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을 격파, 이슬람 文明을 지켜낸 노예戰士들 이야기

튀르크族 출신인 맘루크는 한때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인도를 통치하였다. 1260년엔 이스라엘 땅에서 몽골군을 섬멸, 西進을 저지하였다.

 

Painting of a Mamluk, 1779.

세계사에는 바이킹 海賊, 몽골 騎馬군단, 사무라이, 요한 기사단, 예니세리(오스만 터키의 외인步兵), 프랑스의 외인부대와 같은 용맹한 戰士집단들이 등장, 커다란 足跡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가장 오래 영향을 끼친 戰士 집단은 맘루크이다.

맘루크는 黑海 및 카스피해 북쪽 草原 지대에서 활약하였던 튀르크(돌궐) 계통 기마민족 출신 노예집단을 가리킨다. '소유물'이란 뜻이다. 9세기부터 이슬람 세력(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압바시드 왕조)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면서 충성심이 강한 튀르크계 청년들을 노예로 사들여 독립부대를 편성, 왕을 保衛하도록 했다. 노예들은 토착세력과 연고가 없어 오로지 왕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장점이 있었다. 튀르크족은 몽골족과 비슷한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몽골 騎馬군단의 主力은 항상 튀르크족이었다. 튀르크족은 훈족이나 흉노족과 같은 뿌리이다. 신라 金氏 집단을 몽골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흉노족 출신이라고 보는 視覺이 有力하다.

 

맘루크 戰士들은 이슬람으로 歸化하여 아랍 말을 썼다. 그들은 집단생활을 통하여 단련되고 충성심이 강하였으며 종교적 열정 또한 대단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주민들은 주로 아랍족인데 그들은 맘루크 집단을 존경하였다. 일부러 노예가 되어 맘루크 부대에 편성되려고 한 이들도 많았다. 이슬람 지배층은 맘루크들 사온 뒤엔 노예로 대우하지 않았다. 후견인 역할을 하고 교육을 시켰으며 고위직에 등용하고 軍의 지휘를 맡겼다. 서서히 맘루크 戰士 집단은 이슬람 여러 나라에서 중견층을 형성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王權을 차지하였다.

 

 맘루크가 맨 처음 집권하여 王朝를 세운 곳은 이집트이다. 1249년 6월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지휘하는 제7차 십자군이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도시 다미에타에 상륙하였다. 이집트의 아유비드 왕조 술탄은 이 와중에 죽고 권력은 아들을 거쳐 부인에게 넘어갔다. 바이바르가 지휘하는 맘루크 부대는 반격을 개시, 루이 9세를 포로로 잡았다가 돈을 받고 풀어주었다. 정권의 불안정이 계속되다가 맘루크 부대장 쿠투즈가 왕이 되어 바흐리 王朝를 창건하였다.  1259년의 일이다. 奴隸戰士 집단이 왕조를 세운 것이다.

 

 이듬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決戰에서 승리한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후레구는 1258년에 바그다드를 점령,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압바시드 왕조의 왕을 죽이고,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를 향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몽골군 사령관 키트부가는 기독교인이 된 튀르크族이었다. 이슬람 文明세계는 이집트만 남은 상태였다. 1260년 9월 지금의 이스라엘 아인 잘루트(예루살렘 북쪽)에서 몽골 기마군단과 이집트  맘루크 기마군단이 정면대결하였다. 후레구는 몽골의 칸이 죽어 歸國하였고, 그의 부하 키트부가가 지휘를 맡았다. 양쪽은 각기 1만~2만으로 추정되는 기마군단을 동원하였다. 兩軍의 主力은 다 같이 튀르크族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생리를 잘 아는 사이였다. 말과 활, 그리고 기습과 기만과 역습을 주로 하는 戰法도 비슷하였다. 맘루크 부대를 지휘한 것은 쿠투즈 왕과 바이바르 장군이었다. 하루 만에 끝난 이 결전에서 맘루크 기마군단이 압승, 몽골군의 지휘자 키트부가를 잡아 처형하였다. 

 戰史학자들은 맘루크 騎馬軍團이 승리한 이유를 조직적인 훈련과 이슬람 교리로 무장한 정신력에서 찾으려 한다. 그 뒤 시리아를 중심으로 맘루크와 몽골군의 싸움이 계속되는데, 일진일퇴를 거듭하지만 몽골군은 아프리카로 들어오지 못한다. 맘루크는 몽골군의 말발굽으로부터 이슬람 文明을 지켜낸 것이다. 뿐만 아니다. 맘루크 군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은 십자군 세력도 몰아냈다. 기독교와 몽골군으로부터 이슬람을 지켜냈다는 게 맘루크의 브랜드가 되었다.

 

 아인 잘루트에서 개선한 바이바르 장군은 쿠투즈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들은 산업을 발전시키고 카이로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맘루크들은 재산을 상속할 권한이 없었다. 돈을 모으면 當代에 다 써야 했다. 주로 건축물을 짓는 데 썼다. 지금 카이로에 남아 있는 이슬람 건축물들은 맘루크 시대 것이 많다.

 

 유목기마민족 출신, 즉 맘루크, 튀르크, 몽골족은 권력세습을 부정하였다. 권력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가장 힘센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맘루크 시대에 王(술탄)은 제 命대로 사는 경우가 드물었다. 늘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王이 죽으면 다음 王은 實力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권력투쟁이 극심하였으나 사회는 活力이 있었다. 맘루크 왕조 시절 카이로와 이집트는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중심이었다. 영토도 지금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北아프리카로 확장되어 오스만 터키가 패권을 잡기 전엔 가장 큰 이슬람 帝國이었다.

 맘루크 시절 이집트는 카이로를 흐르는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팠다. 카이로는 나일강 下流를 통하여 지중해와도 연결된다. 즉,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 무역을 중계하는 立地를 갖게 된 것이다. 맘루크는 베니스와 함께 東西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이슬람 세계를 종교적으로 통치하는 교황을 칼리프라고 한다. 8세기 초, 이슬람 主力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움마야드 칼리프 체제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에 압바시드 칼리프 체제를 세웠다.  1258년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점령, 칼리프를 죽였다. 그 3년 뒤 이집트 맘루크 왕조는 압바시드 칼리프 체제를 카이로에서 재건, 이슬람의 정통을 잇는다.   

 

 맘루크 왕조는, 1517년 오스만 터키 군대에 패전, 이집트는 屬國이 된다. 맘루크 軍과 오스만 터키 軍은 튀르크족을 主力으로 한 점에서 비슷하였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맘루크 군대는 그때까지도 기마전술에만 의존하였으나 터키는 기마부대뿐 아니라 소총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스만 터키가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 되면서 문화의 중심도 카이로에서 이스탄불로 옮겨갔다. 오스만 터키의 술탄은 이슬람 교황(칼리프)도 겸하도록 하였다. 오스만 터키가 명실공히 이슬람 세계의 정치와 종교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오스만 터키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데 여전히 계급화된 맘루크 세력을 활용하였다. 맘루크 세력은 이집트의 지배층으로서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1798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였을 때 그들을 맞아 싸운 것도 맘루크 기병이었다. 포병과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 군대는 카이로 근방에서 벌어진 이른바 피라미드 전투에서 간단하게 맘루크 騎兵을 제압하였다.

나폴레옹은 맘루크 기병의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였다. 맘루크 戰士를 호위병으로 채용하고 맘루크 출신의 기병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1805년의 아우스텔리츠 전투와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지금의 체코 브루노 근교에 있는 아우스텔리츠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프랑스의 大勝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王家가 이끌던 神聖로마제국이 800년만에 해산된다.
 
 맘루크 세력의 역사적 역할이 끝난 것은 1811년 3월1일이다. 나폴레옹이 영국군의 공격을 받고 이집트에서 물러난 후 다시 이집트의 통치권을 회복한 오스만 터키는 알바니아 출신인 모하메드 알리를 이집트 총독으로 보냈다. 그는 이집트의 봉건영주 계급 역할을 하는 맘루크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알리는 이날 700명이 넘는 맘루크 지도자들을 시타델이라고 불리는 궁전으로 초대하였다. 연회를 베풀겠다고 속인 것이다. 맘루크 지도자들이 말을 타고 正門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지날 때 미리 매복시켜놓았던 알리의 군대가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한 명만 살아서 달아나고 전원 학살되었다. 그날 밤 알리는 부하들을 지방으로 보내 맘루크 영주들을 다 죽였다. 
 
 1206년엔 이슬람이 지배하던 인도에서도 맘루크 戰士들이 왕조를 만들고 1290년까지 집권하였다. 이 기간 맘루크는 인도를 몽골군단으로부터 지켜냈다. 이라크는 1747년부터 1831년까지 맘루크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오스만 터키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하였다. 이들은 주로 그루지아 출신이었다. 1831년 오스만 터키 정부는 맘루크의 마지막 지도자 다우드 파샤를 타도하고 직할 통치를 하게 되었다.
 맘루크의 군사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군사제도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해병대 장교들이 행사 때 착용하는 禮刀(예도)는 맘루크 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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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황제의 전투가 벌어졌던 브루노 紀行
오스트리아, 러시아 황제의 연합군을 무찌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아우스텔리츠 전투는 그의 最高 작품이다.
趙甲濟   
 204년 전인 1805년 12월 세계사의 결정적인 전투가 지금의 체코 브루노 근방 아우스텔리츠(Austerlitz)에서 벌어졌다. 2005년 10월21일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찌른 20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기념행사가 대단했었다. 한 해에 두 번의 결전이 있었던 1805년은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을 일단 마감한 한 해였다. 비록 海戰에서는 패배했으나 그 한 달 보름 뒤 나폴레옹은 아우스텔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大破하여 유럽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아우스텔리츠 전투는 1804년3월 나폴레옹이 자신의 암살을 꾀하는 독일 공작을 납치하여 처형한 데서 비롯되었다. 영국의 윌리엄 피트 수상은 나폴레옹의 행동에 분노한 유럽王家를 선동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황제를 끌어들여 세번째의 對프랑스 연합전선을 구성한다. 1805년 가을 선수를 친 것은 오스트리아였다. 황태자 페르디난드가 이끄는 7만2000명의 大軍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지금의 독일 바바리아 지방을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반격하여 10월15일 우름(Ulm)이란 곳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멸했다.
 
  프랑스 군대는 비엔나와 오스트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한 뒤 지금의 체코 땅으로 진격하여 아우스텔리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대치했다.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神聖로마제국 황제이기도 했던 프란시스 1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가 직접 군을 지휘했다. 이렇게 해서 아우스텔리츠 전투는 '세 황제의 전투'로 불리게 되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7만3000명에 139문의 대포를 가졌고,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8만5000명에 대포 278문을 보유했다. 연합군은 지휘체제가 2元化되어 혼란을 겪었다. 결전이 시작된 날은 안개가 끼고 추웠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의 右翼이 프랑스 군대를 포위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연합군의 취약해진 右중앙을 돌파하여 배후로 진출, 敵軍을 늪지대로 몰아넣는 전술을 성공시켰다. 敵軍이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서 달아나자 나폴레옹은 빙판을 향해서 포격하게 했다. 연합군 대포 38문과 수많은 병력이 꺼진 얼음 밑으로 수장되었다. 19세기 말 이 호수가 말랐을 때 130마리분의 말뼈가 발굴되었다.
 
  이때 러시아 군대를 지휘했던 사람은 미하일 쿠투초프였다. 그는 8년 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쳐들어오자 방어전을 지휘하여 프랑스 육군에 최초의 대패를 안겨주는데 아우스텔리츠 싸움에선 敗將이었다.
  오후 2시에 이 결전은 나폴레옹의 승리로 결판이 났다. 프랑스 군대는 약9000명의 사상자, 연합군은 1만5000명의 사상자와 1만2000명의 포로를 남겼다. 오스트리아 프란시스 황제는 나폴레옹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盟主가 되어 독일연방처럼 통치하던 神聖로마제국을 해산하고 라인연방을 만들어 독일남부를 지배하게 된다.
 
  이 전투로 해서 영국을 제외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은 일단 완성된다. 이 전투는 그 외교적 영향면에서나 뛰어난 전술면에서 나폴레옹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필자는 수년 전 가을 상미회 여행단과 함께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로 슬로바키아의 블라티슬라바를 거쳐 체코의 브루노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잔 적이 있으나 21km 떨어진 아우스텔리츠엔 가보지 못했다. 브루노는 사회주의의 그늘이 아직 짙어 쓸쓸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古都인데 17세기 이후 모라비아 지방의 수도이다.
 
  인구 약40만의 브루노는 유전학자인 멘델이 연구했던 아우구스틴 수도원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도시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하나 있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 중 한 사람인 미스 판 델 로에가 지은 투겐트하트 저택이다. 1930년에 완성한 집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이 저택이 20세기의 실용적 주택의 한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에는 바우하우스 건축思潮의 대표인물인데 이 현대식 저택을 지으면서 건축재료의 質感을 중시하고 심플한 공간을 선보였다. 들어가보니 서울 강남의 금방 지은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예약한 손님들만 받아주는 곳이라 헛 걸음을 할 수 있다.
 
 
[ 2009-08-28, 1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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