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의 판매 부수를 만 권으로 제한하는 법이 제정된다면?

<'유뱅크씨, 문학적 심미안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거야말로 아주 중요한 사회문제죠.'
밸프 유뱅크가 대답했다. 유뱅크는 그 시대의 문학 지도자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지금까지 3000부 이상 팔린 책은 한 권도 발표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에도 기회균등법을 적용한다면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中略)
'당신이라면 어떤 식으로 그 기회균등법을 문학에 적용시키겠습니까?' 모트 리디가 물었다.(中略)
밸프 유뱅크가 대답했다.
'어떤 책이든 판매 부수를 만 권으로 제한하는 법이 마련돼야 해요. 그렇게 되면 문학 시장이 새로운 기능과 참신한 아이디어, 그리고 비상업적인 글쓰기 쪽으로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쓰레기 같은 작품은 만 권 이상 살 수 없도록 금지 조항을 마련한다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보다 훌륭한 책을 구입할 거예요.'(中略)
'그렇지만 유뱅크씨.....'
흰 드레스를 입은 그 소녀가 물었다.
'만약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꼭 그 책을 사고 싶어한다면 어떻하지요?'
'어떤 책이든 독자는 만 명이면 충분해요.'
'제 뜻은 그게 아니에요. 만약 사람들이 원한다면 어쩌냐는 말이죠.'
'그건 무의미해요.'> (後略)

이상은 미국의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소설 '아틀라스'에 나오는 얘기다.
소설 '아틀라스'는 정부의 규제 강화, 무거운 세금 부과, 생산보다는 분배, 자유보다는 평등을 우선시하는 정부와 세태에 시달리던 창조적인 기업가, 발명가, 예술인, 학자,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일을 접고 은둔함으로써 일종의 '파업'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이 책도, 작가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만, 美의회도서관 조사에 의하면 이 책은 미국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라고 한다. 오늘날 미국 주요 기업의 CEO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언급된 '기회균등법'이란 경제적 약자나 중소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특정 기업체의 시장점유율은 물론 제품의 생산량이나, 원자재 확보량까지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법을 말한다. 이 법이 통과되자 철도회사의 경우 운행량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低速으로 열차를 운행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다.
물론 '기회균등법'의 결과 경제는 망가지고, 실업자는 급증하며, 사람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산업분야야 그렇다고 쳐도 문학출판 분야에까지 '기회균등법'을 적용해 모든 책의 판매부수를 만 권 이하로 제한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부추겨 좋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그와 유사한 발상이 여러 해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어 왔으며, 제17대 국회가 개원하는 대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에 의해 입법화될 것으로 보인다.
농담 말라고?
그렇다면 다음 기사를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시장 독과점 제한 =프랑스가 일간지의 시장점유율을 30% 이하로 제한하는 등 여러 나라에서 여론의 다양성을 민주주의의 중요한 장치로 인식하고 있다. 시민단체와 학계에서도 일찍이 외국의 예를 따라 독과점 상한선 마련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주동황 광운대 교수(언론학)는 “시장 불공정거래 행위로 여론을 독과점하고 있는 거대 신문사를 제동할 장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언개련은 이를 위해 신문진흥법에 전국 유료부수의 20% 또는 특정 지역 유료부수의 30%를 넘으면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규정하고 이를 어길 경우 이행강제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과점 상한선은 독일 정부가 1968년 설립한 ‘귄터위원회’가 “한 기업이 소유한 일간지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20%를 넘으면 언론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규정한 것과 조선, 중앙, 동아 등 세 신문의 시장점유율(2000년 기준 20~26.6%)을 감안해 결정됐다. -한겨레 4월21일>

이를 두고 이른바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시민단체, 학자들은 '신문진흥법' 혹은 '신문다양성법'이라고 한다던가?
독자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특정 신문의 시장점유율을 일정 한도 이내로 묶어야 하고, 그래야 '여론의 다양성'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신문이 '진흥'된다는 발상과, 독자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어떤 책이든 판매부수를 만 권 이내로 제한해야 하고, 그래야 문학창작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발상.....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이런 논리를 확대한다면 TV드라마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방송작가들의 창작의욕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대장금' 같은 '독점적' 드라마가 나오지 못하도록 시청율을 제한하는 법률도 나오지 않을까?
물론 관람자가 1000만 명이 넘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의 관람객수를 제한하는 법률도 제정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 두 영화의 '독과점'으로 인해 극장조차 잡지 못하고 사라진 좋은 영화들이 적지 않으니까....
그밖에 서태지 같은 특정 가수가 가요계에서 독보적 존재로 군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률, '오마이뉴스' 같은 특정 인터넷 매체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해당 사이트 접속자수를 제한하는 법률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이 표를 싹쓸이 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률, 촛불집회 같은 집회의 참가자 수를 제한하는 법률은 어떨까?

소설 '아틀라스' 속에서 그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밸프 유뱅크라는 작가가 3000부 이상 팔린 책은 한 번도 내지 못한 것처럼, 소위 '신문진흥법' 제정을 열렬히 지지하는 몇몇 신문들의 경우도 자유로운 경쟁체제 아래서는 조-중-동과 경쟁할 능력이 없는 마이너 신문들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 마이너 신문의 기자들은 '신문진흥법' 등이 제정될 경우, 자기 신문이 당장이라도 살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소설 '아틀라스'에서 '기회균등법'으로 생긴 '기회'는 무능하지만 정부와 밀착된 부패 기업인들이 차지한다.
한국판 '언론기회균등법'이라고 할 수 있는 '신문진흥법'이 제정된다면, 그 果實은 과연 누가 따먹을까?
언론으로서의 역량도, 비판정신도 떨어지지만, 집권세력과 코드가 맞는 몇몇 신문들이 아닐까?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