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날론 생산으로 北의복생활 획기적으로 바뀌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주)삼화출판사/실패한 北비날론 생산 및 월북(越北)과학자 이승기의 核개발 언급 않아
(주)삼화출판사 발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380페이지 ‘역사의 창’에서 북한의 핵(核)과학자인 이승기(李升基)와 그가 개발한 비날론(북한명 ‘주체섬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리승기(1905~1996)는 세계에서 세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합성 섬유인 비날론을 발명하였다. 이 섬유는 카바이드를 원료로 하기 때문에 석회석과 무연탄이 풍부한 북한에서는 대량생산이 가능하였다. 1960년에 김일성은 “모든 것을 비날론 공장 건설에로”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하였다. 비날론의 생산으로 무명·삼베·아마 등과 같은 천연 섬유에 의존하던 북한의 의복 생활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이승기는 6.25전쟁 발발 직후 이종옥(李鍾玉, 前북한 부주석)의 포섭에 넘어가 제자들과 함께 월북한 과학자로 북한 정권으로부터 ‘노력영웅’, ‘인민과학자’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1905년 전라남도 담양군 출생인 이승기는 중앙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의 마츠야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교토(京都) 제국대학에 진학해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교토 제국대학 화학 연구소에서 조교수로 근무하던 이승기는 1939년 사쿠라다 이치로(櫻田一郎) 등과 함께 비날론 합성에 성공, 아시아 최초로 합성 섬유를 만들었다.

월북 후 1962~1990년까지 北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지내

그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공대학장을 지냈으며, 월북 후 1962년~1990년까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맡기도 했다.

이승기는 비날론 개발로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1959년 제1회 과학부문인민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이라 불리던 레닌 상까지 수상했다. 김일성은 이승기가 잠시 병으로 누웠을 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북한은 비날론의 상용화를 위해 1961년 5월 흥남에 ‘2.8비날론공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비날론은 북한 정권의 선전과 달리 생산과정에서 막대한 전력과 석탄을 소비하기 때문에 나일론 등 다른 합성섬유와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졌다.

‘2.8비날론공장’은 (주)삼화출판사 발행 고교 역사 교과서가 서술한 것처럼 북한의 의복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꾸기는커녕 70억 달러를 투자한 ‘남포갑문’, 40억 달러를 투자한 1989년의 ‘세계청년학생축전’과 함께 북한 경제를 파탄시킨 대표적 상징물로 전락했다.

이승기는 또 1967년 영변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초대 연구소장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했다. 북한은 이승기의 연구소장 재직시설 소련의 도움을 받아 연구용 원자로를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1979년 5메가와트급 원자로를 착공해 1986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영변 원자력연구소장은 핵개발과 관련된 중요한 직책으로 이승기는 내폭형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루토늄 추출 기술은 핵공학 기술이라기보다는 화공학 기술이기 때문에 이승기의 역할은 상당했을 것이다.

이승기 후손, 대대로 北정권에 충성바쳐

이승기를 통해 북한에서는 자체 양성된 핵개발 인력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 가운데 특출한 인재들은 연간 수십 명씩 소련의 드브나(Devuna) 핵 연구소에 파견되어 현장 실습을 통한 기술을 습득했다.

북한 원자력공업부 공무원 출신 탈북자 김대호 씨는 자신의 저서인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은 피지 않는다’에서 이승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93년 여름, 본인은 평양 101 핵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간부로부터 북한이 저폭뇌관(低暴雷管) 개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핵탄두 폭발 시 통상 3만도 이상의 고온에서 핵분열이 일어나지만 그보다 훨씬 낮은 저온에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저폭뇌관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황장엽 씨도 북한 고위관료로부터 들은바 있다고 본인에게 최근 이야기한 적 있다. 당시 연구사들 사이에선 ‘만약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이승기 박사는 그 전범자의 한사람으로 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승기는 또 생전에 함흥과학원 근처 2층 고급빌라에서 살았으며 사망과 함께 남한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대를 이어 북한 정권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

북한의 대외 홍보잡지 ‘금수강산’(2008년1월호)은 이승기의 맏아들인 이종과(교수)가 ‘공훈과학자’로 화력발전소에 촉매법에 의한 발전기냉각용 수소정제체계를 도입했으며, 항일투쟁 구호가 새겨진 ‘구호나무’ 보존에 기여하는 등 중견 과학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종과의 맏아들 이승일은 김책공업종합대학 연구사, 둘째 아들 이명일은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 교수이며, 딸 이옥이는 김책공대 교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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