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3일 오후 서울 중구 충정로1가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제173회 趙甲濟 기자의 現代史 강좌’에서 趙甲濟(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獨蘇(독소) 전쟁 70주년’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獨蘇전쟁은 1941년 6월22일, 나치 독일이 ‘독일-소련 不可侵 조약’을 깨고 국경을 넘어 소련을 침략해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은 독일군이 베를린 공방전에서 패배, 1945년 5월9일 소련에 무조건 항복한 후 끝이 났다.
 
趙 대표는 “독일-소련 전쟁이 규모와 사상자 면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전쟁으로 사망자만 3000만 명이 발생했다. 병력과 武器(무기)의 數(수)까지 고려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래식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趙 대표는 “아리안 우월주의로 대표되는 나치즘과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공산주의라는 두 악마적 체제의 대결로 인해 이렇게 人命손실이 많았던 것”이라고 獨蘇 전쟁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두 체제는 人命손실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人道주의나 사람의 목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독일군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 60% 이상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趙 대표는 “히틀러는 그의 著書《나의 투쟁》에서 ‘독일 인구가 많기 때문에 살 공간을 찾아야 한다. 우크라이나 穀倉(곡창)지대를 점령해 새로운 생활 공간을 만들고, 독일 사람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었다”고 설명했다. 히틀러의 집념대로 독일의 소련 침공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는 “히틀러는 자신의 主敵을 스탈린과 공산주의로 설정했다”며 “스스로를 공산주의로부터 西歐문명을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趙 대표는 “유고슬라비아 정변으로 전쟁 시작이 두 달 정도 늦어져 히틀러가 승리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이것이 독일에 치명적이었으며 결국 소련에 패배한 요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趙 대표는 “1943년 1월말, 스탈린그라드에서 약 10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에 항복했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독일 사람은 5000여 명에 불과했으며, 9만 5000여 명은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獨蘇전쟁 초기 독일이 이기는 것을 본 일본도 미국을 공격하고,  미국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돼 결국 한국의 해방까지 가져왔다. 두 전승국 미국과 소련이 그 이후 세계를 주도하게 된다. 獨蘇전쟁의 발발이 한국 해방의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趙 대표는 “일본에 原爆(원폭)이 투하됐을 당시 소련 군대 일부가 한반도에 진입중이었다. 이후 소련군과 美軍이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獨蘇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소련이 지금은 무너졌지만 아직도 군사력 면에서는 세계 제2위를 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趙 대표는 獨蘇 전쟁의 성격을 ▲이데올로기 전쟁 ▲악당끼리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獨蘇 전쟁이 없었더라면 세계는 영국, 나치독일, 소련, 미국, 일본이 분할 통치하는 구조가 되었을 것이고, 한반도의 해방도 없었을 것이다.
 
주제 강연에 앞서 趙 대표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부산저축은행 不正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광주일고’ 출신들이 주축이 돼 부산서민들의 예금을 가로챘다. 언론은 광주일고라고 明記하지 않고 ‘특정지역 K고교’라고 보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얼마 전 국민행동본부 광고가 중앙일간지들로부터 거부당한 사실도 언급했다.
 
“‘광주일고’라고 명시했다는 이유로 네 개의 조선ㆍ동아ㆍ중앙ㆍ문화일보가 광고 게재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부산의 지방지를 통해 광고가 나가게 됐습니다. 야당이 주장하는 ‘고소영’은 실명 그대로 언급하면서 ‘광주일고’는 마치 聖域으로 규정,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적 公器(공기)인 언론이 그 책무를 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강좌는 5월30일 월요일 오후 2시 문화일보홀에서 ‘자유통일과 시민의 의무’라는 주제로 열릴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