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1980년대의 한국 군부 높게 평가

군대가 민주화에 기여한 모범 사례.
뉴욕타임스의 데이비드 E. 생거 기자는 오늘자 칼럼 '군대가 결심할 때'를 통해서 한국의 군부가 민주화에 기여한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이집트 군부가 민주화의 과정에서 따를 만한 모델로 1980년대의 한국과 1998년의 인도네시아 군대를 들었다.

<한국은 미국이나 한국 시민들을 위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온 가장 확실한 모범사례일 것이다.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이고, 지난 몇년간의 어려운 시기를 거쳐 아시아에서 워싱턴의 가장 좋은 동맹국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대규모 거리 시위에 직면한 장군들은 점차적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쿠데타 소문이 이어졌으나 맨첨 자유롭게 선출된 대통령은 軍人 출신이었다. 그 뒤 민간인 대통령 네 명이 등장하였고 한 사람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反정부 인사였다>

생거 기자는 수하르토 退進 이후 인도네시아 軍部가 민주화를 관리하면서 이슬람 세력이 정치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준 것도 높게 평가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反이스라엘-反美 정책을 갖고 정치를 시작하였는데, 현재로는 소수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정치를 하니 생리가 바뀌더란 것이다. 생거 기자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도 政治에 발을 들이밀면 과격성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싶은 듯하다.

,,,,,,,,,,,,,,,,,,,,,,,,,,,,,,,,,,,,,,,,,,,,,,,,,,,,,,,,,,,,,,,,,,,,,

*2011년의 이집트와 1987년의 한국
趙甲濟

이란의 최고 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는 어제 테헤란에서 설교를 한 뒤 이집트의 시위사태가 1979년 이란 혁명의 연장선상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무바라크 대통령을 이스라엘을 위하여 복무하는 '반역적 독재자'라고 비난, 타도를 선동하였다.

이집트 시위를 관통하는 국민들의 욕구는 민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호메이니 神政체제를 출범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말살한 1979년 이란 혁명보다는 2009년 이란의 反정부 시위를 더 닮았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나선 수백 만의 이란 국민들은 혁명수비대의 무자비한 탄압에 침묵하고 말았다. 이집트 시위가 테헤란에서 일어났다면 하메네이는 발포를 명령하였을 것이다. 이집트 군대는 어제 평화적 시위를 보호하였다. 이란의 군대와 이집트의 군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란과 이집트의 차이는 독재와 전체주의의 차이이다. 독재는 시민의 私생활에 대하여는 간섭을 하지 않지만 전체주의는 시민들의 양심과 사상과 일상생활까지 통제한다. 이집트의 시위는 1987년 6월 한국에서 벌어졌던 대시위와 닮은 면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강력한 군대의 존재, 다양하고 개방적인 사회라는 점에선 닮았지만, 이집트엔 한국에서 있었던 두꺼운 중산층과 강력한 야당이 없다. 6월사태는 6.29 선언을 계기로 改憲과 선거를 통한 평화적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집트 사태를 보면서 새삼 1987년의 한국인이 지혜로운 길을 선택하였음을 확인한다.


집권세력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인 6.29 선언은 말의 힘으로 역사를 바꾼 좋은 사례이다. 6.29 선언이 민주투쟁 시대를 민주실천 시대로 바꿀 수 있었던 힘은 高潮(고조)된 국민여론을 업었기 때문이다. 유도의 업어치기처럼 자세를 낮추어 밀려오는 여론의 힘을 받아내면서 그 고삐를 잡아챙겨 자신의 승리로 만든 셈이다. 6.29 선언 3일 전에 있었던 대시위엔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나 全斗煥 정권의 공권력 또한 강력했다. 무교동 거리로 나서던 金泳三씨가 간단하게 경찰에 들려 닭장차에 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전 6월18일의 대시위에선 부산시청이 밤중에 몰려든 군중에 의해서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그 다음날 오전 군부대 출동준비 명령을 내렸고 오후엔 "오늘 저녁에 비상계엄령이 내린다"는 소문이 언론계에 돌았다. 그러다가 릴리 미국대사가 레이건 대통령의 親書를 전달하러 들어간다고 하더니 밤에 "비상조치는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과 권위주의 정권의 물리력이 거의 대등한 힘으로 팽팽하게 맞서 있을 때였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 구멍을 뚫는 식으로 발표된 것이 월요일의 6.29 선언이었다.

그 내용이 우선 야당과 국민들이 원했던 수준을 넘어서는 全面的 민주화였다.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 보장, 金大中씨 사면복권 등 거침 없는 약속이 국민들을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가장 미움 받던 사람이 가장 사랑 받는 정치인으로 변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29 선언과 兩金 분열 덕분이었다.

이 6.29 선언은 盧泰愚 대표의 외로운 결단으로 알려졌으나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제안을 盧 대표가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뤄졌음이 月刊朝鮮의 취재로 밝혀졌다. 물론 盧 대표도 직선제 개헌 수용밖에는 사태해결의 방도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全 대통령이 자신의 功이 될 수 있는 직선제 수용발표를 후계자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1, 2인자의 이런 콤비 플레이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全斗煥, 盧泰愚 두 사람의 협력과 金泳三, 金大中의 분열이 대조되면서 盧泰愚 정부를 만들어냈다. 全斗煥 기획-연출, 盧泰愚 주연의 6.29 선언 합작은 5.16을 성공시킨 朴正熙-金鍾泌 콤비의 협력관계를 연상시킨다. 5.16 성공 뒤 朴正熙-金鍾泌 관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全-盧 관계도 순탄치 못했다. 盧 대통령이 인간적인 의리와 정치력과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全斗煥 세력을 보호할 수 있었느냐의 여부는 쟁점이다. 1988년 3월 선거에서 與小野大가 된 날 나는 농담 삼아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야 하겠군"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全씨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지 않고 山寺로 들어갔다.

盧泰愚 대통령 시절 5년간이 나의 기자생활 37년간 가장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텔레비전 코미디의 소재가 되고, '물태우'란 말이 나오고,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돌아갈 때 국내 신문을 읽으면 하늘에서 뛰어내리고싶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정치적 기사로 해서 기자들이 안기부에 연행된 적이 없는 첫 시기였다. 盧 대통령과 측근들은 비판적인 기자들을 누르는 대신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 5년간 盧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누구보다도 많이 썼던 필자가 證人이다.

6.29 선언의 탄생과정에 全斗煥 대통령의 역할이 컸지만 결국 그 선언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盧泰愚 대통령이었다. 김대중-김정일의 반역적 합작품인 6.15 선언은 그나마 실천도 되지 않았다. 6.29처럼 철저하게 실천된 정치선언도 달리 없을 것이다.

민주화 세력은 盧泰愚 정권을 어떻게 보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그 정체성을 드러냈다. 나는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그를 찍지 않았으나 "국민의 선택으로 뽑힌 정부이므로 민주 정부,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정리할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선거에서 패배한 일부 민주화 세력은 盧 정부를 군사정권의 연장이라고 해석하고 타도를 외쳐댔다. 그 속엔 친북좌익세력이 있었다. 이 시기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을 향하여 명패를 던지고도 무사했던 盧武鉉 전 대통령까지도 제6공화국을 민주정부로 이해하지 않는 듯한 논법을 자주 썼다.

24년 전 새 시대를 연 6.29 선언, 그 주인공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금 世人의 관심권 밖에 있지만 역사에서 두 사람이 차지할 자리는 지금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전두환의 역할을 부통령 슐레이만이 노태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집트도 민주화의 길로 들어갈 것이다.

(무바라크 사임 발표 전에 쓴 글임)

,,,,,,,,,,,,,,,,,,,,,,,,,,,,,,,,,,,,,,,,,,,,,,,,,,,,,,,,,,

朴正熙
陸英修
朴槿惠
金鍾泌
李承晩
金泳三
金大中
全斗煥
李厚洛
李秉喆
鄭周永
金正濂
南悳祐
張基榮
吳源哲
金載圭
車智澈
文世光
張都暎
尹潽善
張勉

케네디
존슨
닉슨
카터
기시 노부스케
사토 이에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共産主義
民主主義
憲法
三選改憲
8.15 해방
光復
建國
工業化
産業化
都市化
民主化
學生示威
共和黨
民主黨
新民黨

6.25 南侵
5.16 軍事革命
4.19 義擧
6.3 事態
韓日會談 반대
1.21 事態
7.4 共同聲明
維新體制
維新宣布
核開發
原子力 發電所
코리아게이트
釜馬事態
10.26 事件

祖國近代化
民族中興
重化學工業
經濟開發
經濟成長
5個年計劃
輸出立國
山林綠化
工團
京釜高速道路
造船
海運
港灣
自動車
電力
石油
電子
纖維
縫製
農漁村
自主國防
自立經濟
自助精神
KIST
새마을運動
石油波動
中東進出
中東建設市場


越南派兵
韓日國交正常化
韓美同盟
駐韓美軍撤收

勤勞者
勞動者
企業人
派獨鑛夫

서울
龜尾
善山
聞慶
蔚山
釜山
滿州軍官學校
大邱師範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1917~1979) 전 대통령은 5.16 군사혁명을 주도, 18년간 한국을 이끌면서 경제개발을 핵심으로 하는 '조국 근대화'를 추진, 한국을 最貧國에서 일으켜 세워 경제적, 군사적 强國으로 변모시키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건설하였다. 敎師, 軍人, 革命家, 行政家의 면모를 가진 그는 西歐式 민주주의를 後進國에 그대로 적용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경멸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란 주체적 開發 모델을 제시하였다. 實事求是의 정신을 가진 청렴한 교양인이자 무서운 자주정신의 化身이었다. 그는 '先경제건설-後민주건설 및 자유통일'의 신념하에 개방정책과 輸出立國 전략을 선택하였고 민족문화 창달에 노력하였다. 自助정신-自立경제-自主국방이 18년간 이어진 그의 일관된 大戰略이었다. 그는 準戰時상태하에서도 自由와 人權, 그리고 정치 코스트를 최소한으로 제약하고 거대한 공업력을 건설, 南北韓 대결에서 한국이 절대적 優位에 서게 만들었다. 兄은 우익경찰에, 아내는 북한공작원에, 자신은 부하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