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國軍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 '피의 능선'에 가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아군 유해 5400여 구 발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유해는 단 64구 뿐. 軍 관계자, “유해발굴사업은 6·25를 영구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방법 … 마지막 한 분까지 찾아서 가죽에 품으로 돌려보낼 것”
6월22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주관으로 6·25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 초청 행사가 열렸다. 이번 행사에는 사이버안보감시단 블루아이즈(20여 명)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군사관후보생(ROTC, 10명)·脫北 재학생(12명) 등 총 50여 명이 초청됐다. 탈북 대학생들이 국군의 유해 발굴 현장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에서 중동부 戰線(전선)인 강원도 양구로 이동한 참가자들은 집결지에 모여 도보로 1시간 40분가량 이동해 수리봉(983고지)에 올랐다. 수리봉 정상은 안개로 가득했다. 산세가 험한 수리봉은 독수리가 앉아 있는 자태를 띤다고 해 그 이름 붙었다. 이곳을 ‘피의 능선(6km, Bloody Ridge)’이라고도 부르는데, 전투 당시 능선에 피가 흘러내릴 만큼 흥건했다고 해 그 이름이 붙었다. 수리봉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우측에는 ‘斷腸(단장)의 능선’이, 좌측에는 백석산이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이용석(예비역 중령) 조사과장이 수리봉 정상에서 참가자들에게 유해발굴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용석 조사과장은 유해발굴의 산증인이다. 1999년 유해발굴을 처음 계획하고, 11년 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6·25 國軍 전사자 유해를 발굴했다.

“2000년에 처음 수리봉에서 유해발굴을 했을 때, 풀포기만 헤쳐내도 유해가 드러났었습니다. 시간을 60년 전으로 되돌리면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간 것입니다. 내가 내 무덤을 파는 것과 같았습니다. 6·25를 증언해줄 참전용사와 직계가족이 줄어들고 있는 현 상황에서 유해발굴은 시간과의 전쟁입니다.”

2010년 말, 중령으로 예편한 그는 군무원으로 채용돼 여전히 발굴 현장을 누비고 있다. 그는 戰史와 참전용사들의 증언, 지역주민들의 제보를 바탕으로 어느 지역을 발굴할지 조사하는 것을 담당한다. 85kg의 거구인 그는 “한 번 산에 올라갔다오면 2.5kg이 빠진다.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면서 힘들지만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한다고 했다. 그는 2010년 국방부와 조선일보사가 제정한 제1회 爲國獻身賞(위국헌신상) ‘헌신’부문을 수상한 바있다. 초청 행사가 끝나자마자 그는 한계령으로 달려가 유해발굴지역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18일부터 9월5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수리봉 일대의 ‘피의 능선’은 敵이 我軍(아군)의 후방까지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어 아군에게는 목에 들이댄 匕首(비수)와도 같은 곳이었다. 육군 5사단 36연대는 고지에 구축된 적의 대피호와 지뢰로 인해 큰 손실을 입으면서도 이곳을 탈환했다. 북한군의 역습으로 후퇴와 탈환을 반복했지만, 韓美양국이 9월5일 고지를 점령한다. 이 전투에 약 51만 발의 포탄이 사용돼 당시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Van Fleet) 장군은 “한국전쟁 발발 이래 가장 많은 포격을 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 600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됐다. 현재까지 수리봉에서 발굴된 아군의 유해는 6월21일 기준으로 151구이다. 아직도 500여 국군 용사의 유해가 수리봉 일대에 묻혀있다.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장 “발굴된 국군 유해 5400여 구 중 인식표가 있었던 유해는 16구 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박신한(육군 대령) 단장은 “(일각에선 북침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유해가 남쪽에만 있느냐. 이는 南侵(남침)이라는 결정적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발굴 과정이 기상에 가장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발굴 유품]


[발굴 현장 진입에 앞서 묵념하는 사이버안보감시단 블루아이즈 회원과 한국외대 학생들]

22일 수리봉 유해발굴 현장에는 세 구의 국군 유해가 발굴됐다. 한 구는 형태를 잘 갖춘 상태였고, 나머지 두 구는 서로 뒤엉켜 있었다.


[유해발굴병이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60여 년만에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됐다.]




[발굴된 유해를 설명하는 이용석 조사과장. ‘참호가 어느 쪽으로 형성돼 있느냐’도 신원확인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유해발굴 관계자는 “낙동강 일대와 38선 부근, 고지전이 치열했던 곳에서 유해가 주로 발굴된다”고 했다.


[유해발굴에 사용되는 도구]

이번 현장 체험에는 인민군 전차병 출신인 백요셉(한국외대 언론정보학) 씨도 참가했다. 그는 강원도 철원에서 남쪽을 향해 군복무를 했다. 그의 祖父(조부)는 인민군으로 참전해 낙동강戰線(전선)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또 다른 참가자인 최혜원 씨도 “祖父와 外祖父(외조부)가 인민군으로 참전해 낙동강전투에 참가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고 했다.

행사에 참가한 한 탈북 여대생은 “북한에서는 6월25일부터 7월27일까지 5차례에 걸쳐 6·25관련 내용을 집중 교육한다. 北은 6·25를 불행의 날로, 7·27을 해방의 날로 교육시킨다”고 했다. 그는 수리봉을 오르면서, “북한에선 6·25관련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기 때문에 수리봉에 대해 자주 들어봤고, (북한군이) 어떻게 보급을 했는지도 교육 받았다”고 말했다.


[교통호 부근에서 발견된 국군 유해 두 구. 敵의 82mm 박격포탄에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유해가 뒤엉켜있다. 발굴을 위한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석회가루를 뿌렸다.]


[국군 용사의 조각난 두개골과 앙상한 뼛조각]


[뼛조각과 두 개의 敵 박격포 추진체]


[유해와 못 다 쓴 총탄, 적의 82mm 박격포 추진체(날개)가 뒤섞여있다]


[유해발굴 현장에서 헌화 및 묵념]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장 주경배 중령은 “내가 이 일을 해야 용사들이 유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열정을 갖고 한다. 너무 늦게 시작해 아쉬움이 있지만 晩時之歎(만시지탄)이다. 지금부터라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밝혔다.

유해발굴을 통해 아군의 유해로 추정내지 확정되면 오동나무 관에 담아 태극기로 감싼다. 그 후 인근부대에 마련된 임시봉안소를 거쳐 서울 현충원에 위치한 중앙감식소로 옮겨 정밀감식(DNA분석, 사망원인 등)을 한다. 정밀감석이 끝나면, 유가족이 있을 경우 결과를 통보하고 협의를 거쳐 火葬(화장)한 뒤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다. 유가족이 없을 경우에는 유해발굴단에서 유가족이 나타날 때까지 보관한다.

敵軍(적군)의 유해로 확인될 경우, 유골함에 수습해 北韓과 中國에 유해인수의사를 타진한다. 관계자는 “대부분의 경우 인수를 거절한다”고 했다. 거절된 유해는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敵軍(적군)묘지로 간다.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어려울 경우에는 일단 아군으로 간주해 아군의 유해와 같은 절차를 거쳐 중앙감식소로 옮겨져 정밀감식을 거친다. 감식을 통해 적군으로 판명되면 파주의 적군묘지로 옮겨진다. 처음부터 敵軍으로 밝혀진 유해는 서울 현충원에 위치한 중앙감식소에 들어 올 수 없다. 이는 국립묘지가 聖地(성지)이기 때문이다.


[백두산부대에 마련된 임시봉안소. 블루아이즈 회원들이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유해발굴 현장 견학을 마친 이들은 제4땅굴로 이동했다.



[제4땅굴 입구]

제4땅굴은 가장 최근의 발견된 對南침투용 땅굴이다. 우리 軍은 1990년 3월3일, 이 땅굴을 발견했다. 땅굴의 길이는 총 2052m이며, 군사분계선(MDL)으로부터 남쪽으로 1028m까지 파고들어왔다. 현재까지 발견된 땅굴 중 가장 길다. 아군은 이 땅굴을 逆坑道(역갱도)를 통해 발견했다. 군 관계자는 “아주 운이 좋아 발견했다”고 말했다. 제4땅굴의 입구는 아군이 역갱도를 시추한 곳이다.

아군이 시추한 역갱도를 통해 200m쯤 내려가면 북한이 파고들어온 땅굴과 맞닥뜨리게 된다. 북한이 파내려온 땅굴에는 두 개의 레일이 설치돼 있는데, 땅굴을 파내면서 발생한 암석 파편을 퍼나르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현재는 이 레일을 우리 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레일을 통해 100m지점까지 들어가 볼 수 있다.

북한은 땅굴 내부 암벽에 1m깊이의 장전공을 뚫고, 그곳에 폭약(다이너마이트)을 설치해 터뜨리는 식으로 땅굴을 파냈다. 군 관계자는 “하루에 2.6m~3.6m씩 파낸 것으로, 재래식 방식이며, 땅굴의 높이는 북한의 평균 신장인 164cm에 맞춰 1.7m정도 된다”고 설명했다.

우리 군은 군사분계선上에 위치한 제4땅굴 내부에 5m 두께의 콘크리트 벽과 5차 격벽을 설치해 놓고, CCTV로 감시하고 있다. 매주 수색대원이 땅굴 1000m까지 투입돼 북한의 추가 도발 징후를 파악한다.

견학에 참석한 한 탈북자는 “현실을 경험하게 돼 생동감이 있었다”며 “전쟁의 결과물은 피해와 희생뿐이었고, 이는 잘못된 한 사람(김일성) 때문”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사이버안보감시단 블루아이즈의 한 회원은 “그분들(전사자)에게 대한민국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의 안녕과 평화를 우리가 대신 누리고 있다. 감사함을 넘어 감동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다른 회원은 “그들은 나의 가족”, “유해발굴은 국민들의 의무라는 것을 현장에서 느꼈다”고 말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공보담당 유영승 소령은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6·25를 영구적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해발굴사업에서 유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전사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유가족들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마지막 한 분을 찾아서 가족에 품에 돌려 드릴 때까지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된 2000년부터 현재까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27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我軍(아군) 5404구, 敵軍(적군) 870구이다. 5400여 구의 국군 용사 유해 중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유해는 단 64구에 불과하다. 아직도 13만여 구의 국군 용사들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000년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호국영령들의 유해발굴사업을 모태로 한다. 당시 2000~2003년까지 29개 지역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한 이후 육군에서 이 사업을 이어받아 추진해오다 2006년 5월 유해발굴감식단 창설에 관한 법령이 제정됐고, 2007년 1월 국방부 차원에서 정식으로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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