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애국자들

오후 한 시.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탄핵심판의 첫 번째 공개변론이 열리는 헌법재판소앞은 언론사 기자들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전경들만이 헌법재판소 앞을 오고갈 뿐 한가했다.
헌법재판소 앞에는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대책위원회' 회원 한 사람이 '장준하 선생 의문사 때 중정 5국장, 의문사법 2번 반려 폐기시킨 김기춘이 탄핵검사 웬말이냐'는 팻말을 목에 걸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로 보이는 할머니 한 사람이 대선 당시 노무현의 선거유인물을 들고 서 있었다.
탄핵심판을 취재하러 와서 한가로이 시간만 죽이고 있던 있던 방송기자들은 저마다 그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두 사람은 목소리를 높여 탄핵의 부당성을 강조했다. 그들로서는 다시 없는 선전 기회였다.

그러나 그동안 노무현 탄핵에 찬성해왔던 우익시민운동단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몇몇 우익운동단체 대표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헌재 앞에 나와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1인 시위를 벌일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A씨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MBC 신강균('MBC뉴스 서비스 신강균의 사실은'담당자)을 고발하러 가야 한다'면서 '거기 나갈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B씨는 '우리 회원 몇 사람이 방청하러 간다고 했는데....'라며 '이제 사람을 보내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C씨만이 '알았다. 곧 나가보겠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노무현 선전물을 들고 있던 할머니와 남자 노인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할머니는 '너 900억씩 해 먹은 한나라당에서 얼마나 받아 처먹고 왔냐, 이 XX야. 눈깔을 뽑아버릴라'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남자 노인은 '나도 내 자발적 의사로 여기 나온 거다'라면서 '노무현이 얼마나 국민을 불안하게 했느냐'고 따졌다. 할머니는 '노 대통령이 불안하게 한게 뭐 있느냐. IMF는 노대통령 취임 전 일이었다, 이 XX야'고 대들었다. 남자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고 펄펄 뛰고....
남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오늘 여기 나온 사람들가운데는 노무현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MBC 기자에게 탄핵에 찬성한다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저 사람이 와서 욕설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구리시에서 온 이만재'라고 소개하고, '아침 방송을 보다가 일반인들에게도 방청권을 나누어준다는 보도를 접하고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무현 지지 할머니는 온갖 쌍욕을 퍼부었다.
이만재씨는 '대통령만 국민이 뽑았나? 국회의원도 국민이 뽑았다.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 대통령 탄핵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면서 '말을 자주 바꾸고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싹수가 노랗다.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사이에 한 50대 남자와 노무현지지 할머니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말다툼 끝에 50대 남자가 손가락을 치켜 들자 할머니는 '삿대질 하지 마, 이 돼지XX야'라고 욕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밀치는 등 몸싸움까지 벌였다.

대통령 탄핵변론은 다음 변론 기일을 4월2일로 정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났다. 그동안에도 헌법재판소 앞에서 1인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헌법재판소 밖에 진을 친 언론사 기자들은 틈나는 대로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그들의 주장을 취재했다.

2시 20분 경. 1시간 전에 기자와 통화했던 C씨가 나타났다. 시위용품은 보이지 않았다. '1인 시위는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헌재 심판이 어떻게 되가는지 보러 왔다'면서 '저들과 맞대응해 봤자 추해진다'고 말했다.
변론이 끝나고 방청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익시민운동단체 대표 D씨, 대선무효소송 관련 단체의 E씨 등의 모습이 보였다. E씨에게 '좌익에서는 저렇게 몇 시간 전부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방송 등에서도 저들을 열심히 취재해 갔다. 이럴 때 당신들도 노무현 하야나 대선 무효를 주장하는 1인 시위를 벌였으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말을 건넸다.
그는 '대선무효 소송 관련 자료들을 만드느라고 바빠서 그 생각을 못했다. 4월2일에는 우리도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겠다'고 말했다.그러나 그의 얼굴에서는 좋은 선전기회를 놓친데 대한안타까움이나 현 시국에 대한 절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기자와 만났던 채명신 前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이제 나라가 완전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됐다'면서 '나라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이냐'고 개탄했었다. 기자는 그 대답을 오늘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소위 '진보단체'에서는 뉴스의 촛점이 되는 헌법재판소 앞에 나와 탄핵소추위원을 깎아내리는 1인 시위를 벌이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스컴을 타는데, 절호의 선전기회를 놓쳐 버리고도 그것을 아파할 줄도 모르는 것이 오늘날 '보수단체'들의 현 주소다. 군중들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기자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는 해도, 방청객으로 탄핵심판을 참관하기는 해도, 목에 팻말을 걸고 몇 시간씩 1인 시위를 벌일 생각도 없고, 그럴 사람도 없는 것이 오늘날 '애국단체'들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左右 역전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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