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王朝의 大提學은 文官들이 투표로 뽑았다

임금이 마음대로 관리임명 못해
朝鮮 왕조에서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는 成均館의 文廟(=孔子廟)에 配享(배향)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묘 배향은 死後에 이루어지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당대 학자의 대표는 大提學(正二品)이었다.
대제학은 임금이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었다. 보통 관리의 임명은 문관은 吏曹, 무관은 兵曹에서 3명을 추천하면 임금이 그 중 하나를 落點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3배수로 추천되면 物望에 올랐다고 했으며, 물망에 오른 순서대로 首望, 次望, 末望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제학은 예외적으로 문관들의 투표로 뽑았다. 우선 郎官(정5~종6품)을 상대로, 다음에는 大夫(정1~종4품)들을 상대로 圈點(=동그라미를 친다는 뜻)이라는 투표를 실시하여 최고득표자가 단수로 임금에게 추천됐으며, 임금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임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대제학은 한 번 취임하면 죽거나 자신이 스스로 물러나기 전까지는 임금이 마음대로 면직시킬 수도 없었다. 예를 들어 9대 성종 때 徐居正같은 이는 19년간 대제학으로 있었다.
대제학은 1401년(태종 1년)에 大學士를 고친 이름이다. 조선 초기에는 예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으나, 1420년(세종 2년)에는 集賢殿에 대제학을 두었고, 1456년(세조 2년) 집현전을 弘文館으로 고쳐 불렀다. 홍문관 대제학, 藝文館 대제학, 成均館의 大司成 등 학문 관련 세 가지 최고 직위를 모두 겸직하는 경우에 한하여 ‘文衡(문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학문을 다는(=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는 대제학의 임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임금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絶對王政이 아니었다. 임금의 명령도 司諫院 관리들이 반대 상소를 하거나 三司(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가 합동으로 상소를 올리면 취소되기 십상이었다. 만일 임금이 계속 고집을 부릴 경우, 성균관에 재학 중인 儒生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마저 용납되지 않으면 유생들이 捲堂(권당)이라고 하는 동맹휴학을 했다. 어떤 임금도 권당까지 무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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