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햇살이 밝았던 1월10일 맨해튼 남쪽 끝 배터리 파크 부근 페리 터미널에서 스태튼 아일랜드로 가는 페리에 올랐다. 스태튼 아일랜드는 미국 뉴욕 市의 5개 자치구 중 하나다, 면적 151.5 km², 인구 약 44만 명. 뉴욕 市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주민 중 백인이 다수이며,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系와 아일랜드계가 많다. 뉴욕 市의 한적한 교외 중산층 거주지이다. 맨해튼과 연결되는 다리나 지하도로, 철도는 없지만 서쪽의 뉴저지州 및 동쪽의 브루클린과는 다리로 연결되며, 이들을 잇는 고속도로가 東西로 펼쳐져 있다.
맨해튼과 스태튼 아일랜드를 오가는 페리는 ‘자유의 女神像’을 옆으로 지나간다.
스태튼 아일랜드로 가는 페리에 오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요금이 공짜인 데다 오가는 뱃길이 ‘자유의 女神像’ 앞을 지나 기념사진을 실컷 찍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보너스로 맨해튼과 뉴저지, 브루클린의 빌딩 眺望(조망)도 있었다. 목적지보다는 旅程(여정)을 즐기는 여행인 셈이다.
페리에서 맨해튼 전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관광객들
스태튼 아일랜드를 오가는 페리 요금이 공짜로 바뀐 것은 줄리아니 시장 때인 1997년 7월4일, '한 도시에선 한 번만 요금을 낸다!'('One city, once fare')는 정책을 정했기 때문. 스태튼 아일랜드 거주자들 대부분이 종전에는 뉴욕에 나오는 페리 요금(당시 50센트)을 지불하고 맨해튼 안에서 또 한 번 지하철이나 버스요금을 지불했는데 그게 불합리하다 해서 페리 요금을 없앤 것이다. 관광객들은 漁夫之利(어부지리)를 누리는 셈.
겨울철 칼바람을 맞으며 배 난간에 서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다 보니 벌써 배가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 부두에 도착했다. 운행시간 25분. 부두에서 바로 돌아오는 배를 타려니 조금 민망해 인근을 산책하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배에서 내린 승객들은 벌써 버스, 지하철 역으로 빠져나갔다. 앞쪽 4~5명의 관광객들을 따라 나무판자로 만든 바닷가 길을 걸었다. 3분쯤 바닷길을 걷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커다란 벽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벽 안쪽에는 우체국의 私書函(사서함) 상자같은 조형물이 한 쪽에 130여 개씩 마주보고 있었다. 9·11 때 희생된 스태튼 아일랜드 출신자 267명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그저 그런 기념비려니 하면서 둘러보던 나는 묘한 감동을 받았다. 기념비가 놓인 곳에서 보이는 북쪽 하늘 끝에 이들이 희생당한 맨해튼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자리가 보였다. 이 작품의 이름은 ‘우편엽서(Postcards)’, 작가는 일본인 건축가인 소노 마사유키(당시 32세).
‘포스트 카드 全景(전경). 멀리 맨해튼 남쪽의 빌딩숲이 보인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빈 자리가 보이는 곳에 만들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 참사 후 스태튼 아일랜드 자치구에서 200만 달러의 예산으로 9·11 기념물을 바닷가에 세우기로 하고 작품을 公募(공모)했다. 19개國에서 179개의 제안이 들어왔고 6개의 최종 합격작품 중에서 디자인을 고르기로 했는데 소노 마사유키의 작품이 뽑혔다.
소노 마사유키는 일본의 항구도시인 고베에서 태어났다. 9·11 기념비를 구상할 당시, 그는 10년 전 뉴저지州의 포트리에서의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그의 아버지는 맨해튼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맨해튼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상상을 통해 테러를 통해 사랑하는 친구 가족들을 잃은 이들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 그는 5000여 명이 죽고 30만 명의 이재민을 낸 1995년 고베 大지진과도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어찌 보면 고향 고베의 災殃(재앙) 덕에 미국에 자리잡게 되었다.
1995년 소노가 워싱턴州 시애틀大 대학원에서 교환학생으로 재학하던 당시에 고베 지진이 일어났다. 고베 지진 직후 고베大와 시애틀大學간의 교환학생 지원자가 아예 없어졌다. 그는 예정대로라면 1년만 공부하고 일본에 돌아가야 했는데 1년 더 이 프로그램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머물게 되었고 시애틀대학에서 건축박사학위를 딴다. 그는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1998년부터 뉴욕시 맨해튼에서 건축가일을 하게 된다.
소노 마사유키의 ‘9·11 기념물’ 건축의 主題(주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해주는 ‘편지’였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담긴 私書函(사서함)을 마련해 두면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연락이 가능하리라는 ‘착한 생각’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는 최종 제안을 할 때도 다른 사람들처럼 컴퓨터를 쓰지 않고 손수 만든 엽서를 손바닥에 들고 아이디어를 설명했다고 한다.
‘포스트카드’ 안쪽엔 스태튼 아일랜드 출신 희생자 267명의 명단이
한 명 한 명 私書函(사서함)처럼 만들어져 있다
작가는 두 기둥을 엽서로, 기둥 안쪽의 희생자 공간은 우표를 상징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은 저마다의 상상을 한다. 9·11 때 딸을 잃은 공모작 선정위원 중 한 사람은 두 장의 엽서를 나비의 날개처럼 생각했고 죽은 딸이 그 날개를 타고 날아오르리란 상상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 날개를 비둘기의 날개로 생각하고 제작했다고도 했다. 우리 돈 22억 원 정도의 큰 돈을 들이지 않은 조형물 하나가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상상이 가능하게 만든다.
서울과 대한민국 繁榮(번영)의 상징인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을 갖다 놓았지만 왜 이 동상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구체적 설명이 없다. 나는 세종대왕의 얼굴이 한국인의 얼굴이 아닌 미국 치킨가게 KFC 앞에 있는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생각도 했다. 디자인은 결국 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과의 共感(공감)이 아닐까 싶다.
*스태튼 아일랜드에 가면 꼭 보고 올 곳이 하나 더 있다. 부두 옆 바닷가에 지어진 리치몬드 야구장. 양키스 구단의 마이너리그인 'SI 양키스‘ 팀의 홈구장이다. 2001년 開場(개장)한 이 야구장은 관람석 7100석 정도로 아담하다. 외야엔 관중석이 없다. 홈플레이트에서 보면 외야 펜스 밖에 바다가 펼쳐진다. 야간경기 때는 바다 끝으로 맨해튼의 夜景(야경)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때 양키스 팀의 주전투수이던 대만출신 왕첸밍 선수가 이 구단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메이저 리거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쓰던 41번이 이 구단의 永久(영구) 결번으로 남았다. 내가 간 날은 球場(구장) 문이 잠겨 눈덮인 운동장과 내야 펜스 일부만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