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한 사람은 진상을 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범죄는 무고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고, 피를 말리고 속이 뒤집히는 나날을 겪게 한 뒤 교수대로 보냄으로써 조작의 증거를 인멸하고, 그 사형수의 가족과 후손에게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놓는 일이다. 이것은 그 어떤 살인 행위보다 더 악질이다.
 
오판 또는 오판 주장 사건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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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층   출 신 |
피 고 인   |
국선 변호 |
공범 관계 |
별건 체포 |
고문 주장 |
자     백 |
자 백 과   현 |
장 의   부 합 |
이   안 됨   |
증 거 조 작 |
주     장 |
반 증 의   은 |
폐   주 장   |
증 인 협 박 |
주     장 |
혐의 체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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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하 군 살해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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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훈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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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소년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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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티스 살해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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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휘웅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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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만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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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오판, 원죄, 조작 사건을 목격 취재하면서, 나는 적어도 수사단계에서는 피의자가 무고하다는 걸 알면서도 범인으로 조작하는 경우가, 잘못된 판단에 의한 범인지목보다도 결코 적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세 소년 사건을 수사한 형사들은 물증을 조작하고, 증인을 협박하면서도 그 소년들이 진범이라고 생각했을까.
 
김근하 사건을 수사한 검사는 용의자가 사건 당일 교소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또 주범으로 수배한 인물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면서 제 발로 나타났는데도, 범인이란 확신으로 기소를 했을까. 오휘웅 씨를 수사한 형사들은 나보다도 훨씬 진상을 정확히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만 아신다”고 하지만 하느님 이전에 억울한 사정을 먼저 아는 사람들은 사건을 조작한 사람들이다.
사건을 조작한 사람들은 거의가 처벌받지 않고, 때로는 출세가도를 달린다. 그들은 법과 공권력과 조직이란 자동차를 몰고 달리기 때문에 사람을 치고 뺑소니를 쳐도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행사하는 조직의 힘이 한 개인에게 집중될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가를 나는 김근하 사건에서 똑똑히 보았다. 검찰은 김금식 피고인이 사건 당일 대구교도소에 있었다는, ‘국가가 보장하는 알리바이’까지 깼다. 그날 하루 동안 김 피고인을 불법출소시켰다고 하여 세 교도소 직원을 구속하고, 김 피고인이 그날 감방에 있는 것을 본 그 수많은 재소자들의 눈들을 감겨버렸으며, 김 피고인이 그날 바깥 세상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봤다는 수많은 증인들을 만들어내, 드디어 1심에서는 사형선고까지 받도록 집요하게 몰고 간 검찰의 추진력은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민주화가 안 된 국가에서는 개인과 조직이 대결할 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힘이다. 정치,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고문수사와 오판도 줄어들 것이다.
 
고통 받는 자의 심리를 알아야
 
판사들은 격무과 엘리트 의식,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사회 경험의 부족으로 늘 오판의 위험 속에서 일하고 있다. 전과자가 살인 부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할 경우, “그것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저런 인간은 사회에서 격리돼야 할 것이다”는 편견이 과감한 선고, 즉 위험한 선고를 가능하게 하는 면도 있다고 어느 법조인은 지적하고 있다.
 
사실의 정확한 확정에 기초하지 않고, 국가정책이나 여론, 또는 피고인의 인상이나 소질 등을 감안하여 판단을 한다면 드레퓌스 사건[注: 독일과의 전쟁(1870~1871)에서 지고 반독일 감정이 잔재하고 있던 1894년 10월, 프랑스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유대인 출신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2년만에 무죄로 판결된 사건]처럼 되고 만다. 판사들이 검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대 위에서 척 내려다보지만 말고, 낮은 데로 임하여 피고인석의 인간들을 이해하려고 애쓴다면 오판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법은 인간을 잡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법의 그런 정신을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사이다. 우리 사회의 지적 엘리트인 검사가 그 지능에 걸맞은 도덕성으로 무장하여 경찰의 무리한 수사를 견제하고, 자신의 지나친 출세․명예욕을 자제하면서 민중의 권익을 지켜주는 울타리 구실을 한다면, 오판도 줄 것이다.
 
범인이 아니란 것을 검사가 알았을 때 과감하게 잘라버리지 못하고, 계속 무리를 하여 1심에서라도 유죄선고를 받게 하려고(그러면 고가점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끼워 맞춰가다가 끝내는 피고인과 1심 재판부, 그리고 자신들의 명예까지도 손상시키고 만 김근하 살해사건의 경우는 검사들의 엘리트 의식, 출세욕, 명예욕이 소시민의 인권을 깔아뭉개고 돌진할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판․검사가 얼마나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오판의 가능성도 결정될 것이다. 지식이나 능력은 대체로 관심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경주 당구장 사건의 교훈
 
1983년 1월14일 새벽 경주시 황오동 233번지 국일당구장 내실에서 여주인 이경순 씨(그때 37세)가 複數(복수)의 강도로부터 얻어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됐다. 피해품은 백금반지와 현금 3만여 원. 같이 있었던 여종업원 김정심 양(당시 20세)은 위협만 당하고 다치지는 않았다.
 
대구지검 경주지청 김종보 검사는 한 달 뒤 영양경찰서 입암지서장 박호영 경사를 이 사건의 범인으로 구속했다. 박 씨는 2월16일자로 의원면직되었다. 박 씨는 15년 동안 경찰관 생활을 했고, 형사반장으로 일한 적도 있는 고참 수사 경찰관이었다. 검찰은 박 씨가 평소 정을 통해온 이경순 씨를 죽인 동기는, 이 씨로부터 빈 돈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있었고, 불륜의 관계를 은폐하고자 했으며, 이 씨를 시켜 동료 경찰관들을 모함하는 투서질을 한 사실을 이 씨가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여 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김 검사는 1983년 5월엔 공범 혐의로 신백현(당시 34세․운전사), 백해선 씨(당시 37세․식당업)를 추가로 구속, 기소했다. 8월29일 대구지법 경주지원 형사부(재판장 석응진, 판사 심창섭․이선우)는 박호영 피고인에게 무기징역, 신백현․박해선 피고인에게는 징역 10년씩을 선고했다. 그러나 1984년 1월20일 대구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김연호, 판사 황국정․안성희)는 세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84년 5월15일 대법원도 검찰 측의 상고를 기각, 무죄를 확정 시켰고, 세 사람은 석방됐다.
 
1986년 3월3일 부산 동부경찰서는 이미 다른 죄로 구속되어 있던 박이원(당시 30세), 김영호(당시 27세), 조남익(당시 30세)씨 등 세 사람을 당구장 여주인 살해사건의 진범으로 단정, 강도살인죄를 추가했다. 이들은 교도소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여주인 살해)에 대해서 동료 재소자들에게 털어놓았고, 그 정보가 경찰에 들어가 덜미가 잡힌 것이었다. 이들 범인은 그동안 꿈속에서 죽은 여주인이 나타나 괴로워했었는데 경찰관 앞에서 자백을 하고 나서는 “이제 시원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들을 기소할 직접 증거가 없어 당혹스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범인들은 당구장 내부 약도를 정확히, 그리고 1심 법정에서도 순순히 범행을 시인하여 6월말의 1심 공판에서도 유죄가 선고됐다. 이로써 박호영 씨 등 세 사람은 객관적으로 무고함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나는 숱한 오판․조작 사건을 취재해보았지만 이 사건처럼 철저하게 날조된 사례를, 김근하 사건을 빼고는 일찍이 본 것이 없다.
세 무고한 피의자들이 수사과정에서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상세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겠다. 고참 형사반장 출신인 박호영 씨가 1983년 5월11일에 실시된 현장검증에서 자기가 하지도 않은 범행준비 행동을 연기했다는 것이 수사상황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준다(박호영 씨는 범행 준비 행동을 연기해 보이다가 신백현 씨가 김종보 검사를 향해 “이 새끼들아!”라고 소리치자, 그 뒤로는 검증 참여를 거부했다고 검증조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 조작수사에서도 앞에서 설명한 오판․조작 사건의 조건들이 거의 그대로 발견되고 있다. 범행현장의 유일한 증인인 김정심 양은 경찰, 검찰, 법정에서 모두 24회의 진술을 했다. 박호영 씨는 김 양이 너무 고문을 많이 당해 고문 공포증에 걸렸고, 김 양이 검사의 주문대로 허위진술을 해주어도 공소 유지에 필요한 증거가 달리 발견되지 않자, 박해선․신백현 씨를 공범으로 조작하여 구속했다고 주장했다(항소이유서). 박호영 씨는 또 검찰이 수많은 증인들을 위협하여 위증이나 과장된 증언을 하게 됐고, 법정에서 증언하기 전에 허위 진술을 반복 훈련시켰으며, 그것도 모자라 검찰청 직원들을 법정이나 증인 대기장소에 배치하여 위압감을 주었다고 했다.
 
2심 판결문도 김정심 양이 검찰에 연행되어 구속영장 없이 2, 3일간씩 계속 조사를 받았고, 조사 도중 도망을 갔다가 다시 잡혀온 사실을 인정했으니, 검찰의 위법 수사가 입증된 셈이다. 박해선 씨는 1983년 4월23일에 검찰에 연행되어, 10여 일간이나 구속영장 없이 불법 감금된 상황에서 검찰청 직원 6명이 교대로 주야에 걸쳐서 갖은 고문을 가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냈다고 했다(항소이유서). 박해선 씨가 구속된 것은 5월3일이고, 죄명은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식품위생법 위반이었다. 즉, 구속수사기간을 벌기 위해 별건구속을 한 것이고, 5월3일 이전의 검찰 수사는 불법감금이란 얘기다. 2심 재판부는 이 점도 인정했다. 신백현 씨는 취조실에 처음 끌려갔을 때 옆방에서 박해선 씨의 비명이 터져 나오자, 달아나 어느 변호사 사무실로 피신, 도와달라고 애걸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뒤에 말했다.
 
범인 수에 대한 김양의 진술을 보면, 박호영 씨가 붙들리기 전에는 ‘20대 남자 2명’, 박호영 씨가 구속된 뒤에는 ‘박호영 한 사람’, 신백현 씨가 구속된 뒤에는 ‘박호영과 신백현’, 박해선 씨가 구속된 뒤에는 ‘박호영, 신백현, 박해선 3명’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2심 판결문은 “이런 진술로 미루어 추리에 의하여 설명되는 사실관계나, 객관적 사정에 맞추어야 하는 필요에 따라 범인의 수가 수정되어왔고, 범행시간 및 그 범행의 내용이 구체화 명료화되어 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어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완곡하게 지적했지만,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김 양은 강압에 의해 검사의 주문대로 진술을 한 것이란 얘기다.
 
검찰은 또 세 피고인들이 분명히 알리바이가 성립되는데도 관계 증인들로 하여금 성립이 안 되는 방향으로 허위진술을 하게 만들어 꽁꽁 묶어버렸다. 박호영 씨는 사건 당시 현장과는 10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영양경찰서 입암파출소에 있었다. 검사는 그런 박호영 씨를 박해선 씨가 경주까지 자기 차에 태워 데리고 와 범행을 한 뒤 다시 입암파출소로 태워 보냈다고 사실을 조작했다. 박해선 씨는 고문에 못 이겨, 처음에는 중고트럭으로 태워주었다고 했다가 두 번째 진술에선 자기 승용차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승용차를 사건 당시엔 그의 친구가 빌려쓰고 있었음이 너무나 명백하게 입증되자, 박해선 씨는 “출처와 번호를 모르는 곤색 포니 승용차를 사용했다”고 진술을 바꾸었다. 범행에 사용한 자동차가 정체불명이라니? 이런 상황에서도 유죄선고를 한 1심 재판부의 세 판사는 김종보 검사와 함께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2심 판결문은 박호영 씨가 사건 당일 경주에 있었다고 증언한 이 모 씨의 진술은 “일관성과 정확성이라고는 전혀 없고 그저 신문 내용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는 정도이다”고 혹평을 했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보아도 무죄를 찾아낼 수 있는 이 사건에서 어찌하여 세 판사는 유죄를 선고했을까. 아마도 이것이 이 조작․오판 사건의 가장 큰 미스터리일 것이다. 흔히 1심에선 판사들이 검사의 눈치를 본다고 하지만, 인간의 생명이 걸린 이런 사건에서도 그러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법에는 밝고 세상 물정에는 어둡기 때문에 오판을 했을까?
 
박호영 씨는 항소이유서에서 “나의 편지와 피살자의 일기를 오해하고, 이 사건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데 장애가 되는 예외적이고 불합리한 사실들을, 내가 수사에 경험이 많은 만큼 완전 범죄를 시도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곡해했다”고 정확히 지적했다.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증거는 모두 형사반장 출신인 박 씨가 완전범죄를 꾀하여 교묘하게 꾸며놓은 것들이라고 생각하여, 마치 소설에 나오는 명탐정처럼 그 증거들을 뒤집는 데 혼신의 힘을 다 쓰다가 그 자신이 모든 진실을 묵살하고 허위를 창작하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김 검사는 1954년생으로서 한양대학을 졸업한 뒤 지난 1977년에 사법시험에 합격, 1979년에 검사가 됐다. 그러니 이 수사를 했을 땐 검사경력 4년의 29세 청년이었다.
 
그는 머리만 좋고, 수사 경험은 적고, 사회 경험도 얕은 젊은 검사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에 빠진 셈이다. 특출한 지능의 소유자가 보통 지능의 소유자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삶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머릿속에서 끼워 맞출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이 사건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가장 큰 희극은 이 사건이 검사 인지수사의 성공사례로 발표되었고, 김 검사가 서울지검으로 영전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세 피고인과 수많은 증인들을 불행하게 만든(박호영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졌고 생활력을 잃었으며 다른 두 명도 몸을 크게 다쳤고 신백현 씨의 장모는 그 충격으로 일찍 죽었다고 함) 김 검사가 아무런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아직도 검사 일을 계속 보고 있다는 점에서 법·제도·조직의 무책임성과 그 힘을 새삼 절감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