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은 공업과 함께, 농촌은 도시와 함께 발전했다!

계급史觀으로 쓰여진 한국사 교과서는 농민,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조하기 위하여 1960년대의 농촌을 애써 어둡게 그리고 있다.
한국은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을 일으킨 뒤 산업화에 착수하기 전엔 국민들의 과반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국가였다. 농업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ha(헥트아르: 100아르. 1아르는 100평방미터)당 쌀 수확량이다. 대한제국 말기에서 日帝시대가 끝나는 시기까지 한국은 ha 당 쌀 수확량이 1.14t에서 1.63t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 일본은 면적당 쌀수확량이 늘 한국의 두 배 가량이었다.

한국의 쌀수확량이 急增(급증)한 것은 박정희 정부가 적극적으로 농촌 진흥 정책을 쓴 1960년대 중반부터이다. 1966~1970년 평균 ha 당 쌀수확량은 3.14t으로 日帝 시대의 두배로 늘었다. 박정희 대통령 말기에 해당하는 1975~1979년 평균 ha 당 쌀수확량은 4.46t으로 같은 시기 일본의 4.25t을 능가하였다. 이는 한국 농업사상 최초의 개가였다.

좌익들은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화 정책에 집중,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거짓말한다. 왜곡된 記述(기술)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1960년대 말의 농촌은 절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고, 상대적 박탈감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이었다>(천재교육 발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79페이지).

1960년대의 농촌은 낙후된 고장이 아니라 발전하는 고장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가뭄 없는 농토'를 만든다는 구호 아래서 地下水를 개발, 비에 의존하는 天水畓(천수답)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군사혁명이 일어난 1961년엔 가뭄을 타지 않는 水利安全畓(수리안전답)이 54,6%였으나 1969년엔 75.1%로 늘었다.

전국적으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管井(관정)을 많이 판 덕분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과 거의 겹치는 1960~1980년 사이 전국에 약15만 개의 관정을 팠다. 이는 또 지하수를 뚫는 기계의 성능이 좋아진 덕분이다. 농기구 공장이 잘 돌아간 덕분이다. 수출공장을 짓고 외화를 많이 벌고 이로써 外資를 갚아가면서 농기구 공장을 많이 지은 덕분이다.

수출의 이익은 농민들에게도 돌아갔다. 수출을 믿고 외자를 빌어와 비료공장을 지어 화학비료를 많이 대주어 쌀수확량을 늘린 것이다. 농약, 비료, 농기구 등 근대화된 농업자재를 쓸 수 있게 됨으로써 농업 생산성이 올라갔다.

박정희 정부는 농촌 기술 지도 人力도 크게 늘렸다. 농촌진흥청의 연구직 및 지도직 인원은 1960년에 1502명이었는데, 5년 뒤엔 7143명으로 네 배 이상 증가하였다. 1960년대의 이런 농촌혁명은 1970년대에 가면 새마을운동으로 더욱 확산된다.

박정희 정권 때, 공업화, 도시화만 이뤄진 게 아니다. 농촌도 다 같이 잘 살게 된 것이다. 좌익식 계급史觀으로 쓰여진 한국사 교과서는 농민,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조하기 위하여 1960년대의 농촌을 애써 어둡게 그리고 있다. 박정희 시절 국민들의 소득분포에서 下位 40%에 해당하는 이들의 소득증가율은 국민 평균과 거의 같았다. 못 살던 사람도 고도성장의 혜택을 함께 누렸다는 이야기이다. 공업이 잘 된 만큼 농업이 내려 앉았다든지, 도시가 발전한 때문에 농촌이 피폐했다고 쓰는 것은, 내 이웃 집 아이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였기에 내 아들이 3류 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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