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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 김미숙씨(가명.사진) 7월4일부터 서울 충정로에 위치한 ‘평화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서울 본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 시위는 27일까지 이어진다. 평통사는 북한정권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마저 두둔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 온 대표적인 반미·친북단체이다.
 
金씨의 남편은 2001년 세상을 떠났다. 북한서 수용소 생활로 건강이 나빠진 탓에 출소 직후 벌어진 일이다. 큰 아들은 이른바 ‘속도전돌격대’로 노동판에 동원돼 중노동에 시달렸고 병을 얻었다. 하지만 아픈 아들에게 ‘건달죄(노동현장에서 불성실한 태도)’라는 죄목이 씌워져 10년 동안 어린이 보호소로 끌려갔다. 풀려난 아들도 남편과 똑같이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목숨을 잃었다. 2년 동안 남편과 아들을 그렇게 잃었다.
 
“남은 두 딸을 데리고 간신히 연명하다가 2006년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지요. 중국 돈 8000위엔(약15만원)에 팔려가 노래방, 보신탕집을 전전하며 갖은 수모를 다 겪었습니다… 길림에서 연길로, 연길에서 다시 길림으로 또 청도로 다니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일을 하고 돈을 받으면 그나마도 다행입니다. 개장집(보신탕집)에서는 3개월 동안 뼈가 빠지게 일을 하고 돈 한 푼 못 받고 쫓기듯 도망쳐 나오기도 했습니다.”
 
중국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2006년 조선족 남편을 만났다. 중국 청도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서 만난 탈북자 친구와 함께 한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2006년 3월21일 청도를 떠나서 8명이 대련을 거쳐 몽골로 들어갔습니다. 24일 새벽에 중국 국경선을 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길을 잘못 들어 산에서 헤매게 되었어요. 8명이 두 팀으로 나누어져 길을 찾다가 잘 안되어 여자 두 명이 먼저 얼어 죽기도 했습니다.”
 
3월 말이지만 몽골 땅의 온도는 零下(영하)였다. 한 밤 중 산속에서 추위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을 하늘에 걸고 이리저리 산속을 헤매는 것 뿐이었다.
 
“추위 때문에 3명이 동상으로 엄지발가락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상태가 조금 나은 편이었죠. 닷새가 넘게 제대로 못 먹고, 못 마시고 산을 헤맸으니… 그때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내가 살 길이 막막하니까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고…”
 
김미숙씨는 당시 임신 7개월이었다. 중국 국경을 넘어 몽골로 들어온 지 3일째가 되던 날 산 속에서 아이를 낳았다. 갓난아기를 감쌀 천 조각도 없어, 가지고 다니던 작은 핸드백에 아이를 뉘였다. 아기는 이미 나오며 죽어있었지만… 아이를 넣은 핸드백을 목에 걸고 남은 친구와 길을 계속 걸었다.
 
“나랑 같이 가던 친구가 너무 힘들고 배가 고프다보니 정신이 오락가락 했던가 봐요. 옆에 쌓여있는 돌무더기 위에 눈이 쌓인 것을 보고 그걸 찐빵이라고 하는 거에요. 저기 찐빵이 있는데 왜 안주냐고 빨리 찐빵 달라고 하면서 금방 애를 낳고 온 제 머리를 쥐어뜯고 때리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아무리 얘기를 해도 듣지 못하더라고요. 그러더니 또 기다란 바윗돌을 보고 콜라라고 하면서 콜라 달라고 떼를 쓰고 악을 지르다가 그만 쓰러져서 못 일어나더라고요. 그렇게 또 한명이 죽었어요. 심장을 두들기고 손발을 계속 주무르면서 살려보려고 했지만 못 일어났어요.”
 
눈물은 흐르는 대로 고드름이 돼 볼에 붙었다. 결국 친구는 깨어나지 못했다. 오른팔엔 아기를 눕히고 왼팔엔 죽은 친구를 눕힌 채 자기도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金씨는 그때 갑자기 “하나님”을 불렀다고 말했다. 죽은 친구는 ‘한국에 들어가면 반드시 교회에 가자’고 몇 번씩 다짐을 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깐 잠깐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차리니 몽골의 어느 병원이었다. 몽골 순찰대가 미숙씨를 발견해서 병원으로 후송한 것이다.
 
凍傷(동상)의 상태가 너무 심했다. 설상가상 위암까지 발견됐다. 울란바트르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숙씨는 한국 대사관에 인계됐고 4월10일 드디어 대한민국에 들어와 위암과 동상 수술을 받았다. 발가락은 잘라야 했다. 지금은 오른쪽 발가락 2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記者에게 발가락이 다 잘려나간 발을 보여주었다. 발을 감싼 거즈에 피가 배어 있었다. 수술을 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통증이 밤잠을 설치고 매일 출혈이 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시위를 시작한지 열흘이 됐어요.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싫어서 여기로 나왔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왜 난리를 치냐’고 욕을 해요. 하지만 나는 지금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잖아요? 여기서는 못 할 일이 없잖아요.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하지만 이런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에요. 내가 북한을 알리고 탈북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1인 시위를 하는 거에요.”
 
김정일 정권은 그녀의 아들과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은 자녀들도 어머니가 탈북을 했다는 이유로 보위부로 끌려갔다. 아마 정치범 수용소로 갔을 것이다.
 
“남한에 와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어요. 저는 탈북민들의 일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앞장 설 겁니다. 내가 그 아픔을 다 알기 때문에… 후대들에게 이런 아픔을 남겨줄 수 없잖아요. 탈북민들은 이렇게 늘 다짐해요. ‘북한에서의 날들을 잊지 말자! 우리가 당한 일, 힘들게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알리자!’”
 
미숙씨는 한국에 와서 ‘인권’이라는 두 글자를 찾은 것 하나만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누가 돌을 던질지언정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다는 것, 거짓과 선동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 자유를 준 대한민국이 너무나 고맙다고 거듭거듭 말하는 그녀 앞에서 記者는 부끄러웠다.
 
이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평통사’ 서울 본부는 단체 이름을 내건 간판 하나 없이 주택가 한가운데 꼭 은신처처럼 들어앉아있었다. 서울 본부가 그곳에 입주한지 3년이 지났는데도 주민들은 집 주변에 그런 단체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한국 국민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어요. ‘평화롭기 위해서는 북한에 쌀을 주어야 한다.’ 북한이 진정으로 통일을 원했다면 지금까지 준 것으로 통일을 하고도 남습니다. 북한은 그 쌀로 핵을 만들어 강성대국 준비를 한다는데 남한은 북한에 큰소리 칠 수 있는 무기도 없지 않습니까? 왜 주고 당합니까? 안주고 당하는 것도 원통한데 다 퍼주고 국민들이 죽어나는 이런 답답한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북한의 총부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종북단체를 끝까지 쫓아가서 국민들에게 알릴 겁니다. 우리가 당한 그 아픔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미숙씨 앞에 선 記者는 小人國(소인국) 걸리버 같았다. 북한이 인종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말이 실감났다. 지금 중국에서 또 몽골에서 얼마나 많은 탈북여성들이 헤매고 있을까.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인권’을 주어 이 땅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누릴 수 있게 하는 길은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들의 아픔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권력이나 이익이 아닌, 평범한 국민들의 관심과 동의였다. 이제는 그들의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한여름(리버티헤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