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안에서 급정거한 KTX 열차

'5번 車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담배연기를 火災로 감지한 것입니다. 승객 여러분, 흡연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KTX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데 경남 양산 근처 터널에서 급정거를 하였다. 客室 화면엔 消火器(소화기) 표시가 나왔다.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데 곧 車內 방송이 들렸다.

"5번 車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담배연기를 火災로 감지한 것입니다. 승객 여러분, 흡연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삼가해달라'는 말이 거슬렸다. '흡연을 금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해야 한다. '삼가해달라'는 말은 너무 약하다.

방송에 '교통이 통제되고 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통제'란 '금지'가 아니다. 교통경찰이 차량의 흐름을 관리하는 것을 '통제'라고 한다. 그런데 방송을 더 들어보면 진행자가 '차량통행 금지'를 '차량통제'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금지'라고 해야 할 때 '삼가' '통제'라는 낱말을 쓰는 것일까? '금지'라고 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 法治가 무너지고 있는 원인중 하나는 法을 집행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의 이런 '희미한 자세'이다. 안 되는 것은 안된다고 해야지 '삼가해주세요'라고 해선 정말 안된다.

독일에 오래 살았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법이 엄하기 때문이다."


이 KTX 열차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꺼리가 하나 더 있다. 내가 탄 특실안에서 대 여섯 명의 승객들이 親知사이인데, 서울에서부터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하였다. 나이가 60, 70대이고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모두가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니 말리는 이도 없었다.

대전에서 옷을 잘 입은 교양이 있어 보이는 30代 일본 여성 두 사람이 탔다. 이들은 내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대구쯤 오니 일본인 여성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기차안에선 할 수 없는 행동을 한국 열차안에서 하고 있었다. 한국에 온 일본인은 한국식으로 행동하고 일본에 간 한국인은 일본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한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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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형극 : 연출가와 꼭두각시와 구경꾼들

김금식의 앙심 : ‘법에의 복수’

김이만씨는 요절한 동생 기철씨가 간직해왔던 재판 기록과 手記(수기)를 불태워 없애버림으로써 그 지긋지긋한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다. 나는 거꾸로 이 기억을 되살려내려 한다. 관계자들의 증언과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고 기록의 조각들을 찾아내 끼워 맞춤으로써 그 사건을 복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김기철씨를 요절낸 ‘범인들’을 가려낼 것이다.
십 년도 넘게 흐른 옛 사건을 새삼 들춰내어 누구를 나무라고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이 사건 속에 파묻힌 개인체험을 우리 사회의 공동체험으로 승화시켜 거기서 어떤 교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그런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어둠 속에서 색이 바래진 옛 기억과 기록들을 다시 햇빛 아래 내어놓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살리자는 뜻이 아니라 그 고통을 나누어 갖자는 의도이며, 수사관이나 기자들의 잘못을 캐내려는 게 아니라 그 잘못을 오늘과 내일의 수사관들과 기자들 앞에 하나의 경고로 세워두자는 뜻이다. 이것은 ‘흘러간 사건을 되씹는 것이 오늘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무고한 전경렬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가 혼이 났던 경찰과 기자들은 전씨를 풀어준 1967년 11월 초순 이후엔 수사나 취재에 대 같이 시들해졌다. 경찰은 수사본부 요원들을 서부산경찰서 자체요원만으로 크게 줄였다. ‘우리나라 경찰은 한두 달 사이 초장에 범인을 못 잡으면 수사를 사실상 포기한다’고 믿는 사건기자들도 ‘근하 사건은 이걸로 끝이다’고 생각하며 사건에 쏟던 신경을 늦추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자 근하군 살해사건은 ‘김신조 일당의 서울 침투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같은 잇단 대사건에 가려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었다.
부산교도소 4舍(사) 10호실 감방―. 형사와 기자들이 손을 떼려고 하는 근하 사건에 뒤늦게 열을 올리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창살 밖에서 찾아오는 초봄의 溫氣(온기)를 느끼며 하나의 드라마를 구상하고 있었다.
김금식.
그때 서른세 살이었던 이 건장한 남자는 폭력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징역 여덟 달의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술김에 치고받고 한 것을 사실이지만 자기는 얻어맞은 쪽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상대를 풀어주고 자기만 구속시켰다. ‘머리 좋고 공부도 많이 한’ 검사와 ‘현명한’ 판사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았다. 자기가 폭력 前科者(전과자)이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는다고 그는 자기 나름대로 풀이했다.
“나는 철석같이 법을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했다. 그래서 경찰, 검찰, 법원을 다 함께 농락하여 망신시킬 각본을 쓰기로 결심했다. 나를 믿어주지 않는 ‘법’에 복수하기로 한 것이다.”(<국제신보> 1969년 12월6일 김금식씨의 수기)
그는 1968년 3월8일 교도소 안에서 파는 봉함엽서 한 장을 구했다.
<금일도 업무 수행에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김근하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현재 폭력죄로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4사 10호실에 있는 김금식이란 사람은….>
서부서 수사계장 앞으로 쓴 이 엽서에서 금식씨는 “그 사람(김금식)은 근하군을 살해한 뒤 수사망을 피하려고 일부러 폭행을 해 복역 중이다”고 자신을 고발했다. 물론 누가 쓴 편지인지 모르게 위장했다. 김금식씨는 이 편지를 기소유예로 출감하는 閔(민)모씨에게 부탁하여 부치도록 했다. 정식으로 부치려면 교도소 교무과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여자 대접 받으며 수사 협조한 재소자

<엽서를 보낸 지 일주일쯤 지난 3월16일, 나는 한 사람의 방문객을 맞았다. 그는 ‘서부서 李 경위’라고 자기소개를 한 뒤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띄운 엽서의 사본이었다. 나는 일부러 당황한 척했다. 그는 정중하게 ‘수사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한 뒤 돌아갔다. 사흘 뒤 그는 다시 찾아왔다. 그제야 나는 강요에 못이긴 척 주워댔다.
‘몇달 전 서면 크라운 바에서 친구 한영식과 술을 마셨는데 이 자리에서 한영식은 스무 살 가량 난 정기영을 소개해주었다. 한영식은 한 권의 책을 갖고 있었는데 그 속에 종이쪽지 한 장이 끼여 있었다. 내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각서라고만 말하고 <킬러>란 영화를 보았느냐고 되물었다. 보았다고 했더니 이것이 그 영화와 같은 청부살인에 대한 각서인데 그 사건은 대신동에서 일어난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라고 말하더라…’
내 말을 듣고 그는 한영식의 주소를 물은 뒤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음날, 낯선 형사 두 명이 찾아왔다. 李 경위와 함께 가르쳐준 주소에 가서 찾아보았으나 한영식이란 사람은 없더란 것이었다. 있을 턱이 없다. 한영식이란 내가 교도소를 드나들며 알게 된 업무상 과실치사죄의 운전사 이름이며, 내가 되는 대로 주워댄 것이니까. 나는 한을 만나려면 서면 대한다방의 오 마담한테 물어보라고 했다. 그들은 연 600명(그들의 말)의 형사들을 동원, 오 마담을 찾았으나 허탕을 칠 수밖에. 결국 경찰은 골탕만 먹고 손을 뗐다. 그 대신 손을 뻗어온 사람이 김태현 부장검사였다.>(<국제신보>1969년 12월7일)
김태현 검사.
그때 마흔네 살이었던 그의 이름 앞엔 늘 ‘유괴사건 수사의 명검사’란 설명이 붙어 다녔다. 경남 삼천포가 고향인 金 검사는 1943년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學兵(학병) 복무로 중퇴했다.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부산지검, 서울지검, 부산지검 진주지청에서 근무했다. 1956년 진주에서 일어났던 진주여고 교감 아들 조인걸군(당시 일곱 살) 유괴살해사건을 해결했다(피고인들은 복역 중에 조작이라 주장, 재심 신청)하여 유명해지더니 1967년엔 진주 춘우군 유괴살해사건 범인도 경찰을 제치고 단박에 잡아들여 민완 검사의 名聲(명성)을 더욱 굳혔다. 그는 외모에서부터 민완 수사 검사의 분위기를 풍겼다. 훤칠한 키, 정력적인 얼굴, 안경 너머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 빈틈없는 말솜씨….
그와 가까웠던 ㅅ기자는 김태현씨를 “검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한번 밀고 나가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집념의 化身(화신) 같은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또 다른 기자를 “그를 대하면 찬바람이 날 정도로 매섭게 느껴졌으나 기자들을 대하는 통이 크고 잔정이 많아 우리와는 퍽 관계가 좋았다”고 기억했다.
요컨대 그는 김금식씨가 깔아놓은 함정에 빠지기에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1968년 4월 중순 어느 날 오후 나(김금식)는 김태현 검사에게 불려갔다. 안경 속의 눈빛은 매서웠으나 퍽 인정스레 대했다. 그는 진주 공사장 유괴살해사건(인걸군 사건), 춘우군 사건, 대청동 태웅군 사건에 관한 얘기만 하고 근하군 사건에 대해선 한 마디도 비치지 않은 채 저녁을 불러다 먹인 뒤 돌려보내주었다. 이런 식으로 만난 것이 일곱 번.
8일째 만난 날엔 내 쪽에서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먼저 근하군 사건의 얘기를 꺼내고 서부서 형사들에게 한 것과 꼭 같은 거짓말을 했다. 4월24일 나는 김 검사와 구영근씨 그리고 교도관 두 명과 함께 한영식을 찾아 나섰다. 오후 열시 조금 지나 우리는 범일동 ‘큰 소리집’이란 요정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나는 囚衣(수의) 차림이었다. 웃옷은 김 검사의 촉탁 구영근씨의 점퍼를 얻어 입었다. 술을 마시며 김 검사는 한영식의 행방을 파고 물었다. 나는 적당히 얼버무려 대답했다. 술자리는 오후 11시께 끝났다. 김 검사는 현금 2000원을 쥐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일요일을 빼고는 거의 매일같이 검찰에 소환돼갔다. 그때마다 시내를 나돌며 술을 얻어 마시고 한밤중에 감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교도관들이 ‘복역자가 그렇게 매일 술에 취해 와서야 되겠느냐?’고 충고를 할 정도였다. 그간에 나는 세 여인을 겪었다. 첫 번째는 5월 초순 구포에서였다. 그날도 한씨를 찾는다고 구포까지 갔는데 밤이 깊자 나는 허술한 술집의 외딴 방으로 밀어 넣어졌다. 27세가량의 아가씨가 교태를 부리며 나를 맞았다. 이즘 나는 김 검사가 내가 말하는 대로 한씨를 찾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나를 범인으로 꼽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맹목적으로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도 그렇거니와 분에 넘치는 대접들은 자백을 받기 위한 人心(인심) 전술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었다. 5월 초순 드디어 김 검사는 내게 자백을 요구해왔다. 처음 나는 매우 당황했으나 이왕 시작한 일, 마음을 차분히 하고 자백서를 썼다. 며칠 뒤 김 검사는 한영식이란 너의 친구, 김기철이 아니냐‘고 물었다. 기철이는 내가 15년 동안 친했던 친구로, 한영식을 찾아다니는 동안 기철이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연극에는 공연자가 필요하다. 기철은 前科(전과) 한번 없는 양 같은 친구다. 그런 결백한 친구가 共犯(공범)으로 몰리면 나중에 혐의를 벗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1969년 12월10일)

속속 걸려드는 희생양들

1968년 5월5일 김태현 검사는 김기철씨를 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하루 전에 멋도 모르고 부산지검에 끌려온 ‘순덕이’ 기철씨는 “1964년 12월에 금식이와 함께 범천공원에서 아베크 남녀가 가지고 가는 라디오 한 대를 빼앗아간 적이 있지?”란 얼토당토않은 추궁을 받은 뒤 감방에 들어가야 했다.
<열이틀이 지난 5월17일 나(김기철)에게는 두꺼운 가죽띠로 된 수갑이 채워졌다. 세수도 할 수 없고 잠을 잘 때는 모로 누워야 했다. 나는 눈알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검찰청으로 불려갔다. 검사는 ‘좀 반성해봤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죄를 반성하란 말입니까?’하고 대들었다. 검사는 허허 웃더니 ‘너 근하군을 죽였지!’라고 날카롭게 말했다.
‘뭐 말입니까. 한 번 더 말씀해주세요?’
나는 귀를 의심했던 것이다.
‘너는 망을 보고 금식이가 살해했지?’
‘나는 모릅니다.’
‘금식이는 했다는데 너는 잡아떼느냐?’
‘그놈은 했는지 몰라도 나는 안했습니다.’
‘모른다’고 되풀이하는 나의 뺨에는 주먹들이 날아왔다. 이런 고초 속에 날은 밝아 나는 다음날 오전 5시께 교도소에 돌아왔다. 감방 안에서도 나는 잘 수 없었다. 내가 자기만 하면 감방 친구들이 마구 발길질을 했다. 내가 자면 그들이 단체 기합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신문 사흘째인 5월19일 검찰에 나가니 책상 위에 불고기와 정종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그때 금식이가 들어왔다. ‘어찌된 일이냐?’고 나는 소리쳤다. 그는 ‘면목 없다, 술이나 한잔해라’고 힘없이 뇌까렸다. 이어서 ‘이왕 일이 탄로 났으니 영감님 앞에서 용서를 비는 길뿐이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너와 내가 근하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금식은 나에게 다그쳤다. 검사는 ‘자 어때 바로 찌르니 할 말이 없지? 묻는 말에 대답하라’고 했다. 나는 시종 모른다고 했다. 입씨름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나는 아픈 뺨을 움켜쥐고 분함에 이를 갈았다.> (<부산일보> 1969년 7월29일 김기철씨의 獄中 수기)
기철씨에 이어 엮이어든 것은 정대범씨(당시 21세)였다. 정씨는 당시 육군 사병이었다. ㅅ상고를 중퇴한 이 예쁘장한 청년은 유도와 당수 및 합기도 유단자였다. 고향이 밀양군 상남면인 그는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하자 외할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기철씨와 대범씨의 공통점은 둘 다 배경 없는 집안 출신이란 것이었다.
정씨는 고교생 시절 구영근씨를 사범으로 모시고 유도를 배웠다. 기철씨가 친구 금식씨에 의해 이 사건에 연루된 것과 꼭 같이 대범씨는 具 사범에 의해 하나의 配役(배역)을 떠맡게 된다.
구영근씨는 이 해괴한 드라마에서도 특이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김태현 검사의 그림자로 불릴 만큼 줄곧 金 검사를 가까이서 도와왔었다. 진주여고 교감 아들 살해사건 수사 때는 진주경찰서 사찰계 형사로, 춘우군 유괴살해사건에서는 경남도경 소속 형사로 김태현 검사의 수사를 보좌했었다. 근하 사건에서도 김태현 검사는 具씨를 검찰청 촉탁으로 임명하게 하여 손발처럼 쓰고 있었다. 그는 사법 경찰관은 아니었기 때문에 수사권은 행사할 입장에 있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사실상 수사를 하고 있었다.
<구영근씨가 나서서 ‘韓의 친구 정기영이란 정대범이 아니냐’고 따졌다. 나(김금식)는 그가 내민 사진을 보고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대범씨를 공범으로 확신한 모양이다.>(<국제신보>1969년 12월10일)
이렇게 하여 끌려 들어온 정대범씨는 ‘범행 일체’를 자백, 김금식씨와 쌍벽을 이루는 ‘사건 해결의 협조자’가 된다.
<5월19일 오후 8시께 나(김기철)는 또 검사 앞에 끌려 나갔다. 검사는 제법 너그럽게 ‘기철이, 잘 생각해봤나?’라고 말을 걸었다.
‘뭘 생각하란 말입니까?’
‘너 정대범을 알지?’
‘뭘 하는 사람입니까?’
이때 검사는 대범이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땅딸막한 사나이가 들어서면서 손을 번쩍 쳐들더니 ‘형! 오랜만입니다’고 외쳤다.
‘네가 누구지?’
‘이 꼰대가 모른 체한다.’
나는 어이없어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때 금식이가 들어오더니 대범이라는 청년과 반갑게 인사했다. 검사는 ‘대구에 가서 기철이 네가 이 볼 박스를 샀지?’라고 호통 쳤다.
‘나는 대구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옆에 서 있던 대범이가 ‘이 새끼야 몽땅 시인하고 자도록 하자’고 소리치자 금식이도 ‘기철이 너 고집이 어지간하구나. 나도 잠이 와서 못 견디겠다. 빨리 그렇다고 해라’고 했다. 나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모르겠다’ ‘너희 맘대로 뇌까려라’ ‘그런 일 없다’고만 수십 번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정대범이란 꼬마 친구는 누구일까, 그는 이 사건에서 어떤 역을 맡고 있으며 왜 나를 끌어넣으려 할까, 이런 생각들이 나의 흐릿한 머릿속을 스쳐갔다.>(<부산일보> 1969년 7월31일)

고문, 또 고문

김금식, 정대범, 김기철씨 등 세 ‘범인’을 확보한 金 검사 팀(金 검사 이외에 이원형, 정경식 두 검사가 이 수사에 합류했다)은 이제 이들을 조종한 主犯(주범)을 찾아 나섰다. 강력사건이 나면 피해자의 주변, 특히 친족들을 일단 의심해보는 것은 수사의 定石(정석)처럼 돼 있다. 근하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 경찰은 근하의 외삼촌, 그러니 근하 어머니의 오빠 되는 최형욱씨(가명·당시 40세)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았었다. 형욱씨는 1·4후퇴 때 고향인 함경남도에서 월남했다. 먼저 내려왔던 여동생(근하 어머니)을 부산에서 만났는데 얼마 뒤 여동생은 같은 월남민인 김용선씨와 결혼했다. 형욱씨는 부두 노무자, 破紙(파지) 수집상으로 일하면서 여동생 집안과 가깝게 지냈고 김용선씨로부터는 약간의 금전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62년 형욱씨는 중매결혼을 했으나 곧 이혼을 했고 근하 사건이 났을 때는 초량3동에서 재혼한 아내 및 젖먹이 딸과 함께 어렵게 살고 있었다.
1967년 10월 경찰 수사본부에서 파견 근무를 하던 한일민 주임은 형욱씨를 의심하면서도 동향이란 연고로 해서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다. 韓 주임은 “이왕 자수할 바엔 동향 사람에게 하여 특진시켜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부탁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韓 주임은 형욱씨를 모 수사기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있던 거짓말 탐지기에 형욱씨를 걸어본 것이었다. 거짓말 탐지기는 ‘형욱씨의 결백’을 나타냈다. 끈질긴 韓 주임은 탐지기가 보여준 결과에 대해선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난 자네가 그래도 한 고향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이젠 할 수 없게 됐네. 이 기계가 자네의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탐지해내고 말았단 말이야. 기계가 설마 거짓말하겠는가?”
형욱씨는 펄쩍 뛰었다.
“형님 한 번만 더 해봅시다. 혹시 기계가 고장 난 것 아닙니까?”
형욱씨는 韓 주임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한일민씨는 그제야 형욱씨의 결백을 확신하게 됐다. 거짓말 탐지기에 그토록 자신 있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이 범인일 수는 없다는 육감을 믿은 것이었다. 그러나 김태현 검사는 韓 주임이 훑고 내버린 형욱씨를 일곱 달 뒤 다시 주워 올린 것이었다.
<김 검사는 최형욱씨를 끌어넣었다. 이에는 특수한 방법을 썼다. 나(김금식)는 범행 동기를 추궁당했다. ‘돈이다’고 대답했다. 김 검사는 또 다른 동기가 있을 것이라면서 ‘공산당이 관련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랐으나 최씨의 혐의 중에 그런 것도 있구나 싶어 ‘그런 모양이다’고 대답을 얼버무렸다.>(1969년 12월10일 <국제신보> 김금식씨 수기)
검찰은 최씨를 먼저 폭력 혐의로 5월15일에 구속했다.
“문제가 된 폭행사건은 1년 전에 같은 집에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이미 서로 화해했으며 상처도 별로 없었다. 그들은 수사 시간을 벌기 위해 이 사건을 뒤늦게 캐내어 날 잡아넣은 것이다.”(형욱씨의 말)
김태현 검사는 형욱씨를 먼저 다른 공안 수사기관에 보내 근하 사건에 공산당의 개입 여부를 조사하게 했다.
“붙들려 와서 난생 처음으로 대범이와 금식이를 만났다. 생판 모르는 남자들이 신문을 받고 있는 나를 번갈아 힐끗 쳐다보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둘은 검사에게 가서는 나를 알겠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한 번은 빵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뒤에 금식인 줄 알았다)가 나타나더니 대뜸 ‘최 선생, 오랜만입니다’고 아는 체하는 것이었다. 나는 술 냄새와 마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오는 그의 입을 올려다보며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엔 자다가 끌려나와 컴컴한 방으로 인도됐다. 근하의 제단이 모셔져 있었고 근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아저씨 놀러가고 싶어, 응’
‘아저씨는 내가 미워? 왜 죽이지?’
애원과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어리벙벙한 속에서 나는 ‘근하야 빨리 원수를 잡아 날 살려 달라’고 통곡했다.”(형욱씨의 말)
최씨는 항소이유서에서 모 기관에서의 수사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피고인은 1968년 5월15일 부산 지방검찰청에서 폭행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 폭행도 1년 전에 있었던 사실을 갖고 구속당한 것입니다. 그 후 약 2주일이 지나서 검찰에서 소환하기에 오후 6시경에 나갔습니다. 검찰에 도착하니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지프차에 모르는 사람 2명과 함께 태웠습니다. 車內(차내)에 들어가니 무조건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어디인지 가더니 下車(하차)하라기에 하차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수건으로 눈을 가리운 채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하는 말이 솔직히 말하라 하기에, 무슨 말을 할까 하니, 모르느냐 하기에, 모른다고 하였더니, 그냥 어디인지 몰라도 문소리가 나더니, 들어가라기에 들어갔습니다. 무조건 공산당에게서 갖고 온 암호문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나는 그런 사실 없다고 말하니 무조건 내가 생각하기에 5, 6명이 나는 고문하기에 나는 그런 사실 없다고 수차 말했습니다만 고문은 더 심해가기만 하고 그래서 기절하고 일어나서 있으니 그제서야 수건을 풀고 좀 있다가 지금 보니 정대범이란 아이를 지하실까지 데리고 와서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야 이 새끼야, 서면 300번지에서 배우라고 보인 암호문을 내놓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냥 데리고 나가더니 또 고문을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그런 사실 없으니 없다고 하니, 왜 저 아이는 있다고 하고 너는 거짓말한다고 무조건 고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를 다시 대질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나의 말은 아무 소용없고 그 아이 말만 믿고, 고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고문이 심해서 의복에다가 똥까지 싸고 있으니 냄새가 풍겼는지 고문을 중지하고 또 수건으로 눈을 가리더니 어딘가 데려가더니 의복을 갈아입히고, 어느 사무실에 가니 그곳에 좀 앉으니 지금 보니 김금식이가 들어오더니 아무 말 없이 보고 1초도 안되어서 밖으로 나가더니 저 사람 아느냐고 묻기에 모른다고 하니, 저 사람 너를 안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너는 왜 거짓말하느냐고 또 잠을 재우지도 않은 채 밤을 새워가면서 조사하고, 날이 새면 또 지하에 가서 고문하고 무조건 암호문하고 무전기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대질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무려 4일간 고문을 당하고 하루 있으니 검사가 지하실까지 와서 데리고 가기에 따라가니 조서작성하자고 하기에 저는 지금 몸이 아파서 지금 조서 작성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니 그것도 무조건 시간과 시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거부하였습니다. 검사가 하는 말이 여기는 검찰보다 더 높은 곳이다, 내가 너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지만 내가 마음대로 데리고 가지 못하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할 수 없이 조서 작성한 것입니다.
조서 작성하는 것을 보니 공산당에 대한 조서작성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부인하였습니다. 내가 공산당도 아닌 사람을 무슨 이유로 공산당 조서 작성 합니까 하니 무조건 가만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사는 부르고 書記(서기)는 기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으로 몰아서 이 사건에 결부된 것입니다. 바로 이 공산당으로 나를 몬 사람이 정대범 하고 김금식이란 사람입니다. 그러면 공산당 두목, 윤모니 황씨란 사람, 박영태란 사람, 김기철이란 사람들은 누구의 입에서 나온 사람들입니까. 모두 검사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검사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물론 조서 기입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람을 공산당으로 가담시켜서 지금에 와서 내가 말한 것처럼 하니, 나로서 답답할 뿐입니다.…
나는 지금 정대범의 정신감정을 하여보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모르는 사람을 아무 곳에나 물고 들어가니 말입니다.>

뒤에 <부산일보>는 근하의 목소리를 흉내 낸 방송국 아나운서의 擬聲(의성)을 녹음했다가 틀어주었더니 ‘눈물을 흘리며 자백했다’고 과학 수사의 성과를 소개하게 된다.
崔씨는 또 나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 갖가지 고문을 당했습니다. 잠을 못자 정신이 없고, 자백할 것도 없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한번은 수사간부가 오더니 권총을 내 머리에 갖다 대고 이 빨갱이 새끼 쏴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요. 나는, 쏴 죽이시오 라고 대답했지요. 나흘쯤 지나서는 그들도 내가 공산당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에요. 주사도 놔주고 잠도 재우면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달래더군요. 지금도 그들에겐 별 유감이 없어요. 나를 고문할 때 양심이 괴로웠던지 소주를 마셔가며 고문합디다.
그 기관에서 김태현 검사로부터 조서를 받았는데 나를 고문한 사람을 입회시켜놓고 신문을 합디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손도장을 찍어주고 말았지요. 金 검사가 나간 뒤, 나를 고문했던 그 사람이, 왜 도장 찍어주었느냐고 나무라요. 그러면서 한 1년은 고생해야겠다고 합니다.”
崔씨가 도장을 찍어준 조서는 1968년 5월28일에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다. 崔씨는 “황선생의 권유로 북괴노동당에 가입하고 황씨로부터 김용선의 아들 근하군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아 김기철에게 살해지시를 내렸다”고 자백한 것처럼 적혀 있다.
공안기관에서 이미 崔씨의 북괴관련설을 부정해버렸으므로 이 진술은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이란 증거의 가치만 지니게 되었다. 형욱씨도 기철씨처럼 감방에서 가죽 수갑을 차고 있어야 했다. 같은 살인 피의자였지만 금식씨와 대범씨에 대한 대접과 기철씨와 형욱씨에 대한 대접은 사뭇 달랐던 것이다.

공산당으로 몰아 허위자백 유도

김금식씨는 1968년 5월9일의 검찰 진술조서에서 자신이 1967년 10월16일에 대구교도소를 滿期(만기) 출소하여 그 다음날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금식씨는 1967년에도 역시 폭행죄로 징역을 선고받아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러니 그는 대구교도소를 나오자 곧 또 폭행죄로 구속돼 1968년 2월에 부산교도소에 수감된 셈인데 그가 법을 우롱해보기로 결심한 것은 부산교도소에서였다.)
금식씨는 1968년 5월26일 진술 조서에선 대구교도소 만기 출소일을 1967년 11월17일로 고쳐 잡아 진술했다. 그렇다면 근하군이 살해된 1967년 10월17일엔 대구교도소 안에 있었다는 얘기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검찰 측의 깜짝 놀람을 김금식씨는 이렇게 다독거려주었다.
“1967년 10월17일 오전 9시20분께 박영태를 면회하고 기결 1사 14방에 돌아오니 교도관으로 보이는 마흔 살 가량의 선글라스 낀 남자가 나를 부르기에 그 사람을 따라 접견실과 정문을 차례로 빠져 바깥으로 나왔다. 신사는 사라지고 정문 앞에는 기철이와 박영태씨가 갈아 입을 옷과 신발을 갖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오후 완행열차로 부산으로 내려와서 부산진역에서 정대범과 합류, 그날 밤 범행을 저지르고 나는 다음날(10월18일) 오전 8시에 다시 대구교도소로 돌아왔다.”
이것은 기막힌 얘기였다.
‘국가가 보장하는 알리바이’를 얻기 위해 범인 일당이 김금식씨를 범행 당일 하루만 교도소에서 빼내 사용했다는 그의 진술을 검사들이 정말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진술에 따라 곧바로 대구교도소로 그들은 손을 뻗쳤다.
“1968년 5월25일 오전 11시쯤(김금식씨는 26일에 불법 출소관계를 진술했는데 그전에 이미 이 일을 검사에게 귀띔한 듯) 나는 근무 중에 所長(소장)에게 불려갔다. 검찰청에 갔다가 와야겠다고 하기에 열차 편으로 부산에 도착, 부산지검으로 곧장 갔다. 검사는 나에게 선글라스를 끼고 따라오라고 했다. 검사는 어떤 사나이(김금식)에게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맞다’고 했다. 이어 검사가 ‘김금식을 출소 시킬 때 간첩 사건에 박영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알았는가?’라고 물어 나는 간첩 사건 때문에 끌려온 것으로 알았다.
‘너는 자손 대대로 누명을 벗을 수 없다. 그러나 너의 신세를 망칠 생각은 없다’고 검사는 어르며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 저녁이라도 석방시켜주겠다. 이 기회가 마지막이다’고 위협했다. 나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체념하게 되어 검사가 시키는 대로 말을 했다. ‘간첩을 내어주었으면 돈을 안 받고 내어줄 리가 없는데?’라고 검사가 말하기에 나는 이때부터 정신을 잃고 ‘1만원을 받기로 약속했으나 현금은 받지 못했다’고 말해버렸다.”(여광석 교도·당시 32세, 1969년 3월29일 <조선일보> 면담 기사)
공안검사 출신인 김태현씨는 최형욱씨를 공산당으로 몰았을 뿐 아니라 교도소 간부인 여광석씨까지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산당과 연루시켜 손쉽게 자백이란 걸 받아냈다. 여씨는 교도소에 근무했으므로 한번 공산당으로 낙인 되면 어떤 신세가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金 검사는 그것을 약점으로 이용한 듯하다. 여광석씨는 이즈음의 상황을 그 뒤 항소 이유서에서 자세히 썼다.
<그날부터 ‘너는 박영태라는 對南(대남)간첩과 접선하여 대구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금식을 불법 출소시킨 자이니 너는 공산당과 접선하여 활약하는 간첩임이 틀림없다’고 하여 그날부터 갖은 협박으로써 취조당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잠깐의 대기시간이 있으면 부산교도소 교무과 직원이며 당시 김태현 부장검사 곁에서 김금식을 계호해서 다닌 권영택, 박학율이란 사람들이 옆에 와서는 “당신은 對南(대남)간첩인 박영태와 접선하여 공산당으로 활약하니 중앙정보부에 가서 취조를 받아야 한다. 중앙정보부라는 곳은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 시체가 되어 나오는 곳이다. 보안법으로 한번 처벌되면 당신의 자손대대로 빨갱이 취급을 받아야 하며 마지막 절망인 것이다”라는 등으로 갖은 협박으로써 나에게 공포를 주며 “우리들은 검사들과 잘 알고 있으니 당신은 박영태라는 자가 對南(대남)간첩인 줄은 모르고 김금식을 불법 출소시켰다고 하면 당신은 최고 직무유기밖에는 되지 않으니 그 정도는 우리들이 이야기하면 기소유예 혹은 불구속 기소 정도로써 충분하다”는 등으로 공포의 분위기를 조장하여 이를 이용 기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사건이 어떤 사건인 것조차 알 수 없었으며 어떤 사람의 조작으로 빨갱이 취급을 당하고 있구나 생각할 때 극도의 공포에 떨고 있었으며 검사취조에서도 한결같이 對南(대남)간첩인 박영태와의 접선여부와 김금식을 불법 출소시킨 사실을 추궁하면서 “너는 공산당으로는 보지 않으니 일시적인 실수로써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면 나도 같은 법무부 직원으로서 기소유예처분으로 출소시켜준다”고 하면서 너가 살 길은 이 길 밖에는 없다고 협박과 기만으로써 취조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실이 무근한 일이므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니 이 시간이 지나면 중앙정보부로 취조하기 위해 가니 마지막 기회를 잘 생각해서 너의 장래를 잘 생각하라”는 등의 협박으로 취조함으로써 공산당이란 죽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양심에 없는 허위 시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허위 시인이라 앞뒤의 일관성이 없는 것인데 이 前後(전후) 사실을 권영택, 박학율이란 사람들이 가르쳐줌으로써 사건을 연관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부산교도소 보안과장님실에서 증거보전신청을 하게 되었을 시 본 피고인이 사건 자체를 부인하니 검찰 측에서는 너는 대학시절에도 공산주의 서적을 많이 탐독하여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자이니 기소유예의 처분이나 집행유예의 처분을 받을 수 없게 공산당으로 처벌한다는 등으로 판사님 앞에서까지도 협박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협박적인 공포분위기 속에서 본 피고인의 심정은 앞으로야 어떻게 되든 단 몇 분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검찰에서와 같이 양심에 없는 허위 시인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 교도에 이어 교도보 이석연씨(당시 41세)도 간수자 도주원조 혐의로 구속됐다, 김금식씨의 각본은 이제 여섯 사람의 배우들을 만들어냈다. 남은 것은 이들에게 어떤 역할을 나눠주는가 하는 문제였다.

金 검사의 심리

‘희대의 민완 검사’로 세상에 알려진 김태현 검사 팀이 어떻게 하여 초등학교 졸업생 김금식씨의 각본에 그토록 쉽게 말려들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김금식씨와 정대범씨를 뺀 나머지 네 피의자는 처음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들 중 세 피의자는 나중에 ‘이상 분위기’ 속에서 허위 자백을 했지만 김기철씨는 모진 신문에도 굽히지 않고 시종일관 범행을 잡아떼고 믿을 만한 알리바이까지 제시했다. 金 검사 팀은 이들 다수의 ‘범행 부인’은 묵살하고 오로지 김금식씨의 좌충우돌 횡설수설하는 자백만을 굳게 믿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 김금식씨가 ‘아!’ 하면 검사들은 ‘어!’ 하는 식으로 협조 분위기 속에서 범인들을 얽어갔다.
검찰이 확보한 네 명의 ‘살인범’은 서로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금식씨와 기철씨 사이만은 친구). 그런 사실을 검사들은 대질 신문에서 알았을 텐데 그것도 묵살해버렸다.
김금식씨의 각본은 결코 치밀하지 못했다. 그는 검찰 진술에서 스무 번도 넘게 범행의 핵심 사실을 번복하거나 추가하고 수정했다. 대구교도소 출소 날짜, 범행 동기, 범행 도구의 구입 장소 따위 결정적인 부분에서 그의 진술은 오락가락 갈팡질팡했다. 그래도 엘리트 검사들은 이 김금식씨를 믿으면서 순덕이 김기철씨를 믿지 않으려 했다(혹은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
金 검사의 심리상태에 대해 김금식씨는 뒤에 이런 평을 했다.
“우리가 자백한 뒤의 수사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범인일 수 없다는 確證(확증)이 몇 번이나 있었으나 金 검사는 그때마다 억지 해석으로 범인으로 맞추어 들어가는 인상이었다. 너무 지나치게 우리를 범인으로 믿은 나머지 일종의 자기최면에 걸린 듯했다. 그러자니 그의 수사도 자연히 하나의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金 검사는 숱한 실수를 저질렀다. 자질구레한 지엽적인 문제에 너무 연연한 것도 그 하나였다. 나의 됨됨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면 처음부터 내가 범인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군 복무 당시를 합해 네 번의 前科(전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엔 계획된 범죄라곤 한 번도 없었다. 나의 전과는 모두 술에 취해 저지른 우발적인 범죄였다. 폭행에는 한 번도 흉기를 사용한 일이 없었다. 그런 내가 그렇게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국제신보> 1969년 12월10일, 15일)
이즘, 그러니 金 검사의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인 1968년 5월 중순 부산지검 출입 기자들은 냄새를 맡았다. 부산지검엔 열대여섯 명의 기자들이 출입하고 있었다. 거의가 사건기자 경력 십년 이상의 고참들이었다. 수사 진행 상황을 눈치 채기는 했으나 기자들은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
그때 <국제신보>기자였던 설영우씨(뒤에 신발 수출 회사 대표)는 “검찰 측에서 대외비 사건이라고 하는 바람에 본격적인 취재를 할 수 없었고 상세한 보도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수사의 중간보도는 기자들 사회에선 금기로 돼 있었다. 기자들은 그러나 수사 진행상황을 지켜보며 공식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경렬씨 수사로 곤혹을 치렀던 한일민 경위는 5월 말 어느 날 정석모 부산시경국장의 부름을 받았다. 정 국장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서는 “검찰이 근하 사건을 해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 국장은 ‘근하 살해범 일망타진’의 발표가 임박했다는 정보를 검찰 아닌 다른 수사기관에서 듣고 이 사건에 가장 밝은 韓 주임을 불러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韓 주임은 형욱씨가 구속됐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로 해서 검찰 수사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韓 주임은 형욱씨 등을 다루었던 기관의 수사요원들을 만나보았다. 주로 韓 주임이 범행과 관계된 여러 가지 세부적인 질문들을 꼼꼼하게 던졌다. 그런 뒤 그는 높은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장담했다.
“이들은 절대로 범인이 아닙니다.”
며칠 뒤인 5월29일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석 달 동안 은밀히 수사한 전모가 발표된 것이었다. 공식발표는 김태현 부장검사가 했다.

영웅이 된 검사, 장단 맞춘 언론

<국제신보>와 <부산일보>는 ‘근하군 살해범 일망타진’ 기사를 1면 및 사회면 머리기사로 다루었고 대부분의 중앙지도 사회면 머리기사로 취급했다.
<국제신보>는 검찰이 최형욱, 김기철, 정대범, 김금식 등 네 명을 붙들고 박영태는 수배중이라고 보도한 뒤 이렇게 써나갔다.
<이 사건의 主犯(주범)은 한때 용의선상에 떠오르기도 했던 최형욱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두 번 다시 실패를 범하지 않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교도소에 복역중이던 김금식씨의 신병을 확보, 수사를 전개하다가 지난 5일 김기철을 절도 혐의로, 지난 15일엔 최형욱을 폭력 혐의로 구속 수감하는 한편, 16일엔 정대범을 체포, 수사에 개가를 올렸다. 수사진은 밀양에 있는 정대범의 집에서 범행 때 입었던 밤색 잠바와 바지 및 티셔츠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사건 당일 범인을 봤다는 파출소 순경, 사환 등 증인들과의 대질 신문도 끝났다. 이들의 범행 동기는 돈이었다. 이들은 시체를 버린 뒤 협박장을 박영태가 근하 집으로 보내면 主犯(주범) 최가 근하 집에서 100만원을 내주도록 사주할 계획이었다. 범행 당일 금식과 기철이는 범일동 시장 안에 있는 고물상에 가서 30원 주고 볼 박스를 구입(칼과 노끈의 출처는 자백을 안했다), 범천2동 기철의 집에 운반해두었다가 정대범을 먼저 근하 집 근처로 보낸 다음 오후 늦게까지 구름다리 아래 돼지 국밥집에서 술을 마셨다. 금식과 기철이는 칼, 노끈, 볼 박스를 코로나 택시에 싣고 오후 9시20분께 보수동 검정다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들은 대범에게 칼 등을 건네주었다. 기철은 대범에게 피를 흘리지 않도록 두 번 찌른 뒤에 칼을 뽑지 말고 그냥 꽂아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두 명은 달아났다.
대범은 집으로 돌아오는 근하군을 발견, 오른손으로 목을 조르고 왼손으로 가슴을 찔렀다. 이들은 潮流(조류)의 시간까지 계산, 시체를 영도다리 및 하수구 속에 버리면 밤 12시쯤 5노트 속도의 해류가 시체를 휘감아 대마도까지 흘려보낼 것으로 예상, 완전범죄를 꾀했다.>
<국제신보>는 또 <검찰이 이들의 점조직을 푸는 데 진땀을 흘렸다>고 보도했다. 범인들끼리 가명을 사용했고 서로 얼굴도 모른다고 했다. <박영태와 최형욱이 主犯(주범) 그룹을 이루었고 하수인 정대범의 위에 김기철과 김금식이 붙어 있었다. 대범은 범행 당시 ‘기영’이란 이름을 썼고 기철은 ‘한영식’이란 가명을 썼다.>
신문들은 검찰 발표문을 그대로 보도한 다음엔 화살을 최형욱씨에게 돌렸다.
“외삼촌은 비정했다. 죄짓고는 못 사는 세상인 것을…”(<국제신보>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
“외삼촌이 그럴 수가… ‘돈이 그리 아쉽던가’”(<부산일보>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
두 신문은 최씨의 사생활과 매부와의 관계를 한참 과장한 다음 “거짓말 탐지기에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만큼 그의 심장은 대담했다”느니 “진주에서 철근군 유괴사건의 범인이 잡혔을 때는 본사 기자를 찾아와 진주 범인이 근하 살해범이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다”(<국제신보>)면서 그의 철면피(?)를 비꼬고 근하 어머니를 등장시켜 오빠를 매도하게도 했다.(<부산일보>)
<부산일보>에 실린 ‘나는 오빠를 저주한다’는 제목의 ‘근하 어머니 崔 여사 수기’는 최형욱씨 규탄극의 압권이었다. ‘手記’라고 해놓고 글의 끝에는 ‘文責在 記者’(문책재 기자)라고 써붙이는 모순을 드러낸 이 수기는 아마도 기자가 근하 어머니의 말을 재구성하여 엮은 것 같다. 따라서 얼마나 崔 여사의 말을 진실되게 전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최형욱씨의 부인에 따르면 근하의 부모는 공식발표 이전에 수사 진행과정을 대강 전해 듣고 있었으며 형욱씨가 범인이란 검찰 측 주장을 크게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문에도 그런 흔적이 군데군데 엿보인다.
<근하군 아버지와 어머니는 범인이 잡혔다는 말을 기자들로부터 전해 듣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반신반의의 표정을 지었다. …근하 어머니는 ‘왜 범인들이 우리 애를 택했을까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국제신보>)
최형욱씨 다음으로 과장과 왜곡의 祭壇(제단)에 올려진 속죄양은 순진한 김기철씨였다. 남에게 손찌검 한번 한 적이 없는 그는 “교통부 로터리 근방에서 노는 깡패”에다가 “國卒(국졸)의 실업자”로 소개됐고 “해병대 시절의 특수 교육 경험을 살려 살인 방법과 시체유기 방법을 하수인에게 가르쳐준” 악질 교사범으로 묘사됐다.
신문들은 또 검찰 수사관들이 기철씨를 연행하려다가 역습을 당해 위기일발의 상황이 벌어졌었다고 전하는가 하면 기철씨를 하수인 포섭 책임자로 그리면서 완전범죄를 위해 정대범씨까지 죽이려 했었다고 보도했다. 정대범씨는 ‘여자 같은 손, 목소리, 얼굴 생김’으로 하여 냉혹한 살인마로 지탄을 받았다.
악당이 있으면 영웅 또한 있는 법. 신문들은 김태현 검사를 한껏 추켜올렸다. <국제신보>는 “흉악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김검사의 아들이 “범인들의 일당으로 보이는 괴한들로부터 유괴를 당할 뻔했다”고 보도했고 구영근씨의 아이들도 같은 위협을 받았다고 전했다. 구씨는 ‘미친 사람’이란 욕까지 들어가며 밤낮 없이 수사에 열중했다고 쓰기도 했다.

현장검증과 흥분한 군중

‘刻苦(각고)의 영광’이란 수사 秘話(비화) 소개기사의 제목은 기자들도 이들 ‘2대 진범’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런 보도 태도는 한국 언론의 사실인식과 진실확인의 수준과 도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기자들은 확정 판결 훨씬 이전의 ‘무죄 추정인’들을 ‘범인’이라고 불러 스스로의 언론 재판에서 有罪(유죄)를 확정 시켜버린 다음 그들이 범인이란 전제 아래서 기사들을 써갔다.
최형욱씨 등을 ‘범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검찰의 견해인데 기자들은 자신의 판단 기능을 일단 정지시키고 이 검찰의 견해에 그대로 편승한 것이었다. 이것은 언론이 스스로 진실확인 의무를 내버리고 그 의무를 검찰의 판단기능에 양도한 것과 같은 자세였다. 검찰의 판단에 잘못이 생기면 그것과 합치돼 있는 언론의 보도 방향도 뒤죽박죽될 터였다. 기자들이 검찰 발표내용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 있긴 했다. 수사 과정의 취재가 부실했고 피의자나 그 가족들에 접근하지 못해 검찰 발표내용의 진실성을 검증할 만한 자료와 잣대를 미리 갖고 있지 못했다. 이와 함께 사회부 기자들이 갖고 있는 검찰에 대한 상대적인(경찰과 비교하여) 높은 신뢰도가 또한 그런 방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엔 확정 판결 이전에 형사 피의자를 어떻게 보도해야 하느냐에 대한 지침이나 기준이 한국 언론엔 확립돼 있지 않다는 점도 근하 사건 보도에서 착오를 빚게 한 요인이 됐다.
몇몇 기자들이 의심을 갖기는 했다. 그때 합동통신의 검찰 출입기자였던 신상욱씨는 “김금식씨의 불법 출소 문제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무리 교도 행정이 썩었다고 해도 그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구나 만 원을 받기로 하고 그것도 외상으로 해서 하루를 외출 보내주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범행 내용이 너무나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내용대로라면 범인들은 모두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기자들도 의혹을 갖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기자들보다 변호사들은 훨씬 자신 있게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최형욱씨의 고모부는 부산의 한봉세 변호사를, 대구의 교도관 가족들은 대구의 박찬 변호사와 부산의 서윤학 변호사를 각각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최형욱씨에 따르면 韓 변호사는 자기를 면회한 그 자리에서 바로 “공산당으로 몰았구나. 걱정할 건 없지만 1년은 고생해야 될 것 같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서윤학 변호사도 “기록을 검토해보니 단박에 피고인들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더라”고 했다. 박찬 변호사(9대 국회의원 역임)는 녹음기를 들고 대구교도소로 찾아가 결정적인 반증을 확보했다. 그는 김금식씨와 같은 감방에 있었던 세 복역수를 만났다. 세 사람은 한결같이 금식씨가 외출했다는 1967년 10월17일에 그가 감방 안에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특히 서모씨는 김금식씨가 감방 정리원이었기 때문에 더욱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6월8일 <조선일보>가 처음으로 근하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왔다. 검찰 발표 열흘 뒤의 일이었다. <조선일보>는 대구교도소 이원호 소장이 자체 조사를 실시, 불법 출소는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오히려 법무부 장관에게 항의했다고 보도했다. 이틀 뒤 김태현 검사는 대두교도소의 조사 결과는 행정책임을 면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의혹의 꼬리가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할 때 검찰은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6월12일 오전 6시부터. 현장검증이 범인 검거 발표 보름 뒤에나 이루어진 것도 퍽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날 부산의 두 신문은 또다시 처절할 정도로 흥분해 마지않았다. 사회면의 거의 4분의 3을 다 바쳐 ‘살해 장면’과 ‘군중의 저주’를 스냅 사진들을 곁들여 극명하게 소개했다. 사회면 제목들은 춤추고 있었다.

‘근하군을 이렇게 죽였다’
‘흥분한 군중, 저놈들을 죽여라’
‘살해 장면 등 태연하게 再演’
‘바른대로 말하자고 서로 타일러’
‘사나이답게 바로 대라―발뺌하려들자 하수인이 주범을 면박’

칼질의 모순

<부산일보>는 구경꾼들이 “짐승 같은 저놈들을 저렇게 데리고 다닐 것이 아니라 코를 꿰어 끌고 다녀야 한다”고 저주했다고 썼다. 또 정대범씨를 ‘살인귀’라고 표현했다.
이런 흥분, 저주, 분노의 소용돌이에 시선을 빼앗긴 기자들이 현장검증의 실상을 정확히 관찰할 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기사에는 그런 티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현장검증 날은 피의자들이 처음으로 백일하에 공개된 날이었다. 기자들이 처음으로 ‘검사들의 통역’을 거치지 않고 바로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날 현장검증의 우등생은 정대범씨였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김기철씨가 ‘연극’을 거부하고 우두커니 서 있으면 대범씨는 “네가 시킨 게 아니냐? 사나이답게 바로 해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대범씨는 살해 장면과 시체유기 장면을 ‘얼굴 빛 하나 안변하고 태연히’ 연기했다. 그는 ‘자학적인 태도’까지 보이며 김금식씨에게 “이왕 죄를 지은 몸이니 바른대로 말하라”고 타이를 정도였다.
김금식씨는 웬일인지 이날 몸을 도사렸다. 얼굴을 신문으로 가리고 사진기자들에게 욕을 퍼붓다가 대범씨가 살해 장면을 연기할 땐 “담벼락에 붙어 서서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부산일보>)
그는 ‘피둥피둥 살이 찐 건강한 모습’이었다. 감방에서도 수갑을 차고 있어야 했던 기철씨나 형욱씨와는 달리 그는 감방 안에서 好衣好食(호의호식)했던 것이다. 그는 부산진역에서 기철씨 및 대범씨와 만나는 장면에 와선 연기를 거부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검찰에 협조를 거부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현장검증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최형욱씨가 현장검증에 끌려나온 것은 밤중이었다. 네 명의 연기자들은 두 패―꼭두각시와 사람―로 갈라졌다. 기철씨와 형욱씨는 “와본 적이 없다” “그런 건 모른다”고 현장검증을 끝까지 거부했다. 검사들의 노리개가 된 대범씨와 금식씨는 이런 기철씨와 형욱씨에게 욕설을 퍼붓고 빈정대기도 했다. 낮에 현장검증을 거부했던 금식씨는 밤에 와선 다시 적극협조자로 돌변해 있었다.
그는 “낮에는 아는 사람들이 많아 그랬었다”고 했다.
이 현장검증에서 서윤학 변호사는 主演(주연)배우의 중요한 실수를 발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왼손잡이인 정대범씨는 근하군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은 다음 뒤에서 오른팔로 목을 조르고 왼손에 쥔 칼로 근하의 왼쪽 가슴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이 연기대로라면 칼자국은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으로 뚫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근하군 시체의 부검 결과, 칼이 오른쪽 가슴으로 들어가 왼쪽 아래 방향으로 꽂히면서 그 칼끝은 왼쪽 심장 벽을 뚫었음이 밝혀져 있었다. 곧, 정대범씨의 현장검증 때의 칼질과는 반대 방향이었던 것이다.
徐 변호사는 또 鄭씨가 범행 때 입었다는 옷에서 핏자국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 더욱 자신감을 굳혔다.

‘불법 출소’ 싸고 공방전

현장검증이 진행된 그날 대구發 통신 및 신문기자들은 김금식씨의 감방 동료들 말을 인용, “김씨가 범행 당일 출소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드러나 근하 사건 수사에 혼선을 가져오게 됐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를 물고 들어가면서 부산 신문과는 달리 ‘파문 속의 현장검증’이란 제목으로 짙어가는 의혹을 부각시켰다. 대구교도소 측에선 이날 여광석 교도는 정문 교도였고 기결수 감방은 홍원식 교도가 맡고 있었으므로 기결수를 여 교도가 불러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검찰을 반박했다.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검찰측 견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부산 신문들까지도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국제신보>는 6월13일 사회면 머리기사로 ‘확대되는 파문, 김금식의 출소 여부’를 취급하고 엇갈리는 양쪽 견해를 대등하게 소개했다.
이제 사태는 하나의 작은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다. 검찰의 논리는 김금식씨의 1일 불법 출소에 그 바탕을 두고 전개되고 있었다. 불법 출소는 말하자면 논리의 구조물을 떠받들고 있는 주춧돌이었다. 이 주춧돌이 뽑혀버리면 범인 입증의 논리구조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게 돼 있었다. 검찰로서는 이 위기를 어떻게 하든지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4일 김태현 검사 팀은 김금식, 정대범, 최형욱씨를 데리고 대구교도소로 올라갔다. 현장검증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김금식씨는 한몫을 톡톡히 했다. 불법 출소의 과정을 훌륭하게 솔선해서 ‘재연’한 것이었다. 그 연기는 너무나 완벽하여 취재 기자들의 의혹까지 풀어줄 정도였다. 부산 두 신문의 의심스러워하던 태도도 바뀌고 말았다. <국제신보>와 <부산일보>는 다음날 이번엔 화살을 대구교도소로 돌렸다. “김금식의 불법 술소 사실은 재확인되고 대구교도소 측의 알리바이 조작이 탄로났다”는 것이었다. 金 검사는 “대구교도소의 알리바이 조작이 드러난 이상 관계자를 전원 입건, 조사하겠다”고 밝였다. 며칠 뒤 金 검사는 대구교도소의 교도관 두 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당시 부산문화방송 기자로 이 사건을 취재했던 강남주씨(뒤에 부산 수산대학교 교수·국문학)는 이렇게 말했다.
“부산의 현장검증에서 피의자들끼리 ‘했다‘ ’안했다‘ 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대구교도소 측에서 불법 출소를 시킨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오자 이 느낌은 의혹으로 변했다. 그러나 김금식씨가 대구에서 제 발로 불법 출소를 ’재연‘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했다. 사형을 각오하고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는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김금식씨는 행동으로써뿐 아니라 신념에 찬 대사로 검찰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나는 약한 교도관을 위해 불법 출소 사건만은 완강히 부인했으나 증거가 드러난 이상 발뺌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생에 애착이 없는 사람이다. 근하와 그 가족에게 죄송할 뿐이다. 무고한 전씨가 잡혀 고문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다. 죄를 뉘우치고 짧은 시간이나마 사람답게 살고 가고 싶다.”
“지금 심정은 후련하기만 하다. 교도소에 들어온 뒤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마태복음>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정대범씨도 김금식씨에 못지않게 초연하게 말했다. “의심받을 정도로 범행을 순순히 자백하고 있는데…”라고 설영우 기자가 묻자 명언들을 쏟아놓았다.
“나는 이미 죄를 뉘우치고 있다.”
“사형도 각오하고 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보니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이번 사건의 관련자들이 무죄가 되는 경우, 두 번 다시 이런 사건이 안 나도록 나는 그들(형욱, 기철씨)을 죽이겠다.”
“그들은 어린 나를 이용해 요꼴로 만들어놓고 자기들만 발뺌하려 하고 있다.”
이런 소리를 옆에서 맨 정신으로 듣고 있어야 했던 최형욱씨는 대구행 열차 안에서 <부산일보>의 검찰 담당 안병규 기자(뒤에 민정당 국회의원)와 이런 문답을 주고받았다.

문 : 왜 범행을 부인하는가?
답 : 외삼촌인 내가 근하를 죽일 리 없다.
문 : 그래도 자백을 했다는데.
답 : 검찰이 아닌 모처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 문초에 못 이겨 자백했다.
문 : 다른 범인들을 아는가?
답 :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근하 아버지와 나 사이가 좀 미묘하니까 얽어두는 것 같 은데 공판정에 가서 모든 걸 밝히겠다. 내가 무죄라는 알리바이가 다 있다. 법이 살아 있으니 무죄 될 줄 믿는다.
문 : 금식이와 대범이가 왜 당신을 끌고 들어갈까?
답 : 제 놈들이 죽을 죄를 지었으면 저들이나 죽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피살자 아버지에겐 밀수꾼 누명

대구 달성동의 술집 ‘부엉이집’ 현장검증에선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崔씨가 ‘연기’를 거부하고 “살인 모의를 이런 술집에서 할 수 있나?”고 냅다 소리쳤다. 그러나 아들 뻘 되는 대범씨가 “조그만 새끼들을 꾀어 살인을 저지르게 한 놈이 무슨 거짓말이냐”고 대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崔씨는 수갑 찬 손으로 신발을 벗어 그를 후려쳤다.
김금식씨의 진술이나 검찰의 발표를 종합하면 근하 살해 조직의 괴수는 박영태씨로 돼 있었다. 박씨는 김금식씨를 불법 출소시킨 장본인이며 범행 계획의 주모자이고 계획에서 실행까지 모든 편의를 제공한 막후 실력자였다. 그렇다면 모든 의문은 박씨를 붙잡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었다. 불법 출소 與否(여부)의 시비가 검찰 측의 승리로 일단락되자 기자들은 박영태씨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법무부가 ‘물의를 빚었다’하여 대구교도소 소장을 전주교도소장으로 좌천시킴으로써 일반인들에게까지 불법 출소의 진실성을 확인시켜주는 듯했으나 부산지검 출입기자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하진 못했던 것 같다.
6월18일 <부산일보>는 박영태씨가 밀수품 운반책으로 부산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는 무기를 갖고 다니며 수십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이 신문은 사회면 머리에 또 근하 사건 관계기사를 올렸다. 김윤근 차장검사가 근하 살해의 동기를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의 요지는 이러했다.
‘박영태와 김기철은 밀수 특공대원으로 근하 아버지와 한패였으며 근하 아버지가 몫을 나눠주지 않아 이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박, 김, 최 등 세 범인들은 정대범이 범행에 실패할 경우, 살인범으로 몰아 죽일 계획도 짰다.’
다음날 검찰은 공소장을 발표했다. 이 공소장에서도 검찰은 기철씨와 박영태씨가 김용선씨(근하 아버지)의 밀수품을 몇 차례 운반해주었으나 배신당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
김용선씨는 <부산일보>에 문제의 기사가 난 그날 검찰을 찾아가 이 범행 동기에 납득이 안 간다고 밝히고 “최형욱씨가 아들을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했다(<국제신보> 1968년 6월20일). 이 문제는 피살자 가족의 명예와 관련되는 만큼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뒤에 밝혀지겠지만 박영태씨와 김기철씨는 김용선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 물론 두 사람은 밀수에 손댄 적도 없었다. 김용선씨가 밀수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서윤학 변호사는 “그런 말이 공판 중에도 자꾸 나와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으나 아무도 증거를 대지 못했다”고 말하고 범죄 피해자에 대한 무지막지한 명예손상이었다고 했다.
아들을 잃고 ‘밀수꾼’의 누명까지 뒤집어쓴 김용선씨나 그 가족의 원통함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만약 <부산일보> 기사가 사실이라면 그 범행 동기를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검찰 간부는 형법 126조의 ‘피의 사실 공표죄’를 지은 셈이 된다.
<형법 제126조 : 검찰, 경찰, 기차 범죄 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 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 정지에 처한다.>
물론 이 조항은 예나 지금이나 死文化(사문화)된 지 오래지만 김용선씨의 경우에는 진실이 아닌 허위사실의 공개로 평생 씻을 수 없는 명예훼손을 당한 극단의 사례로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김윤근 차장검사는 <부산일보>에 문제의 기사가 난 다음날 “일부 신문에서 김용선씨가 과거에 밀수를 했다고 공소장에서 단정한 것처럼 보도한 것은 사실과 다르며 아들마저 잃은 그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행위라고 검찰 입장을 해명했다”고 보도됐다(<국제신보>). 따라서 이 허위사실 유포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가리기가 어렵다.

‘主犯’ 나타났지만…

6월19일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검사와 기자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박영태씨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검찰청이 아니라 <국제신보>의 사회부 자리로 불쑥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대뜸 “나는 억울하다. 근하 사건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고 말했다.
“나는 1967년 2월2일 장물 취득죄로 구속돼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 김금식씨를 알게 됐다. 나는 1967년 10월13일에 출소했다. 나오고 나서도 같이 고생한 정을 못 잊어 세 차례에 걸쳐 김금식씨를 면회 갔었다. 면회 신청할 때는 전과자임을 숨기려고 나의 본명이 ‘박태형’인데도 ‘박영태’라고 기록했다(필자 주 : 검찰이 이름을 잘못 알게 된 것도 이 면회부 기록 때문이었다). 나는 김금식씨가 만기 출소하는 1967년 11월17일에 교도소로 마중 나가 그를 나의 셋방에 데리고 와서 아침밥을 먹였다. 내가 잠시 나갔다가 오니 그는 아내에게서 1500원을 빌어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다. 1967년 9월 중순 범인들이 나의 집에서 범행을 모의했다고 하는데 그때 나는 감방 안에 있었고 나의 아내는 삯바느질을 하여 방을 비운 적이 없었으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김금식씨가 불법 출소한 날(1967년 10월17일)에 나의 집에서 팬티를 갈아입었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그가 만기 출소한 11월17일에 갈아입은 것이다. 검찰이 나를 찾고 있다는 것도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알았으며 나는 지금 대구에서 고물장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검찰이나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돌발사였고 <국제신보>엔 굴러들어온 특종이었다. 마침 검찰은 바로 그날 박영태씨를 主犯으로 서술한 공소장을 공개하면서 관련자 일곱 명(군인 정대범씨는 軍裁로 돌려짐)을 기소했었다. 그 박영태가 홀연히 나타났으니 검찰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 거꾸로 기자들은 이 사건 수사결과를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붙든 것이었다. 박영태 아닌 박태영씨의 말대로라면 김금식씨의 불법 출소나 범행 모의는 거짓이며 김금식씨가 불법 출소한 날에 했다는 행동의 상당부분은 그가 출소한 11월17일의 행동을 옮겨다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었다.
이 두 번째 위기에서 김태현 검사를 구한 것은 기자들이었다. 엄청난 특종을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빼앗긴 <부산일보>는 다음날 “박태형이 억울하다고 나선 것은 알리바이 조작극에 불과하다”는 검찰 측 견해를 소개하면서 오히려 검찰 대신 박태형씨를 치고 나왔다. “검찰은 잠적한 박영태가 박태형을 시켜 박영태로 가장하여 나타나도록 꾸민 알리바이 조작극으로 밝혀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검찰은 박태형씨를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하고 그를 통해 진짜 박영태의 거처를 알아내어 속히 主犯을 붙잡아 들여야 했다. 검찰은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포기하고 엉뚱하게도 절도 혐의로 박태형씨를 구속해버렸다. ‘傳家의 寶刀’를 쥐게 된 <국제신보>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 미스터리를 더 추적하지 않고 주저앉아버렸다. 이렇게 하여 검찰의 기소 사실을 그 밑뿌리에서부터 뒤엎어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기자들을 스스로 팽개쳐버리고 말았다. “박영태의 검거만이 모든 의문을 풀어줄 것이다”고 썼던 기자들이 막상 그 사람이 나타났을 땐 왜 의문을 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부산의 기자들이 제대로 이 사건을 추적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결코 능력의 결함이 아니었다. 그때 이 사건을 맡은 기자들은 사건이 많이 나는 부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서 나중에 교수, 국회의원, 실업가들이 많이 배출된 것만 봐도 ‘무능’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을 示唆(시사)하게 한다. 근본 이유는 아마도 한국 언론의 구조적 문제점이나 부산의 특수 여건 및 기자들의 常軌(상궤)를 벗어난 경쟁 심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의 취재를 맡았던 한 기자는 “검찰이기에 그러한 무리 많은 수사가 가능했다. 경찰이었으면 기소도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기자들이 경찰을 대하는 태도로 검찰을 대할 수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경찰이 전경렬씨 수사에서 실수를 하자 신문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우격다짐 수사를 비판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당한 검찰 수사에 대해선 비교적 얌전했던 사실이 언론과 검찰 사이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산은 비록 한국 제2의 대도시이지만 행정권이나 사법권의 측면에서 보면 ‘지방성’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많다. 권력이 집중된 서울에서 서울지검이 차지하는 비중과 차관급이 행정공무원 중 우두머리인 부산에서 부산지검이 차지하는 무게는 같을 수 없었고 중앙지의 영향력과 부산 지방지의 영향력 또한 같지 않았다. 두 차례의 근하 사건 수사에서 그래도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하고 나온 것이 부산에서의 취재력이 <부산일보>나 <국제신보>에 비해 훨씬 약한 중앙지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엿보게 하는 일이었다.
이런 구조적 문제점과 함께 ‘박영태 출현’의 보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기자들이 경쟁지를 너무 의식하여 상대가 특종한 기사는 될 수 있는 대로 묵살하려 하는 태도도 진상을 파헤치는 데 장애가 됐을 것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기자와 수사관들의 力學(역학) 관계가 逆轉(역전)되어 수사관들이 優位(우위)에 서게 되고 기자들을 ‘갖고 노는’ 사태도 자주 빚어진다. 사건기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落種(낙종)’이다. 이 落種과 特種(특종)을 좌우하는 것이 정보를 쥔 수사관들이므로 이때만은 기자들도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기 어렵게 된다.
근하 사건 수사에서 수사권도 없으면서 수사를 하고 있던 구영근씨의 행각은 기자들이 마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당시의 취재 기자 ㄱ씨는 “우리는 속으로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가끔 그가 값진 정보를 흘려주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친한 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자백과 否認의 정면대결

기자들이 포기하다시피 한 진실 확인의 책임은 이제 판사들에게 넘어갔다. 1968년 7월22일 오전 10시쯤 부산지법 제1호 법정에서 근하 살해사건의 첫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박정표 부장판사, 배석에 남용희, 정지형 판사, 네 교도소 직원들의 변호인엔 서윤학씨, 최형욱씨 변호인은 한봉세씨, 김금식 및 김기철씨엔 國選(국선) 변호인 이영호씨, 관여 검찰관은 김태현, 이원형, 정경식 검사.
첫 공판은 인정신문으로 간단하게 끝냈다.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 속에서도 수많은 방청객들과 기자들이 법정을 꽉 메웠다. 이 법정의 열기는 하나의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사회부 기자들이 강력사건의 재판과정에 이처럼 집착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갖가지 의혹과 미스터리가 풀릴 곳은 바로 이 ‘正義(정의)의 법정’ 밖에 달리 없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 검찰이 진상을 가리려 아무리 애써도 변호인들의 공격 앞에선 될 일이 아니란 믿음을 그들은 갖고 있었을 것이다. 법의 공방전이 공평하게 펼쳐지기만 한다면 진실은 밝혀질 것이란 기대감과 법정에서 오가는 말들을 이제는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그들의 직업의식을 자극하였다. 두 번째 공판은 8월12일에 열렸다. 이날엔 전경렬씨 부자도 방청석에 나타났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는 “저 악랄한 범인들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맞았다”고 원망했다는 것이다.
이날 김태현 검사는 직접 김금식씨를 신문했다. 김금식씨는 범행모의, 불법 출소, 범행 경위를 청산유수로 시인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불법 출소한 날에는 근하를 죽이지 않고 유인하여 돈만 빼내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박영태와 김기철이 海流(해류)를 이용하면 시체를 감쪽같이 없애버릴 수 있다고 하여 완전범죄를 꾀하게 됐다”(<국제신보>)면서 두 사람을 극악한 살인자로 부각시켰다. 오후에 金 검사는 김기철씨와 맞닥쳤다. 기철씨는 검사가 ‘피고인’이라고 부르자 화를 냈다.
“피고인, 피고인 하는데 그 말을 빼시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기철씨의 직업을 無職(무직)이라고 하자 자신은 무직이 아니며 버스회사에서 일했다고 반박했다. 평소 남들 앞에선 말 한번 제대로 못하던 그는 검사들에게 소리치며 대들기도 했다.
“이곳을 나가면 당신들과 금식이, 대범이를 무고죄로 고소하겠소!”
기철씨는 “모른다” “그런 일 없다” “상식 밖의 일이다”를 되풀이하며 검사의 공소사실 일체를 부인했다. 기철씨에 이어 검찰 신문에 올려진 최형욱씨는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국제신보>는 이렇게 썼다.
<기철에 비해 최형욱은 더 발악적이었다. 평양 사투리를 속사포처럼 써가면서 검사의 질문과도 거리가 먼 설명조의 답변을 하다가 검사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재판장 앞에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는 조사받을 때 고문을 당한 자리라고 흉터를 가리키면서 울상으로 호소했다.>
이 취재 기자는 기철씨와 형욱씨의 이름 밑에서 존칭을 빼고는 형욱씨의 ‘항변’을 ‘발악’이라고 했고 ‘미친 사람’에 비유했으며 검사의 말은 ‘꾸지람’이라 했다. 기자가 어떤 관점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용어 선택이었다. 이날 김금식씨는 다음과 같은 회개의 심정을 밝혔다.
“내가 죽어서 근하군이 살아난다면 백 번이라도 죽어 근하를 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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