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좌파’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강남좌파란 ‘고학력·고소득자이면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진보’란 무엇인가? ‘사물의 상황이 보다 좋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진보적인가?
 
오늘날 이 땅의 ‘진보’세력들은 한 마디로 1980년대 운동권의 사상과 정서를 계승한 자들이다. 하지만 이미 20년 전에 처참하게 파산한 사회주의체제에 미련을 두거나, ‘실패국가’로 전락한 북한의 김씨왕조체제를 한사코 비호하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북핵문제나 북한 인권에 대해 침묵하는 자들을 과연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또 하나, 오늘날 이 땅의 사상대립을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한가? ‘진보’가 ‘사물의 상황이 보다 좋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할진대, 거기에 거역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세력은 그 사실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 ‘진보’를 자처하는 사회주의, 종북주의 세력에 맞서 싸운다면서 그들을 ‘진보’라고 호칭하는 것은 그들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
 
翼-黨-派
 
이 땅의 보수세력이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거의 20년이 걸렸다. 그래서 찾아낸 말이 ‘좌파’라는 단어였다. 이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지칭하고, 소위 ‘진보세력’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하지만 ‘좌파’는 타당한 표현일까? 한자문화권에서 사상적 경향이 동일한 세력을 지칭할 때는 ‘익(翼: Wing 또는 Forces)’이라는 단위를, 동일한 사상진영에 속하면서도 정책의 차이로 별도의 정치조직을 만드는 경우에는 ‘당(黨: Party)’라는 단위를, 그러한 당 내부에서 인간적 친분관계나 당면문제에 대한 정책적 입장의 동일성 등으로 뭉친 집단을 지칭할 때 ‘파(派: Faction)’ 단위를 사용한다. 이를 무게 단위에 비유한다면, 익은 ㎏, 당은 g, 파는 ㎎에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한나라당이나 자유선진당은 우익에 속하는 정당이고,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은 좌익에 속하는 정당이다. 민주당의 경우 그 뿌리인 한국민주당은 분명한 우익정당이었지만, 김대중 이후 좌익정당으로 변질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각 정당마다 이념적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한나라당 안에서 복지 확대에 찬성하고 남북한 관계에서 햇볕정책 등에 우호적인 남경필 최고위원 같은 사람은 한나라당 내 좌파, 그에 반대하는 전여옥 의원 같은 사람은 우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진보’라고 호칭해 온 세력은 ‘좌익’으로 호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을 좌파라고 지칭하는 것은 ㎏을 써야 할 곳에 ㎎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10㎏과 10㎎이 같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잘못된 용어 사용은 재앙을 가져온다
 
양동안 전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최근 펴낸 ‘사상과 언어’(북앤피플 刊)는 이처럼 ‘한국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사상-정치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찾는 책이다.
 
사상-정치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양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인 동시에 인식과 사유의 도구이기 때문에, 언어생활에서 사용되는 용어들과 그 용어들의 의미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물인식과 사상에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상과 관련된 용어들이 사람들의 사물인식과 사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사상과 관련된 용어들은 사물인식과 사유의 핵심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어떤 국가에서 사상 관련 용어들이 부정확하고 부적절하게 사용되면 그 나라 국민의 사회인식과 사유에 혼란이 초래된다. 그러한 사회인식과 사유의 혼란이 장기간 지속되면 국가의 운명에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 국민이 사회인식과 사유를 부적절하게 하게 되면 그들의 사회적 행동이 부적절해질 수밖에 없고, 국민이 사회적 행동을 부적절하게 하게 되면 국가는 재앙을 면할 수 없다.”
 
양동안 교수는 “사상 관련 용어들이 부정확-부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 바람에 우리 사회는 이미 상당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류역사의 진행방향에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진보세력’으로 호칭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사상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민주인사’로 자처하며 중요한 공직을 차지하기도 하고,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로 국민들이 착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름의 뜻과 실제가 같도록 바로잡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고 했던 공자의 정명(正名)사상을 떠올리게 된다.
 
잘못된 사용되는 사상용어들
 
이렇게 잘못된 용어 사용이 일반화된 이유는 어디 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언어생활에 정밀성을 무시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습성, 고의적으로 사상 관련 용어들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일부 사상운동세력의 전술, 이 나라 지식인들의 태만에서 찾는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두 번째 이유, 즉 일부 사상운동세력(좌익세력)의 전술에 이 나라 언론과 지식인 사회가 말려든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식의 외침으로 가득한 책은 아니다. 각 용어의 기원, 의미의 변화와 용법 등에 관한 저자의 고찰은 학문적으로 나무랄 데 없이 엄밀하다.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 이외에도 양동안 교수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이념과 이데올로기, 사상은 같은 말인가?
- 자유주의(Liberalism)와 Neo liberalism, New liberalism은 어떻게 다른가? 미국의 리버럴은 ‘진보’세력인가?
- 노무현 시절 유행한 ‘참여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참여민주주의’와 좌익과의 연관성은?
- 1980년대 이후 운동권을 이끌어 온 NL과 PD란 무엇인가?
- ‘수정주의’란 무엇인가? 독일 사회민주당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모택동이 후르쇼프를 비난할 때 사용한 수정주의,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커밍스의 수정주의은 어떻게 다른가?
-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포퓰리즘과 한국 운동권의 민중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사상전의 소총’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이런 주제들을 양동안 교수는 쉽고 재미있게 풀이한다. 마치 식사 자리에서 소주 한 잔 곁들이면서 어떤 학문적 주제나 시사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실 양동안 교수는 실제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저평가되고 있는 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이는 1980년대 후반 그가 발표했던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논설 때문이다. 그 논설을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디서 주워들은 논설의 제목과 그 후 양 교수에게 덧씌워진 ‘극우(極右)’라는 이미지만 가지고 그를 재단해 온 것이다.
 
하지만 양교수를 만나본 사람은 알겠지만, 양 교수는 실력과 인품, 균형감각, 애국심을 갖춘 진짜 양심적인 지식인이다. 그를 ‘극우’로 낙인찍게 만든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를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가 이 논설을 쓴 후 20여 년 간 한국현대사는 정확히 그가 예언한대로 굴러왔음을 잘 알 수 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에게 총이 없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치열한 사상전(思想戰)을 치르고 있다.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애국전사들에게 양동안 교수의 ‘사상과 언어’는 꼭 필요한 ‘사상전의 소총’이 될 것이다.강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