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시초프의 진실과 양심(2)

1956년 2월25일,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에 가장 놀란 것은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 참석자, 즉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스탈린에 충성하여 수많은 동지들의 시신을 밟고 승진했던 간부들은 이제 자신들의 목을 걱정하게 되었다. 속으로 스탈린을 증오했던 이들도 공산당의 최고책임자가 신격화된 전임자를 가차 없이 공격하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소련 KGB(국가정보방첩기관) 수령이 되는 블라디밀 세미차스트니 등 참석자들은 이렇게 기억했다.

'연설이 끝났을 때 처음에는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파리가 날아가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과 기쁨이 교차했다. 흐루시초프가 어떻게 이런 연설을 이런 청중 앞에서 할 수 있는가 하는 경이로움이 퍼져갔다.'

흐루시초프의 정신적 제자인 고르바초프의 보좌역으로서 소련의 해체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알렉산드 야코브레프는 당시 소련 공산당 선전국의 하급 간부였다.

'우리는 대회장을 나오면서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부끄럼 때문이었는지,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예측하지 못한 돌발사태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는 연설중 스탈린의 숙청과 함께 2차 세계 대전 지도방식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1941년의 키에프 패전, 다음해의 하르코프 패전에 스탈린이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두 패전에는 흐루시초프가 정치위원으로 간여했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를 스탈린에 넘기는 인상도 주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야말로 비겁자였다. 그는 겁쟁이였다. 그는 전쟁중 한번도 전선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스탈린 격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스탈린의 숙청에 협조했던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 간부들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침묵했다. 흐루시초프는 소련군의 원로인 보로시로프 전 국방장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이미 늙어빠진 노인네야. 당신 눈으로 본 진실을 이 자리에서 털어놓을 용기도 없는가.'

흐루시초프 전기를 쓴 윌리엄 타우버만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흐루치초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용감한 행동이자 가장 무모한 행동이었다. 소련 체제는 그 일로 해서 영원히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고 그 또한 그러하였다.'

그의 용감성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목숨을 구했고 그의 무모함으로 인해 그는 결국 실각되었으며 소련 체제는 결국 붕괴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흐루시초프는 왜 용감하고 무모한, 영향력의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연설을 하기로 했던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 의문에 대해 타우버만 교수는 이 책을 통해서 흐루시초프의 정의감, 특히 진실을 전하려고 하는 인간 본연의 善함이 광채를 발한 순간이라는 답을 내리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 연설이 있은 지 4년이 흘러 흐루시초프는 사석에서 이런 설명을 했다고 한다.
'내가 학교에서 읽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짜르 시대에 정치범 감옥이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 멘셰비키들, 볼셰비키들이 있었는데 그들중 핀야라는 늙은 구두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20 차 전당대회에서 내가 한 일이 바로 그거야. 나는 제1서기로 뽑혔으니 내가 할 임무를 다해야 했다. 핀야처럼 말이야. 나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나는 과거에 있었던 진실을 증언할 의무를 진 것이야.'

나는 흐루시초프의 말을 믿고 싶다. 그의 생애는 스탈린에 대한 충성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양분된다. 흐루시초프 또한 스탈린에게 충성하면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이나 사형장으로 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의식, 즉 분노와 정의감을 불씨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며느리도 정치범 감옥생활을 수년간 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하고 목격했던 인간말살의 참혹상을 반드시 증언함으로써 수용소 群島를 없애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를 움직인 것은 진실과 양심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부분에서 黃長燁씨가 생각났다. 그 또한 흐루시초프처럼 소위 주체사상을 만들어 金日成 우상화에 가담했다. 그러면서도 그 또한 진실을 알리고 말겠다는 양심의 불을 꺼버리지 않았다. 1997년 탈출 이후 그가 한국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연설과 비교된다. 전제 정권의 본질과 진실을 알리는 것! 수백만의 북한주민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수치를 통해 처음으로 알린 것도 그였다. 1980년 이후의 김일성 정권은 본질상 김정일 정권이었고 이 정권 안에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오직 충성파만이 있을 뿐이란 사실을 알린 것도 그였다.

黃長燁씨의 이러한 진실 토로에 대해서, 20차 전당대회 때의 청중들처럼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남한내 친북세력이었다. 그들은 김정일 정권에 대한 진실이 확산될 때 자신들의 정체와 위선이 폭로될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그 뒤 黃長燁씨의 입을 막고 그의 증언이 믿을 수 없다고 선동하는 데 힘을 썼다.

친북좌파가 아닌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黃씨가 전한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진실을 직시하는 것은 북한정권을 악으로 규정해야 하며, 그렇게 한 뒤에는 행동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를 지기 때문이었다. 양심이 부과하는 역사적, 인간적, 도덕적 짐을 질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지금도 북한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흐루시초프처럼 黃선생은 많은 위선자들에 진실의 증언자, 그리고 양심의 가책자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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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왜 모택동은 히틀러만큼 비판받지 않나?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만든 [공산주의 黑書]란 책에 따르면 공산당은 20세기에 약1억명을 학살했다. 나치 히틀러는 유태인 약600만 명을 학살했다. 스탈린은 약2천만 명, 모택동은 약6천만 명을 학살하거나 사실상 굶겨죽였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스틀린이나 레닌, 모택동을 히틀러처럼 미워하지 않는가. 인명살상의 규모로 볼 때는 스탈린 모택동 등이 더 악독한데도. 최근 盧武鉉 대통령이 모택동을 존경한다고까지 발언한 걸 보면 공산당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는 그 피해국가에서도 상당히 너그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나치 히틀러는 2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다. 그 죄상이 패전과 함께 모조리 드러나 전범들은 재판을 거쳐 단죄되었다. 공산권의 붕괴는 패전하듯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 서서히 변화하면서 망해갔다. 분명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전범재판도 없었다. 공산당이 붕괴된 이후에 집권한 사람들도 공산당 출신들이 많아 공산당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기 힘들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의 학살을 고발하고 규탄해야 할 지식인 사회에 오랫동안 사회주의적인 영향이 강하게 침투하여 그런 자기 반성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평등, 정의, 평화 같은 좋은 말에 넘어간 것은 생활인이 아니라 백면서생 같은 철부지 지식인들이었다. 공산당이 망하고도 이들 철부지들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지는 공산당 비판을 애써 피하고 있다. 마르쿠제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좌파 학자들은 모택동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미국을 파쇼로 몰았다. 이런 자들이 한때나마 세계 지식인 사회의 스타가 되었다. 識者憂患이란 말 그대로다. 지식인이란 존재가 얼마나 세상과 역사가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인간인 김정일을 아직도 위원장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수구니 전쟁광이나 하고 비난하는 자들이 진보니 개혁이니 자칭하고 이런 자들을 대우해주는 정신병적인 한국의 상황도 세계적으로 보면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지식이 반드시 인간을 현명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지식이 변태적으로 쓰일 때는 흉기나 독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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