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TV드라마 '시티헌터' 속의 좌파코드들

계층갈등 부각, 무상급식 필요성 은연 중 강조하면서 의료민영화 폄하

‘시티헌터’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지난 7월13일 방송된 ‘시티헌터’ 15회는 시청률 20.5% (AGB 닐슨, 수도권 기준)를 기록, 수목드라마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원래 ‘시티헌터’는 1980년대 후반 국내에 소개됐던 일본만화 ‘시티헌터’가 원작이다. 하지만 드라마 ‘시티헌터’는 플레이보이 사립탐정 겸 청부살인업자의 코믹액션인 원작과는 상당히 다르다.

 

‘시티헌터’ - 사회 이슈로 양념을 친 복수극

 

이야기는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으로 시작된다. 안기부-군부-정부의 소장 엘리트로 구성된 사조직 오인회(五人會)는 대통령이 암살될 뻔 했다는 사실에 격분, 북한 군부 요인들을 암살하는 ‘싹쓸이계획’을 세우고 21명의 특수요원을 북한으로 밀파한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은 오인회는 이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임무를 수행한 후 남포 앞바다에서 우리 잠수함과 접선을 기다리던 북파요원들을 사살한다.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이진표(김상중 분)는 동료 박무열(박상민 분)의 아들 이윤성(이민호 분)을 데리고 태국으로 탈출한다. 그곳에서 마약왕이 되어 엄청난 부(富)를 일군 이진표는 신분을 세탁한 후 이윤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인회 멤버들에게 차례로 복수를 시작한다. 그러는 가운데 이윤성은 우연히 알게 된 청와대 여자경호관 김나나(박민영 분)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 요즘 우리 사회의 이슈들과 연관된 이야기들이 양념처럼 덧붙여진다.

 

비리의 종합선물세트 - 오인회

 

오인회의 면면도 흥미롭다. 관료 출신 국회의원 이경완 (이효정 분), 군 출신 정치인 서용학 (최상훈 분), 교육부 장관을 지낸 사학재단 이사장 김종식 (최일화 분), 안기부 간부 출신 재벌 천재만 (최정우 분), 그리고 안기부 특수작전 부장 출신으로 현재 대통령으로 있는 최응찬 (천호진 분). 이들은 40여 년 전 김지하가 시(詩) ‘오적’(五賊)에서 난도질했던 ‘다섯 도둑놈들’, 즉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을 연상케 한다.

 

이들의 행태를 보면,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는 온갖 비리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만하다.

이경완은 결식아동급식비를 삥땅쳐서 정치자금을 만들다가 쇠고랑을 찬다 (이 대목에서 시청자는 은연 중 무상급식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국방부 장관 출신 정치인으로 유력한 대권 주자인 서용학은 말끝마다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고 안보태세 강화를 외치는 ‘애국자’다. 하지만 그는 뒷구멍으로는 외국에서 무기를 들여오면서 뇌물을 받고, 불량군화를 납품한다. 그의 세 아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한다.

김종식은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학생들 앞에서 짐짓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뒤로는 학생들의 등록금 2000억원을 빼돌리는 파렴치한이다.

안기부 간부에서 재벌로 변신한 천재만은 자기 회사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을 앓게 된 근로자들에게 산재처리를 해 주기를 거부하고, 이에 항의하는 근로자들을 구사대를 동원해 폭행한다. 이것이 문제가 될 것 같자 그는 부장검사급 검찰간부들을 향응과 뇌물로 매수하려 든다.

대통령 최응찬은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의 불법비리를 적극적으로 막지는 못한다.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한’ 사회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시티헌터’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사회 현안들을 건드려주는데 있다는 분석도 있다.

 

뜬금없이 ‘의료민영화’ 튀어나와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진 자’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다. 이들은 ‘못 가진 자’들을 ‘거지’ 취급한다. 참 잔인하게 짓밟는다. “너희는 우리와 종자가 다르다. 우리가 주면 주는 대로 고맙게 받아먹으라”는 투다. 대사 하나하나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의 갈등을 조장하려고 고심하고 만든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얼마 전부터는 ‘의료민영화’문제가 나왔다. 대형병원을 갖고 있는 악덕 기업인 천재만은 “의료민영화는 꼭 해야 한다”면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뇌물을 먹인다.

7월20일 방영분에서도 의료민영화 문제가 다시 나왔다. 의료민영화를 강조하는 천재만에게 최응찬 대통령은 “건강보험이 있어서 그나마 없는 사람들도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쏘아붙인다. 천재만은 이에 아랑곳 않고 보건복지위 의원들에게 뇌물을 뿌리며, 의료민영화 법안 통과 로비를 벌인다.

 

이 드라마 중에 묘사된 다른 사회 현안들은 그래도 극의 흐름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된다. 하지만 ‘의료민영화’ 문제는 드라마의 전개와는 거의 관계없이 튀어나온다.

 

국회의원들의 부패상을 묘사하려면 다른 소재도 많다. 구(舊)정권 실세들이 줄줄이 연루되어 있고, 서민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저축은행 사태 같은 것은 약자를 돕고 부정한 강자를 쳐부수는 ‘시티헌터’의 컨셉과도 꼭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참 묘하다.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등 이슈란 이슈는 다 다루면서도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잘못과 연결되는 저축은행 사태는 피해간다.

그 대신 제주특별자치도나 인천송도국제도시 활성화와 의료관광 및 의료산업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의료민영화법이 뜬금없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이걸 우연이라고 봐야할까?

 

드라마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좌파 코드’ 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회 있을 때마다 ‘가진 자’의 오만을 한껏 부각시키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구조를 강조하고, 저축은행사태는 피해가면서 드라마의 맥락과 무관하게 ‘의료민영화’를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에서 나는 이 드라마의 성격에 대해 확신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오인회의 배신과 출세를 보면서 은연 중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참 나쁜 나라인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는 점이다.

 

TV드라마 속의 좌파코드들

 

TV드라마 속에 ‘좌파 코드’가 숨어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금년 초 인기를 끌었던 SBS의 법의학 드라마 ‘싸인’에서는 미군이 연루된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 정권과 보수 세력이 이를 은폐하려 드는 얘기가 나왔다.

‘여성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내걸었던 SBS 드라마 ‘대물’ 곳곳에는 ‘노무현 코드’가 숨어 있었다. KBS 드라마 ‘프레지던트’의 경우, 주인공인 대통령 후보 장일준(최수종 분)은 군사독재정권 시절 운동권 출신으로, 그의 형과 함께 ‘형제간첩단’으로 몰려 형이 사형에 처해진 아픔을 간직한 인물로 그려졌다.

 

1990년대 초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시대의 모순을 고민하는 진지한 인물들은 좌파 아니면 그에 동조하는 인물들이었다. 반면에 빨치산 토벌대장인 경찰 간부는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정의파’ 조폭으로 묘사됐던 태수(최민수 분)는 빨치산의 유복자(遺腹子)였다.

 

문학 게릴라전과 ‘쓸모 있는 바보들’

 

이런 드라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1950년대 미국의 공산주의자 시나리오 작가 존 하워드의 말이 떠오른다.

“작가로서 여러분들은 공산주의 전부를 보여주려 하지 말고, 쓰고 있는 모든 대본에 공산주의 원리가 5분간, 당 노선이 5분간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라.”

비슷한 무렵 활동했던 좌파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는 “제 값을 하는 작가라면 누구나 각자의 방식대로 전투를, 일종의 문학 게릴라전(戰)을 감행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티헌터’를 비롯해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들에서 나는 존 하워드나 달튼 트럼보의 그림자를 본다.

문제는 이런 ‘좌파코드’를 내장한 드라마나 영화들이 시장경제체제 아래서 부를 일군 기업인이 만든 방송사나, 대기업이 출자한 배급망을 통해 전파된다는 사실이다. 이념전선의 후방이 자유사회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몫을 부담해야 할 자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레닌은 그런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쓸모 있는 바보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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