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와라: 조갑제 선생님께 (이번 만남을) 부탁했는데, “공식적으로 후세에 남기는 모임”이라고 하시니 긴장을 했습니다. 저는 일본말로 하고, (이동복, 조갑제) 선생님과 김현희 씨는 물론 한국말로 하시고, 서로 모르는 말은 이 분(마이니치신문사 서울지국 金宣姬 기자)이 통역을 해주시는 걸로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갑제: 그럼 제가 중간에서 이런 모임을 주선했으니까,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회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평양에서) 이 세 분이 만나고, 사진을 매개로 세계에 알려진 것이 굉장히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거 같아요. 39년 전(1972년)인 11월2일, 북한의 (평양 교외) 驛浦(역포)라는 곳에서 이동복 선생님이 남북 조절위회담의 대변인으로 참여해 비행기에서 내릴 때, 꽃다발 소녀로 뽑힌 김현희 학생이 세 번째 花童(화동)으로 이동복 선생께 꽃을 드렸습니다. 그 장면을 당시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의 평양 특파원이던 하기와라 료 기자께서 촬영했습니다. 아주 결정적 사진이 남았습니다.
이 사진이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88년 1월15일 안기부에서 KAL858기 폭파 사건 진상을 발표하면서였습니다. (안기부에서는) ‘김현희 씨가 꽃다발을 장기영 씨한테 줬다’고 발표를 하니까, 하기와라 선생님께서 찍은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하기와라 선생님께서 “(사진에서) 김현희 씨로 보이는 소녀가 이 사람이다”라고 찍었는데, 그게 잘못 짚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북한이 주장하는 정희선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진에서) 김현희 씨는 (다른 사람의) 얼굴에 가려서 잘 안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에선 바로 정희선이 나와서 “(김현희는) 가짜다”라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하기와라 선생님이 김현희 씨가 보이는 사진을 다시 찾은 것이죠.
하기와라: 제가 찍은 것이 아니고, 요미우리 기자가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가리키며)
조갑제: 요미우리 기자가 찍은 사진을 하기와라 선생님이 받아서 공개하신 거죠? 그 사진을 보면 확실하게 김현희 씨가 선명하게 나왔습니다. 2004년에 요미우리가 발행하는 위클리 요미우리에 컬러사진으로 앵글이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과는 조금 다르지만, 더 결정적인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하기와라: 귀가 명백히….
조갑제: 여기 (칼러 사진에) 귀가 드러나니까, 이걸 가지고 법의학자가 분석을 했습니다. (사진에 나온) 귀와 김현희 씨의 귀를 비교해서 과학적으로 더 확정 지었습니다.
하기와라: 맞습니다. (김현희 씨의 KAL858기 폭파 사건) 기자회견 이후에 조총련이 (거짓)선전공작을 많이 했습니다. 조총련이 김현희를 김현희가 아니라고 하기에, 저널리스트로서 약간의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조총련에서 거짓 증거사진을 근거로 계속 거짓말을 했을 때, 제가 조총련에 가서 “너희는 (현장에) 가보지도 않았지만, 나는 현장에 있었다”고 말하면서 조총련에 증거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그 이후 조총련의 (행태가) 수그러졌습니다. 이후 조선중앙통신이 장문의 발표문을 통해 “일본 공산당과 아카하다의 기자는 자중하라”고 했습니다. 협박한 것입니다.
조갑제: 그리고 하나 빠뜨린 게 있는데, 그때 북한에서 낸 사진이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이죠?
하기와라: 네. 이 사진입니다.
조갑제: (이 사진은) 북한에서 반박자료로 낸 사진인데, 여기 김현희 씨가 찍혀 있었어요.
김현희: 원래 제가 있어야 하는데, 제 사진이 정확하게 나오니까 북한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 몽타주만을 갖다가 (제 얼굴에) 붙인 겁니다.
조갑제: 아, 이거 김현희 씨 사진 아닙니까?
하기와라: 김현희 씨 사진 아닙니까?
조갑제: 하기와라 선생은 이 사진이 진짜인 줄 알고 계셨군요.
김현희: (사진을 가리키며) 원래 이 자리에 있었는데, 머리만.
조갑제: 다른 소녀의 머리 사진만 오려서 붙인 것입니다.
이동복: 이게 어떤 거냐면, 옛날에 서대숙 씨가 1972년에 (북한의) 혁명박물관에 갔더니 김일성의 혁명 시절의 사진이 몇 장 있는데, 서대숙 씨가 원래 갖고 있던 사진하고 다 다르데요. 왜냐하면 (사진의) 머리를 잘라서 여기저기 붙여 놓아가지고….
조갑제: (사진 속 다른 소녀를 가리키며) 이 아가씨는 기억이 안 나죠? 난 지금까지도 이게 좀 비슷해서….
김현희: (제 사진이) 아닙니다.
이동복: 이건 김현희 씨 사진이 아니구나.
김현희: (이 사진은) 북한이 몽타주를 붙여 제시한 사진입니다. 정 다른 얼굴이잖아요.
이동복: 그래. 이 사진하고 영 다르지.
김현희: 사실은 어떻게 됐냐면, 조금 시간이 지나 (안기부)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제가 어린 시절 북한에서 花童으로 많이 나갔고, 남한 대표단이 (1972년 평양 역포에) 왔을 때 꽃다발을 드린 적 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래서 후에 사진이 나온 것이 이 사진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북한에서 당에서 동원하는) 다른 행사도 많이 나갔지만, 그때는 남북조절위원회의 남한 손님들이 온다고 교육을 (특히) 많이 받았거든요.
다른 때는 그냥 꽃다발과 인사, 넥타이만 매어 드리고 오면 되는데, 그때는 남조선에서 온다고 하나하나 질의응답을 연습을 (당에서) 다 시켰어요. 거기 참가한 애들은 그래도 중심 중학교에 다니고 출신 성분도 다 괜찮은 애들이었죠.
저도 당시에는 (아버지가) 외교부에서 일하는 외교관이셨는데, 저한테도 지정하면서 다 가르쳐 주셨어요. 저희 집이 그때 西평양역 쪽에서 있었거든요. (지도원이 저에게) “너는 서평양역에서 일하는 선로공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모두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라는 것처럼 과시하기 위해서 (남한 손님이) “아버지가 뭐하시니?”라고 물어보면 저는 “서평양역에서 일하는 선로공입니다”(라고 답하도록 교육받았죠). 다른 애들도 다 그런 식이에요. 터빈공, 화력 발전소 터빈공. 저의 귀에도 생소했거든요. ‘터빈공이라는 게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다 가르쳐주고, 누가 물어보면 실수하지 않도록 “세상에 부러움 없이 원수님의 품속에서 부러움 없이 자랍니다”(라고 답하라고 배웠죠). 북한 국가와 당에 조그마한 위신을 떨어뜨리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일일이 다 가르쳐 줬어요.
(그때는) 다른 (행사) 때보다 어린 시절이었어요. 나이는 만 10세 정도 됐었고, 다른 행사 때보다 많이 긴장했었죠. 아침에 일어나서 (화동) 20명이 버스를 타고-저는 역포인 줄도 몰랐어요. 어리니까-평양시 근처로 가서 나무도 없는 야산 같은데 세우더니, 헬리콥터가 바람을 일면서 내리더라고요. 정신없이 순서대로 나가서도 두 줄로 섰다가, 한 줄로 선거 같기도 하고…. 저는 사실 (남측 대표단이) 물어볼까 봐 걱정이 됐거든요. 대답을 못할까 봐…. 인사를 하고 꽃을 드리고 넥타이 딱 매어 드리는 데, 그분이 바로 이동복 선생님이셨어요. 그 당시에는 몰랐죠.
이동복: 이게요. 그것만 잠깐 이야기할게요. 그때 나는 李厚洛 공동위원장의 대변인이에요.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하고 상관없이 이후락 부장 바로 옆에서 내가 항상 움직여요. 그리고 같이 간 일행은 이후락 씨, 최규하 씨, 장기영 씨, 강인덕 씨, 정홍진 씨, 나 이런데. 헬리콥터에서 내릴 때도, 내 생각에는 이후락 부장 내리는데 내가 부축하다시피 해서 내렸을 거예요. 내렸는데,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중학생이 아닐까? 국민학생인가요?
김현희: 여기서 말하면 국민학교(초등학교)죠. 4학년이었으니까요.
이동복: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데 정말 예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부드럽게, 어떻게 ‘얘(소녀 김현희)와 소위 인게이즈(engage)를 하나’ 해서 내가 뭐라고 물어봤냐면, “이 꽃이 참 예쁜데, 이 꽃 이름이 뭐지?”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 소녀가 얼굴이 확 변하더라고요. 변하더니 뒤로 탁탁 한 서너 걸음 물러서서 날 쳐다보는데, 아주 굉장히 증오심, 적대적인 시선으로 보더니 갑자기 말이에요.
‘조선 사람이 조선 꽃도 이름을 모릅네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당황하겠어요. 당황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더 했는지 모르지만, 그리곤 헤어져서 차를 탔어요. 차를 탔더니, 내 자리 옆에는 정화섭이라고 이후락 씨 사위가 앉고, 그 사람이 정보부의 1국장이었어요. 그리고 앞에 (북한측) 안내원이 탔어요. 내가 생각해보니까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안내원 어깨를 쳐서 “여보 이럴 수가 있소? 내가 아주 예쁜 소녀가 그렇게 환영하기에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이렇게 대응을 하니 참 남북 간에 큰일 났소”라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이름이나 압시다. 이 꽃의 이름이 뭐요?”라고 물어봤어요. 내가 보니 들국화였어요. 야생국화.
조갑제: (김현희 씨는) 들국화를 몰랐던 모양이죠?
이동복: 몰라서 그렇게 대꾸한 게 아니라, 당황해서….
김현희: 아니에요. 몰랐어요. 또 특히.
이동복: 안내원이 이렇게 (뒤를) 돌아보면서 “그거 뭐 조선 꽃이지요 뭐” 이러더라고요. 아주 그날 해프닝이 기억에 남게 돼서, 내가 11월에 그걸 끝내고 나서 돌아와 강연을 여러 군데 다녔어요. 강연을 다닐 때마다 김현희 양을 만나서 겪은 이야기를 여러 군데에서 여러 달 했을 거예요. 그러곤 또 (그 날의 기억을) 잊어버렸죠.
잊어버렸는데, 내가 1988년에 삼성정밀의 사장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KAL기 폭파 사건이 나고 김현희가 잡혀왔는데, 심문을 한 기사가 났어요. 자기가 “(1972년) 花童으로 나왔었고, 장기영 씨한테 꽃을 주면서 그때 장기영 씨가 ‘이 꽃이 무슨 꽃이냐’고 물어봐서 자기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는 기사가 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게 장기영 씨가 아니고 난데…’라고 생각하였지요.
장기영 씨는 그때 이미 작고해서 안 계셨어요. 내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내가 1988년에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갔어요.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가있는 동안에 1989년인가에 김현희가 가짜란 이야기가 나왔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경향신문하고 MBC에 연락해서 “그렇지 않다. 내가 사실은 김현희한테 꽃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하니 신문에 났어요. 신문에 그 내용이 나오니, 또 “이동복이도 거짓말이다”라는 이야기가 일본에서 나와서 피드백이 돼 그런 해프닝이 또 지나갔습니다.
1991년에 내가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돼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다시 안기부 식구가 돼, 김현희 양 만나게 해달라고 내가 부탁을 했죠. 그래서 김현희 양 데리고 와서 둘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물어봤죠. “김 양 장기영 씨를 아느냐?” 그랬더니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 어떻게 장기영 씨한테 꽃을 줬다고 한 거냐?”고 하니 “그게 아니고, 나는 장기영 씨를 모르기 때문에 장기영 씨라고 얘기한 게 아니고, 두 번째 내리는 분인가, 세 번째 내리는 분한테 꽃다발을 줬는데, 좀 몸이 부했다. 그런 기억을 한다”고 (조사에서)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래서 “장기영 씨인지 아닌지는 나는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김현희 양한테, “그게 나다”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 얘기를 한 사람은 나와 당신(김현희) 하고 두 사람뿐이니까 “나다”라고 하니 “아! 그렇군요”라고 하더군요.
김현희: 저는 그걸 평생 비밀로 하고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북한에서)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외국인이 관광을 와서 아파트에 갑자기 들어가자고 하잖아요? 들어가면 먹을 게 없잖아요? 그러면 감자 먹던 걸, 자기들 主食으로 먹던 걸, 내놓으면서 통역으로 “북한에서는 최고급 손님한테 드리는 겁니다”라고 하면 그걸 인민반 회의에서 잘했다고 합니다. ‘당신네는 타이어를 왜 앞에만 바꾸고 뒤에는 안 바꿉니까?’라고 어떤 기자가 물어보니까, 안내양이 아주 재치 있게 ‘당신은 넥타이를 앞에 매지 뒤에 맵니까?’(라고 한걸) 잘했다고, 인민반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연합니다. 북한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게…. 이게 재치 있게 거짓말 하라는 거죠. 그런 걸 늘 배워왔고, 교육을 받고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生花(생화)라는 게 없습니다. 생화를 키우지도 못하고, 키우는 걸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이름도 모릅니다. 이번에 이런 꽃(남측 대표단에 전한 꽃)은 특별하게 온실에서 준비한 겁니다. 전혀 꽃 이름에 대한 상식이 없다가, 모르는 질문을 받을까봐 긴장한 상태에서 나갔는데, 딱 걸린 거죠.
“이게 무슨 꽃이냐”하는 순간에 당황도 했고, 말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늘 배워온 것처럼 재치 있게 맞받아친 거죠. “조선 사람이 조선 꽃도 모릅네까?”라고…. 저도 모르게 말실수해서 지면 안 되잖아요. 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어린아이지만 ‘조선 사람이 조선 꽃도 모릅네까?’하고서는 인사하고 돌아왔거든요.
(행사가) 다 끝나고 나서 (지도원) 선생님이 물어봅니다. ‘(남측 손님이) 뭘 물어봤느냐?’, ‘어떻게 대답했느냐?’, ‘무슨 질문을 했느냐?’. 이게 어린 마음에 찝찝했거든요. (제가 이동복 선생님 질문에) 정확히 무슨 꽃인지 모르고 대답을 못했잖아요. 그래서 그건 말을 안 했어요. 그냥 숨기고 지나갔어요. 평생 저도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조용히 지나갔거든요. 저도 그 말이 기억에 남았나 봐요.
여기 한국에 와서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 다른 사진이 없었는데, 제가 (화동으로) 참가했다고 하니까 안기부에서 하기와라 씨 사진을 갖고 왔어요. 사진에서 ‘두 번째다’, ‘세 번째다’ 하는데, 딱 나타난 건 정희선이라는 애잖아요. “귀 모양은 모르지만, 내려 보고 있는 사진이 지금이랑 비슷하네”라고 수사관들이 말을 했어요. 그래서 나도 “맞는가 봐요”라고 했죠.
두 번째 섰으니까, 분명히 앞에 있는 애는 기억이 나더라고요. (행사에) 많이 참가했던 애라. 그렇게 ‘얘(가 김현희) 맞는가 보다’하고 외부로 발표했는데, 이후에 ‘김 양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어요. 그렇게 되면서 사실 더 정확한 사진이 나오게 됐죠. 이 사진이 진짜 주인을 찾게 됐죠.
이동복: 내 생각에는 그 사진이 나온 게 1989년일 거예요. 1989년에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하는데, 이 문제를 갖고 언론과 대결이 붙어서 신문에도 여러 번 나고 그랬거든요.
김현희: 한 줄로 선 사진은 후에도 가지고 왔어요. 제가 딱 보는 순간 ‘세 번째가 (내가) 맞구나’ 생각했어요. 한 줄로 선 사진은 몇 달 안 돼서 또 가지고 왔더라고요.
조갑제: 하기와라 선생님, 이 진짜 사진이 나오게 된 배경을-하기와라 선생님은 찍지도 않으셨는데- 설명해주시죠.
하기와라: (이 사진으로) 조총련의 거짓말을 막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열흘 뒤 요미우리 기자가 찾아와 “하기와라 상 당신의 사진은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보니까 (제가 사진에 김현희를 표시할 때) ‘듯하다’라고 썼었데요. 그게 기자로서 굉장히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요미우리 기자가 “진짜 김현희 사진은 이것이다”라며 (사진을 가리키며) 자신의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조갑제: 그 사진을 어디에 발표하셨습니까?
하기와라: 요미우리의 기자가 북한에 세 명 있었습니다. 카메라맨, 경제부장, 편집위원. 제가 “이 김현희 사진을 발표하자”고 하니, 이 요미우리 기자들은 “안 된다. 북한에서 자기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일 년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단 일본 공산당이 틀렸다는 것을 이야기 하자”고 계속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현희 씨도 사진 속에 잘못 짚은 사람을 자신이라고 알고(착각하고) 있고, (괜히 나섰다가 오보로 인해) 기자 생명이 끝날 수도 있으니 (나서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자”고 친절히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갑제: ‘(하기와라) 기자가 (사진 속에서 김현희 씨를 잘못 짚어) 誤報(오보)를 한 셈이니 가만히 있으면 되고, 더구나 김현희 씨도 사진 속에 인물이 자기라고 인정한 걸 왜 또 진짜를 발표하려고 하느냐?’고 주변에서 설득했다는 말씀이시지요?
하기와라: 일 년간 계속 “진실을 말하자”고 요미우리 기자들을 설득했습니다. 이것을 말하면 오보를 한 제 기자 생활은 끝날 것을 각오했습니다. 진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조갑제: 자신의 명예가 손상돼도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진의) 판권을 가진 요미우리 신문 기자를 설득하셨다는 건가요?
하기와라: 그렇습니다.
조갑제: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하기와라: 요미우리 신문 미츠이시 히데아키(三石英昭) 기자입니다. 제가 그를 설득했고, 그는 “죽어도 괜찮다”며 (사진을) 발표하라고 했습니다.
조갑제: 어느 잡지에 나왔습니까?
하기와라: 1년 후, 1989년 10월에 제가 쓴 책을 통해 처음 나왔습니다. 사진을 제공한 요미우리 기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요미우리가 제공했다’고만 밝혔습니다.
이동복: 2004년의 컬러 사진은 누가 찍은 겁니까?
하기와라: 미츠이시 기자가 찍은 겁니다. 개인적으로 제 자랑일지는 모르겠지만, 조갑제 사장과 김현희 씨가 2003년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고, 많이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金과 趙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의) 거짓말을 뒤집고, 김현희 씨를 개인적으로 구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미우리 기자에게 또 다른 사진을 요청했고, 반년에 걸쳐 뒤지다가 컬러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귀가 보이는 사진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발표하자고 했습니다.
조갑제: 그 시점이 중요합니다. MBC에서 대한항공 KAL858기 폭파 사건을 완전히 조작으로 모는 프로를 만든 것이 2003년 11월18일입니다. 그때 김현희 씨가 사는 아파트도 (방송에서) 공개하고, 김현희 씨가 코너로 몰릴 때 이야기입니다. 그때의 상황입니다. 2004년 1월4일 위클리 요미우리에 (김현희 씨가 花童으로 참석한 모습이) 이번엔 컬러사진으로 나왔습니다.
하기와라: 우리가 김현희 씨를 도우려 한 것은 2003년 말부터였습니다.
김현희: 감사합니다.
조갑제: 또 이 사진을 법의학을 전공하는 동경치과대학의 하시모토 조교수한테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김현희 씨, 자신의 입술 부근에 난 점을 가리키며)
하기와라: 지금도 있나요?
김현희: 어려서부터 조금 튀어나온 점이 있었는데, 공작원이 된 이후에 표적이 된다(식별의 근거)고 해서, 금성정치군사대학에 들어갔을 때 지도원이-거기는 수술하는 것도 없잖아요- 담뱃재를 점에 붙여놓고 뜸뜨듯이 떼버렸어요. 그래도 아직 점이 남아 있어요.
종이를 돌돌 말아서 그 안에 담뱃재를 넣고 뜸뜨듯…. 무슨 놈의 팔자가 귀 때문에, 입술 옆 점 때문에….
이동복: 현대판 耳塚(이총)이에요. 옛날 임진왜란 때 귀 무덤….
김현희: 그전에는 ‘이거 (김현희) 맞구나’ 하고 쓱 지나갔어요. 김대중 좌파 정부 때도 약간 그런 기미가 있었는데,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사진을 가리키며) 특히 이 귀를 부각한 거죠. ‘결국 귀가 다르기 때문에 김현희가 가짜고, 김현희가 가짜이기 때문에, KAL기 사건도 가짜다. 북한이 한 게 아니고, 남한이 했다’는 거죠.
(이 귀를) 부각시킨 이유가 거기에 있거든요. 여기서(남한에서) ‘김현희 아니다’고 하면 결국 김현희는 가짜고, 김현희 가짜면 (KAL기 폭파는) 남한이 한 것이거든요. (김현희가) 북한 사람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저를 가짜로 만들어, 이 사건을 뒤집으려고 이걸 2003년에 부각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MBC를 비롯한 방송사에서 틀린 사진을 갖고 계속해서 내보내면서 ‘귀가 아니다. 다르다’고 방송하고, 마지막에 진짜 사진을 5%만 내보이면서 ‘본인이(김현희가) 세 번째 섰다고 했더라’고 (방송을) 하니 제가 보기에도 ‘(김현희는) 가짜다. 거짓말한다, 부도덕하다’는 여론이 각인되거든요. MBC에서 그랬지, SBS에서 그랬지, 시민단체에서는 (잘못된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강연을, 세미나를 하곤 했습니다.
또 신동진이라는 사람이 쓴 글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테러를 당한 이 사건을 국가기관이 (나서서) 북한을 이롭게 하고, 국익을 손상시키는 나쁜 짓을 했는데도 그걸 처벌도 안하고, 아무 사과도 안하고 전혀 반성도 없습니다. 그냥 제 개인만을 달래서 쓱 덮으려는 식으로 가고 있거든요.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생각하면 대한민국이 G20 의장국도 하고 발전하지만, ‘법이 살아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기와라 씨한테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저를 증명해주신 사진을 용기를 갖고 처음으로 공개해주셨기 때문에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려웠습니다. 제가 2003년도에 가짜로 몰리고, (방송에서) 노출시켜서 집에서 쫓겨나고 조그만 애들 업고 정말 눈물겨운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아직도 해결이 안 돼서 (집으로) 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요미우리 위클리에 발표된 사진)이 발표됐을 때 ‘참 용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인사드리고 싶었거든요. 뵙고 싶었으나 어떻게 안 됐었는데, 이번에 (조갑제 기자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하기와라: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