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표는 주한미국대사인가?

주민투표, 신공항, 과학벨트, 개헌 등 현안에 대해 남의 일 보듯 말해,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느낌, 온기가 안 느껴져

“내일이 투표일이니 서울 시민이 그것을 판단하지 않겠느냐?”

 

무상급식 서울시 주민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8월23일, 기자가 주민투표에 대한 입장을 묻자 박근혜 전 대표가 대답한 말이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 본회의 참석에 앞서 기자들로부터 주민투표에 대한 입장을 요구받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지방자치단체마다 사정이 다르니 거기에 맞춰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이같이 말했다.

 

기가 막힌 얘기다. 주민투표가 왜 서울시민만의 문제이고, 해당 지자체만의 문제인가? 복지의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 하는 나라의 명운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는 일찍부터 복지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립형-자활형 복지를 모색해 온 박근혜 대표 자신의 정책방향과도 관계가 있는 문제였다.

 

8월23일이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가슴 졸이며 주민투표 성공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을 때,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의 한 마디면 투표율이 몇 퍼센트는 더 올라가지 않을까 싶어 그의 옥음(玉音)을 고대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대답은 냉정하기만 했다. 오불관언(吾不關焉),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하는 태도였다.

 

남의 일 말하듯 하는 말투가 문제

 

박근혜 전 대표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내용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그 말하는 방식이다.

그의 발언에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어떤 문제를 나 자신의 일, 우리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늘 ‘그건 내 일이 아니다’라는 느낌을 준다.

 

동남권 신공항, 과학벨트, 개헌 문제 등이 한창 논란이 되던 지난 2월에도 마찬가지였다. 2월17일 그는 ‘으뜸언어상’인가 하는 상의 시상식 자리에서 이런 현안들에 대해 “많은 분들이 과학 비즈니스벨트, 동남권 신공항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제가 답할 사안이 아니라 가만히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동남권신공항에 대해서는 정부의 백지화 발표가 나온 후인 3월31일 재추진 의사를 밝히기는 했다)

 

그게 왜 박근혜 전 대표가 답할 사안이 아닌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0순위에 오르는 거물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답해야 할 사안 아닌가?

 

박 전 대표는 과학비즈니스벨트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약속하신 것인데 원점에서 검토하겠다고 하면 그에 대한 책임도 대통령이 당연히 지지 않겠느냐?”고 했고, 동남권 신공항에 대해서도 “대선공약으로 약속했다. 정부에서 조만간 이에 대한 발표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이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한 데 대해 “한나라당이 집권 여당인데 갈등·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처리해야 하지 않나. 이 이야기는 제가 아니라 당 지도부가 먼저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개헌 문제에 대해서도 “당 지도부에서 논의할 일”이라고 잘랐다.

 

거듭 말하거니와, 박근혜 전 대표는 차기 대권주자 0순위의 정치인이다. 국민들은 그런 정치인이 국가의 각종 현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권리가 있다. 그리고 정치인은 자신이 각종 현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말할 의무가 있다.

 

선거 때도 남의 일 보듯

 

각종 선거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 전 대표는 선거 때 한나라당이나 후보들이 그의 도움을 애타게 요청할 때마다 이를 냉정하게 외면했다.

 

지난 4-27 분당을 보궐선거 당시 박 전 대표는 이에 대한 질문을 받고 “선거에 개입 안 한다”고 밝혔다.

 

작년 6-2지방선거를 앞두고서도 “당에서 계속 지방선거 지원을 요청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 전 대표는 “선거는 당 지도부 위주로 치르는 게 맞다고 본다”며, 지원을 거절했다.

 

형식논리상으로 박근혜 전 대표는 ‘평당원’이다. 하지만 지금 박 전 대표가 ‘당 지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국민 가운데도 없고, 한나라당 당원 가운데도 없다.

 

하지만, 선거와 관련해서 박근혜 전 대표가 보인 태도는 “선거는 내 일이 아니다”하는 것이었다.

 

천안함 사태 때도....

 

국가안보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천안함 사태 후, 박근혜 대표는 “무엇보다 가장 급한 게 인명구조 아니겠느냐. 지금도 희망을 갖고 구조작업 중인 만큼 거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서 “정부와 군에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한 점 의혹 없이 그리고 가감 없이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북한의 소행임을 능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발언 어디에서도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분노와 경고는 없다.

 

여기서도 박근혜 전 대표는 천안함 폭침을 우리 자신의 안보위기가 아니라 남의 일 보듯 말하고 있다.

 

나는 박근혜 전 대표의 이런 어법(語法)이 참 싫다. 아니, 밉기까지 하다. 이제는 화가 난다. 박 전 대표가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처럼 화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발언에 온기가 없는 것은 너무 화가 난다. 나라의 장래와 관련된 현안들에 대해 매사 남의 일 보듯 하는 게 화가 난다.

 

박 전 대표는 외교관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다. 군인다운 단호하고 훈시하는 듯한 말투는 외견상으로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이 나라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었다. 국민과 더불어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조국의 장래를 고민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은 진정 ‘나의 조국’이었다. ‘우리나라’였다.

 

박근혜 전 대표의 말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자신을 현안과 거리를 둔 제3자, 관찰자로 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만 든다.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알맞은 직업이 있다. 외교관이다. 남의 나라에 대사로 나가서, 지금 그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냉철하게 관찰해서 본국에 보고하면 되는 게 외교관이다.

그가 주한미국대사라면 “주민투표는 한국인들의 일이니, 한국인들이 그것을 판단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해도 된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는 주한미국대사가 아니다. 대한민국 집권여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라면, 그것도 다음번 대통령이 되려는 정치인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대해서건, 동남권신공항에 대해서건, 과학벨트에 관해서건, 천안함에 대해서건, 바로 나 자신의 일로 여기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한다. 그게 대통령이 되려는 정치인의 의무고, ‘박정희의 딸’이 가져야 할 태도다.

 

'딴나라공주' 소리 들을라

 

박근혜 전 대표가 전면 무상급식에 찬성한다고 말해도 좋다. 동남권신공항을 지어야 한다고 말해도 좋다. 과학벨트를 충청도에 줘야 한다고 말해도 좋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그 모든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의 ‘남의 일 말하듯 하는’ 어법이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이다.

박 전 대표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꼭 딴 나라 정치인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와 같이 대한민국에 살고, 대한민국의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한나라당은 이미 민주당이나 좌익으로뿐 아니라 자신의 전통적인 지지세력으로부터도  '딴나라당'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이러다가는 박근혜 전 대표마저 '딴나라공주'라는 비난을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

 

 박근혜 전 대표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 그가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 ‘남의 일 보듯’ 말할 때마다,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나간다는 사실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지극히 존경하는 사람으로써, 그리고 내년 대선에서 좌익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 박근혜 전 대표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써 고언(苦言)한다.

진정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제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라고, 내 가슴을 뜨겁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내년 당내 경선과 대선에서 박 전 대표의 승리는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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