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情院長 문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모사드의 해외 납치행위를 옹호한 이스라엘 言論. 뉴욕타임스가 청와대를 도청한 CIA 부장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나?
1. 작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두바이에서 발생한 하마스 간부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다. 두바이 경찰이 사진을 공개한 암살 혐의자들이 사용한 여권의 주인 중 6명은 영국 시민권을 보유한 이스라엘인이었으며, 다른 1명은 미국계 이스라엘인이었다.

모사드가 유럽 국적을 가진 이스라엘人의 이름을 도용한 여권으로 요원들을 두바이에 보내 알-마부를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자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이날 암살단이 二重(이중)국적자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것이 곧 모사드의 암살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며 모사드 연루설을 부인했다. 하마스 간부 알-마부는 이란 무기류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들여오는 임무를 맡아 오다가 두바이의 한 고급호텔 객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두바이 경찰은 공항과 호텔 등의 폐쇄회로TV 화면을 분석한 결과, 유럽 여권을 소지한 암살단이 지난달 여행객을 가장해 알-마부의 객실에 잠입해 그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정부의 완강한 부인으로 확대되지 않고 끝나버렸다.


2. 1980년대에 영향력의 절정기를 맞았던 영국의 언론 재벌 로버트 맥스웰은 체코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가족을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잃었다. 영국군에 들어가 장교가 된 그는 1948년에 이스라엘이 建國(건국)하자 체코가 이스라엘에 무기를 대주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은 건국하자 마자 아랍국가들과 전쟁에 돌입하는데, 체코製(제) 무기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1980년대 그는 데일리 미러, 선데이 미러, 데일리 레코드, 선데이 메일 같은 신문사와 출판사 및 텔레비전 방송국을 소유, 영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노동당 국회의원도 두 차례 지냈다.

1984년 맥스웰은 이스라엘 핵개발의 代父(대부)이기도 한 수상 시몬 페레스(현 대통령)를 만난 뒤 해외정보기관 모사드의 적극적인 협조자가 되었다. 페레스는 모사드 부장 나훔 아드모니를 맥스웰에 소개해주었다. 맥스웰은 거물 언론인으로서 세계의 지도자들을 쉽게 만나고 다니면서 고급 정보를 수집, 모사드에 전해준다.

1986년 9월14일 맥스웰은 모사드의 아드모니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디모나 핵시설에서 근무했던 한 기술자가 대리인을 통하여 자신이 소유한 신문사 선데이 미러에 핵시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여 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보중엔 비밀 시설에 대한 사진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기술자의 이름은 디모나에서 9년간 근무한 적이 있는 모로코 출신의 유대인 모르데차이 바누누. 아드모니 부장은 페레스 수상에게 直報(직보)하였다. 모사드가 바누누의 행적을 조사하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바누누는 핵무기를 제조하는 시설까지 볼 수 있는 保安(보안) 허가증의 소유자였다.

이스라엘은 당시 핵폭탄을 수백 개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론 '核(핵)에 대하여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는 모호성을 核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이 모호성 덕분에 이스라엘은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핵강국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폭로가 이뤄지면 이 모호성과 유연성이 깨진다.

이스라엘 정부는 비상대책반을 구성하였다. 바누누를 암살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납치로 결정되었다. 모사드는 바누누가 선데이 타임즈와도 접촉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들은, 로버트 맥스웰을 동원, 선수를 쳤다. 맥스웰의 지시로 선데이 미러는 바누누가 제공한 정보는 가짜라고 보도하였다.

선데이 타임즈는 기사를 쓰기 전에 영국의 핵전문가를 바누누와 만나게 하여 정보의 眞僞(진위)를 확인하게 하였다. 그 결과는 '진짜'였다.

선데이 타임즈는 바누누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운트바텐 호텔에 투숙시켰다. 모사드는 런던에 사는 협조자들을 동원, 바누누의 거처를 알아냈다. 모사드는 美人計(미인계)를 쓰기로 하였다. 모사드의 여성 첩보원 세릴 벤 토브가 동원되었다. 그는 결혼한 상태에서 이 작전을 자원하였다.

9월24일 바누누는 따라다니는 선데이 타임즈 기자를 따돌리고 호텔 바깥으로 산책을 나갔다. 타임즈 기자는 그를 미행하였다. 기자는 바누누가 라시세스터 광장에서 한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금발의 미녀였다. 유대인 냄새가 났다.

호텔로 돌아온 바누누는 선데이 타임스 기자에게 "신디라는 미국 여자를 만났다"면서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고 털어놓았다. 기자가 "당신이 그 여자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계획된 것 같다"고 경고했지만 바누누는 듣지 않았다. 모사드 첩보원 세릴은 훈련 받은 대로 첫눈에 바누누를 사로잡은 것이다.

며칠 뒤 공작원 '신디'는 로마에 사는 여동생을 만나러 가자고 바누누를 설득, 로마行 비행기에 올랐다. 이 여객기엔 다섯 명의 모사드 요원이 동승하였다. 로마 공항에서 신디와 바누누는 택시를 타고 여동생이 산다는 아파트로 갔다. 여동생의 호실에선 세 명의 모사드 요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누누를 끌어들여 마취시켰다. 요원들은 바누누를 들것에 실어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선 앰불런스에 옮겼다. 걱정스런 표정을 한 이웃사람들에겐 "친척인데 갑자기 발병하였다"고 설명했다.

바누누를 실은 차는 해안으로 달려갔다. 작은 배에 옮겨진 바누누는 먼 바다에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화물선으로 다시 옮겨졌다. 사흘 후 바누누를 납치한 요원들은 이스라엘의 하이파 항에 도착하였다. 선데이 타임스는 10월에 바누누의 폭로를 기사화하였다. 이스라엘이 적어도 100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다고 썼다.

바누누는 간첩죄로 18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1년간 독방에 감금되었다. 국제여론이 나빠지자 1998년에 좀 좋은 방으로 이감되었다. 그는 2004년에 석방되었으나 이스라엘 당국은 엄격한 제한 조치를 취하였다. 출국은 금지되고 외국인을 만날 수 없으며, 항구와 공항에 접근할 수 없게 하였다. 이스라엘 국경의 500m 이내론 다가갈 수 없다. 전화도, 인터넷도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규정을 어기면 석방조건 위반으로 수시로 잡아 가둔다.

1991년 11월5일 로버트 맥스웰은 카나리아 군도 근해를 항해중이단 자신의 호화여객선에서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 失足死(실족사)로 발표되었으나 자살이란 설과 모사드에 의한 암살이란 설도 있다. 사고 직전 한 전직 모사드 요원은 미국에서 발간한 책을 통하여 맥스웰과 데일리 미러의 외신부장 닉 데이비스를 모사드 요원이라고 지목하였다. 데일리 미러는 맥스웰이 모사드에 의하여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실었다. 맥스웰은 이스라엘에 묻혔는데 國葬(국장)에 버금 가는 장례식이었다.

이스라엘 언론은 정부가 바누누를 납치한 사실이 드러난 이후에 정부를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누누를 비난했다. '반역자가 암살되지 않고 재판 받는 게 다행인 줄 알아라'는 식의 논지였다.

3. 기자는 1996년 11월 초 라빈 당시 수상을 인터뷰하였다. 피살되기 하루 전이었다. 이런 問答(문답)을 남겼다.

<―며칠 전 '이슬라믹 지하드'의 지도자가 말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모사드의 관련설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총리께서는 올해 초 지하드를 지칭하여 “우리는 당신들을 추적하여 제거할 것이다. 어떤 국경도 당신들의 보호막이 되지 못할 것이다”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접 국가의 主權(주권)도 침범할 각오가 돼 있다는 뜻입니까.

“1993년 이후, 이스라엘-PLO 사이의 평화 협상이 진전되어 갈수록 지하드와 하마스 조직에 의한 테러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동차 폭탄으로, 수류탄으로, 자살공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모든 테러 희생자의 70%가 이스라엘人들입니다. 그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평화협상에 반대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해온 방식 그대로 그들에게 대항하고 있습니다. 지하드 두목을 누가 죽였는가는 먼 장래에 역사가 알려 주겠지요. 우리는 그 可憎(가증)할 테러 조직의 두목이 제거된 데 대해서 애도할 입장은 아닙니다.”>


4. 1972년 西獨(서독)의 뮌헨 올림픽 기간에 선수촌으로 침입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이 이스라엘 선수 및 코치 11명을 죽였다. 독일 경찰과 총격전으로 테러단 5명이 사살되고, 세 명이 잡혔다. '검은 9월단'은 그 뒤 서독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여 西獨 정부를 위협한 끝에 잡혀 있던 세 명의 동료를 구해냈다.

화가 난 골다 메이어(여성) 이스라엘 총리는 이 테러를 기획하고 가담한 범인들을 암살하는 조직을 만들게 하였다. 정보기관 모사드와 이스라엘군이 합동으로 특수조직을 구성했다. 이 팀의 첫 작전은 1973년 4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침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보책임자 모하메드 유수프 알 나자르 등 세 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 特攻(특공)작전의 지휘관은 나중에 참모총장, 그리고 수상이 된 에후드 바락(현재 국방장관)이었다. 이 국가公認(공인) 암살단은 주로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니면서 팔레스타인 테러단을 추적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였다. 1973년 6월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한 모로코인을 뮌헨사건 관련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誤認(오인)하여 암살하였다가 요원 다섯 명이 붙들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끈질긴 외교 교섭 끝에 옥살이하던 요원(여성 2명, 남성 3명)을 2년 뒤 전원 송환받았다. 이스라엘 암살 팀은 살라메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1979년 1월22일 그를 베이루트에서 찾아내 원격조종 폭탄으로 죽였다.

뮌헨 보복작전은 '신의 분노'라는 암호명을 가졌다. 1992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테러관련자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이 이스라엘 같이 보복하였더라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 관련자,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관련자, 아웅산 폭파사건 관련자, KAL기 폭파사건 관련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거기에 김일성, 김정일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의지의 핵심은 보복의지이다. 보복의지의 핵심은 애국심과 분노일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외국을 상대로 한 工作(공작)이나 첩보수집 행위가 들통 났을 때 그 나라 정치인과 언론이 이를 맹비난하면서 물고 늘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피해자격인 인도네시아 정부가 '우리는 피해를 본 것이 없다'고 하고 '침입자는 실수로 들어온 투숙객이었다'고 해명했는 데도 불구하고 국정원장을 문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민주국가의 언론에서도 찾기 힘든 사례이다. 인도네시아는 국정원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는데 한국 정부가 국정원장을 문책, 인도네시아를 바보로 만들면 이야말로 국제문제가 된다. 自國民(자국민)을 상대로 한 정보기관의 不法(불법)행위와 외국을 상대로 한 工作을 같은 수준에 놓고 비판하는 언론은 분별력에 문제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를 상대로 한 미국측의 도청이 1970년대에 발각된 적이 있지만 뉴욕타임스가 이의 책임을 지고 CIA 부장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는가?

괴한의 호텔 침입 사건 추적과 추궁은 이 정도에서 끝내야 한다. 임동원의 국정원이 不法자금 수억 달러를 간첩 두목 김정일의 비자금 계좌로 보낸 것이 들통났을 때는 침묵하였던 언론이 국정원의 對外(대외)첩보활동에 대하여 이렇게 집요하게 폭로하려 드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 행동이다. 공평성이 없는 사실 보도엔 진실이 없다.

국가정보기관장인 국정원장은 해외 공작에 대하여는 시인도, 부인도, 사과도 할 수 없다. 국가는 전쟁에서 진 경우가 아니면 해외첩보활동에 대하여 당사국에 사과할 수가 없다. 국가정보기관이 主權이 미치는 自國 영토에서 해외기관을 상대로 정보수집활동을 벌이는 것은 어느 나라에도 있는 常例이다. 인도네시아 정보기관도 한국 대사관이나 商社들을 상대로 한 정보수집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국가가 간첩을 보냈다고 사과한 경우를 보았는가? 言論(언론)의 자유와 國益(국익)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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