 재처리 공장이 있는 나라에선 6개월 뒤 재처리 공장으로 이 사용後핵연료를 옮겨 플루토늄을 분리한다. 우라늄 235와 공존하던 우라늄 238은 원자로 속에서 핵분열을 일으킬 때 중성자를 받아 플루토늄으로 변한다. 즉 플루토늄이란 마성의 물질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재처리 공장에서 분리된 플루토늄을 우라늄과 섞어 경수로 연료로 재순환시킨다. 재처리의 원래 목적은 자원의 재활용이며 그 부수적 효과는 사용後핵연료의 양을 줄여 보관을 쉽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재처리 공장이 없는 나라에서는 사용後핵연료를 보관해야 하는데 방사능이 엄청난 이것의 관리에 돈이 많이 든다. 고리 1호기의 사용後핵연료 저장조는 1990년 말에 포화될 예정이었다. 韓電은 고리 3호기의 저장조에 밀집 저장대를 설치 1호기의 것을 옮겨 보관하기로 하였다. 우리나라는 재처리 공장을 언제 짓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발전소 내에 보관하고 있던 사용後핵연료를 1997년까지 별도의 중간 저장 시설을 만들어 옮기기로 하고 부지를 찾고 있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韓電의 한 간부는 "요사이 우라늄 값이 떨어져 재처리의 경제성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짧게, 좁게 보면 경제성이 없지만 한국 에너지 自立 전략이란 측면에서 장기적인 전망을 한다면 경제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韓電 측의 계산에 따르면 영광 1호기에서 한 해에 배출되는 20.2t의 사용後핵연료를 30년간 중간 저장했다가 영구 폐기하는 데는 1070만 달러가 든다고 한다. 이를 해외 재처리 공장에 위탁,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회수하여 연료로 재활용한 뒤 영구 폐기하는 데는 1560만 달러가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증식로 도입에는 재처리가 전제조건


한국 전력은 1989년 12월에 아주대학교 부설 에너지문제 연구소에 의뢰하여 '2000년대 원자력전망 및 대처 방안 수립에 관한 연구'라는 3500 페이지 짜리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서기 2025년 후에는 고속 증식로를 도입해야 하며, 2015년까지는 商用 농축 공장을 가동시켜야 하고, 재처리 공장 건설은 국제적인 이해를 얻은 뒤 추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원자력 업계에서는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상당히 적극적으로 재처리 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들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농축과 재처리 두 부문의 국산화가 이루어져야만 핵연료 週期를 우리가 주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 진정한 원자력 에너지 自立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원자력 전문가들은 언론과 외교관들이 그런 공감대를 뒷받침하여 對美 설득을 강력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한 전문가는 "원자력 自立을 막고 있는 벽은 미국뿐이다"고 했다. 고속 增殖爐(증식로)의 도입은 그 전 단계로서 재처리공장 건설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고속 증식로의 연료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의 혼합물인데 이것이 원자로에서 연소되면 핵분열로 소모되는 플루토늄보다도 1.3배가 많은 플루토늄이 새로 증식된다.
이런 방식의 발전은 현재의 우라늄 자원 활용도를 50-60배쯤 높이는 것이다. 인류 에너지 문제의 최종 해결책인 핵융합 발전이 가능해질 때까지의 과도기에 主役이 될 만한 발전 방법이다. 원자력 기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프랑스가 120만㎾급 슈퍼 피닉스 高速 증식로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업 운전하고 있었다.
1984∼86년부터 원자력연구소는 프랑스 원자력청과 공동으로 '고속 증식로 도입에 필요한 기술능력 확보방안 수립'을 연구, 세 권의 보고서를 냈다. 그 결론 부문에서 이 보고서(연구책임자 趙滿)는 "고속증식로 1호기는 2012년에 운전개시 할 수 있고 6호기와 고속 증식로 센터는 2025년까지 완성 될 수 있다. 이 센터에는 재처리 공장 등 핵주기 시설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에서 소개한 아주대학교의 보고서는 이런 전제하에서 원자력협력 외교정책의 기본목표로 原電핵심기술(농축 재처리 기술)의 이전 및 자체개발 여건의 조성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추진 방향으로는 우리나라 原電 산업에 대해 국제 사회가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즉 평화 목적임을 납득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1970년에 재처리 공장 설계를 프랑스의 SGN社에 맡겨 끝냈었다. 1972년에 도카이(東海) 재처리 공장을 착공, 75년에 완공했다. 일본은 이 공장에서 처리되는 사용후핵연료가 미국에서 공급된 것임으로 미국의 동의를 받는 교섭을 벌여야 했다. 美日 정상회담 때마다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1982에 겨우 공장을 돌려도 좋다는 미국의 동의를 받아서 이해부터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감시카메라


일본은 미국에 대하여 플루토늄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려고 온갖 성의를 다한 것이다. 헌법에 핵무장이 사실상 금지돼 있고, 핵무장한 선박의 自國內 입항까지 금지할 정도로 핵무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일본조차도 재처리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는 끈질긴 미국 설득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 1989년 통계에 따르면 원자력 발전국 27개중 재처리 공장을 돌림으로써 核연료주기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은 핵 선진국 등을 포함한 17개국이었다. 한국처럼 사용後핵연료를 중간저장하면서 재처리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8개국이며 사용後핵연료를 영구 폐기하는 나라는 스웨덴과 미국이다. 일본은 1973년에 농축 우라늄 시험시설을 짓기로 결정, 1983년부터 상업적인 농축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핵폭탄을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인 재처리와 농축시설을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재처리의 방향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농축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원자력 연구소는 새로운 농축기술인 레이저를 이용한 선택적 光이온화 기술개발을 기초 연구의 한 테마로 설정, 1989년부터 착수했다.
핵확산금지 조약에 가입하면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1990년 현재 가동중인 원자력 발전소 9기 중 경수로 8기에서는 국제원자력기구가 설치한 감시카메라가 1기 당 두 대씩 작동중이었다. 원자로에 하나, 사용後핵연료 저장조에 하나가 설치돼 있었다. 국제 원자력 기구는 두 달마다 한 번씩 두 명의 조사관을 각 原電에 보내 이 카메라의 필름을 빼보고 현장을 점검한다. 중수로인 월성 1호기에는 감시 카메라가 20대나 있다. 핵연료가 출입하는 통로를 따라 붙어 있다.
월성1호기는 매일 핵연료를 16다발씩 교체하며 그 다발이 야구 방망이 정도로 작기 때문에 특별히 감시가 심한 것이다.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조에는 물을 빼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는 예스 노 모니터가 붙어 있다. 금속물질이 이 구멍 속을 통과하는지의 與否(Yes or NO)를 감지하도록 한 장치다. 국제 원자력 기구에서는 한달 반만에 한 번씩 4명의 조사관을 월성에 보내고 있었다.
그 몇 년 전에는 월성 1호기에서 페인트칠 작업을 하던 人夫가 감시 카메라에 페인트가 묻지 않도록 헝겊으로 싼 적이 있었다. 조사관들은 이 카메라에서 필름을 뽑아보고 시커멓게 나오는 부분이 있어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국제 원자력 기구의 사찰에서 나쁜 평가가 나오면 그 나라는 요주의 국가로 낙인돼 원자력 기술을 도입하기가 어렵게 된다.
국제 원자력 기구(IAEA)는 미국, 소련, 영국 등 핵보유국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격이 강하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본부가 있다. 핵확산 금지조약의 이행을 책임지고 있는 이 기구의 운영에 있어서는 냉전시절에도 미국과 소련이 협조적이었다. 소련은 공산세계의 핵확산방지를, 미국은 자유세계 안에서의 핵확산 방지를 책임지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돼 있었다.
국제 원자력 기구와 함께 주한 미국 대사관, 주한 미 CIA, 주한미군 정보기관, 미 군축위원회, 에너지성 등 미국의 주요 기관들도 유기적으로 한국의 원자력 연구 상황을 감시하고 있었다. 국제 원자력 기구와 미국의 이런 감시체제 밑에 옴싹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절대로 핵폭탄을 비밀로 개발할 수가 없다는 것이 衆論이었다.
당시 韓電의 한 간부는 이제는 외교력이 원자력산업과 과학자들에게 울타리를 쳐주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원자력산업과 두뇌수준에 걸 맞는 원자력 외교人力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89년 말 현재 원자력 발전소 9기의 설비용량은 716만6000㎾로서 북한의 전체 전력용량(약 700만㎾)을 앞지르면서 남한의 전체 발전설비용량(2100만㎾)의 36.3%를 차지하였다. 설비용량으로는 세계 제10위의 원자력 大國이 되었다. 발전량에서는 89년에 전체의 50.1%를 차지하여 석탄화력(22.4%)과 석유화력발전(22.7%)을 압도하였다. 이는 韓電이 원자력 발전을 基底(기저)부하담당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전소 운영기술을 나타내는 原電 이용율에서 韓電은 세계평균을 약 10%포인트 웃돌고 있었다. 월성 1호기는 그 몇 년 전 세계에서 최고의 운전 효율을 가진 중수로 발전소로 꼽힌 바 있었다.


일단 명령만 내린다면…


1990년 현재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單價는 ㎾/H당 26.63원으로서 석탄, 석유보다 훨씬 쌌다. 원자력 발전 덕분으로 한국의 전기요금은 세계적으로 값이 싸 물가 안정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원자력 발전의 가장 큰 장점은 간편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100만㎾급 原電의 1년간 소비 연료는 25t인데, 같은 크기의 유연탄 발전소 연료는 10만t급 선박 22척이 수송해야 할 분량이다. 석유 발전소의 경우라면 20만t급 유조선 7척이 동원돼야 실어 나를 수 있는 연료(820만 배럴)가 먹힌다.
폐기물의 양을 보면 100만㎾급 原電에서는 1년에 525t이 발생하고 유연탄 화력에서는 약 40만t이 생긴다. 원자력 산업이 거대화되면서 원자력 두뇌의 용량도 커졌다. 1990년 현재, 韓電과 산하 회사들의 원자력 관계 기술人力은 약1만 명에 달하며 원자력 두뇌의 총본산인 大德의 원자력 연구소는 2298명의 직원을 가진 한국의 最古, 最大 연구소였다.
원자력병원 인력을 제외한 연구소만의 人力은 1500명, 그중 연구 기술직 人力은 936명이었다. 그 가운에 242명이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1990년 예산은 1365억4000만 원인데 정부가 대주는 순수연구비는 약328억 원이었다. 원자력 연구에 대한 투자는 미래에의 투자란 인식으로 선진국들은 연구 개발에 천문학적인 돈을 넣고 있다. 당시 일본에는 두 개의 원자력 관계 국립연구소가 있었는데 연구人力은 8500명, 1년 예산은 약 1조8360억원이었다. 연구비의 반은 정부투자, 반은 ㎾당 0.445엔씩을 電源 개발촉진세로 거두어 충당하고 있었다.
이 연구소는 순전히 21세기를 위한 장기적 연구만 하고 있었다. 프랑스 원자력청 직할 연구소의 인력은 약2만 명, 영국의 하웰 연구소 인력은 1만6000여 명, 인도의 원자력연구소도 그 정도 수준이었다.
1960년대에 폴란드 정부는 작은 核부대를 창설하는 데 드는 경비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10년에 걸쳐 폭격기 10-15대, 핵탄두 20-30발, 중거리 유도탄 100기, 미사일 발사 잠수함 2척을 만드는 데는 약 56억 달러가 든다는 계산이었다.
미국은, 1976년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은 1990년대에 가면 6081㎏의 분리가능 핵 분열성 플루토늄을 (사용후핵연료의 형태로)축적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작은 原爆 수백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일본에는 약 3만6000㎏의 플루토늄이 축적될 것으로 이 보고서는 예상했다. 1977년에 미국 군축위원회는 핵실험 가능 국가들을 3등급으로 분류한 적이 있었다. A급은 핵무기 개발을 결심하면 1-3년 사이에 핵폭발 실험을 할 수 있는 나라들로서 대만, 일본, 남아프리카, 이스라엘 등 10개국이었다. B급은 4-6년 뒤에 가능한 나라로서 파키스탄, 한국 등 10개국이었다. C급은 7-10년 뒤에 핵실험이 가능한 나라로서 이란, 터키, 멕시코 등 10개국. 북한은 이 3개 그룹에 끼이지 못 했었다.
한국은 1970년대에 아직 원자력 산업과 기술능력이 토대를 굳히기 전에 외국 기술을 들여와 짜집기 식으로 原爆을 개발하려다가 미국이란 장벽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그 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부문(발전)에 國力을 쏟음으로써 1990년대엔 原爆제조 기술쯤은 우습게 볼 정도의 크고 정교한 기술적인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한 핵 물리학자는 "평화적 이용을 집념 있게 추구하다가 보니까 군사능력까지 자연스럽게 얻은 것이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북한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좋은 원폭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갖고는 있지만 재처리 분야에서 미국이 덜미를 잡고 있어 우리는 당장은 원자력 自立도, 原爆 제조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한 원자력 공학자는 "북한의 고민은 기술이고 우리의 고민은 국제관계다"고 했다.

5大 原電대국으로

한국은 지금 원자력 발전소 21基를 돌리고 있고, 9基를 건설중이다(계획 확정 포함). 수년 안으로 30基의 原電으로 발전량의 약59%를 맡게 된다. 현재도 한국은 발전량 면에서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에 이언 제5大 원전 大國이고, 운용기술은 세계 최고이다. 한국의 原電기술 자립 과정을 정리해본다(월간조선 吳東龍 기자의 기사를 참조).
1986년 한국電力은 영광 3·4호기를 건설함에 있어서 1차계통(원자로 등) 엔지니어링을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이하 CE), 2차계통(BOP) 엔지니어링을 서전 앤드 런디(이하 S&L)에 맡겼다. 이 결정과정에서 全斗煥 대통령과 朴正基 사장이 큰 기여를 하였다. 韓電은 두 회사에 기술 傳授(전수)를 조건으로 걸었다. 그해 12월, 韓電은 영광 3·4호기의 원자로 공동설계를 위하여 원자력연구소 등의 人力을 미국 코네티컷州 윈저의 CE 본사로 보냈다. 당시 韓弼淳 원자력연구소장은 ‘필(必) 핵증기 공급계통 설계기술 자립’이란 액자를 써 파견 연구원들에게 전달하며 “기술自立을 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몸을 던지라”고 말하고 만세삼창을 불렀다고 한다.
현지에서 우리 기술자들이 공동설계 작업에 참여하려면 설계기술자 자격을 부여받아야 하기 때문에 설계 코드 교육, 원자로 설계 부문 교육을 먼저 받았다. 원자로 압력용기를 설계하는 기준인 미국기계학회(ASME) 코드, 전기관련 기술코드인 IEEE)드도 사전에 숙지(熟知)해야 했다.
당시 한국은 원자로의 爐心을 감싸는 格納용기 설계능력은 전무 상태였다. 核연료를 태우는 爐心계통은 민감한 부분이라 국내엔 설계코드도 없었고, 미국 原電 회사들도 주지 않았다. 韓電과 CE 사이 계약서에 따르면, 설계 책임자인 CE는 모든 책임을 지고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다.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은 CE측에 일을 절반씩 나누어 하자고 제의했다. 한 연구원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일을 배우려면 설명만 들어서는 되지 않잖아요? CE가 처음에는 주는 일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는 핵심적인 일만 하고, 우리는 뒤치다꺼리만 하면 어떻게 기술습득이 되겠느냐’고 항의했어요. 그 다음부터 무조건 반반씩 일을 나눠 한 다음, CE가 우리가 한 일을 체크하고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 외로 어려운 문제도 쉽사리 해내니까 CE 직원들도 상당히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CE의 각 부서회의에 우리측 대표자를 보내 기술적인 문제점이 나오면 토론을 하곤 했습니다."
이 설계팀은 2년 뒤 돌아왔다. 한 참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원자로의 핵심설계 기술인 NSSSD(핵증기 발생장치 계통설계)를 비롯해 많은 부분을 배우고 왔지만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귀국해 우리의 기술自立 프로그램에 따라 반복설계를 통해 다시 ‘복습’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울진 3·4호기로 한국표준형 原電(KSNP)을 만들 때 95%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1986년부터 영광 3·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를 CE社와 공동수행해 발전로 설계분야의 경험과 기술자료를 확보했다. 이때의 공동설계와 試運轉 경험을 토대로 1995년 한국표준형 原電(KSNP·OPR-1000으로 불림)인 100만kW급 可壓經水型 原電을 독자적으로 설계하여 기술自立의 목표를 이뤘다. 이어 2002년에는 OPR-1000보다 안전성·경제성이 향상된 한국 新型 原電(APR-1400) 기술을 개발, 수출도 하기에 이르렀다.
金泳三 정부하 과학기술부는 G7 국가의 과학기술을 확보할 목적으로 ‘G7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G7 프로젝트에 '新型 원자로 설계'가 들어갔다. 정부는, APR-1400을 개발하는 데 연구개발비로 2000억원을 투입하였다.
1986년 5월12일, 정부는 원자력법을 개정, 방사성폐기물을 한국 에너지연구소(원자력연구소)에 맡겼다. 1990년대 들어 야당인 평민당을 중심으로 反原電 투쟁이 벌어졌다.
김대중 총재는 13대 국회 상공위에, 원자력 정책을 따지라고 曺喜澈(조희철) 의원을 배치했다. 曺 전 의원은 “1년여 조사를 해 보니 電力수요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代案은 없어 원자력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김대중 총재가 당무회의에서 原電 건설 반대를 黨論으로 정하려 의사봉을 두드리려는 것을 빼앗은 적도 있었고, 당내에서는 ‘韓電의 앞잡이, 배신자’로 불릴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상임委를 바꿔야 했다.
“일본 사회당 간부인 후쿠마(福間)는 저처럼 原電 반대를 愛國인 줄 알고 반대하다 찬성으로 돌아선 사람입니다. 그가 지은 <원자력은 악마의 앞잡이인가?>라는 책에 감명을 받아 번역까지 했습니다.”
그는 꾸준히 김대중 총재를 설득했다. 1989년 11월28일 김대중 총재가 목포를 방문했다. 지역주민들은 영광原電 건설에 대한 金 총재의 입장을 물었다. 金 총재는 “자원貧國인 우리나라는 原電을 건설할 수밖에 없으나 주민과 충분한 홍보와 협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李宗勳 전 韓電사장은 “원자력界는 이를 김대중 총재의 ‘목포선언’이라 부르고 있다”면서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原電 건설이 순조롭게 될 수 있었던 데는 ‘목포선언’의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3. 北核과 중국의 음모



이리역 폭발사건의 참상



1977년 11월 전북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폭발 사건이 있었다. 民需用(민수용) 화약을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下行線(하행선)에서 대기 중이던 화물열차에 실린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 25t이 폭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사망 49명, 실종 7명, 중상 293명, 경상 717명, 가옥 전파 675채, 반파 1289채, 재산피해 80억원, 이재민 9000여 명이 발생했다. 화약 수송원 신무일씨가 소주를 마신 후 열차 내에 촛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를 포장한 마분지 상자로 옮아 붙으면서 일어난 사고였다.
필자는 이 현장을 취재했다. 이리역 부근이 폭격을 당한 듯 초토화되어 있었다. 5t은 넘을 것 같은 기차의 쇠바퀴가 수백 m까지 날아가 떨어져 있었다.
2006년 10월 북한 정권이 핵실험을 했는데, 폭발력은 TNT 환산 400t이었다. 이리 폭발 사건 때 폭약의 약 13배였다. 핵실험치고는 폭발력이 너무 작았다. 전문가들은 설계 미숙에 의한 불완전 폭발이라고 평가했다.
2009년 5월의 2차 핵실험은 달랐다. 미국의 핵 전문 연구소들은 이 실험의 폭발력을 4000t으로 추산했다. 1차 때보다 폭발력이 10배 이상 늘었다. 3년간 북한 정권이 핵폭탄 기술을 발전시켰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미사일에 실을 만큼 小型化(소형화)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여 안도하는 이들도 있다. 핵전문가들은 막연한 낙관론을 경계한다.
북한 정권은 핵폭탄을 미사일이나 폭격기로 운반할 수는 없어도 배나 차량에 실어 부산항, 고리 원자력 발전소 부근, 혹은 광화문으로 잠입시켜 터트릴 수 있다.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 1993년 2월 알 카에다 요원들이 트럭에 폭발물 630kg을 싣고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건물 지하로 들어가 폭파시켰다. 트윈 타워 중 하나를 쓰러뜨려 다른 타워를 밀어붙이게 하여 두 타워가 다 무너지도록 기획한 것이었다. 다행히 타워는 기울지 않았다. 그래도 6명이 죽고 1000명 이상이 다쳤다.


5000t의 핵폭탄이 광화문에서 터진다면?

이 트럭에 만약 핵폭파 장치가 실려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예컨대 남아프리카가 개발한 핵폭탄(TNT 환산 5000t짜리로서 작은 트럭에 실을 만한 크기) 같은 것을 트럭에 싣고 와서 폭파시켰다면 피해는? 미국의 핵연구소들이 가상 시나리오를 썼다.

1. 길이 약 10km 타원형 지역, 즉 월스트리트에서 센트럴파크까지의 지역 내 건물들은 거의 다 파괴되고 거주자들은 사망한다.
2. 125街(가) 남쪽의 100만 이상 거주자들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는다.
3. 100만명 이상의 맨해튼 지역 거주자들이 방사능 병에 걸린다.
4. 맨해튼, 브루클린, 호보컨 지역 집들이 불탄다.

북한이 보유한 핵폭파 장치를 맨해튼만큼 인구밀집도가 높은 광화문 지역에서 터트린다면? 100만명 이상의 서울시민이 사망할 터인데, 이런 기습을 당하고도 국가 지도부가 결사抗戰(항전)을 결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항복하거나 휴전을 요청할 것인가?
북한 정권은 지금 이런 수단을 확보한 것이다. 김정일과 북한군 장군들은 자신만만해 있지 않을까? 만약 김정일이 오늘밤 이 핵폭파 장치를 쓰기로 결심했을 때 북한에서 이를 저지할 사람이 있을까? 없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한 미친 자 손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사이 미국과 한국의 핵전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되어 있는 책이 있다. 토머스 C 리드와 대니 B 스틸만이 共著(공저)한 <核特級>(핵특급·The Nuclear Express)이다. ‘핵폭탄과 확산의 政治史(정치사)’라는 책이다(미국 지니스 프레스 출판).
이 책이 관심을 모으는 것은 秘話(비화)가 많고 필자들이 핵폭탄 제조에 직접 관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리드는 로렌스 리브모어 국립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에 종사했고, 포드 및 카터 행정부 시절엔 공군장관을 지냈으며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 특보였다.
스틸만은 미국 최초의 핵폭탄을 만들어냈던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 등 업무에 종사했고, 13년간 핵관련 기술정보국을 이끌었다. 그는 10년간 중국의 핵관련 시설을 방문 조사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미국 핵폭탄 연구소의 정보책임자가 핵실험장,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만드는 원자로 등 중국의 핵시설들을 10년에 걸쳐 방문 조사하도록 한 것인데, 그 배경은 무엇일까?
스틸만은 “중국이 자신들의 높은 핵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이 誤判(오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했다.


중국의 핵시설을 10년간 방문 조사한 사람의 보고


그는 팀을 만들어 1990년 4월에 처음 중국의 핵시설을 시찰했다. 중국 정보기관들은 그들의 一擧手一投足(일거수일투족)을 추적, 감청했다. 스틸만은 중국의 핵폭탄 기술 개발이 높은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몇 분야에선 미국보다 앞서 있었다. 그는 여행 중 많은 과학자를 만나면서 중국이 1982년 이후 정책적으로 중동과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핵기술을 확산시켜 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1994년 방문 때 그는 “중국 원자력연구소장이 이란·이라크·파키스탄 과학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과학 장비들을 파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90년대 말 중국 방문 때는 중국이 오랫동안 프랑스와 핵개발에서 협조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틸만의 중국 여행은 1999년에 끝났다. 美(미) 하원 정보위원회가 중국이 미국의 수소폭탄 설계 정보를 훔쳤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하자 중국 측이 대응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 책에서 스틸만은 10년간의 중국 핵시설 방문으로 얻은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미국을 포함해 어느 나라도 혼자 실력으로 핵폭탄 개발에 성공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미국이 뉴멕시코州(주)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최초의 핵폭탄을 연구하고 있을 때 영국·캐나다·이탈리아 등 외국인 과학자들이 많았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을 도왔고, 이스라엘은 南阿共(남아공)의 핵개발을 지원했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개발엔 중국의 지원이 있었다.
중국이 1964년에 핵실험에 성공하게 된 데도 소련 간첩과 프랑스 과학자 등의 도움이 있었다. 미국 로스 앨러모스 연구실에서 핵폭탄 설계에 종사했던 클라우스 푹스는 독일인으로 공산주의자였고 일찍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된 스파이였다.
그는 나치의 압제를 피하려고 영국으로 건너가 물리학자가 됐는데, 미국의 원폭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여기서 얻은 고급정보를 소련 측에 보낸 그는 영국에서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고 나와 1959년 東獨(동독)으로 달아났다.
여기서 그는 중국 핵개발 책임자를 만나 미국이 최초로 개발한 원폭의 설계 개념뿐 아니라 수소폭탄에 대한 정보도 주었다고 한다. 푹스는 로스 앨러모스에서 일하던 1948년에 벌써 수소폭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정보는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의 水爆(수폭) 개발을 도왔다.


북한·파키스탄 핵개발 적극 지원


중국은 1964년 10월16일 우라늄 원폭 실험에 성공했고, 1967년 6월17일엔 3.3메가톤(TNT 환산 330만t)짜리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 과학자들은 중국이 原爆에서 水爆으로 가는 데 32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것에 놀랐다. 미국은 그 단계에서 7년이 걸렸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狂風(광풍)이 몰아치던 중국에서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 스틸만은 10년간의 현지 조사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1. 간첩 클라우스 푹스의 정보 제공.
2. 연구자들의 높은 數學的(수학적) 분석 능력.
3. 높은 해외 기술정보 수집 능력.
4. 서방에서 교육받은 과학 인력.

스틸만은 중국이 1980년대에 네 번의 실패 끝에 중성자탄 개발에도 성공했다고 썼다. 그는 중국의 핵기술은 미국과 거의 同級(동급)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 책에서 중국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핵 및 미사일 기술을 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와 공산국가(북한)에 확산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1982년이었다고 주장했다. 책의 일부를 인용한다.
<중국은 알제리와 비밀 협정을 맺고 원자로를 지어주기로 했다. CSS-2 미사일을 사우디아라비아에 팔았다. 북한에 대하여는 전폭적인 핵지원을 했다. 특히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중국은 라이벌인 인도의 宿敵(숙적) 파키스탄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자 기술자들을 초빙해 교육도 하고 CHIC-4라고 불리는 단순구조의 원자폭탄 설계에 대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 책임자이고 요새는 ‘죽음의 핵상인’으로 불리는 A. Q. 칸 박사는 이 자료를 리비아에 팔았다. 리비아가 수년 전 핵개발 포기 선언을 할 때, 양복점용 하얀 플라스틱에 들어 있는 이 설계도의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파키스탄의 실력자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지아울 하크 장군이었다. 그는 미국 편에 서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親美的(친미적)인 파키스탄이 중국으로부터 핵개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눈 감아 주었을 것이다.


파키스탄의 핵실험 代行해 주기도


중국은 파키스탄의 핵실험까지 代行(대행)해 줬다고 스틸만은 주장한다. 중국이 ‘35번’으로 이름 붙인 핵실험은 1990년 5월26일 신장위구르자치구 롭 누르 실험장에서 있었다. 우라늄탄이었는데, 폭발력은 10kt 정도로 추정됐다. 스틸만은 이 실험 때 쓰인 핵폭파 장치 CHIC-4는 8년 후인 1998년 5월28일 파키스탄이 自國(자국) 내에서 실험했던 原爆(원폭)과 同型(동형)이라고 주장한다.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17일 뒤에 대응 핵실험을 했다. 이렇게 빨리 대응하고 또 미리 실험계획을 발표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1990년 중국에서 실험한 자료가 있었던 덕분이란 것이다.
미국도 1990년대에 영국을 위해 네바다 사막에서 핵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과 南阿共(남아공)도 대서양에서 공동 핵실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틸만은 중국이 대행실험 때 기폭장치의 中性子(중성자) 발생 기술을 제공했다고 했다.
스틸만은 <핵특급>에서 파키스탄이 북한과 미사일-핵기술 교환 협정을 맺은 것은 베나지르 부토 총리 때였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노동 미사일 기술을 판매하고 파키스탄은 농축우라늄 기술을 북한에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북한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이던 黃長燁(황장엽) 선생은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초반 金日成(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에도 핵무기개발 책임자(노동당 군수공업부장) 전병호가 핵실험 계획을 세워 허가를 받으려 했습니다. 전병호는 “우리는 핵실험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왜 주석께서 허가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불평도 했어요.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엔 나를 찾아와 “러시아에서 플루토늄을 얻어올 수 없을까”라고 묻더군요. 내가 “왜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했더니 그는 “몇 개를 더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얼마 뒤 전병호가 나타나더니 “이젠 됐다. 파키스탄과 협력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파키스탄은 1998년 5월28일에 다섯 차례, 30일에 여섯 번째의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여섯 번째 핵실험을 한 지역에서 플루토늄을 검출했다. 파키스탄은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개발을 하고 있었기에 이 플루토늄彈(탄)을 두고 소문이 많았다. 북한에서 가져온 플루토늄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실험을 북한의 기술자들이 현장에서 참관했다는 정보도 있었다.


북한, 중국의 原爆 설계를 개량


스틸만은 자신의 책에서 여섯 번째 핵폭파 장치에 들어간 플루토늄은 파키스탄 측이 원자력발전소에서 불법적으로 빼낸 핵연료에서 재처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스틸만은 북한의 핵개발에 중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의 친구들’이, 북한은 중국의 CHIC-4型(형) 원폭 설계도를 개량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소개했다. 이 설계도는 중국이 핵개발 도상국들에 대한 일종의 ‘수출용’으로 설계한 것으로 核彈을 만들기 쉽도록 되어 있다.
스틸만은 파키스탄·북한·리비아·이란에 이 설계도가 넘어갔다고 본다. 스틸만은 2006년 10월9일의 북한 핵실험에 사용된 설계도는 우라늄탄인 CHIC-4를 플루토늄용으로 변형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형이라면 12kt의 폭발력이 나와야 하는데 설계치의 약 4%인 400t에 그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 폭파장치의 설계 미숙.
2. 중성자 발생장치의 고장.
3. 설계 변경時의 착오.

스틸만은 북한이 농축우라늄이나 원시적 형태의 핵폭탄을 만들면 미사일처럼 외국에 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2000년에 리비아는 50개의 중거리 노동 미사일을 수입하는 데 6억 달러를 지불했다. 북한은 2006년의 핵실험으로 유엔의 제재를 받는 가운데서도 시리아에 영변식 원자로를 지어주다가 이스라엘의 폭격을 自招(자초)했다.
북한이 2009년 4월 미사일을 발사하는 현장에는 이란 참관단이 와 있었다고 한다. 중국-파키스탄-북한의 핵개발 트라이앵글과 함께 북한-이란-시리아의 핵 및 미사일 거래 트라이앵글이 작동하고 있다.
스틸만은 이렇게 썼다.
<중국은 핵 및 미사일 기술을 이란·시리아·파키스탄·이집트·리비아·예멘에 파는 데 있어서 북한을 再(재)이전의 포인트(re-transfer point)로 이용해 왔다. 중국은 북한-파키스탄 사이의 미사일 및 핵장비 거래를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중국과 북한의 장교들은 1998년 및 2006년 미사일 발사 실험 전 긴밀하게 정보를 교류했다.>
북한은 파키스탄에서 우라늄 농축용으로 만든 왕복 가스 실린더에 제6불화 우라늄을 채워 리비아에 밀수출한 적이 있다. 당시 리비아는 파키스탄의 칸 박사에게 1억 달러를 주기로 하고 원폭용 우라늄 농축 시설을 만들고 있었다.


중국은 말리는 시늉만 할 뿐


스틸만은 이런 핵 및 미사일 거래는 중국의 묵인이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핵물질과 미사일 수출에는 중국 영공을 지나는 항공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틸만은 북한이 차베스가 좌경화시킨 베네수엘라나 反美的(반미적)인 멕시코에도 접근할지 모른다고 했다.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직후 북한을 방문, 김정일을 만난 중국의 국무위원 탕자쉬안(唐家璇)은 김정일에게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추가 핵실험은 없다. 금융제재를 풀면 6자회담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틸만은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사실상 지원해 왔으므로 ‘갑자기 진지해져서’ 김정일에게 개발 중지를 주문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너무 도발적인 행동은 삼가라는 충고가 있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스틸만은 1982년에 덩샤오핑이 제3세계, 특히 이슬람과 공산권 국가들의 핵개발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이후 중국이 일관된 행동을 해왔다고 본다. 중국은 이들 국가의 핵 관련 과학자들을 훈련시켜 주고, 기술을 넘겨주고, 핵운반 수단을 팔고, 그런 목적을 위한 기초공사를 해주었다. 이렇게 핵기술을 확산시켜 놓은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 저지에 나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중국과 북한은 共犯(공범)이란 이야기다.
스틸만은 미국의 핵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 북한은 ‘聖域(성역)’이나 ‘자유무역지대’로 불린다고 했다. 북한은 다른 핵개발 국가(주로 이슬람 국가)를 위한 창고, 수리창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와 같은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북한은 비밀이 보장되고 어느 나라로부터도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는 후세인이 미국의 침공 이전에 핵개발 시설을 북한으로 옮겼다는 소문(가능성이 거의 없지만)이 돌 정도였다는 것이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한반도 전문가인 래리 닉시 박사는 북한의 제2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對北(대북)제재 결의 1874호가 公海(공해)상에서 의심 가는 북한의 선박을 세우고 수색하는 데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명시한 반면, 항공 화물의 검색에 관해서는 모호하게 해놓는 바람에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는 항공로 통해 반출


닉시 박사는 2009년 7월10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 한 전화통화에서 북한이 대량살상무기와 그 관련 기술을 수송하고 관련 과학자나 기술자를 교환하는 주요 경로는 해상교통이 아니라 항공교통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북한과 이란을 오가는 항공기에 실린 북한 화물을 검색하는 것이 열쇠라는 설명이었다. 문제는 이 항공 검색의 열쇠를 중국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닉시는 북한이 여러 나라에 미사일이나 관련 기술을 수출해 매년 15억 달러가량을 벌고 있는데 이의 최대 수입국은 이란이며, 북한이 2009년 4월5일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할 때도 15명의 이란 대표단이 참관했던 사실을 들었다.
이 같은 북한과 이란 간 미사일 협력은 중국 당국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란과 북한의 항공기들은 중국 당국의 領空(영공) 통과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닉시 박사는 “최근 필립 골드버그 국무부 조정관이 이끄는 미국의 對北 제재 전담반이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외교부, 인민은행, 세관 등 관계자로 구성된 정부 합동대표단을 만났을 때, 중국 측에 대해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등 무기를 이란으로 반출하는 항공기의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도록 촉구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보다 그 범위나 强度(강도)가 높은 항공수색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유아시아방송은 보도했다.
스틸만과 리드의 책을 읽으면 중국이 핵확산 장려에서 핵확산 금지라는 전략적 대전환을 하지 않는 한,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에 협조하기는커녕 협조하는 척하면서 방해만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중국이 1983년에 알제리에 지어준 15메가와트 重水爐(중수로)는 원폭용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다. 매년 3kg 정도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데, 이는 나가사키급 핵폭탄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이 시설이 발각된 것은 착공 8년 뒤였다. 중국은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에 CSS-2 중거리 미사일을 팔았다. 이 미사일은 목표물에서 1.6km나 빗나가는 일이 많아 재래식 무기나 화학무기 운반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이 미사일은 중국이 개발한 CHIC-4형 원폭 운반용이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에 자금을 대고, 개발한 핵탄두를 얻는다는 구상을 실천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50개의 CSS-2 미사일에 장착할 핵탄두를 파키스탄으로부터 구입하는 데는 1주일분의 기름 수출액이면 족하다고 한다.


중국에서 새 지도부 등장해야 핵확산 멈출 것


중국은 이란에서 原油(원유) 수입량의 14%를 수입한다. 중국은 이란에 재래식 무기를 팔고 핵 및 미사일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이 이런 식으로 핵을 확산시키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鄧小平은 19세기식 세력균형을 추구하려 했던가? ‘중국의 敵(적)의 적’은 중국의 친구가 될 것인가? 핵무장한 파키스탄이 인도를 견제하고, 핵무장한 북한은 미국을 흔들 것인가? 등소평이 이런 핵확산을 추구하는 것은 그렇게 하여 핵전쟁이 일어나도 오히려 중국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인구가 많은 중국은 그런 핵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존재가 된다고 믿는 것인가? 그런데 중국이 도와준 파키스탄의 핵은 과연 관리 가능한 존재인가?
이 책의 共著者(공저자) 리드와 스틸만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중국 지도부에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야 핵 확산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틸만과 리드는 이 책에서 세계의 골칫거리인 舊(구) 소련의 핵물질 관리에 대해 무시무시한 계산을 했다. 소련이 갖고 있던 핵물질의 0.1%가 실종됐다면 이는 1200kg의 농축우라늄과 140~170kg의 플루토늄이 북한이나 알카에다 같은 조직에 넘어갔다는 뜻이 된다. 이 양은 16개의 우라늄 원폭이나 23~27개의 플루토늄 원폭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북한은 2000년부터 황해북도 평산군 평화리의 남천화학연합기업소를 확장했다. 우라늄 原鑛(원광)을 캐 와서 이를 精鍊(정련)하여 옐로 케이크를 만들고 다시 이를 6불화우라늄으로 변화시키는 공정을 가진 공장이다.
북한은 여기에다가 파키스탄에서 밀수한 가스 확산-원심분리 방식의 농축 우라늄(핵폭탄용) 시설을 추가해 일관체제를 갖추려고 했다. 遠心분리를 하려면 고속 모터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기술적 장벽으로 남아 있어 아직은 무기급 우라늄을 농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脫北(탈북) 과학자는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 이 우라늄 농축 시설이 확장된 것은 對北(대북)송금과 관계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천기업소를 확장하는 데 적어도 2억 달러는 들었을 것입니다. 3억 달러가 없어 흥남비료공장 현대화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인데, 갑자기 남천기업소를 확장하게 된 데는 남한 등 외부로부터 들어온 돈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영변 핵연구 단지에서 플루토늄 핵폭탄 개발에 종사하는 인력은 약 3000명, 남천기업소에도 약 3000명의 기술자가 일하고 있습니다. 간접 인원까지 치면 약 1만명의 기술인력이 핵개발에 투입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미사일 제조에 참여하는 인원은 1만5000명쯤 됩니다.”


對北 금융봉쇄로 돈줄 말려야


그는 북한이 연간 15억 달러 정도를 미사일 수출로 벌어들인다는 미국 측의 추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좀 많이 잡은 것 같습니다. 미사일 輸出價(수출가)는 사정거리 1km당 100만 달러 정도입니다. 사정거리가 500km이면 500만 달러입니다. 原價(원가)는 25% 정도인데, 이 가운데 상당부분은 수입 부품 및 자재 값입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무기용 부품 및 자재의 수입을 차단하고 미사일 수출을 막는다면 현금 경색에 시달리게 되고 이는 핵개발도 어렵게 할 것입니다. 농축 우라늄식 핵개발에는 고압 알루미늄관 등 핵심 기자재의 수입이 필요합니다. 다만 중국이 어느 정도 협조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북한은 1980년대에 이라크와 싸우는 이란에 각종 무기를 팔아 적어도 30억 달러를 벌었다. 1990년대엔 공산권의 붕괴로 외화 조달에 큰 애로를 겪었고, 이 시기에 대량 餓死(아사) 사태가 일어났다. 2000년부터는 좌파정권이 집권한 한국으로부터 현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식 집계만으로도 좌파정권 10년간 약 30억 달러의 현금과 약 40억 달러의 물건이 南(남)에서 北(북)으로 들어갔다.
2008년부터 李明博 정부가 對北 실용정책을 취하면서 이런 지원이 끊어졌다. 그럼에도 2009년 북한 정권은 18발의 미사일을 발사하고, 두 번째 핵실험을 했다. 여기에 들어간 돈을 정부 측은 약 7억 달러로 추산한다.
미국은 유엔의 對北제재 결의에 따라 지금 북한 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금융봉쇄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의 重病(중병)으로 사령탑이 흔들린다. 김정일 정권은 달러가 돌지 않으면 기능에 큰 장애가 생긴다.
김정일 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 年間(연간) 30억 달러 이상의 外貨(외화)가 필요하다. 미사일과 핵개발, 黨(당) 및 軍(군) 간부들을 위한 선물비, 그리고 對南(대남)공작 자금에 들어가는 체제유지비다.
2007년 국정원은 미국 CIA와 합동으로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규모를 추적한 적이 있었다. 兩國(양국)의 국가정보기관이 이런 작업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미국측이 정보 공유를 꺼려 이 작업이 마무리되진 못했으나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규모를 추정할 수는 있었다고 한다. 그 규모는 15억 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40억 달러로 추정됐다.

핵을 껴안고 죽어가는 김정일

핵무기를 만들었다가 폐기한 나라는 남아공뿐이다. 白人 지배층이 인종차별로 세계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체제를 지키려고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핵폭탄 6개를 만들었으나 백인지배가 흑인지배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 故黃長燁 선생은 북한 정권의 핵개발 전략은 분명하고 간단하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핵무기의 힘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뒤 한국을 武力(무력)으로 공산화하려는 목적의 핵전략은 당분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김정일의 딜레마는 핵과 미사일 개발에 돈을 집어넣는 사이 경제가 망가졌고, 고립은 더욱 깊어졌으며, 이제는 黨과 軍의 간부층에서도 중국식 개혁 개방을 주장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핵을 껴안고 늪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이다. 김정일 정권의 몸에 매달린 偶像化(우상화)라는 돌덩어리가 침강 속도를 빨리하고 있다. 소련의 막강한 핵무기가 체제붕괴를 막지 못했듯이 핵무기가 김정일을 구할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4. 이스라엘式 비밀 핵개발


프랑스-이스라엘의 密約

1956년 10월 말 프랑스 수상(기 모레)과 국방장관, 이스라엘의 수상(벤 구리온)과 국방장관(모세 다얀)이 파리 근교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두 국가 지도부는 영국과 프랑스가 관리하던 수에즈 운하를 國有化(국유화)한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을 상대로 3國(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공동작전을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를 공격,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 또 다른 역사적 합의가 이뤄졌다. 프랑스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에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고 우라늄을 공급해주기로 한 것이다. 디모나는 그 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핵무기 개발 기지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가능하게 한 이 합의는 이스라엘이 영국과 프랑스에 협조한 代價(대가)이기도 하였다.
英佛과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은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전투에선 이기고 외교에선 지는 결과를 빚었다. 점령지를 내어놓고 철수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핵무장한 소련이 위협을 해오는데 핵무기를 갖지 못한 이스라엘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나라이든 핵무기 개발은 국가 지도부의 장기간에 걸친 계획과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1948년 建國(건국) 직후부터 핵개발을 추진한다. 建國의 아버지 벤 구리온이 직접 핵개발을 지도하였고, 서른 살에 국방부의 국장으로 임명된 시몬 페레스(현재 대통령)가 실무적으로 주도하였다.

핵폭탄 설계에 같이 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핵개발을 지원해줄 나라는 프랑스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 소련은 이스라엘에 무기 판매를 금지한 상태였다. 建國(건국) 직후 무기를 팔던 체코는 나세르가 정권을 잡고 親蘇 정책을 쓰자 이스라엘의 宿敵인 이집트에 무기를 팔기 시작하였다.
4공화국 시절의 프랑스 국가 지도부는 2차 대전중 反나치 저항운동, 즉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치의 대학살을 딛고 建國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도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핵시설(원자로, 재처리, 폭탄 설계소)로 기술자를 파견하였다. 수십 명의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프랑스 사람들과 같이 핵개발, 특히 핵폭탄 설계에 참여하였다.
두 나라 지도부는 인간적으로 친해졌다. 反나치 정서를 공유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비전과 열정이 프랑스 지도부를 감동시켰다. 이스라엘 핵개발의 실무 책임자 페레스는 급한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 閣議(각의)가 열리는 장소에 가서 수상을 중간에 불러내 “회의에서 이 사안을 꼭 의결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수상은 이를 흔쾌히 승낙할 정도였다.
프랑스-이스라엘의 협력관계는 전면적인 것이었다. 프랑스는 미라즈 전투기 등 재래식 무기도 이스라엘에 팔았다. 두 나라의 과학자, 군인, 관료, 정치인들이 서로 협력관계를 맺었다. 1958년 알제리 독립문제로 프랑스가 혼란에 빠지자 군부와 국민들의 熱火(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하여 政界(정계)에 복귀, 수상이 된 드골(개헌 후엔 대통령)은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상호 유착이 너무 심한 데 놀랐다. 그는 원자력 담당 장관을 불러 협력 중지명령을 내렸다. 이 장관(자크 수스텔)은 親이스라엘 성향의 소유자였고 의회에 독자적인 지지기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드골의 지시를 무시했다.

한 번 핵실험으로 두 나라가 핵무장

이스라엘은 핵개발을 비밀로 하기 위하여 여기에 들어가는 자금은 국가예산 항목에 넣지 않았다. 미국의 유대계 부자들이 모금하여 개발자금을 댔다.
1957년 말 미국의 U-2 정찰기는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서 건설중인 수상한 시설의 사진을 찍었다. 유명한 사진 분석가 디노 브루지오니는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용 원자로와 똑 같은 시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육상으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 공사장엔 많은 프랑스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분석결과는 CIA에 의하여 이듬해 초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런 정보에 민감한 2차세계대전의 영웅은 이 건에 대하여는 무심하였다. 보고자에게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런 보고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백악관의 참모들도 親이스라엘 성향이 강해 비밀 핵개발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U-2기의 정찰비행은 계속 되었으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1960년 2월13일 프랑스령인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프랑스 최초의 지하 핵실험이 있었다. TNT 환산 6만5000t의 폭발력을 보였다. 대성공이었다. 핵전문가들은 이날의 핵실험으로 두 나라, 즉 프랑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사실상 核무장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核기술을 이스라엘이 공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核실험 없이 核폭탄을 만든 것은 1966년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1차 핵실험 직후 드골 대통령은 친이스라엘 성향의 원자력 장관을 밀어내고 이스라엘과의 협력관계를 정리하라는 확고한 지시를 내렸다. 당시 프랑스 원자력청의 청장이던 프란시스 페린은 나중에 인터뷰를 통하여 1950년대에 프랑스와 이스라엘 팀은 공동으로 핵폭탄 설계를 했고, 2차대전 중 미국에서 입수한 기술을 근거로 연구하였다고 털어놓았다.
1960년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수상은 파리로 가서 드골과 담판을 했다. 救國(구국)의 영웅과 建國(건국)의 아버지는 만나자말자 서로 통하였다. 정부 차원에서 프랑스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프랑스 기업은 기존 계약에 따라 협력을 계속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프랑스 회사들은 디모나 핵시설을 다 지어주고 떠날 수 있었다.
드골이 이스라엘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최종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은 1967년 6월 전쟁 직후였다. 드골은 전쟁 직전 “어느 쪽이든 먼저 공격하는 나라를 응징하겠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알고도 덮어준 아이젠하워

1960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 후보가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에게 아주 작은 표차로 졌다. 정권 교대 작업이 진행중이던 12월18일 미국의 원자력 위원회 존 맥콘 의장은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이스라엘의 비밀 핵개발 정보를 흘렸다. 그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이스라엘 감싸기에 분노하고 있었다. 국가안보회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디모나 프로젝트의 전모를 보고하였다. 대규모 플루토늄 생산 기지 건설에 1억 달러가 들었고 미국의 유대인 모금 및 외국원조 자금의 轉用(전용)이 있었다고 했다. 영국 정보기관은 그 전에 이스라엘이 노르웨이로부터 원폭 개발에 필요한 重水(중수)를 사들여간 사실도 밝혀냈었다.
벤 구리온 수상은 1960년 12월21일 의회 연설을 통하여 처음으로 디모나 원자로 건설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평화적 목적의 사업이고, 이스라엘 전문가들이 주도한 공사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이젠하워 팀은 케네디의 정권 인수팀에 정보를 넘기고 떠나면서 디모나 원자로가 곧 플루토늄 생산을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핵확산 금지에 관심이 많았다. 이스라엘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하기 시작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1961년 5월 벤 구리온 이스라엘 수상이 미국을 방문,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이스라엘은 淡水化(담수화) 사업과 값싼 電力(전력)을 얻기 위하여 디모나 원자로를 짓고 있다’는 거짓말을 되풀이하였다. 케네디 정부는 벤 구리온의 訪美(방미) 직전에 조사관 두 사람을 디모나 시설에 보냈다. 그 중 한 사람 라비 교수는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이사였다. 와이즈만 연구소는 이스라엘 핵개발 기술자들을 양성한 곳이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측이 엉뚱한 설비와 구조를 보여주는 것을 믿고선(혹은 믿는 척하고선) “핵무기 개발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된 사건은 이스라엘로선 일종의 橫財(횡재)였다.

地下핵실험 없이 핵무장

후임 존슨 대통령은 유대계 인사들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거둔 이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눈을 감았다. 1963년 12월 드디어 디모나의 원자로가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한 달 뒤 이스라엘은 미국의 원자로 기술자 세 명을 디모나로 초빙, 시설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도착 직전 이스라엘은 가짜 통제실을 만들었다. 미국의 순진한 세 기술자들에게 이스라엘은 원자로를 보여주지 않고 가짜 통제실만 시찰하게 하였다. 세 기술자들은 미국과 이집트에 “디모나 시설은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스라엘은 원자로의 원료인 우라늄 原鑛(원광)을 프랑스로부터 수입하다가 나중엔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에서 ‘옐로우케이크’(원자로용으로 精製된 우라늄)를 사들였다. 1965년 이스라엘은 미국의 유대계 기업인 잘만 샤피로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원자로에서 나오는 물질의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90kg의 농축우라늄을 빼돌려 이스라엘에 건네주었다. 우라늄 핵폭탄 10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샤피로는 형사처벌도 받지 않았다. 존슨 행정부 시절 駐이스라엘 대사 바부르는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을 만족시켜주라.”
1968년 벨기에 브루셀의 한 창고엔 수백 톤의 우라늄 원광이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회사로 위장, 이를 수입하기로 하였다. 원광을 실은 터키 화물선은 안트워프 항구를 떠나 公海(공해)로 나온 뒤 이스라엘 배에 원광을 옮겨 실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연구를 한 경험이 있어 地下(지하)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폭탄을 만들었다. 1966년 가을에 네게브 사막 지하에서 핵폭탄 모형을 가지고 실험을 하였다. 전문가들은 이때 이미 이스라엘은 수소폭탄과 중성자탄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본다. 1967년 6월 전쟁 때는 이스라엘이 두 개 정도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6일 전쟁을 시작한 데는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무장을 하기 전에 끝장내야 한다는 강박심리가 작용하였다. 6일 전쟁은 이스라엘 전투기가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어 이집트 공군기지를 기습, 300대가 넘는 전투기를 활주로와 격납고에서 파괴함으로써 사실상 30분 만에 끝났다.

리버티호 격침의 미스터리

6일 전쟁중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1967년 6월8일 미 해군 6함대 소속 정보수집함 리버티호가 이집트 연안 공해상에서 이스라엘 전투기의 폭격과 어뢰정의 공격을 받고 침몰, 34명이 죽고 172명이 다쳤다. 공격을 받자 리버티호의 함장은 미 航母(항모) 아메리카호에 지원을 요청했다. 아메리카호 함장은 즉시 A-4 전투기를 발진시킨 다음 가이스트 6함대 사령관에게 보고, 사령관은 출격을 승인하였다. 직후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출격중지’를 명령하였다. 사령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최고사령관의 肉聲(육성) 명령이 없으면 중지시킬 수 없다’고 버티었다. 존슨 미국 대통령이 전화를 받더니 “장관 명령대로 하라”고 했다(레이건 정부 때 공군장관을 지낸 토머스 C. 리드가 쓴 ‘核급행’에서 인용).
이스라엘은 誤爆(오폭)이라고 변명하였으나, 리버티호가 이스라엘군의 작전계획을 탐지, 시리아에 넘겨줄까봐, 격침시켰다는 설이 있다. 라빈 참모총장은 이스라엘 공군기가 격침시킨 배가 소련 함정이 아니고 미군 함정이란 보고를 받곤 안도하였다고 한다. 소련 함정이었으면 군사적 보복을 각오해야 하는데, ‘다행히’ 미군 함정이므로 존슨 행정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자신감 뒤엔 미국의 유대인 세력이 존슨 대통령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존슨 행정부는 리버티호 격침 사건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존슨 대통령을 이은 닉슨도 親이스라엘 노선을 따랐다. 그는 대통령 선거와 캘리포니어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 지도부는 닉슨을 끝난 사람으로 취급, 홀대하였는데 당시 참모총장이던 라빈 장군이 닉슨을 부대로 초청, 환대하였다. 라빈은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되었고 駐美(주미)대사로 부임하였다. 닉슨은 라빈을 우대하였다. 6일 전쟁으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로부터, 골란 고원을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이스라엘은 두 나라를 상대로 低强度(저강도)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1969년 9월 골다 메이어 수상이 미국을 방문, 닉슨과 회담하였다. 메이어 수상은 25대의 팬텀기, 80대의 스카이호크 전투기, 그리고 2억 달러의 低利(저리) 차관을 요청하였다. 닉슨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런 평을 하였다.
<메이어 여사는 극단적인 强固(강고)함과 극단적인 친밀감을 동시에 표현할 줄 알았다. 이스라엘의 생존과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는 굉장히 강고한 태도를 보였다.>

닉슨-메이어 비밀협약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公認(공인)되지 않고 있다. 1991년 이스라엘 언론에 의하여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당시 닉슨의 안보 보좌관이던 키신저의 메모가 비밀해제로 공개된 적이 있다. 비밀협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공개적 선언이나 핵실험을 통하여 핵무기의 보유를 알리지 않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 사업(Nuclear Program)을 묵인하고 보호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작년 7월6일 오마바 대통령은 네탄야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한 직후, “이스라엘은 독특한 안보상의 필요성에 따라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안보상의 이익을 저해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도록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1969년의 비밀협약이 유효함을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메이어-닉슨 비밀협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핵보유를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게 되었다. 플루토늄으로 만든 핵폭탄은 정밀한 內爆(내폭)장치를 필요로 하므로 핵실험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으로 핵폭탄을 설계, 실험한 셈이므로 이 단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농축우라늄으로 만드는 핵폭탄은 분리된 우라늄을 臨界(임계)질량 이상으로 합치기만 하면 터지게 설계되어 있어 별도의 핵실험이 필요하지 않다. 북한정권이 이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수소폭탄이나 중성자탄은 핵실험이 필요하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 때 혼이 난 이스라엘은 중성자탄 개발에 착수하였으므로 핵실험장이 필요했다. 여기서 남아프리카가 떠올랐다.
1973년 이집트의 기습으로 시작된 4차 중동전쟁은 제1차 석유파동을 불러 세계를 경제침체로 몰고 갔다. 석유를 全量(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한국의 朴正熙(박정희) 정권은 기존의 親이스라엘 정책에서 親아랍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朴 정권은 벌려놓은 중화학공업 건설을 강행하고, 오일 머니가 모이는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등지로 건설업체를 진출시켜 중동 붐을 불렀다.
이 전쟁은 핵무장한 나라를 핵무장하지 않은 나라가 친 특이한 경우이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開戰(개전) 8시간 전에 이집트의 의도를 알았다. 미국의 CIA도 기습 직전에 있었던 이집트군의 훈련을 통상적인 것이라고 誤判(오판)하였다. 닉슨 행정부는 이스라엘로부터 開戰(개전)이 임박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소련과 이집트에 자제를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한 국가가 전쟁을 결심하고 D 데이를 정한 뒤 준비를 진행하기 시작하면 이를 중지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골다 메이어 수상은 이집트를 선제공격하자는 군부의 건의를 묵살하고 얻어맞는 쪽을 택하였다. 이스라엘이 또 선제공격을 하면 미국의 여론이 악화되어 군사원조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키신저도 선제공격을 하지 말도록 권유하였다.
기습을 허용한 이스라엘은 큰 피해를 입은 뒤 반격에 성공, 失地를 회복하였다. 이스라엘은 한때 핵폭탄 사용도 검토한 적이 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전투에선 졌으나 외교에선 이겼다. 그는 1978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6일 전쟁 때 잃었던 시나이 반도를 되찾아갔다. 그 4년 뒤 사다트는 평화협정에 불만을 품은 이슬람 강경세력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1996년엔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추진하던 라빈 수상이 이스라엘 강경파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이스라엘-남아공의 核 커넥션

1974년 골다 메이어 수상이 물러나고 라빈이 수상, 페레스가 국방장관이 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페레스는 ‘프렌치 커넥션’으로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成事(성사)시킨 사람이다. 그는 국방장관이 되자 南亞共(남아공)에 눈을 돌린다. 남아공은 인종분리 정책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국내에선 흑인들의 무장 반란이 일어나고, 이웃나라에선 親蘇 세력이 등장, 쿠바와 북한군을 불러들였다. 국내외로 불안이 증폭되자 남아공 정부는 체제유지를 위하여 핵무장을 결심하게 된다. 남아공은 우라늄 매장량이 많았다. 농축우라늄 방식에 의한 핵폭탄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1974년 페레스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南亞共(남아공)의 존 볼스터 수상을 비밀리에 만났다. 여기서 핵개발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그 내용은 공개된 게 없으나 이스라엘은 핵무기 관련 기술을 포함한 군사기술과 장비를, 남아공은 우라늄 原鑛과 핵실험 장소를 제공하기로 합의하였을 것이다. 1974년 여름 두 나라는 修交(수교)하고 대사를 교환하였다. 1976년 3월 페레스는 남아공을, 볼스터는 이스라엘을 방문, 核기술 교류를 촉진시켰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얻은 교훈에서 중성자탄의 개발을 전략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스라엘은 기습을 당할 경우, 自國 영토에서 핵폭탄을 써야 하는 상황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중성자탄을 쓰면 敵의 탱크부대 같은 집단 목표에 중점적인 타격을 주고 다른 시설물에 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1976년 소련은 남아공의 핵개발 계획을 탐지, 미국에 대하여 공동으로 발린다바의 농축우라늄 시설을 공습하자고 제의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1978년 1월 발린다바 시설은 무기용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대서양에서 중성자탄 실험

1979년 9월22일 지구를 돌고 있던 미국의 인공위성 벨라는 남아프리카 南端(남단)으로부터 남쪽으로 약2000km 떨어진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근처에서 일어난 폭발 장면을 촬영하였다. 아센션 섬에 있던 미 해군의 음파탐지기도 같은 시간에 폭발음파를 관측하였다. 푸에르토 리코에 있는 세계최대의 전파 망원경도 이상한 전자파를 잡았다.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및 북한 등의 비밀 핵개발을 다룬 ‘核급행’의 공동 著者(저자) 댄 스틸만은 뉴 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 핵폭탄 연구소 기술정보 담당 국장이었다. 1979년 어느 날 그는 다른 일로 CIA의 원자력 국장 잉글레이 박사를 만났다.
박사는 광선 분석 자료를 내어놓으면서 스틸만의 의견을 구하였다. 평생 핵실험 자료를 접하였던 스틸만은 즉석에서 “대기권 핵실험의 흔적이다. 틀림 없다”고 대답하였다. 잉글레어 박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이으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스틸만은 “핵실험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고 확인했다.
미국 정부는 9월22일의 폭발이 핵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도 공식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이를 인정할 경우 미국은 이스라엘에 제재조치를 취하여야 하는데 그럴 배짱이 없었다. 사실은 정책을 위하여 희생되었다.
이스라엘도, 남아공 정부도 침묵하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컨테이너에 넣은(음파 교란 목적) 작은 중성자탄을 바지선에 실어 폭파시켰다고 본다. 태풍이 부는 시기를 골라 터트린 것은 방사능이 바다로 쓸려나가 사라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디모나 핵시설에서 일했던 기술자 바누누는 1986년에 한 폭로에서 1984년부터 이스라엘은 中性子彈(중성자탄)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남아공 정부는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1983년부터 우라늄 방식의 핵폭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지름이 60cm, 길이가 180cm인 폭탄의 무게는 약1t이었다. 이 핵폭탄은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개발한 중거리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었다. 1989년까지 南亞共(남아공)은 약400kg의 농축 우라늄과 여섯 개의 우라늄 폭탄을 제조하였다.
남아공을 둘러싼 정세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冷戰(냉전) 종식, 앙골라에 배치되었던 쿠바군의 철수, 인종분리 정책의 재검토, 만델라와 정권 이양 협의 등. 1989년 남아공 백인주민은 클레르크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핵시설 및 폭탄의 해체를 명령하고, 1990년에 옥중의 만델라를 석방하였다. 백인정부가 핵무장 폐기를 결심한 것은 만델라가 영도할 흑인정부에 핵폭탄을 넘기기 싫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클레르크는 1993년 3월24일 국회에서 한 보고를 통하여 핵개발에 약4억 달러가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외국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이스라엘-남아공 커넥션이 끝났다. 남아공은, 일단 핵무장을 했던 나라가 국내외의 정세 변화에 적응, 핵을 포기한 유일한 사례이다.

영국의 언론재벌이 모사드 협조자

1980년대에 영향력의 절정기를 맞았던 영국의 언론 재벌 로버트 맥스웰은 체코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가족을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잃었다. 영국군에 들어가 장교가 된 그는 이스라엘이 建國하자 체코가 이스라엘에 무기를 대주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은 건국하자 마자 아랍국가들과 전쟁에 돌입하는데, 체코製 무기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1980년대 그는 데일리 미러, 선데이 미러, 데일리 레코드, 선데이 메일 같은 신문사와 출판사 및 텔레비전 방송국을 소유, 영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노동당 국회의원도 두 차례 지냈다.
1984년 맥스웰은 이스라엘 핵개발의 代父이기도 한 당시 수상 시몬 페레스(현 대통령)를 만난 뒤 해외정보기관 모사드의 적극적인 협조자가 되었다. 페레스는 모사드 부장 나훔 아드모니를 맥스웰에 직접 소개해주었다. 맥스웰은 巨物(거물) 언론인으로서 세계의 지도자들을 쉽게 만나고 다니면서 고급 정보를 수집, 모사드에 전해준다.
1986년 9월14일 맥스웰은 모사드의 아드모니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디모나 핵시설에서 근무했다는 한 기술자가 대리인을 통하여 자신이 소유한 신문사 선데이 미러에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여 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핵시설 사진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기술자의 이름은 디모나에서 9년간 근무한 적이 있는 모로코 출신의 유대인 모르데차이 바누누. 아드모니 부장은 페레스 수상에게 直報하였다. 모사드가 바누누의 행적을 조사하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바누누는 핵무기를 제조하는 시설까지 볼 수 있는 保安 허가증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핵폭탄을 수백 개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론 '核에 대하여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는 모호성을 核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이 모호성 덕분에 이스라엘은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核 강국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폭로가 이뤄지면 이 모호성과 유연성이 깨진다.
이스라엘 정부는 비상대책반을 구성하였다. 바누누를 암살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납치로 결정되었다. 모사드는 바누누가 선데이 타임스와도 접촉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들은, 로버트 맥스웰을 동원, 선수를 쳤다. 社主(사주)인 맥스웰의 지시로 선데이 미러는 바누누가 제공한 정보는 가짜로 밝혀졌다고 보도하였다.

核정보 폭로자 납치 작전

선데이 타임스는 기사를 쓰기 전에 영국의 핵전문가를 바누누와 만나게 하여 정보의 眞僞를 확인하게 하였다. 그 결과는 '진짜'였다. 선데이 타임스는 바누누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운트바텐 호텔에 투숙시켰다. 모사드는 런던에 사는 협조자들을 동원, 바누누의 거처를 알아내곤 美人計를 쓰기로 하였다. 모사드의 여성 첩보원 세릴 벤 토브가 동원되었다. 그는 결혼한 상태에서 이 작전을 자원하였다.
9월24일 바누누는 늘 따라다니는 선데이 타임스 기자를 따돌리고 호텔 바깥으로 산책을 나갔다. 타임스 기자는 그를 몰래 미행하였다. 기자는 바누누가 라시세스터 광장에서 한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금발의 미녀였다. 유대인 냄새가 났다.
호텔로 돌아온 바누누는 타임스 기자에게 "신디라는 미국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기자가 "당신이 그 여자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계획된 것 같다"고 경고했지만 바누누는 듣지 않았다. 모사드 첩보원 세릴은 훈련 받은 대로 첫눈에 바누누를 사로잡은 것이다.
며칠 뒤 공작원 '신디'는 로마에 사는 여동생을 만나러 가자고 바누누를 설득, 로마行 비행기에 올랐다. 이 여객기엔 다섯 명의 모사드 요원이 同乘(동승)하였다. 로마 공항에서 신디와 바누누는 택시를 타고 신디의 여동생이 산다는 아파트로 갔다. 세 명의 모사드 요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바누누를 끌어들여 마취시켰다. 요원들은 바누누를 들것에 실어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선 구급차에 옮겼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웃사람들에겐 "친척인데 갑자기 발병하였다"고 설명했다.
바누누를 실은 차는 해안으로 달려갔다. 작은 배에 옮겨진 바누누는 먼 바다에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화물선으로 다시 옮겨졌다. 사흘 후, 바누누를 납치한 요원들은 이스라엘의 하이파 항에 도착하였다. 선데이 타임스는 10월에 바누누의 폭로를 기사화하였다. 이스라엘이 적어도 100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다고 썼다.
바누누는 간첩죄로 18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1년간 독방에 감금되었다. 국제여론이 나빠지자 1998년에 좀 좋은 방으로 移監(이감)되었다. 그는 2004년에 석방되었으나 이스라엘 당국은 엄격한 제한 조치를 취하였다. 출국은 금지되고 외국인을 만날 수 없으며, 항구와 공항에 접근할 수 없게 하였다. 전화도, 인터넷도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규정을 어기면 석방조건 위반으로 수시로 잡아 가둔다.
1991년 11월5일 로버트 맥스웰은 카나리아 군도 근해를 항해중이단 자신의 호화요트에서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 失足死로 발표되었으나 자살이란 설과 모사드에 의한 암살이란 설도 있다. 사고 직전 한 전직 모사드 요원은 미국에서 발간한 책을 통하여 맥스웰과, 데일리 미러의 외신부장 닉 데이비스를 모사드 요원이라고 지목하였다. 데일리 미러는 맥스웰이 모사드에 의하여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실었다. 맥스웰은 이스라엘에 묻혔는데 國葬에 버금가는 장례식이었다.

이란 핵 과학자 암살

바누누 납치 사건은 이스라엘이 自國(자국)의 핵 정보를 보호하려는 필사적 의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핵무기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中東(중동) 이슬람 국가가 핵무기를 갖는 것은 반드시 저지한다는 방침도 확고하다.
연평도 도발로 東北亞 정세가 긴장되어 있을 때인 지난 해 11월29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연쇄 암살 시도가 있었다. 核물리학자인 마지드 샤리아리는 부인과 경호원을 태운 푸조를 몰고 출근 길 停滯(정체)가 심한 市內를 달리고 있었다. 이때 오토바이 한 대가 옆에 오더니 푸조 문짝에 무엇인가를 붙이고 사라졌다. 직후 차는 폭파되었다. 샤리아리는 즉사하고 다른 탑승자들은 중상을 입었다.
몇 분이 지난 테헤란의 주택가, 또 다른 核물리학자인 아바시 다바니가 탄 차 옆에 오토바이가 따라 붙었다. 다바니는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서 유엔 안보리의 對이란 제재결의문에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관계하는 인물'이라고 특정된 사람이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車體에 무엇인가를 붙이는 것을 본 다바니는 차를 세우고는 타고 있던 부인을 끌어내렸다. 직후 차가 폭발하였다. 다바니는 목숨을 건졌다.
작년 1월엔 核개발에 종사하는 이란 과학자 마수드 알리 모하마디가 같은 방법으로 암살되었다. 이스라엘이 일련의 암살작전에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에게만 보복을 하는 게 아니다. 敵國(적국)의 핵, 미사일, 신형 대포 등 신무기 개발에 종사하는 과학자에 대하여도 國籍을 묻지 않고 암살을 해온 경력이 있다.
1980년 6월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기관 모사드의 암살 팀은 이라크의 후세인 政權에 협조하는 이집트인 核전문가 예히아 엘 마샤드를 파리의 한 호텔에서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암살팀은 총기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마샤드가 투숙한 방으로 들어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옆방에 있던 창녀는 경찰에 자신이 들은 소란에 대하여 증언한 직후 뺑소니로 위장한 교통사고로 피살되었다.
1980년대, 후세인의 이라크 정권은 캐나다 출생으로 벨기에서 활동하던 기술자 제랄드 불과 '수퍼 건' 제작 계약을 맺었다. 射程거리가 수천 km나 되는, 핵폭탄을 쏠 수 있는 大砲를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이 大砲 제작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1990년 3월 모사드의 암살단이 벨기에 브루셀의 한 아파트 문을 노크하였다. 제랄드가 문을 열자 다섯 발을 쏴 죽였다. 그들은 제랄드의 屍身 사진을 찍어 대포제작에 관계하는 유럽 기술자들에게 이런 글과 함께 보냈다.
<비슷한 운명을 맞지 않으려면 내일부터 일하러 가지 말라>
이스라엘은 북한정권을, 이란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을 지원하는 敵으로 간주한다. 北의 核 및 미사일 개발에 종사하는 要人들도 모사드의 암살 리스트에 올라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암살과 보복의 경력이 화려하지만 민주국가이다.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自由度(자유도) 랭킹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中東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나라'로 분류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에 적용되는 원칙이지 국방과 安保를 민주적으로 할 순 없다. 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安保 전선에선 自衛(자위)의 원칙이 가장 유효하다.

核미사일 실전 배치라는 악몽


북한정권이 核폭탄을 小型化(소형화), 장거리 미사일에 장착, 實戰배치함으로써 한국의 생존을 위협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라늄농축 시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核무기 量産체제를 갖출 것이고 북한은 核강국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北이 천안함 爆沈과 연평도 도발 같은 사건을 일으켜도 核무기를 갖지 못한 한국군은 응징을 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한국의 從北세력은 北이 도발해도 무저항주의로 나가야 한다면서 한국을 北에 종속시키려 할 것이다. 從北세력이 정치와 언론을 장악한 상태에서 북한군이 기습남침, 서울을 포위하고 "현위치에서 휴전하자. 불응하면 핵무기를 쓰겠다"고 위협할 때 국가지도부가 과연 決死항전을 결단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韓美연합사가 해체되는 2015년 후라면 미국이 한국을 위하여 核전쟁을 각오하고 核무장한 北을 武力응징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핵무장한 북한정권은 남침을 하더라도 반격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한미 연합군이 휴전선을 넘어 반격을 시작하면 핵무기를 쓰겠다고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北의 核개발을 막지 않았고 사실상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싱가포르 李光耀(이광요) 전 수상은 '北이 美中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중국은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北의 핵무장을 막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그런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은 이미 국제사기극으로 드러났다. 우리 정부는 아직도 6자회담에만 기대를 걸고 '대화를 통한 해결, 평화적 해결'을 주문 외듯 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북한이 '核미사일 實戰배치'를 향한 초읽기에 들어간 위기상황에서도 '복지 포퓰리즘'만 노래하면서 딴 나라 일처럼 구경만 한다.
敵이 핵무기를 가졌는데도 자위적 차원의 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조차 생기지 않는 곳은 지구상에서 한국뿐이다. 미국이 제공한다는 核우산은 北의 核무장에 의하여 이미 '찢어진 우산'이 되었다. 核무장을 막지 못한 核우산은 우산이 아니다. '찢어진 우산'에 5000만 국민의 생존을 맡길 수 있는가.

外注국방?

북한정권을 무너뜨리든지, 北核 시설을 폭격하든지, 공개적으로 對應(대응)핵무장을 하는 수밖에 없다. 安保를 외국이나 국제사회에 의존하는 나라는 독립국가가 아니다. 조갑제닷컴(chogabje.com)의 인터넷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대응핵무장에 찬성하는 여론이 99%였다. 핵확산금지 조약(NPT)도 '핵문제와 관련된 비상사건이 自國의 최고이익을 위태롭게 한다고 판단한다면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자신을 지키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든지 안보문제에서 敵의 눈치를 보는 자는 노예이다. 中北이 핵무장을 배경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敵을 편드는 從北세력을 방치하는 나라는 자살을 결심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민행동본부는 신문광고를 통하여 <戰犯집단의 核 미사일 實戰배치를 저지하기 위하여 국민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국방까지 미국에 外注(외주)를 주고 웰빙에만 탐닉할 것인가? 살찐 돼지 같이 살다가 야윈 늑대에게 잡혀먹힐 것인가?>라고 호소하였다.
金泳三(김영삼) 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지냈던 尹龍男 예비역 대장은 인터넷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한국은 미국의 核우산만 믿고, 북한이 核무기를 투발할 징후가 있으면 선제 타격할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선제 타격을 할 수 있을까? 누가 징후를 자신 있게 確證하고 신속하게 타격을 결심하여 통수권자에게 건의할 것이며, 통수권자는 즉각 시행을 명령할 수 있을까?>
그는 ‘재래식 무기만 가진 군대가 核무기를 가진 敵과 과연 전쟁이 가능할까?’라고 질문한다. ‘韓美연합사의 해체로, 미국의 지원與否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북한의 핵무기 투발 위협에 대해 미국이 一戰不辭의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라고도 했다.
尹 장군은 ‘하루 빨리 미국과 협력하여 미국의 전술 핵무기를 이 땅에 재배치하든지 그것이 안 되면, 국민 여론을 고조시켜 경제가 다소 어려움을 겪더라도 나라의 命運을 생각하여 우리도 核무기를 개발, 보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안 되면, 북한이 핵무기를 實戰 배치하기 전에 죽기를 각오하고 폭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세계 最貧國인 북한의 核무장 위협에 언제까지 불안하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했다.

현상유지의 달콤한 생활을 끝낼 때

한미 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였던 金鉉宗 전 통상교섭본부장·유엔대사(현 삼성전자 해외 법무담당 사장)는 최근에 펴낸 책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홍성사)에서 이렇게 썼다.
<백악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오찬 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미국과 중국은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큰 나라 간에는 크게 타협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큰 나라들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고, 여기에 휘말려 國益(국익)을 훼손시키는 일이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미사일과 핵무기, 화학무기, 장사정포 등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능력을 강화하고, 일본과 중국의 군사력에 대한 최소한의 억지력도 확보해야 한다. 현상유지의 지속은 달콤하겠지만, 그 끝은 우리나라와 민족의 약화 내지 소멸로 나타날 것이다.>
북의 핵미사일 위협에 관한 대응조치란 한국의 핵무장밖에 없다. 한 전직 장관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행정복합도시를 건설할 때 지하도시를 만들고 여기에 비밀 핵시설을 두어 단기간에 핵폭탄을 제조할 것이다. 그런 다음 북한정권에 대하여 ‘장난감 같은 핵무기로 우리를 협박하지 말라’고 하고 주변국에는 ‘우리는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이 있다. 다만 북한도 동시에 핵을 포기하여야 한다’고 선언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북핵 문제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 미국의 힘을 빌어 北核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건 노예근성이다. 미국의 협력을 받아 핵무장을 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아프간에 1개 연대나 여단병력을 보낸 뒤 오바마 대통령에게 ‘재처리 시설을 갖도록 해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국에선 정신병자 취급을 하는 풍토이지만 이스라엘에선 상식일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없다. ‘북한의 핵미사일 實戰(실전)배치’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현상유지란 달콤한 생활도 끝낼 때가 되었다.

남을 죽이려면 자신도 목숨을 걸어야

안보상의 國益(국익)을 위하여 암살을 마다하지 않는 이스라엘 지도부는 생활이 청렴하다. 남을 죽이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거는 사람은 생활과 생각이 복잡해선 안 된다. 골다 메이어 할머니 총리는,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죽인 팔레스타인 테러단을 전원 암살하라고 정부에 명령한 이다. 그의 삶을 엿보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탈리아의 인터뷰 전문 여기자인 올리아나 팔라치는 1972년 11월 골다 메이어 총리를 인터뷰하였다. 팔라치는 두 번 인터뷰하여야 했다. 첫 번째 인터뷰를 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와 호텔에 투숙하였는데, 누군가가 녹음 테이프를 훔쳐갔던 것이다(팔라치는 리비아 정보기관 요원들을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메이어 총리는 이 소식을 듣자 인터뷰를 다시 하자고 연락을 취하였다.
일찍 남편과 이혼한 메이어 총리는 빌라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빌라 앞에 경호원이 서 있을 뿐이었다. 메이어 총리는 낮에 한 소녀를 불러 청소를 시킬 뿐 요리도 직접 하였다. 팔라치와의 인터뷰 전날 메이어 총리는 손님들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였다. 회식은 새벽 2시에 끝났다. 손님들이 돌아가자 총리는 새벽 3시30분까지 설거지를 하였다. 3시간 남짓 잠을 잔 74세의 할머니 총리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집무를 시작하였다. 팔라치가 오전 10시에 메이어를 만나니 피로해 보였다고 한다. “인터뷰를 연기해도 좋습니다”라고 했지만 메이어는 “이렇게 멀리 오셨잖아요. 테이프를 도둑 맞고…”라고 오히려 위로했다.
팔라치 기자는 긴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지기 직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메이어 여사님, 죽음을 어떻게 봅니까?
“저의 한 가지 걱정은 너무 오래 사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죄도 아니고 자랑도 아닙니다. 계단을 뛰어서 오를 수 없다든지, 점프를 할 수 없다든지 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게 없어요. 문제는 정신력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너무 일찍 죽은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듯이 너무 늦게 죽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 좋던 知性(지성)이 망가져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치욕입니다. 그런 치욕이 나에게 생기지 않기를 바라죠. 내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한 가지 걱정은 너무 오래 사는 것입니다.”
골다 메이어 총리의 소박한 삶은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 지도부가 용감한 것은 청렴한 덕분이다. 지도자는 깨끗한 만큼만 용감해질 수 있다.


5. 核에는 核-自衛的 핵무장론
“국가가 결심하면 2년 안에 핵실험 없이 100개 이상의 핵폭탄 만들 수 있다.”


“핵개발 하다가 망한 나라는 없다”

필자는 ‘한국의 自衛的(자위적) 핵개발’을 주제로 강연을 자주 한다. 북한정권의 핵무기를 폐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이런 反論(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한 안보포럼에서 예비역 중장이 했던 주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합니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한국은 핵을 개발하면 망합니다.”
물론 이런 俗說(속설)에 대한 답변은 준비되어 있다.
“핵을 개발하다가 망한 나라는 없습니다.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는 지금 미국으로부터 제재는커녕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습니다. 북한정권도 核(핵)을 개발하면서 한국으로부터 100억 달러 이상의 금품, 미국으로부터는 10억 달러어치 이상의 重油(중유)와 식량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매년 30억 달러씩, 파키스탄은 2001년 9? 테러 이후 매년 20억 달러 이상씩 미국의 무상원조를 받습니다. 인도와 미국은 밀월관계입니다. 인도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나라가 미국이고, 원자력 발전소와 무기까지 팔겠다고 합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도 핵을 개발하려다가 포기한 대가로 주한미군 잔류,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대한 지원 등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國益을 지켜주고, 파키스탄은 對테러 전쟁에 협조하고,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미국과 협조하므로 미국이 핵무장을 묵인한 것입니다. 東北亞에서 한국은 이들 세 나라보다 미국에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국의 몸값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한국처럼 경제적, 지정학적, 군사적 가치가 큰 나라는 핵개발을 해도 제재가 먹히지 않습니다. 朴 대통령이 핵개발을 포기한 이유는 압력에 굴복해서가 아니고, 얻을 것을 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한국은 1970년대의 한국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東北亞의 이스라엘’ 수준 이상일 것입니다. 세계 5대 공업국, 5대 원자력 기술국, 7대 수출국, 8대 군사력(재래식), 9대 무역국에 드는 한국이 중국 편으로 기울면 일본도 버틸 수 없을 것이고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覇權(패권)국가가 됩니다. 이런 한국이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갖겠다는데 미국이 정말 제재를 할까요? 우리가 被원조국입니까? 한국에 경제재재를 하면 미국은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韓美동맹이 중요하지만, 한국에 미국이 소중한 만큼 미국에도 한국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미국, 중국, 유엔 등 국제사회가 北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은 이미 찢어졌어요. 우리는 중국 미국의 무능에 의한 피해당사국이에요. NPT(핵확산금지조약) 10조도 이런 경우, 즉 敵의 핵개발로 국가 생존 차원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는 사전에 통보하고 탈퇴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았습니다. 우리는 ‘6자 회담이 6개월 안에 北核(북핵) 폐기에 실패한다면 NPT에서 탈퇴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핵문제의 주도권은 대한민국이 쥐게 됩니다. 주도권을 北의 손에서 빼앗아오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넓어집니다. 핵게임을 즐길 수도 있어요. 국가가 결심만 하면 2년 안에 100개 이상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한국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북한더러 ‘야, 그런 장난감 같은 핵폭탄으로 불장난 하지 말고 우리 다 같이 폐기하자’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왜 안 됩니까? 핵확산의 피해당사국이 자위적, 평화적, 합법적 목적의 핵개발을 하는데 누가 막습니까?”


인도와 파키스탄 제재가 지원으로 돌변


미국은 1998년에 核실험을 한 인도와 파키스탄에 무기 기술 경제 금융 분야에서 제재를 가한 적이 있다. 핵심적인 제재는 원자력 관련 기술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01년 부시 행정부는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기로 하고 제재를 풀어가기 시작하였다. 9? 테러 이후엔 아프가니스탄 작전에 협조한 파키스탄에 대한 제재도 완화하기 시작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22일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재재를 해제하였다.  
 부시는 최근 회고록에서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파키스탄의 對테러 작전 협조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는 제재를 풀고, 파키스탄을 非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하였다. 그들의 對테러 예산을 지원하였으며 의회가 30억 달러를 경제원조 하도록 했고, 우리의 시장을 열어 파키스탄의 상품과 용역을 수입하도록 했다>  
 2005년 7월 부시 대통령과 인도 싱 수상은 공동성명을 통하여 美-印 민간 원자력 협력 협정을 추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2008년 10월 美 의회는 이 협정을 승인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인도는 군사적 핵시설을 제외하고, 민간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 기구의 사찰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미국은 인도에 원자력 기술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나서서 美 의회, 국제원자력 기구, 원자력공급국가회의를 설득, 對인도 제재를 풀어 줄 것을 로비하였다. 농축 및 재처리 관련 자재도 인도에 공급할 수 있게 하였다. 핵확산 국가를 제재하도록 되어 있던 미국의 국내법은 國益 앞에서 흐물해졌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미국-인도 원자력 협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주국가와 가장 큰 민주국가 사이의 관계를 향상시키려는 우리 노력의 결정이었다>면서 <인도는 인구가 10억 명이고, 잘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있는 나라여서 미국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자력 협정은 인도가 국제무대에서 맡을 새로운 역할을 알리는 역사적 巨步였다>고 自讚(자찬)했다.  
 인도 원자력 건설시장의 규모는 앞으로 10년간 1500억 달러 규모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美印 원자력 협정에 따라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1년 9? 테러 이후 파키스탄에 막대한 지원을 해온 미국은 작년에, 향후 5년간 군사지원 20억 달러, 민간지원 75억 달러를 또 약속하였다. 파키스탄은 親中국가인데도 이렇게 특혜를 주었다.

부시의 暗示?

 1998년 3월 인도 총선에서 집권한 중도우파 정당(자나타)은 핵실험을 하겠다고 공약했었다. 바즈파이 총리는 취임 즉시 핵실험을 지시, 두 달 뒤 地下 핵실험이 이뤄졌다. 그 직후 클린턴 미국 대통령 등에게 바즈파이 총리가 보낸 편지는 한국이 핵실험을 한 뒤 어떤 논리를 세워야 하는가 참고가 될 만하다. 
 <우리는 핵무장한 나라(중국)와 國境(국경)을 접하고 있다. 1962년 인도를 무장 침공한 나라이다. 지난 年代에 두 나라의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으나 不信은 여전하다. 이 나라는 우리의 다른 이웃 나라(파키스탄)가 핵무장을 하도록 돕고 있다. 이 나라는 지난 50년간 우리를 세 번이나 침공한 적이 있고 테러공격을 부추긴 前歷이 있다> 
 인도와 한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등 國力이 비슷하다. 敵國으로부터 수많은 침공과 위협을 받아온 점에서도 같다. 물론 한국의 경우가 더 심한 피해국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있는 점에서도 같다. 한국이 핵무장을 한다고 미국이 경제재재를 하고 韓美동맹을 해체할 것인가? 핵무장한 한국이, 철강생산량은 세계 전체의 50%(약6억t)이고, 3조 달러의 외환보유고(2위인 일본의 세 배)를 가지고 연평균 9%(복리)의 고도성장을 계속하는 중국 편으로 기울면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부시 정부는, 2008년에 아무런 양보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정권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준 나라이다. 천안함 테러를 자행해도 再지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제재를 가한다면 미국의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나온 도널드 럼스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의 회고록엔 묘한 대목이 있다. 그는 중국이 한반도의 非核化보다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저지하는 데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일본, 한국, 대만이 북한의 核에 대응하기 위하여 核무장을 추구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중국은 자신들의 현재 태도에 관하여 후회하게 될 것이다> 
 2002년 10월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江澤民(강택민) 중국 주석을 크로포드 목장에 초청, 회담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부시 회고록).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 부정적 영향력을, 중국은 긍정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우리 두 나라가 이를 결합시킨다면 근사한 팀이 될 것이다.”
 江澤民은, 북한은 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이고,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라고 말했다. 몇 달을 기다렸으나 진전이 없자 부시는 새로운 論法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그는 江澤民에게 ‘만약 북한이 核개발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일본이 核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통보하면서,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군사적 공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압박하였다는 것이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6개월 뒤 6者 회담이 열린 것은 이 압박 덕분이란 투로 이야기하였다. 미국은 속으론 일본과 한국이 核개발 카드를 써주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부시와 럼스펠드의 말은 "왜 한국은 核개발을 추진하지 않는가. 그렇게 해야 중국과 북한의 억지에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국이 NPT를 탈퇴하고 自衛的 차원의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나와도 우리는 반대하는 척만 하겠다"는 암시로 해석된다.

 
사대주의적 戰略문화


敵이 핵무기를 개발하였는데도 상대방 정부나 국민들이 "우리도 核개발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敵이 自國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네 번(1ㆍ21 사건, 아웅산 테러 등)이나 공격을 했는데도 敵의 책임자를 암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지 못하는 나라도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한 예비역 장성은 “한국이 핵무장을 한다고 해야 미군의 존경을 받을 것이고 전략적 가치가 올라 갈 것이다. 미군 상층부엔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에 대응하는 한국군의 희미한 태도를 보고 ‘이런 한국군을 과연 믿을 수 있나’라는 의문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韓民族은 신라의 통일전쟁 이후 1300년간 단 한번도 他國을 겨냥, 전쟁을 결심한 적이 없다. 이 또한 세계기록일 것이다. 조선조는 사대주의를 외교와 국방의 기본으로 삼았다. 自主(자주)국방을 포기하고 안보를 大國에 의탁한 것이다. 공동체의 생존문제를 외국에 맡기는 지배층과 백성들은 반드시 정신적으로 타락한다. 말장난에 능한 文民이 武班(무반)을 억누르면서 정권을 좌지우지하니 나라는 실용ㆍ尙武(상무)정신을 잃고 文弱으로 흘렀다. 전쟁과 군사는 무조건 惡이란 생각이 깊어갔다. 여기에 日帝(일제) 36년의 식민지 체질이 더해졌다.  
 광복 후,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피를 흘렸음에도 사대주의적 근성은 여전하다. 문화의 놀라운 지속력이다. 韓美동맹은 한국의 생명줄이나, 조선조의 對中사대주의 노선처럼 한국인을 무책임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정치인과 국민들이, 안보를 미국에 맡겨놓고 政爭과 웰빙에 탐닉하도록 했다. 從北좌익 세력의 끈질긴 '위선적 평화론'이 안보의 기반인 彼我식별 기능을 마비시키고 尙武정신을 좀 먹었다.
 6? 남침 전쟁을 거치면서 70만 大軍이 만들어졌으나 이런 戰略 문화의 磁場(자장) 속에서 점차 강건함을 잃어갔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서 국가 및 국군 지휘부가 보여준 비굴한 모습은 韓民族의 골수에 사무친 사대주의적, 노예근성의 필연적 발로라고 봐야 할 것이다.  
 國軍의 아버지인 李承晩, 富國强兵의 건설자인 朴正熙가 한때 사대주의적 전략문화를 혁파할 수 있는 청신한 분위기를 불어넣었으나 민족성을 바꾸는 데는 더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은 거의가 反軍的 성향을 가졌다. 이들이 정권을 잡고 북한의 무장집단과 대결하니 여러 가지 부작용이 빚어졌다. 이런 풍토에선 "우리도 核개발을 해야 한다" "북의 核시설을 폭격해야 한다"는 당연한 말들이 과격한 것으로 치부되고 만다.
 요사이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自衛的 核무장론'은 이런 변태적인 戰略문화를 혁파하고, 백성 같은 국민들을 각성시켜 一流국민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드는 話頭(화두)가 될 것이다. 一流국민의 제1조건은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단결하고 희생을 감수한다"는 정신이다. 한국의 核무장은 민족성의 일부가 된 사대주의, 노예근성, 文弱性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이다. 핵무장이 조국 선진화의 길이다.
<현재 진행되는 핵무장론은 한국의 핵무장을 통하지 않고는 북한의 핵무기를 철폐할 도리가 없다는 단순한, 그러나 준엄한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다. 核을 가지지 않는 나라가 기왕 보유한 상대방의 核을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국과 국제사회는 그동안 이처럼 말이 되지 않는 허상을 쫓기 위하여 북한과 수십 년 동안 말이 되지 않는 협상을 벌여온 것이다. 한국의 核무장론은 북한의 核을 제거하기 위한 궁극적 방법이 무엇인가에 관한 현실적인 인식 결과이다>(李春根)

2015년 연합사 해체 전에 핵무장해야

 지난 3월3일 애국단체총협의회 주최 自衛的 핵무장 관련 심포지엄에서 朴定洙 전 해병대 준장(워 게임 전문가, 前 연합사 대항군 사령관)은 ‘북한의 核무장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지적하였다.
 
 1. 한국이 武力위협을 받지 않고 영토와 영해를 지킬 수 있는가?
 2. 核을 보유한 북한을 상대로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이 가능한가?
 3. 한국이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번영을 지속하며 선진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가?
 
 朴 장군은 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라고 했다. 북한정권이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實戰(실전)배치, 미국과 일본까지 위협할 수 있게 된다면 한국은 北의 ‘핵인질’이 될 것이다. 北은 다양한 核戰略(핵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核戰力과 재래식 무기와 從北(종북)세력을 결합시킨 여러 가지 공세가 가능하다. 局地(국지)도발, 全面(전면)남침, 핵공갈 등 여러 방법으로 남한 赤化나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려 할 것이다. 朴 장군은 미국이 약속한 '核우산'은 北核에 대한 억지력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核우산은 韓美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하고 있으나, 조약의 실행은 미국의 헌법절차, 즉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불완전한 약속이다. 유사시 미국의 개입을 자동적으로 유발하던 韓美연합사는 2015년에 해체될 것이다. 북한의 끈질긴 주한미군 철수 공작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핵우산을 억지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억지력이 되지 못한다. 북한이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면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하는 것을 억지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 국민과 의회는 핵 戰場에 아들 딸들을 보내지 않으려 할 것이고, 남북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북한 측이 판단할 것이다. 核과 같은 국가안보의 치명적인 위협에 대한 억지는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
한국은 ‘핵우산’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2015년 한미연합사 해체 전에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하나의 時限(시한)을 가진 셈이다.
<各軍 내부와 各軍 사이에서 긴축된 국방비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한 점을 감안하여 앞을 내다 본다면, 육군은 가장 그럴싸하고 最善인 작전 시나리오가, 아시아나 페르샤만, 또는 기타 지역에서, 해공군력이 동원되는 전투란 현실을 직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또 다시 대규모 지상군 병력을 아시아나 中東이나 아프리카로 파견하라고 건의하는 미래의 국방장관이 있다면, 맥아더 장군이 그토록 조심스럽게 말하였던 대로, '그의 두뇌를 검사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 경고는 로버트 M. 게이츠 美 국방장관이 지난 2월25일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한 연설의 일부이다.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美 육군병력을 대규모로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란 대목이 걸린다. 북한군이 남침하면 最多 63만 명의 美軍이 전개되도록 한 韓美연합 작전계획이 그대로 실천될지 의문이란 이야기이다.
북한군의 남침엔 한국군이 主軸이 되어 대응해야 한다. 그런데 그 북한군은 핵무기를 갖고 있다. 美軍의 대규모 증원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데, 핵무기를 갖지 않은 한국군이 양적으로는 國軍의 두 배나 되는 북한군이 核무기와 從北세력을 믿고서 全面 남침을 개시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우리도 核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런 절박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미국은 서울을 위하여 뉴욕을 희생시킬 것인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核共有정책'이란 걸 갖고 있다. 核무기를 개발하지 못한 국가가 核보유국가의 核무기를 自國영토에 가져다 두고 戰時엔 공동으로 사용에 참여하는 제도이다. 3大 核보유국인 프랑스, 영국, 미국 가운데 미국만이 이 정책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11월 현재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터키가 미국의 核무기를 自國 영토에 보관하고 있다. 거의가 전술핵무기이다. 평시엔 이 核무기의 관리권을 미국이 갖는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과 해당 국가가 공동으로 협의하여 사용한다.
 미국은 核共有 정책이 없으면 독일이 소련의 核위협에 대응, 독자적으로 核개발을 할 것으로 보고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이다. 만약 한국이 北核에 대응, 자위적 核개발을 할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하여 한국에 전술核무기를 배치하고 공동사용권까지 보장해줄지 모른다.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實戰(실전) 배치하는 날이 다가오는데, 우리는 核무장을 막지 못한 미국의 핵우산을 계속 믿고서 6자회담판에 안주, 北核(북핵)을 사실상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핵우산’은 미국이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핵폭탄을 사용할 의지가 있을 때만 유효하다. 만약 북한이나 중국이 서울에 핵폭탄을 투하하면 미국은 북경과 평양을 향하여 핵폭탄을 실은 미사일을 쏠 것인가? 그렇게 하면 로스엔젤스나 뉴욕이 核공격을 받을 것이다. 즉, 미국은 서울을 위하여 뉴욕을 포기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미국 여론과 議會가 이를 허용할 것인가? 
 미국이 전술核무기를 한국에 재배치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이 배치한 전술核무기의 관리 및 사용에 한국이 공동으로 참여한다면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지 않고 미국이 전술核무기를 갖다 놓기만 한다면 큰 의미가 없다.
 프랑스가 NATO를 믿지 않고 독자적인 核무장을 한 것은 미국이 소련의 核공격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가 지도부는 비록 프랑스가 약하더라도 더 강한 소련에 核억지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략론을 발전시켰다. 드골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10년 안으로 우리는 러시아 사람 8000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할 것이다. 나는, 8000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일 수 있는 나라를 그들이 간단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8억 명의 프랑스인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물론 프랑스인이 8억 명이라면 말이다."

10大 핵폭탄 제조 잠재국


한 국가가 核개발을 결심한 이후 核폭탄을 갖게 되기까지의 기간을 보면 이렇다.
 
 1. 미국, 1941년 12월에 결심, 1945년 7월에 핵실험. 3년7개월 걸림.
 2. 소련, 1945년 8월에 결심, 1949년 8월에 핵실험. 4년 걸림.
 3. 영국, 1947년 1월에 결심, 1952년 10월에 핵실험. 5년10개월 걸림.
 4. 프랑스, 1954년 12월에 결심, 1960년 2월에 핵실험. 5년3개월 걸림.
 
 武器級(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원자로가 가동하고 나서 核실험을 하기까지의 기간은 이렇다.
 
 1. 미국: 10개월
 2. 소련: 14개월
 3. 영국: 27개월
 4. 프랑스: 49개월
 5. 이스라엘: 40개월 미만
 6. 중국: 26개월
 
 한국의 현재 원자력 관련 기술은 1940년대의 미국, 1960년대의 중국보다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 플루토늄을 多量 함유한 사용후 核연료도 많다. 여기서 플루토늄을 재처리해내기만 하면 核폭탄의 재료를 확보한다.
<한국은 核무기는 없으나 레이저 재처리 우라늄 농축기술력과 플루토늄 추출 기술, 遠心(원심)분리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레이저 농축기술은 세계가 괄목할 만한 경지에 이르고 있으며 有事時 단기간에 核무장도 할 수 있는 재정적, 기술적 역량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TNT 高爆(고폭) 실험을 통하여 核폭발에 관한 工學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핵실험 없이 슈퍼컴퓨터만으로도 核탄두 설계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간 우리 原電에 쌓인 사용후 핵연료는 1만t에 육박하고, 이중 플루토늄이 수십t으로서 핵폭탄 한 발 제작에 8kg이 필요하니 플루토늄 폭탄을 대량 생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서균렬 교수는 지난 3월3일 애국단체총협의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핵개발 능력과 과제'라는 발표를 통해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의 원자력 기술을 종합하여 세계 5위, 운전기술을 세계1위, 그리고 핵폭탄 제조 잠재력을 세계10위권으로 평가하였다. 核개발을 위한 기술력과 경제력을 종합한 것인데, 한국을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능력은 거대한 원자력 산업을 인큐베이터로 삼고 있는 셈이다. 다른 원자력 전문가는 “국가가 결심하면 2년 내에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몇 개를 만들 수 있을까? 서 교수의 계산에 근거한다면 많게는 100개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핵폭탄 제조 과정의 핵심인 재처리 시설도 과거처럼 수입할 필요 없이 자체 제작이 가능하다. 서 교수는 한국의 핵개발 능력은 기술과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였다. 국가가 결심하고 정치인들이 방패만 되어준다면 核개발은 '연탄찍기'처럼 간단하다는 것이다.
외국의 핵 전문가들은, 한국이 처한 안보상황, 특히 北의 핵무장, 한국의 國力(국력)을 감안하면 핵개발에 나서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10대 핵폭탄 잠재국가 가운데 핵개발을 하지 않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의 戰犯(전범)국가이고, 스페인과 브라질은 敵이 없는 나라이다. 모든 객관적 조건은 한국의 핵개발을 당연시하는데, 국내에선 최근까지만 해도 ‘핵개발하자’는 말이 범죄시되었다.  
 서 교수는 이렇게 비판하였다.
 <남북한은 1991년 비핵화공동선언을 통하여 '핵무기 및 농축 재처리 포기'를 합의하였지만, 이후 북한은 플루토늄을 만들어 핵실험을 强行(강행)하면서 이 문건을 폐기하였다. 그럼에도 한국은 서명 상대방이 폐기한 공동선언을 준수하기 위해 농축과 재처리를 시도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처지를 감수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충고하였다.
 <北核문제의 全역사를 회고해볼 때 으뜸가는 교훈은 '전체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一喜一悲나 기술적 상세사항 분석을 넘어 北核 문제 전반의 진전 또는 악화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향후 核해결 전망을 가늠하고, 총합적 國益을 최대화하는, 종합적인 核정책을 펼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6자회담, 美北간 핵협상, 北核의 안보적 위협, 對北정책, 원자력 산업 등은 모두가 끈끈하게 엮여 있어 하나의 多面體처럼 보인다. 그 多面體로부터 國益 최대화를 기하는 일은 전체를 보는 능력과 전략적 조정능력을 가진 조직만이 담당할 수 있다. 누가 언제 그런 조직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한국이 풀어가야 할 核과제이다>


‘압도적 여론’이 만들어져야


미국의 에텔 솔리젠 교수는 프린스턴 대학교가 2007년에 펴낸 '核논리학'(Nuclear Logics)이란 책에서 이런 요지의 논평을 하였다.  
 <세계의 경제대국 중 하나이며, 선진 기술력을 가진 한국은 韓美동맹이 약화되어가는 가운데서 核무장한 북한의 위협이 높아가고 있으니 당연히 核무기를 개발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그런 예측은 어긋났다> 
 接境(접경)한 敵이 核무기를 개발하면 상대국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첫째는 敵이 核무기를 개발하기 전에 시설을 공격,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이라크를 상대로 취한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對應 핵개발을 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하여 소련이, 소련에 대하여 영국, 프랑스, 중국이, 중국에 대하여 인도가, 인도에 대하여 파키스탄이 했던 방식이다. 이란의 核개발은 이스라엘 核에 대응한 것이다.  
 한국은 두 가지 조치 중 어느 쪽도 취하지 않았다. 인류역사상 거의 처음 있는 無對應(무대응)이었다. 역대정권은, 국가생존 차원에서 반드시 취해야 할 자위적 核개발을 추진하지 않음으로써 핵문제 해결을 위한 주도권을 북한에 넘기고 말았다.
 
 盧泰愚 정부는, 北이 核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된 시점에서 재처리 시설을 갖지 않겠다는 선언을 먼저 하였다. 이로써 對應 수단을 자진 포기하였다. 核시설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한 李鍾九 국방장관은 비판을 받았다.  
 金泳三 정부는, 北이 NPT(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하였을 때, "우리도 탈퇴하겠다"고 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미국의 군사적 對應을 막고 가장 유효한 對北억지 수단인 팀 스피리트 훈련을 중단시키는가 하면 核문제 해결 회담을 미국에 맡기고 구경꾼으로 전락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核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北에 4억5000만 달러의 불법자금을 제공하고, 금강산 관광을 통하여 거액의 현금이 들어가도록 하였다. 김정일을 만났을 때도 핵문제를 꺼내지 못하였다. 김대중은 北이 핵실험을 한 직후 노무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수정, 對北제재조치를 취하려 하자 이를 막았다.
 노무현 정부는, 北이 핵실험을 하였는데도, 韓美연합사를 해체, 對北억지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利敵행위를 하였다.  
 한국이 核문제에서 주도권을 되찾으려면 북한정권이 취한 행동을 거꾸로 따라가면 된다. 남북한 비핵화 선언 폐기, NPT 탈퇴 時限 예고, 탈퇴 선언, 국제원자력 기구 사찰 팀 추방, 自衛的 핵개발 선언, 재처리 시설 건설 선언 등등. 이렇게 나가면 세계의 視線은 서울로 쏠릴 것이고, 중국이 급해질 것이다. 미국은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 한국은 ‘NPT 탈퇴 時限’을 예고하는 순간부터 국제 외교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할 것이다. ‘NPT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한국은 ‘핵카드’를 쥐게 된다. 거대한 원자력 산업과 군수 산업을 바탕으로 핵무기 조립 직전까지 여러 요소 기술을 발전시켜놓으면 이 또한 유력한 ‘핵카드’가 된다. 이스라엘은 핵폭탄의 有無(유무)에 대한 불투명성을 ‘핵카드’로 삼고 있다.
물론 이런 게임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려면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가 있어야 한다. 연평도 도발 이후 ‘자위적 핵개발’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지고 있다. 60%를 훨씬 넘는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이런 여론을 업고 핵개발을 공약하는 대통령 후보와 정당도 나오고, 내년 총선과 大選에서 ‘自衛的 핵개발’이 가장 큰 쟁점이 되어야 국제사회가 주목하게 될 것이다. 핵개발을 公約(공약)한 후보와 정당이 집권하면 주변국들의 行步(행보)가 급해질 것이다. 일부 애국단체에선 ‘압도적 여론형성’을 위한 汎국민운동을 벌일 태세이다.

핵을 포기한 카다피의 교훈

1988년 12월, 팬암機 폭파(270명 사망)를 지령한 죄로 국제봉쇄망에 갇혔던 카다피는 한때 김정일처럼 핵폭탄을 개발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의 칸 박사로부터 우라늄농축기술과 원자폭탄 설계 및 제조기술을 도입하기로 하고 수억 달러를 썼다.
2003년 미국 CIA는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와 비밀리에 접촉, '빅딜'을 성공시킨다. 카다피는 核개발계획을 포기하고, 팬암기 사망자들에게 약30억 달러를 보상하고, 미국은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 國交를 재개하였다. 이 약속에 따라 리비아는 核개발에 사용된 4000개의 원심분리용 파이프, 수천 개의 독가스탄, 농축 우라늄, 핵폭탄 설계도 등을 미국에 넘겼다.
카다피는 소량의 독가스를 보유하고 있으나 內戰에 쓸 수 있을지는 의문시된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2월 말 부시 정부하에서 이뤄진 리비아 核개발계획 해제 조치가 惡夢을 제거한 것이라고 높게 평가하는 기사를 썼다. 만약 카다피가 핵무기를 개발하여 보유한 상태에서 무장반란 사태를 맞았다면 核폭탄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국내외의 압박에 대응하였을 것이다. 最惡의 경우에는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도 있었다.
리비아 사태를 지켜보면서 김정일 정권은 카다피의 실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은 후세인의 실수는 核개발을 포기함으로써 미국의 침공을 불러들인 점이라고 고이즈미 일본 총리한테 실토한 적이 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도 우리에게 미국의 압박에 굴복, 核개발을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였다. 김정일은 카다피가 미국에 속아 넘어가 核개발을 포기하였기에 오늘 그 미국으로부터 퇴진압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기사에서 한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들은 북한정권이 만약 리비아와 같은 사태를 맞으면 核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으로 외국이 反정부 시위를 선동하는 걸 막으려 할 것이라고 했다. 한 한국 관리는 "북한정권의 지도층은 핵무기를 쓰겠다는 위협을 하여서라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게 공갈이라도 전반적인 대응전략을 바꿀 것이다"고 말했다.
카다피의 '核포기 실수'는 김정일과 측근들에게 反面교사로서의 교훈을 줄 것이다. 무슨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核폭탄은 안고 가야 한다는 집념이 강화될 것이다. 중국도 북한정권의 이런 자세를 양해한 지 오래이다. 6者 회담은 중국과 북한이 꾸민 국제사기극이다. 한국의 자위적 核개발 선언만이 이 문제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잡게 할 것이다.

禁忌를 깨다

全斗煥(전두환) 정부가 출범할 때 핵심 요직에 있었던 한 인사는 “레이건 행정부가 두 가지를 부탁하였다. 하나는 핵 포기, 또 하나는 통일교 지원 중단이었다”고 했다.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는 핵무장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朴 대통령이 1976년 무렵 핵개발을 포기한 것은 미국이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압박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원자력 발전이란 평화적 핵 이용을 위하여 原爆(원폭) 개발을 포기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의 원자력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하였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물질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원자로까지 국산화함으로써 우리가 핵개발을 하더라도 미국은 압력을 넣을 수단이 제한적이다.
2011년의 한국은 1976년의 한국이 아니다. 미국 등 외국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몸집을 키웠고, 무엇보다도 북한이 핵무장을 하였다. 북한의 핵을 폐기시키기 위한 목적의 핵무장을 하겠다는 선언은 정당성과 합법성뿐 아니라 큰 설득력을 가진다.
지난 3월3일 애국단체총협의회 주최 심포지엄에서 李春根 박사(한국경제연구원 외교안보실장)는 발표문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대한민국의 核무장은 거의 자동적으로 일본의 核무장을 초래할 것이며, 일본이 核무장을 결단할 경우 거의 즉각적으로 수백 발의 핵무기를 보유한 영국, 프랑스 수준의 核강국이 될 것이며, 이는 세계 패권국을 지향하는 中國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일본이 核무장을 할 경우 중국은 세계는커녕 아시아의 覇權國(패권국)이 되는 것도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한국의 核무장을 반대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취할 일은 너무나 간단하다. 중국이 보유한 지렛대로 북한의 核을 폐기시키면 되는 것이다>  
 <核무장론이 제기되는 배경에는 중국의 놀라운 행태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의 공격을 받아 군함을 잃고 수십 명의 병사를 잃은 대한민국을 위로하지도 않았고 대한민국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지지한 적이 없다. 중국은 대한민국의 국가 대전략인 통일전략을 정면에서 훼방하고 있다. 한국이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과거 조선처럼 중국에 굴종하며 살지 않기 위해서는 核무장이 필수가 될지 모른다.
 미국은 우호국이 核무장하는 것을 무조건 저지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核보유를 인정하였고, 최근에는 인도의 核무장을 인정했다. 중국의 急浮上을, 核무장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막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국의 核무장은 일본이 내심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일본은 남북한이 모두 核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을 불안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은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할 것이며, 한국의 核무장을 필사적으로 방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李 박사는 <이제까지는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않았던, 그러나 더 이상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한국의 核무장에 대하여 심각하게 논의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끝을 맺었다. 천안함, 연평도 도발 이후 우경화된 여론이 ‘핵무장’이란 禁忌語(금기어)를 깨고 이를 公論(공론)의 場으로 불러내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현재 진행중인 韓美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을 통하여 우리가 핵재처리 시설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急先務(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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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4월호 月刊朝鮮에 필자는 '한반도의 핵게임'이란 긴 기사를 실었다. 北의 핵개발과 韓美의 대응을 취재하여 쓴 글이었다.

北의 原爆개발 성공한다

기자가 이번 취재를 통해서 만난 수십 명의 원자력 관계 학자·기술자들은 거의가 북한이 영변에서 가동중인 연구용 원자로를 核 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용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직사각형의 건물을 미국 정보기관에서는 연구로에서 생성된 플루토늄을 분리해 내는 재처리 공장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이 한국 학자들도 미국측 판단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 견해를 가진 학자들 중에는 1970년대에 故朴正熙 대통령이 극비리에 추진하였던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여 개발도상국에 의한 原爆개발의 공식에 정통한 이들도 있다. 국내 과학자들과 군사 전문가들은 대체로 북한이 原爆개발에 성공할 수 있고 미국과 소련이 외교적 압력으로 이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였다. 그들은 북한이 1950년대부터 고독하게, 그러나 주체적으로 쌓아온 자체 核 기술로써 연구로와 재처리 시설을 돌리고 있으므로 손 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1950∼1960년대에는 소련에서, 80년대에는 原爆을 비밀리에 개발중이던 파키스탄에 기술자들을 보내 원자력 기술을 배워오게 한 뒤부터는 약 2500 명으로 추정되는 적지 않은 연구人力을 확보하여 조용히 모종의 작업을 해 왔었다. 그 성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980년 영변지역에 자체 기술로 착공, 1987년 말에 완공한 연구용 원자로였다. 북한은 소련에서 들여온 1000㎾짜리 연구용 원자로를 2000㎾로 확대했다가 다시 4000㎾ 용량으로 늘렸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연구로 설계기술을 익힌 다음 본격적인 연구로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이처럼 차근차근 자체 기술을 축적 해간 끝에 드디어 原爆개발에 도전하고 있으므로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 3만㎾짜리 연구로가 북한産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는 고전적인 흑연감속재 플루토늄 생산용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부터 미국은 소련을 통해서 경고 신호를 보냈다. 核과학자들은 "원폭 재처리기술은 어렵지 않다. 예컨대 재처리 기술은 정유공장 운영보다 훨씬 간단한 수준이다. 북한이 설계·제작한 연구로는 原爆보다 더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原爆 제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의지의 문제다"고 했다.
한국이나 일본이 핵무기를 안 만드는 것은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국제 감시 하에 놓여 있는데다가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原爆을 제조할 때 쏟아질 국제적 압력과 비난을 감수할 만한 의지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있다면 원자폭탄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밀개발에 적합한 체제

원자력 연구소장 韓弼淳씨는 "북한이 국제 원자력 기구의 사찰에 응하게 되면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기술 도입이 가능해지는 등 여러 가지 이익이 많은데도 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다른 핵 과학자는 "북한의 핵 개발 시스템은 북한산 천연 우라늄→연구로→재처리 공장으로 이어지는 핵연료 순환 사이클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고 분석했다. 그럴 경우는 외국에서 간섭할 방법이 없어 외교적 압력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과학자는 "소련이 북한에 상업용 원자로를 지어주기로 돼 있는데 그러면 영향력이 생기게 될 것이다"고 했다. 우리 핵 과학자들은 또 "북한의 사회체제가 原爆을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플루토늄을 다루는 데 있어서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것은 안정성입니다. 방사성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하고, 방사능이 강한 사용後핵연료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재처리 기술의 핵심인데 북한 사회에서는 여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재처리 공장을 자체적으로 만들려면 차폐시설과 정교한 원격 조정 장치를 수입해야 하는데 이것도 경제성을 무시하고 엄청난 투자를 하여 기자재를 자체 개발하면 됩니다. 더구나 보안이 유지되니 안성마춤이지요."
原爆 제조가 그 나라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이나 기술 수준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은 가난한 인도와 원자력 발전소도 없는 중공이 核 보유국이 된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더구나 북한은 군사력을 위해 생활 수준을 희생시켜 온 군사大國이다. 30여 년에 걸쳐 육성된 원자력 기술 人力은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가 한 基도 없는 북한에서 오로지 원폭 제조 연구에만 투입되었을 것이고 바야흐로 그 결실의 순간이 왔다는 게 한 군사 전략 전문가의 예상이었다.
정부내의 핵심자리에 있는 그는 "1993년에 북한이 원자 폭탄을 가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리 정보로는 북한 연구로가 한 해에 히로시마 투하 원폭 정도의 20kt짜리 한 두 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본다. 대응방법으로는 외교적 수단 이외의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우리도 대응 개발하겠다는 여론도 일어날 것이다"고 했다.

북한이 공산권 민주화의 열풍 속에 포위돼 있는 시점에서 '北의 原爆'이 현실화된다면 한반도의 군사력 균형은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거기에 바탕을 둔 안정도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현재의 군사력 균형은 '북한의 압도적인 재래식 군사력=한국군의 열세한 재래식 군사력+주한미군과 보유 核'이란 공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북한은 벌써 북한 원자력 시설의 국제 사찰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주한 미군의 핵무기 철수를 요구, 核개발을 정치무기로 써먹기 시작하였다.

在美 핵 공학자 경원하 유치 성공

북한의 핵 개발설을 금강산댐의 경우와 비교할 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금강산 댐 水攻說에 대해 미국측은 회의적이었고 한국측은 긍정적이었으나 북한의 核개발에 대해서는 미국측이 더욱 확증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한국의 核전문가들도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미국 정보팀은 1981년에 이미 한국 고위층에게 "북한이 짓기 시작한 영변의 연구로는 핵무기 제조를 겨냥한 것 같다"고 브리핑했었다. 지난 해 여름에 한국의 관계자들에게 이 정보팀은 "연구로와 함께 재처리 시설을 완공한 것 같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에 核 폭탄을 완성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영변 원자력 센터에는 연구로와 재처리 시설 이외에도 강변 백사장에 뇌관 시험장을 두고 있는데, 여기서의 폭파 실험 장면이 미국 첩보 위성에 포착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최근 일부 核 과학자들은 프랑스 인공 위성이 찍은 영변 시설 사진을 분석, 북한의 연구로는 당초 예상했던 천연 우라늄 연료·흑연 감속재·가스 냉각식이 아니고 천연 우라늄·흑연 감속재·중수 냉각식이라는 분석도 하고 있다. 가스 냉각식으로 보기에는 건물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중수 냉각 연구로는 캐나다의 NRX형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북한의 3만㎾ 연구로의 年間 플루토늄 生成 능력은 20kt짜리 핵 폭탄 한 개분인 8㎏(플루토늄은 비중이 약 19로서 8㎏의 부피는 야구공 크기), 영변 재처리 시설의 플루토늄 분리·추출 능력은 한 해에 6㎏정도라는 평가도 있다. 연구로가 캐나다 식이라는 것과 관련, 한국의 관계기관에서는 在美 원자력 공학자였던 경원하씨를 주목하고 있다.

경씨는 미국 뉴멕시코주에 있는 국립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핵 폭탄 제조에 참여하였으며 캐나다 맥길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1974년쯤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경씨는 캐나다에서 만든 연구로에 관한 자료 등 많은 기술 자료를 갖고 들어갔고, 이것이 북한 핵개발에 급 피치를 걸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원자력 학자들은 또 영변 원자력 연구센터의 소장 李昇基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6·25 전에 서울 공대 학장이었던 李 박사는 교토대학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했으며 북한으로 올라간 뒤에는 비날론을 개발한 세계적인 화학자이다. 김일성의 신임도 두터워 영변 연구소를 金日成이 방문하면 李 소장과 같은 방에서 잘 정도였다고 한다.
1942년에 경성제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丁根도 原爆 개발의 핵심도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대체로 북한의 화학 분야가 센 편이다. 원폭 제조는 재처리, 연구로 등 화학 공정이 중심으로 돼 있어 북한은 그 기초가 튼튼한 편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외국 기술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원폭 개발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우라늄 原鑛의 존재다.
남한에 부존된 우라늄 원광은 농도가 낮아 연구로의 연료로 쓸 수 없지만 북한의 원광은 그 농도가 0.5∼0.8%로서 精鍊(정련) 과정을 거쳐 연구로의 연료로 쓸 수 있다고 한다. 朴 대통령 시대 핵개발의 주요 참여자였던 한 원자력 과학자는 "그때 우리의 핵개발은 혼선이 많았지만 북한의 개발 방향은 일관성이 있고 기초가 든든해 70년대 한국보다 기술력이 앞선다"고 평가하였다.

최후의 제어 수단은?

중국의 핵실험이 인도를 자극하여 1974년에 인도의 핵실험이 있었고 이는 다시 파키스탄을 자극하였다. 파키스탄은 산업 스파이 방식의 핵무기 제조에 집념을 불태워 지금은 거의 성공한 단계다. 아랍의 압도적인 재래식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비밀리에 제조해 두고 있으며 이라크는 이슬람 세계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 1981년 6월7일 이스라엘 공군의 F16, F15 전투기 14대는 이라크 트와이터에 있는 연구용 원자로 건물을 폭파하여 가동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製 연구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연구로가 핵폭탄 제조용이라고 판단, 선제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이 연구로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라크로 보내지기 직전에 항구에서도 한 번 폭파된 적이 있었다. 이라크로 옮겨진 뒤인 1980년 9월에는 연구로 건설 현장이 국적 불명의 팬텀기에 의해 격파 당했었다. 이 팬텀기는 이스라엘 공군기로 추정되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 연구로가 93%의 고농축 우라늄을 核연료로 쓰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아 명백히 핵무기 개발용 연구로라고 단정하여 프랑스에 대해 수출금지 조처를 취하도록 압력을 넣어 왔었다. 프랑스는 이 연구로의 연료로 72㎏의 고농축 우라늄을 공급하기로 돼 있었다. 그 정도 양의 순도 높은 우라늄이라면 히로시마型 핵 폭탄을 3∼4개나 만들 수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외교적 압력과 테러를 병행하다가 선제폭격을 해 버린 것이었다.
아랍-이스라엘과 같은 대치 상황에서는 상대방이 핵무기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 생존의 문제로 확대되며 그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외교적 노력이 한계에 부딪치면 연구 시설에 대한 선제 공격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하나의 사례로서 남북한 관계에도 중요한 시사를 던지고 있다.
우리 정부내의 한 인사는 의미 있는 말을 던졌다. "북한은 핵 폭탄 운반 수단을 동시에 개발하고 있습니다. 소련에서 들여온 스커드 B형 미사일을 개량하여 사정 거리를 500㎞까지 연장하는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련을 통해서 북한의 핵무기 제조를 막아 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쓸 때도 미국과 소련의 양해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는 영변의 북한 원자력 연구 센터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지만 우리 공군의 F-16은 지형에 맞추어 초저공비행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다고도 했다. 북한이 원폭을 만들고 있는 사이 우리가 잠자코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이겠다. 주한 미군의 한 정보 책임자도 "최근 한국 내에서 대응 개발과 예방적 조처의 견해가 나타나고 있는데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내의 관계자는 "북한은 심리적, 경제적 목표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본격적인 核부대의 건설보다는 먼저 핵실험에 성공하는 것을 당면관제로 설정하고 한 두발의 핵 폭탄을 개발한 뒤에는 재래식 군사력을 축소, 군사비 부담을 줄이려 할 것이란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核 보유국이 된다는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대단한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앞으로 2년이 문제인데 우선은 미국과 소련이 북한을 말려 주기를 기다려 볼 것이다. 부시가 직접 고르바초프에게 이 문제를 부탁할 정도이다. 소련이 북한 핵 개발을 말리지 못하면 美蘇군축 협상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고 했다. 北의 원폭에 대한 우리의 대응 능력을 알아보려면 朴 대통령 시대의 핵 개발에서부터 점검해 봐야 한다. 이 부분은 그 동안 과장된 면이 있었다. 기자는 이 계획의 참여자들과 극비 자료를 찾아냈다.


2. 프렌치 커녁션

프랑스 재처리 회사와 교섭

原爆의 원료 물질 생산을 뜻하기도 하는 '핵연료 재처리'라는 이 민감한 낱말이 우리정부 문서에 처음 의미 있게 등장한 것은 1969년 5월 제172차 원자력위원회가 확정한 원자력 연구개발 장기이용 계획서였다. 원자력 연구소가 작성한 이 계획서는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2∼76년)에 재처리 체제에 관한 기술적, 경제적 검토를 한 뒤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7∼81년)에 재처리 시설의 설치를 추진한다'고 했다.
1971년 1월 당시 원자력청 산하에 있던 원자력 연구소는 재처리 사업계획서를 원자력 청에 제출하였다. 1974∼80년을 건설기간으로 잡고 경남 온산공업단지 인접지역에 하루에 우라늄 1t을 처리할 수 있는 대단위 공장을 만든다는 요지였다.
1972년 7월에는 영남화학(주)이 핵연료 재처리 합작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하였다. 미국의 스켈리 석유나 NFS사(Nuclear Fuel Services), 일본의 미쓰비시 석유가 국제합작 하여 1978년 가동목표로 고리 원자력발전소 인접지역에 年 처리능력 900t 규모의 재처리공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두 계획중 국제합작 계획이 실제로 추진되었다. 이 계획에는 핵 확산금지와 관련한 국제적 규제 강화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전에 기득권을 확보한다는 전략적 고려가 있었던 것 같다.
원자력연구소는 1972년 원자력 연구개발의 최우선 과제를 핵연료 週期 기술의 확립으로 설정, 그 핵심 거점 기술인 재처리기술과 핵연료 가공 기술의 연구를 위한 시설 도입 교섭에 들어갔다. 미국 측은 냉담했다. 원자력연구소와 자매결연관계에 있던 알곤 국립연구소도 재처리분야의 기술훈련협조 요청을 거절하였다.
정부는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1972년 5월 崔亨燮 과학기술처장관은 프랑스 영국을 공식 방문했다. 원자력 협력, 특히 재처리 기술도입에 관한 협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이해 10월에는 프랑스 원자력 청(CEA)의 장피에르씨 등이 한국에 왔다. 핵연료가공 및 재처리 사업에 관한 양국간의 기술협력 문제를 의논하였다. 1973년 3월 프랑스의 원자력청과 그 산하의 재처리 시설 용역회사인 SGN사(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 대표단이 와서 원자력연구소와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였다.
SGN사는 재처리기술이 세계에서도 가장 발달된 프랑스에서도 이 분야의 대표회사였다. 프랑스 원자력청 산하의 국영회사로서 1952년부터 가동되었다.
원자력연구소는 일단 SGN사에 대해 시험용 재처리설의 개념 설계를 요청, 용역계약을 맺었다. 1973년 9월 尹容九 원자력 연구소장은 CEA와 SGN사를 방문하였다. 재처리사업과 발전소용 핵연료 가공사업의 협력 방안을 의논한 끝에 정부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 건설계약을 체결하자고 합의하였다. 1975년 4월에는 원자력 연구소와 SGN사이에 재처리 시설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이때 핵연료 사이클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에서 독립시키겠다는 自立전략을 설정, 재처리이외에 핵연료 제조기술의 도입도 시도하였다.
제1 핵연료 가공 시설인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 시설의 도입선은 프랑스의 CERCA사로 정했다. 1975년 1월 원자력 연구소와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에 의해 분리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原電 핵연료로 재 순환시키는 데 필요한 혼합핵연료 가공시험시설(제2 핵연료 가공시설)의 도입에 대해서는 벨기에의 핵연료 주기기술 용역 전문업체인 BN사(Belgonucleaire)와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1974년 1월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장 李炳暉(이병휘)씨는 벨기에를 방문, 플루토늄 가공기술 및 연구시설의 도입을 위한 벨기에 정부차관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해 9월에는 崔 과기처장관이 벨기에를 방문, 기술용역 및 기술훈련 협의를 거쳐 11월에 혼합 핵연료 가공 시험시설의 개념설계를 BN사에 맡기는 계약을 했다.


인도의 개발 모델에 관심


이것은 미국을 따돌리고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원자폭탄의 폭약에 해당하는 플루토늄 분리 및 그 취급 기술을 종합적으로 손에 넣으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었다. 핵 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재처리사업은 崔亨燮 과기처장관, 朱載陽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金哲 원자력연구소 대덕분소 공정개발실장을 축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뒤에 원자력 연구소의 재처리사업과 연구로 개발사업 국방부산하 국방과학 연구소의 핵 폭탄 설계와 유도탄 개발사업을 통합 조정하여 朴대통령을 보좌한 것은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담당 수석비서관이었던 吳源哲씨였다.
핵 폭탄 개발은 플루토늄을 생성시키는 연구로와, 연구로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에서 그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재처리공장, 그리고 플루토늄을 폭약으로 하여 核 폭탄을 설계·제조·시험하는 시설 및 운반수단인 미사일 연구의 종합 시스팀이다.
재처리 사업 실무책임자 朱載陽씨는 미국 MIT대학에서 化工분야를 전공한 뒤 핵연료 관계의 연구를 했던 在美학자로서 1973년 3월1일에 원자력 연구소 특수사업담당 부소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우선 과제는 人力확보였다. 그때는 국내외 어디를 찾아보아도 재처리공장에 근무했거나 재처리를 전공한 학자가 없었다. 그는 그해 5월 23일부터 7월12일까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 젊은 한국학자들을 찾아내 이 특수사업에 끌어들이기 위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金哲씨의 경우는 서울대 화공과출신으로서 뉴욕 주립대학(스토니 브룩소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년간 매사추세츠주의 나티크 육군연구소에서 근무중 朱載陽씨에게 설득 당하여 귀국하였다.
金박사는 육군 연구소에서 폐기 문서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보안상의 목적으로서, 종이를 분해, 셀루로즈 성분을 포도당으로 변화시키는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 재처리 사업을 위하여 해외로부터 유치된 과학자들은 약 20명이었다. 거의가 화공·화학전공자였다. 재처리 과정이 기본적으로 용매 추출에 의한 플루토늄 분리라는 화학 공정이기 때문이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金哲씨 밑에서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 李哲洙씨를 비롯한 유치 과학자들의 과반수는 서울 공대 화공과 출신이었다. 서울대 화공과의 입학 점수가 전국에서 가장 높던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상반기에 화공과에 들어갔던 이들이었다. 유치 과학자들은 주택제공, 높은 월급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캐나다서 NRX 연구로 도입추진

朱載陽씨는 재처리 기술도입 뿐 아니라 연구로 확보의 실무 책임자이기도 했다. 朱부소장은 1973년 11월9일에 재처리 사업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프랑스의 SGN사 등을 한 달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만과 인도를 보름 동안 방문하였다. 朱 부소장 외 2명의 대만, 인도 방문사유를 "원자력 연구소 20년사'는 'NRX 원자로 도입에 따른 기술 문제 협의차'라고 적고 있다. 이 짧은 기록은 朴대통령의 핵 폭탄 개발 전략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던지고 있다. 1974년 3월23일 朱부소장은 드디어 NRX 원자로 도입 사업 추진차 프랑스와 캐나다를 24일간 방문한다. 프랑스의 재처리공장과 캐나다의 NRX연구로 도입이란 두개의 기본 축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인도는 캐나다의 NRX연구로를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핵 폭탄 제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朱 부소장 등 실무 책임자들을 인도에 보내 인도의 개발 전략을 우리의 모델로 배워 오도록 했던 것 같다. 핵 폭탄 개발과 관련하여 일반의 오해가 있다. 상업용 원자력 발전에서 타고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얻은 플루토늄이 핵 폭탄 제조에 쓰일 수 있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핵 폭탄용 플루토늄은 군사용 원자로와 연구용 원자로에서만 생산된다.
우리나라 고리에 있는 경수로 原電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이 생기는데 여기에는 핵폭발에 방해가 되는 플루토늄 240이 23.8%나 들어있다. 핵폭발용이 되려면 플루토늄 동위원소들 중 플루토늄 240이 7%이하, 플루토늄 239가 90%이상이어야 한다. 경북 월성에 있는 캐나다 중수로의 경우에는 플루토늄 240이 26.6%로서 이 역시 폭탄용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商用 原電의 사용 후 핵연료에서 핵폭발용 플루토늄 239가 순도 미달이 되는 것은 핵연료가 3년간이나 타기 때문이다.
군사용 원자로나 연구용 원자로는 핵연료의 연소 시간을 짧게 함으로써 핵 분열성 플루토늄을 90% 이상의 순도로 생산할 수 있다. 북한을 포함하며 지금까지 핵폭탄을 개발했거나 개발을 시도했던 나라는 모두 연구로에서 폭발용 플루토늄을 얻었다. 따라서 어떤 형의 연구로를 확보하느냐가 핵폭탄 개발전력의 제1관문이 된다. 웨스팅 하우스 자료에는 1977년 현재 핵무기 개발용으로 돌릴 수 있는 연구로는 인도, 이스라엘, 캐나다(3개), 대만, 노르웨이, 서독, 이탈리아, 스위스 등 8개국에 11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인도는 캐나다로부터 NRX 연구로를 도입, 인도에서 채굴된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집어넣어 태운 사용후 핵연료에서 폭발용 플루토늄을 생산하였다. NRX연구로는 중성자 감속재로 重水를 사용하는데 이 중수 제조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여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인도 핵실험의 충격

朴 대통령은 연구로 가동에 필요한 중수와 천연 우라늄 공급선도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확보해야 했다. 朴 대통령의 핵개발 의지와 한국이 처한 이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선 것이 이스라엘 국제상인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1950년대부터 한국에 거점을 마련하여 턴 키 베이스의 기간산업 건설과 이에 따른 외자 알선으로 떼돈을 벌었던 아이젠버그는 1969년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 고위층에 캐나다의 重水爐(중수로) 원자로를 소개하였다. 핵개발을 위해서 편리하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朴대통령은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에 대하여 미국이 화끈한 대응을 하지 않고 1969년에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한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핵폭탄 개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상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72년11월에 아이젠버그가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와 독점 대리인 계약을 맺으면서부터였다. 1973년4월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존 그레이 사장은 한국에 와서 청와대, 상공부, 과학기술처, 韓電 등을 차례로 방문, 월성에 세워질 60만㎾짜리 원자력 3호기 건설 계획에 참여할 뜻을 비쳤다. 73년 11월에 호주 대사에서 韓電 사장으로 임명된 閔忠植씨는 상공부와 한전의 일부 실무자의 반대를 꺾고 직접 朴대통령의 의중을 받들어 원자력 3호기 主계약자로 AECL을 선정하는 쪽으로 밀고 나갔다. 이때 우리 정부는 캐나다로부터 중수로 원자로 이외에 3만㎾짜리 NRX 연구로를 같이 수입하기로 하고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NRX 연구로에 쓸 중수로와 천연우라늄 연료는 캐나다 중수로(CANDU)에도 공급되므로 미국의 간섭을 피해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형 중수로는 연료의 일부를 매일 교체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미국제 경수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을 중단시킨 뒤 연료를 바꾸는 데 비해 중수로는 수시로 사용 후 핵연료를 끄집어 낼 수 있다. 국제 원자력 기구에서는 핵 개발 야심을 가진 나라가 중수로를 가지면 사용후 핵연료를 몰래 빼내 플루토늄을 재처리해 내기가 쉽다고 판단하여 경수로보다도 훨씬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다.

1974년 5월에 인도가 핵폭발 실험을 했다. 라자스탄 사막의 L자 모양 참호속에서 이루어진 핵실험 장치는 나가사키 투하 원폭보다 약간 작은 15kt짜리 였다. 인도가 핵폭발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출신인 핵 물리학자 호미 바바박사의 집념 덕분이었다. 그는 1945년에 벌써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 평화 목적의 이용이란 명분을 내걸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 자금은 초기에 인도의 재벌들이 부담했고 네루 수상이 적극 뒷받침했다. 바바 박사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 核 선진국의 기술 협조를 받는 데도 폭넓은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핵폭발용 플루토늄이 생산되었던 캐나다製 NRX형 연구로 사이러스(4만㎾)는 캐나다가 경제원조의 일환으로 인도에 공급한 것이었다. 사이러스 원자로에서 태워진 사용후연료에서 플루토늄을 뽑아낸 재처리 공장은 미국 회사의 기술적 도움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미국이 비밀분류를 해제한 휴렉스 방식의 재처리 공장이었다.

原爆제조 막을 길 없다

이들 국가가 인도에 核관련기술을 마음 턱 놓고 넘겨준 것은 세계 평화를 부르짖으며 비동맹 외교를 선도해 온 인도를 믿었던 때문이었다. 인도도 핵폭발 실험의 목적을 건설 등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인도는 핵 확산금지 조약이 평화목적의 핵폭발까지 금지하고 있는 데 반발하여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인도의 핵폭발 실험 이후 뒤늦게 낭패한 캐나다는 NRX 연구로에서 생성된 플루토늄을 앞으로는 핵 폭발물 제조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인도에 요구, 거절당하자 인도에 대한 원자력 기술협력을 두절시킴으로써 캐나다 회사가 짓고 있던 중수로 1기는 완공되지 못하였다. 인도 핵실험은 가난한 나라도 정치 지도자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으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함으로써 核 보유국을 경악케 했다.
핵 보유국들은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단결하여 핵폭탄 개발과 관련 있는 연구로 농축 재처리 기술 및 이와 관련된 주요 기자재의 對外 판매나 이전에 따른 규제를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인도식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한국이었다.

인도 핵실험 이후 개발도상국에 의한 핵개발이 국제 문제가 되었을 때 미국 의회 자료실(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은 뉴욕의 폴리 테크닉 연구소 원자력공학 부장인 존 R 라마쉬 박사에게 의뢰하여 개발도상국 및 小國의 비밀 핵폭탄 개발 가능성에 대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라마쉬 박사는 이들 나라가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를 핵 선진국의 도움 없이 만들 수 있느냐에 대해 "어렵지 않은 일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소국 및 개발도상국에 의한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의 건설에 관하여'란 對의회용 보고서에서 "1년에 10㎏의 플루토늄(20kt급 원폭 한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는 1300만∼2600만 달러를 들이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재처리 시설도 쉽다

라마쉬 박사는 또 "설계에 필요한 정보는 이미 공개된 문헌에 다 있으며 건설에 필요한 부품과 자재는 공개된 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 우라늄은 세계 도처에 부존돼 있어 큰 부담 없이 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핵확산의 금지를 위한 국제적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가 핵폭탄 개발을 추진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오히려 핵개발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라마쉬 박사에 따르면 핵폭탄 하나를 만들기 위한 최소량의 플라토늄은 4㎏이다. 농축 우라늄 핵폭탄의 최소량은 우라늄 11㎏이라고 한다.

라마쉬 박사는 (북한처럼)원자력 발전소가 없는 나라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연구로는, 천연우라늄을 그대로 연료로 쓸 수 있고, 흑연을 감속재, 가스를 냉각재로 쓸 수 있는 원자로라고 분석했다. 이런 원시적 원자로는 1942년에 原爆 제조의 선구자 페르미가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원자로와 같은 型이다.

이런 초기 형식의 원자로는 그 상세한 설계도가 이미 공개돼 있어 이를 모방하여 만들기는 간단한 일이다. 라마쉬 박사는 건설 기술자 1명, 전기기술자 1명, 기계 기술자 2명, 금속 기술자 1명, 核공학자 3명만 있으면 그 설계와 건설을 지휘·감독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건설 시작 후 4년 뒤에는 원자로가 가동될 것이고, 1년 뒤에는 그 핵연료 중에 작은 핵폭탄 하나를 만드는 데 충분할 정도의 플루토늄이 생성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라마쉬 박사의 이 보고서를 베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비슷한 연구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 원자력 연구소가 자체 기술로 완성한 다목적 연구로(K-MRR‥Korea Multi-Purpose Research Reactor)의 사업단장인 金東勳 박사는 "북한의 연구로는 지독하게 간단하다. 그런 것을 짓고 싶었으면 벌써 전에 만들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 K-MRR에 비교하면 공학적으로 형편없는 저수준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硏究爐가 고도의 기술로 만들었지만 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데 대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북한 것은 플루토늄 생산에는 적합하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라마쉬 박사는 개발 도상국의 재처리 능력에 대해서도 검토 보고서를 냈다. 그 결론도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의 경우와 같았다. 개발 도상국들이 이미 공개된 문헌과 공개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부품으로 어렵지 않게 재처리 공장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폭용 플루토늄을 재처리 방법으로 뽑아내려면 연구용 원자로에서 1년쯤 태운 연료를 꺼내 재처리 공장에 걸어야 한다.

2만5000㎾짜리 연구로의 천연 우라늄 연료는 약 60t이고, 여기에서 생성되는 플루토늄이 9㎏이다.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 후 핵연료는 물 속에서 129일간 저장하여 방사능을 감소시킨다.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경우 120일이 지나면 방사능은 t당 5만5000 큐리 정도이다. 이것은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방사능 1t당 200만∼300만 큐리의 50분의1 쯤이다.

재처리의 가장 큰 기술적 문제는 방사능이 강한 사용후핵연료를 차폐시설 속에 집어 넣어놓고 원격 조종으로 운반, 해체, 절단, 분석, 용해, 분리시키는 일이다. 여기에 필요한 방사능 차폐 시설과 원격 조종장치의 제작 및 설치와 운영이 재처리 과정의 핵심적 사항이다. 상업용 原電 재처리 시설보다 훨씬 약한 방사능을 취급하는 핵무기용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재처리 시험시설이 제작이나 운전면에서 훨씬 쉽다는 얘기이다.

플루토늄 재처리 공장 설계도 공개된 것이 많다. 라마쉬 박사에 따르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반웰의 재처리 공장 설계도는 도서관에서 구할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마쉬 박사는 재처리 시설을 설계, 건설, 감리 하는 데는 고급인력도 필요 없고 다음과 같은 7명의 엔지니어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化工 기술자 2명과 건축 기술자, 전기 기술자, 기계 기술자, 금속 기술자, 핵 공학 기술자 1명씩. 그는 작은 플루토늄 추출용 재처리 시설을 미국에서 만든다면 2500만 달러쯤 들 것이라고 계산했다.



3. 미국의 압력에 무너지다

미국, 프랑스와 캐나다에 압력

미국 버클리 대학의 피터 헤이즈는 '한국에서의 미국 核 딜레머'라는 논문에서 朴 대통령이 1971년에 병기 개발 위원회를 조직,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1∼72년에 있었던 주한 미군 7사단의 철수에 자극 받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정부는 장비 현대화 5개년 계획(1971∼75년)을 위한 무상 원조액을 한국의 人權 상황에 연계시켜 삭감하기 시작, 당초 약속한 액수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다. 인도 핵실험 뒤 미국 정부는 세계 각국의 미국 대사관과 정보 분석 전문가들에게 비상을 걸어 각국의 핵무기 개발 여부를 주시하도록 하였다.
벨리륨, 특수 폭약 등 핵폭탄 제조에 쓰이는 재료물질의 수입 여부도 감시하였다. 미국 전문가들은 아주 쉽게 한국이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들었음을 간파하였다. 1975년 3월 8일 주한 미국 대사 리처드 스나이더는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란디에게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것은 핵무기 개발을 위함이라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란디 대사는 즉시 이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였다. 1975년 4월에 월남이 패망한 뒤 朴대통령은 그해 6월26일 워싱턴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핵무기의 개발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 다음날 코리아 타임즈는 崔亨燮 과기처 장관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본격적으로 한국 정부뿐 아니라 한국측에 민감기술(Sensitive Technology)을 넘겨주기로 돼 있었던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정부에 대해서도 정치적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고려하겠다고 朴대통령을 협박하였다. 한국은 이런 압력을 견딜 수 없었다.

NRX연구로 도입 좌절

1988년에 미국 콜럼비아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핵 폭탄 없이'(Without the Bomb)란 책에서 영국 전략문제 연구소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저자 미첼 라이스는 한국 핵개발의 경과를 한 章으로 다루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의 재처리 시설 도입에 대해 압력을 넣은 상황을 이렇게 썼다.
<한국은 1975년 4월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을 비준했다. 이것은 미국무성과 의회의 압력이 있은 뒤였다. 미 의회는 수출입 은행에 대해 고리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 지원을 보류하도록 결의했던 것이다. 75년 가을에 프랑스는 한국측에 재처리 시설의 機材를 20년 동안 복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이자고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제 원자력 기구, 한국, 프랑스 3자간의 안전조치(원자력 시설에 대한 사찰의 규정)협정도 맺어졌다.
1975년 말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원자력 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을 중단할 것이며 캐나다도 중수로 판매를 유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 대통령은 한국이 核개발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미군과 핵무기를 남한에 붙들어 두려고 했던 것 같고 그런 작전은 성공한 것 같다>
1976년 1월 한국 정부는, 프랑스의 SGN와 맺었던 재처리 시험 공장 건설계약의 파기를 프랑스 정부에 요청하였다. 프랑스 정부도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한 잡지는 "한국이 핵기술 도입선을 다변화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미국의 私有地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한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중수로 1기와 함께 한국에 끼워 팔기로 돼 있었던 NRX 연구로 판매 협상을 중단하였다. 캐나다의 중수로를 사줌으로써 플루토늄 生成用 연구로 등 여러 가지 민감 기술을 얻으려던 한국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월성에는 그때 중수로 두 基를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계속된 압력으로 1호기 도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7년 11월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벨기에 BN사와 추진하던, 플루토늄을 재사용한 제2 핵연료 가공 사업도 취소되었다. 핵폭탄 개발에 필수적인 연구로, 재처리 사업이 문서 작업 단계에서 움도 터보지 못한 채 죽어 버린 것이었다.

재처리 공장 설계서의 내용

朱載陽 원자력 연구소 부소장 밑에서 재처리 사업 담당 실무 책임자였던 金哲 공정개발 실장(아주대학 교수)은 프랑스와의 계약을 파기할 당시 SGN사와 개념 설계를 끝낸 상태였고 기본 및 상세 설계의 용역 계약을 완성한 직후였다고 회고했다. 기자는 모 연구기관에 보관돼 있는 SGN사의 개념 설계서를 볼 수 있었다. 1974년 10월1일에 작성된 개념 설계서는 두 권의 큰 책으로 돼 있다. 재처리 공장의 규모는 1년에 200일간 가동하는 것으로 잡고 하루 처리량을 사용후핵연료 20㎏(우라늄 기준)으로 했다.

1년에 우라늄 4t을 재처리한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추출되는 핵 분열성 플루토늄 239는 약 20㎏으로서 나가사키 투하 원폭 (20kt짜리 TNT 2만t의 폭발력과 같음)두 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었다. 이 제조 시설은 시험 공장 개념으로서 캐나다에서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던 NRX 연구로와 경수로 및 중수로의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가동 목표일은 건설 확정일로부터 5년 뒤로 잡았으며 건설 설비는 약 3900만 달러였다. 이 시설은 그 중요성에 비해서 건물 자체는 소규모였다. 길이 54m, 너비 46m, 높이 27.5m, 하루에 소요되는 냉각수는 80㎥, 食水는 50㎥, 증류수는 20㎥으로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이 공장 운영에는 15명의 책임자급 엔지니어, 165명의 기술자, 74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었고 6∼12개월의 훈련 과정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개념 설계에는 '핵 분열성 물질의 회수'(Fissile Material Recovery)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이것이 핵무기 제조용임을 분명히 했다.
1976년에 미국의 압력으로 플루토늄 관련 사업은 포기된 듯하였으나 朴 대통령은 재처리를 맡고 있던 원자력 연구소의 특수 사업 담당 부서를 대덕 공학 센터로 분리시킨 뒤 1976년 12월1일에는 그 자신이 설립자가 되어 한국 핵연료 개발 공단을 발족시켰다. 핵연료 개발 공단은 포기한 재처리 사업을 우라늄의 정련·변환 시설, 조사후(照射後)시험 시설, 방사성 폐기물처리 시설 도입 사업으로 대체하여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화학 처리代替사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재처리代替사업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인데 재처리 때문에 워낙 미국인들로부터 시달려 화학처리란 말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그 뒤 우리나라의 원자력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재처리란 말은 禁忌語(금기어)가 돼 버렸다.

朴대통령의 우회전략

金哲 교수는 화학 처리 대체 사업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재처리 기술을 우회적으로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재처리와 연관된 여러 가지 기술을 따로 따로 배워 놓았다가 나중에 하나로 통합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체 사업은 照射後(조사후) 시험시설이었어요.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연소 상태나 변형 상황 및 방사성 물질 조성비 등을 검사하는 것을 조사후 시험이라고 합니다. 이 일을 하자면 사용후핵연료를 水曹와 방사능 차폐 시설 안에 두고 바깥에서 원격 조정 장치로 해체, 절단, 측정하고 용해, 분리시켜야 합니다. 이런 과정은 재처리 과정의 핵심 부분과 같은 성격으로서 재처리 기술의 일부를 익히는 일인 것입니다. 재처리를 하면 강한 방사능을 가진 폐기물질이 생깁니다. 대체 사업에는 방사능 폐기물 처리 기술과 시설도 도입하게 돼 있었습니다."

金哲 교수는 "대체 사업시설 도입은 재처리 사업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프랑스 정부 차관 2000만 달러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업을 '佛차관 사업'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했다. 시설 및 기술 도입선은 프랑스의 SGN사 그대로였다. 관련 기자재는 金哲 실장이 프랑스에 가서 구매했다. 핫셀(Hotcell 방사능 차폐시설), 글로브 박스(Glove Box) 등 조사 후 시험시설과 방사능 폐기물 처리시설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核工團은 또 20여 명의 우수 인력들을 핵 재처리 시설이 있는 유럽 여러 원자력 연구소로 보내 재처리 관련 기술을 연수해 오도록 했다. 출발시킬 때는 "재처리 기술 관련 정보나 자료를 많이 얻어 오고 가능한 한 재처리 관련 연구를 하도록 해 보라"고 지시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던 金康鎭(고려대 화학과 교수) 박사의 경우 벨기에의 BN연구소에서 다른 두 연구원과 플루토늄 定量 분석법을 1년간 연구하였다. 이런 정량 분석법은 재처리 과정을 추적, 감시하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金교수에 따르면 BN사는 재처리 시설 등 민감 기술분야에 대해서는 한국 연구원들을 접근시켜 주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그레노블 원자력 연구소에서는 박현수(원자력 연구소 사용 후 핵연료 관리부장 역임), 박헌휘 연구원(원자력 연구소 방사성 폐기물 관리부장 역임)이 연수를 했다. 이 두 사람은 재처리 관련 부문의 국내 권위자가 되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수시로 과학관 로버트 스텔러씨를 핵공단으로 보내 연구상황을 점검하곤 했다.
그는 미국 국기를 단 승용차를 타고 나타나 핵공단의 시험실과 사무실을 샅샅이 조사했다는 것이다. 일반 사무실까지 열어 보라고 하며 한국 연구원들의 감정을 건드리기도 했다. 스텔러씨 등 주한 미국 대사관의 歷代 과학관들은 모두 핵기술에 관한 교육을 받고 부임, 장기 근무하면서 한국의 핵연구 상황을 감시하는 役을 맡았다. 朴 대통령은 두 번 핵공단을 방문했다고 한다. 유도탄 개발을 맡고 있던 국방과학연구소에 들르는 길에 핵공단을 찾았는데 이때 朴 대통령의 주된 관심은 국방과학연구소에 쏠려 있었다고 한다.

미국, 핵공단 수시로 감시

핵공단은 화학처리 대체사업 이외에 핵연료 成型가공시험 시설 도입을 프랑스의 CERCA사로부터 추진, 성공하였다. 외자 280만 달러, 내자 9억 원으로 핵연료 가공 기기를 구매하고 1200 평의 시험시설을 이용하여 중수로 핵연료의 제조기술 개발을 시작, 1980년대에 성공하게 된다. 정부 일각에서는 한때 파키스탄 방식으로 핵개발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핵 재처리사업이 벽에 부딪치자 유도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는데 미국의 감시를 피해 제3국으로부터 유도탄을 공해 에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自力 개발에 고심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방식의 핵무기 제조는 주로 지하 공작과 산업 스파이식 접근법이었다.
압둘 칸이라는 파키스탄 기술자는 네델란드의 우라늄 농축 회사 와렌코社에 遠心분리 기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의 기술 상담역이 된 것을 기회로 삼아 와렌코로부터 농축 기술의 핵심인 遠心분리법에 대한 극비자료를 수집, 1975년 말에 파키스탄으로 달아났다. 파키스탄은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자체적인 농축 공장 건설에 나서서 스위스 등지에서 부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핵개발에 필요한 기자재가 트리거 리스트란 이름의 국제 금수 품목에 들어 있긴 했지만 파키스탄 정부는 유령 회사들을 통해서 이것들을 사 모았다. 1980년대 초에 파키스탄 정부가 카후타에 세운 농축공장에서 순도높은 우라늄을 생산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1987년 2월 칸 박사는 인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이 원자 폭탄을 이미 만들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그 발언을 부인하였다.
당시 대덕의 국방 과학 연구소에서 추진하던 국산 유도탄 개발은 朴대통령 앞에서 시험 발사에는 성공했으나 후속 연구가 따르지 못하여 정확도가 보장되지 않고 실용화되지는 못하였다. 독자개발의 한계였다. 국방 과학 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 연구 책임자로 일한 이는 서울공대 원자력과 교수 출신인 李모 박사였다. 그는 미국의 알곤 연구소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연구부장 직책을 맡았던 그는 핵폭탄의 부품 재료를 구하는 일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뇌관용 HMX 폭약을 미국에서 수입하긴 했는데 미국측이 이를 그리셀린과 섞어 수출해 HMX를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朴 대통령의 집념을 등에 업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던 화학처리代替사업은 1978년에 朱載陽 소장이 물러나고 1979년에 朴 대통령이 피살된 뒤 후견인을 잃었다. 1980년에 핵공단이 원자력 연구소에 통합돼 에너지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사업은 일단락 돼 버렸다.

핵폭탄 설계도 연구

全斗煥 정권은 출범초기에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핵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 이름에서까지 원자력이라는 말을 떼 버렸다. 영문 약어 표기는 KAERI를 그대로 썼다. 여기서 A는 Atomic이 아니고 Advanced를 뜻했다. 1979년 당시 핵 공단의 핵심 연구원들을 보면, 물자 관리 실장 金康鎭, 개발 제2 연구부장 金哲, 機電과장 南章洙(원자력연구소 정책부장 역임), 안전관리실장 魯聖基(원자력연구소 안전시험 해석부장 역임), 개발 1연구부장 朴元玖(인하대 교수 역임. 핵연료성형 가공담당), 품질관리 기술실장 徐庚壽(원자력연구소 핵연료 사업부장 역임), 물리 제2 연구실장 徐斗煥(원자력연구소 원자로 관리실장), 화학 3연구실장 李哲洙(고려대 화학과 교수 역임)씨 등등이었다.

1980년 12월19일 핵연료 개발 공단이 에너지 연구소에 통폐합되었을 때 인력은 2 66명, 그 해 예산은 45억4800만 원이었다. 예산의 대부분은 시험시설 건설비였고 순수 연구비는 보잘것 없었다. 한편 인도 핵실험의 여파로 캐나다製 NRX연구로의 도입이 불가능하게 되자 원자력연구소는 1970년대 후반에 자체 개발 설계에 의한 연구로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이 사업의 책임자는 金東勳 박사였다.
金 박사팀은 4만㎾짜리 재료 시험로 설계에 착수 5년 만인 1979년에 상세 설계까지 끝냈다. 연구로의 이름은 TFTF(Thermal Flux Testing Facility)였다. 제작에 옮기려면 중요 부품 및 기재는 외국에서 조달해야 하고 중수 등 몇 가지 품목은 국제 원자력기구가 정한 규제품목에 걸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국 정부는 이때도 한국이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를 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신경을 곤두세우더니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이 사업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4. 재처리에의 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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