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은 왜 사임하지 않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왜 사임하지 않을까

최성재/토론방



--대통령 못해 먹겠다.
--눈앞이 캄캄하다. 국민의 신임을 받지 못하면 물러나겠다.
--민주당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의 10분의 1을 넘기면 사임하겠다.

단 한 마디 거짓말한 것이 탄로 나는 바람에 의회가 탄핵안 표결을 서두르자, 미국 대통령 닉슨은 꼭 가결되리라는 보장도 없었지만 미련 없이 스스로 물러났다.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킨 셈이다.

한국 대통령 노무현은 재적의원 271에서 193대 2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국회가, 2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표로 당선된 대통령과는 달리 3분의 2를 훌쩍 넘는 국민의 신성한 표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거의 한 마음 한 뜻으로 탄핵안을 가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싫다던 자리를 끝내 내놓지 않았다. 2개월 동안 청와대에서 독서도 하고 발명도 하면서 푹 쉬다가, 당신이 입당도 않고 단지 지지할 따름인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득표율은 2분의 1에 훨씬 못 미쳤으나 의석은 2분의 1을 절묘하게 넘기자,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탄핵은 물 건너간 것으로 보고 대통령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여당에 국무위원 제청권을 주겠다.
--김혁규를 국무총리로 기용하겠다. 상생의 정치를 얘기하지만, 한나라당이 3번이나 경남지사로 공천하지 않았느냐.

2004년 5월 14일 아니나 다를까, 헌재는 아리송한 결정문으로 국회의 탄핵안을 인용(認容)하는 척 기각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모기장처럼 엷게 드리워졌던 발을 걷어내고 만년필을 꺼내어 부지런히 사인하기 시작했다.

과연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은 무엇일까?
대통령직을 걸었던 말들이 액면 그대로의 뜻이었을까. 오묘한 수사법이었을까.
헌재가 결정문에서 헌법을 수호하고 법률을 준수하라고 경고할 줄 미리 알고 헌법과 법률에 충실하기 위해서 온갖 굴욕을 참고 헌재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을까.

직설법이든 완곡법이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불리한 말이라도 법률 이전에 도덕의 거울에 비추어 조금의 흠이라도 보이면, 스스로의 말에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 가정의 가장도 선심 써서 한 말이거나 홧김에 한 말이라도 그것이 자녀에게 책임질 말이라면, 아무리 불리해도 그 말의 액면 그대로의 뜻을 따른다. 오묘한 수사법이라고 발뺌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 그대로 측근의 각종 비리가 홍수 안 든 해에 강가의 기름진 개펄에서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탐스러운 땅콩이 주렁주렁 달려 나오듯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큰 돈 작은 돈, 대선 전 대선 후를 가리지 않았다. 도저히 낯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일이 있고도 대통령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을까.
'10분의 1'이란 수비를 도외시한 살벌한 공격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분명 과장법이자 감정자극법이지만, 어떤 식으로 계산해도 10분의 1은 넘겼다. 범죄 책임이 1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해도, 거짓말 한 마디 들통난 것 때문에 권력보다 명예를 택한 1970년대의 미국 대통령과 비교해 보면, 그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나 여야 국회의원들의 거짓말은 1마디가 아니라 100마디도 더 들통난 게 있었을 테지만, 물귀신 작전은 생각도 않고 하늘 아래 제일 큰 권력을 과감히 내던졌던 닉슨과 비교해 보면, 이것 역시 이해가 잘 안 된다.

검찰과 국정원과 방송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른바 당선 축하금은 회장이 구속된 SK 것 외에는 전혀 안 밝혀진 것을 생각해 보면, 10분의 1이 아니라 10분의 11도 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여튼 그것은 의혹 수준에 지나지 않으니까, 더 이상 거론할 수 없지만, 헌법과 법률을 가장 잘 지켜야 하는 대통령의 말로서는 너무 무책임하다. 10억 원 훔친 은행 강도는 큰 죄인이지만, 1억 원 훔친 '좀도둑'은 죄인도 아니라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0명 죽인 자는 극형에 처해야 하지만, 1명 죽인 자는 훈방하고 무죄 방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살인죄는 중죄로 엄히 다루지만, 전치 52주의 중상을 입힌 죄는 유감 표시 한 마디 하면 빽이 든든하다고 해서 경범죄로 봐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전대통령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지만, 성격은 판이하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이성적이다. 논리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어떤 일도 나중에 치밀한 논리로 얽어맨다. 어린애 눈에도 빤히 들여다보이는 궤변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논리랍시고 태연히 말할 정도다.
--약속을 못 지킨 적은 있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와 정반대다. 감정적이다. 비논리적이다. 임기응변에 능하다. 지나고 나면 '땡'이다. 그 순간의 위기를 넘기며 도리어 역공을 가하거나 생각 밖으로 분위기가 좋으면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과장법이든 불법이든 비논리적 발상이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사람들의 응어리진 감정에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옜다, 받아라! 내 명패를 네 빛나는 이마빡으로 어디 한 번 받아 봐라!

헌재의 결정문이 실은 완곡한 사임 권유라고 볼 수 있다. 덜컥 탄핵해 버리면, 여당이 과반수를 차지한데다 정부 여당이 방송과 인터넷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가 혼란의 극에 달할 것이 두려워 여러 죄를 인정하되, 그 정도가 약하다는 말로 중죄를 선고 않고 선고를 유예하니까, 스스로 알아서 조용히 물러나 장수천을 흑자기업으로 만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노무현 대통령이 아무리 재치 있고 순수하다고 해도 대통령이라는 무거운 자리를 감안하면,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대통령의 자리를 한사코 지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 자리가 그리도 좋을까. 경상도 사나이 노무현은 배알도 없는가.

혹시 이렇지는 않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의구심을 갖게 되는 까닭은 이렇다.

첫째, 그는 얼떨결에 대통령이 되었다. '얼떨결에'라는 말이 좀 심한 표현이 되겠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과 힘과 노력으로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든 민간인 출신이든 스스로의 계획과 결단과 힘과 노력으로 대통령이 되었었다. 물태우라는 노태우 전대통령도 12·12의 주역이었고, 감독은 전두환 전대통령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하여튼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한 6·29선언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선거전에 임해서도 기가 막힌 선거전략으로 양김을 닭 쫓던 개 신세로 만들고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전두환당을 해체하고 공개적으로 의표를 찌르는 노태우당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만은 예외이다. 역대 모든 대통령을 흉내내어 새 당을 창당하여 총선에서도 승리하는 쾌거를 일궈냈지만, 창당설을 극구 부인하다가 당원도 아니면서 외곽에서 지원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2개월간 대통령 직위를 내놓아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노무현당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말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읽고서 햇볕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그는 일약 대선 후보로 낙점되었다. 김대중 전대통령과 동향인 목포 출신의 수재 천정배 의원이 김심(金心)을 꿰뚫어보고 싹이 노랗던 노무현 대선 주자를 적극 밀었다. 그가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셈이다. (천정배 의원이 DJ의 실질적인 후계자이고 노빠는 잠정적인 인물인지도 모른다.) 노무현 후보는 호남과 수도권에서 좌표를 잃고 헤매던 영원한 DJ 팬들의 표를 고스란히 가져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용도폐기된 김종필 대신 행정수도란 당근으로 충청표를 모으고 고향인 경남에서 약간의 동정표를 더하여 누가 봐도 승산이 없던 대선에서 승리했다. 스스로 얻은 표는 거의 없다. 신세대들의 표로 당선되었다는 것은 DJ 표를 가져갔다는 것을 분식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노사모와 386이다. 이들이 기획과 연출과 광고를 맡았다. 그러나 이들도 표를 모으는 힘은 거의 없었다. 바람잡이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다만 이들은 논공행상에 적극 참여하여 양김 시대를 종식시키고 권력의 중추에 들어섰다. 그 결과 DJ의 수족이 대부분 잘려 나갔다. 진보를 가장한 좌익이 DJ 정권에서 교두보를 확보한 데 이어 마침내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이들이 만든 당이 바로 열린우리당이다. 이들은 빛나는 기획과 연출과 광고로 2004년의 총선에서도 승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들의 생산 능력은 신통찮았다. 여전히 DJ의 초거대 독점 공장에서 90% 이상의 표가 생산되었다. 이들은 고작 1년 전에 설립한 '행정수도'란 유령회사에서 날짜 없는 어음을 끊어 극히 일부 지역에서 약간의 표를 납품 받았을 따름이다. DJ는 90% 이상의 지분을 갖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선 대재벌의 실소유자인 셈이다. 따라서 여야를 막론하고 그를 직접 비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민주당이 몰락하면서 DJ는 오히려 부정부패에 대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새털같이 가벼워진 몸으로 유럽으로 날아가서 미국을 향해서 당당히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노사모와 386이 기세등등하지만, DJ의 손바닥 위에서 논다. 무엇보다 그들은 표밭이 없고 그 사상과 정책이 정치든 경제든 외교든 복지든 남북문제든 DJ의 머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북한 공히 유훈 정치를 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기반은 대단히 취약하다. 운신의 폭이 극히 좁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한 것은 386과 DJ에 대한 불만의 토로일 수도 있다. 국민을 향해 SOS를 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낳게 하는 것은 근거는 또 있다.

--말을 적게 하게 하겠다.
--여당에 국무위원 제청권을 주겠다.

이건 실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실질적인 권력 집단이 서서히 전면에 나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겉보기에는 대화와 조화를 위한 정치 같지만, 대통령을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여당에게 국무위원 인사권을 주겠다는 말은 헌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이 태연하게 나오고, 정동영과 김근태의 입각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 둘이 실세인지 여부도 대단히 불확실하다. 그들의 엉성한 386과 DJ 팬 장악 능력을 볼 때, 나는 이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천정배와 한나라당의 원희룡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서울대 수석과 전국 수석이라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차근차근 스스로의 힘으로 크고 있다. 어쩌면 이들보다 훨씬 강력한 사람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집단지도 체제라고 본다. 왕년의 DJ나 YS 같은 카리스마가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도 개인의 소신을 펼 수가 없기 때문이다.

DJ와 386은 대북 정책이 거의 일치한다. 이 점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다.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과 2000년의 6·15 공동선언에 입각하여 평화·자주·민족의 깃발을 내걸고 이에 맞춰 일방적인 '퍼주기' 親北, 교묘한 '신경 긁기' 反美, 노골적인 '추파 던지기' 親中, 애매모호한 '비웃기' 反日 등으로 의도적으로 고립과 '새판'을 유도함으로써 연방제 통일의 고속도로를 닦고 민족자주 통일의 철로를 이으려는 원대한 계획도 한 치도 어김없이 추진될 것이다. DJ의 낙점과 386의 옹립에 결정적 계기가 바로 햇볕정책의 계승인 만큼 그의 평화번영정책은 일점일획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국기를 흔든 대북송금 관련자도 5월 26일 초파일을 맞아 항소심에 계류중인 박지원 외에는 전원 사면복권되었다.

개혁과 진보의 붉은 깃발을 한층 선명하게 내건, 여당보다 더 여당다운 야당인 민노당이 음으로 양으로 돕고, 개혁과 진보와 평화통일이라면 2분의 1이 적극 동조하는, 여당 같은 야당인 한나라당도 대북 정책에 관한 한 기꺼이 상생의 정치를 약속한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2기를 끌어가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다고 느낄 것 같다. 게다가 10신문사 부럽지 않은 1방송이 천군만마 역할을 하니, 두루 믿고 맡기고 말을 적게 하면서 시골 아저씨 같이 푸근한 표정을 지으며 청와대의 사랑방과 잔디밭을 지키고 가꾸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게 실세들이 권유할지 모른다. 진짜 주인공이 나타날 때까지.
(200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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