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長 春(전 외무부대사․ 자유평론가)
1. 나는 1940년 경남 마산市에서 적빈의 나라(country) 朝鮮의 한 소시민(the petit bourgeoisie)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 해는 제2차世界大戰이 발발한 지 근 1년이 지났을 때였고 帝國일본이 망하기 5년 前이었다.
2. 나는 72세를 내다보는 노생으로 지난 세월을 별로 후회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나는 1958년 서울로 가서 1962년 대학을 졸업한 후 줄곧 근 38년 동안 큰 곤경과 풍파 없이 대체로 무난히 국가(state)에 ‘奉仕’했다. 나는 개인적 권력과 致富는 언감생심이로되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of 1469-1527)의 말로는 “국가에 ‘奉仕’하는 일 가운데 가장 명예로운 것 중의 하나인 외교”에 종사하는 직업외교관(professional diplomat or foreign ‘service’ officer)을 오랫동안 지냈다.
3. 나는 거창한 회고록을 쓸 위인이 못 된다. 나에게 외교의 끝장인 선전포고(declaring war)나 그 시작인 강화(making peace)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회고록에 담을 진진한 얘깃거리가 혹시 나에게 있을만하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 다만, 내 출신이 출신인 만큼 내 시대의 한 조그마한 증인으로서 내 同時代人과 後世에게 참고가 되거나 疑訝心을 풀어주는 잡담을 내가 남길 만은 하다. 나는 이 글을 그런 잡담의 일부로 여겨 쓴다.
4. 나는 - 2000년 이른 봄 국가(state)에서 사회(society)로 복귀한 이후 지난 12여 년 동안 신문사 등에 기고한 글 중에서 - ‘나’라는 일인칭 어법을 사용한 적이 없고 내 신상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 年老해지며 내 自我의 實在 그대로를 깊이 깨달아가는 사이에 ‘나’의 일부를 고백하는 것인 만큼 - 이 글의 제목에 관련하여 '내가 누구(my character and persona)'인지 즉 내 思考와 行態의 ‘正體‘를 짧게나마 일인칭으로 먼저 밝힌다. 나는 그리하여 조명된 나의 ’正體‘를 가지고 “왜 나는 BBK명함을 깠나?”의 이유가 한마디로 ‘나의 國家安保觀과 民主主義觀’ 때문이었다고 해명한다.
5. 나는 어릴 적에 수줍고 과묵한 내성적 아이였다.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나는 내 同時代人의 다수처럼 불교적으로/유교적으로 길들여졌다.
6. 나는 유달리 空手來空手去의 無慾과 自制/禁忌의 佛法에 따라 쉽게 孤寂의 경지에 끌려들곤 했다. 나는 대학 초입 때 - 그 열악하던 한국의 교통편을 무릅쓰고 - 1958년 단 둘이 충남 東鶴寺를 또한 1959년 혼자 海印寺를 찾았고 1960년 마산玩月洞의 절간에서 두 달을 보냈다. 내가 70세를 넘긴 최근에 혼자 영주 浮石寺와 강원도 古汗 등을 찾는 것은 내 佛敎的 성향과 무관치 않다. 나는 ‘평생에 단 한 번 만난다[一期一會]’고 기회를 중시하는 불교적 死生觀에 감복한다. 내 나이 서른이 지나 알기 시작했지만 고독을 견디고 孤高를 누릴 수 있는 내 氣質은 직업외교관의 생존을 위한 속성과 그리 멀지 않다. ‘運命은 타고난다’는 그 말의 절반은 안 틀린 것 같다.
7. 나는 유달리 義理 즉 正義와 正直과 道理를 받들어야 하고 不義와 欺罔과 頹廢를 배척하는 性理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끈질기게 받았다. 나는 1960년 自由黨정권을 무너뜨린 도화선인 3.15마산義擧를 주동했고 4.19학생혁명의 선봉으로 나섰다. 군중의 분노가 電光石火로 폭발한 3.15는 그 당시 내 고향 馬山의 낭만적 血氣의 特産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4.19는 전국적 규모로 대학/고등학교 학생들이 물불을 안 가리고 權力의 횡포에 항거한 ‘조직적’ 투쟁이었다. 나는 서울대 文理大가 선언문과 격문을 걸고 올린 깃발의 조직책으로서 不義와 싸우기 위해 死線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8. 나는 ’스스로를 修養해야 사람과 나라를 다스린다[修己治人/修身齊家 治國平天下]‘고 설파하는 儒敎철학을 신봉한다. 나는 거짓말과 放縱에 철퇴를 놓고 東亞에 뜬 ‘네 마리 龍( the Four Dragons of East Asia)의 ’고향‘이 漢字문화권의 儒敎라고 확신하는 싱가포르의 이광요(李光耀)를 존경한다. 왜? 한국이 경제국가로 大成할 수 있었던 根本的 원인은 漢字로 구성되는 그 思惟語 韓語로 배운 유교의 도덕적 倫理的 기초 위에서 현대식 경제를 축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그의 고견에 내가 동의하는 까닭이다.
9. 나는 思春期 말을 향해 삶과 죽음을 심각하게 여겨 한때는 천주교와 개신교 예배당의 설교를 듣곤 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神(God)을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이후의 나는 神의 존재를 절대로 부인하진 않지만 不可知論者(agnostic)로 남아 있다. 물론 나는 한국적 鬼神을 믿지 않는다.
10. 나는 셰익스피어의(Hamlet)/괴테((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바이론(Cain)/롱펠로우(A Psalm of Life)/톨스토이(War and Peace) 등에 매료되었고 모차르트/베에토벤/슈베르트/멘델스존/쇼팽/슈만/브람스/차이코브스키를 구식 축음기로 들으며 클라씨칼 음악을 즐겼다. 그런 나는 浪漫的 소년으로 자랐고 1958년 馬山高等學校 졸업기념 校誌에 남긴 한마디는 “썩어 100年 살아 무엇 하리!”이었다.
11. 나는 낭만적 詩人/멋쟁이 영감 李殷相(1903-1982)이 그가 태어난 고향을 “가고파 - 내 고향 남쪽 바다”로 그리워한 그 ‘마산의 浪漫’을 버리지 못한다. 독일의 철인 헤겔(Friedrich Hegel of 1770-1831)의 말로 '개인은 그 시대의 아들(das Individuum als ein Sohn seiner Zeit)'인 것을 아예 부정하지는 못한다. 나는 내 타고난 DNA에 운명적으로 결부된 나의 시대적 배경의 ‘囚人’이었다. 그런 나는 내가 근 6년을 체험하며 익힌 獨逸문화권의 ‘浪漫的 저항과 告發’의 피가 내 몸속에 도도히 흐르는 것을 가끔 意識한다.
12. 나는 한국 ‘최대/최고의 ‘史文哲’[역사/문학/철학] 市場‘ 서울대 文理大에서 심한 번뇌와 갈등을 앓았다. 거기서 가장 인기 높은 ’상품‘은 낭만주의였고 거기에선 유토피아를 향한 社會主義 바람이 거셌다. 나는 그런 ‘市場‘에서 무엇을 ‘구입’[택]할 것인가? 어디서 구입資金[직업]을 마련할 것인가? 어떻게 내 인생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나는 ‘現實(reality)'에 봉착했다. 결국 4.19를 넘긴 후의 나에게 轉機가 왔다. 미국의 $3000萬 상당 PL480 농산물 對韓원조 결정이 나면 신문이 ‘호외’를 발행하고 수출할 엄두를 못 내며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내 나라 그 한국에서 우선 안 굶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 때 그 시절엔 요새의 시쳇말로 ‘이구백‘의 투정이 통할 여지가 없었다.
13. 나는 現實[목적과 도그마] 對 理想[낭만과 유토피아와] 간의 교차로에서 갈 길을 선택해야 했다. 나에게 1961년 12월 고등고시[행정3부 외교]에 합격하는 행운이 왔다. 그 때문에 나는 4.19혁명 후 ‘민족통일 운동’에 가담한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나는 1962년 봄 대학졸업과 동시에 空軍장교로 입대하여 4년 4개월의 복무를 끝낸 직후 바로 외무부에 취직되었다. 나는 그 후로 중단 없이 현실로~현실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國祿을 먹으며 복역한 38년은 사실상 철창 없는 ‘감옥‘이었다. 待遇는 썩 좋았고 不平할 게 거의 없었으나 千金을 노리며 欲情을 채울 수 없는 그런 ’감옥‘ 말이다. 上命下服의 기율과 制約에 매인 나는 나에게 잠재하는 낭만적 正體를 감추거나 억제하며 ’現實’에 적응해야 했다.
14. 나는 내 나이 40이 될 때까지 근 20년을 국제법과 외교[국제정치]를 공부하고 거기에 관련된 실무에 종사하면서 - 외무부 조약과事務官/조약과장/국제기구條約局長 등을 역임하고 조약법과 해양법 등을 위해 ‘값비싼’ 國際회의에 참가하면서 - 한 우물을 팠다.
그 사이에 내가 경험한 ‘現實’은 - 나에게 잠재하는 ‘浪漫의 영혼[내 정신의 본원]’과 肝과 쓸개를 홀랑 빼앗을 만큼 - 나에게 가혹하지 않았다. 나는 俗世의 큰 성공을 위해 흔히 거짓말해야 하거나 비굴해야 하는 일에 물들지 않고 그런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 때문에 세상에 대한 나의 認識에 일관의 ‘안정과 平穩’이 유지 될 수 있었다.
다만, 그때까지 내가 구경하던 세상의 무대와는 아주 딴판인 두 개의 ‘舞臺(무대)’가 -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기존 認識을 가차 없이 보강하는 기회와 文明社會에 대한 나의 기존 認識을 다양화하는 기회가 - 나에게 두 차례 제공된 것은 참 다행이었다.
그 하나의 ‘舞臺‘는 내가 武裝헬리콥터(helicopter gunship) 위에서 월남전(the Vietnam War)의 밀림 현장을 쳐다보며 처절한 ‘現實’을 목격한 곳이다. 나는 극한상황에 처한 정치집단[국가]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적나라하게 실감했다.
그 다른 하나의 ‘舞臺’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王의 목을 베어 王權을 빼앗아 개인의 自由를 차차 신장하며 근대 민주주의의 元祖로 떠오른 英國이다. 속은 ’共和國‘이나 겉으로는 ’王國‘으로 위장한 나라(a republic disguised as a kingdom)’에서 내가 살면서 얻은 것은 실로 적지 않다. 괜히 佛蘭西처럼 난폭한 과격주의(radicalism)로 ’國民主權‘을 표방하거나 獨逸처럼 지나친 이상주의(idealism)로 허공을 향한 시행착오를 감행하는 대신 ’議會주권(parliamentary sovereignty)‘의 깃발 아래 傳統과 관행을 중시하는 英國식 ’保守의 세계‘를 체험했다. 천천히 그러나 실속 있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英國의 그 외교도 실속主義(pragmatism)로 거침없이 國益을 도모한다는 것을 내가 실제로 깨닫기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생사가 주마간산으로 교차하는 戰爭의 현장에서 또한 권력의 횡포와 오만에 유혈로 항거하면서 自由와 인권을 점진적으로 신장한 先進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정치적 현실주의(political realism or Realpolitik)를 생생하게 박진감 있게 배웠다.
15. 나는 1980년 가을 내 일생의 가장 중대한 轉機를 맞았다. 나는 全斗煥 대통령의 정무비서관(외교/안보 담당)으로서 국가의 총체적 실상을 대충 엿볼 수 있었고 南北관계와 한국외교에 상당히 관여할 수 있었다. 나는 - 대통령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않기 위해 - 大統領의 시각에서 또한 원점에서 근본적으로 내 所任을 보고 내 책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것은 나에게 무거운 도전이었다. 나는 그것을 감당하기 위한 첫 단계로 1980년 이전의 한국외교를 회고하며 잘잘못을 성찰해야 했다.
그 결과 나는 - 建國 대통령 李承晩이 공산주의 집단의 南侵을 격퇴한 후 일궈낸 - 1953년의 ‘韓美상호방위조약’과 - 한국적 奇蹟의 영웅 朴正熙가 고려대학의 李明博 등을 포함한 철없는 學生들과 무책임한 政客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궈낸 - 1965년의 ‘韓日관계조약’이 한국외교의 빛나는 금자탑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한편, 나는 재발돼선 안 될 몇몇 외교적 不祥事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것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근 10년에 걸쳐 중앙정보부가 자행한 ‘東伯林공작단사건‘/’金大中납치사건‘/’박동선 KoreaGate‘ 등과 외무부가 그 장관의 목을 날린 소위 비동맹外交 에피소드 등이다.
나는 - 내가 그때까지 체험한 외교와 배운 국제정치의 원리에 비추어 본 - 한국외교의 제약(constraints)을 의식하며 무모한 作爲的 사기(詐欺)/방종(放縱)에 의한 불상사의 발생 또는 재발을 막기 위한 反對가 긴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외교적 詐欺/방종이란 대외관계[한국의 경우에는 특히 韓美 및 對北관계]로 국가(state)와 국민(people)을 속이고 상식에 역행하며 부질없이 무책임하게 제멋대로 부리는 탈선행위로 나라(country)에 害를 끼치는 발상과 행위이다.
나는 나에게 떨어지는 ‘現實’에 대한 官街의 고식적 처방과 상투적 타성을 수용할 수 없었다. 나는 국가의 頂上에서 장차 떨어질 일을 예상하고 대비해야 했다. 그런 나의 막중한 책무는 비상한 발상과 勇氣 없이 수행될 수 없었다. 청와대에 몸을 담고 있던 나는 나에게 잠재하던 “썩어 100年 살아 무엇 하리!”가 불교적 無我와 유교적 性理의 바람을 타고 내는 ‘離陸(이륙)’의 종소리에 내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땅에서 싸우는 ‘陸戰‘의 戰力만으로는 나의 온전한 책무 수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現實’에 대한 ‘理性的 감시‘를 회피할 수 없었다.
외교적 詐欺/방종은 裁判의 대상이 안 되고 직업언론과 자유언론의 감시를 받을 뿐이다. 나의 청와대 복무는 아슬아슬할 때가 적지 않았다. 내가 외교적 詐欺/방종을 묵인하지 않고 反對할 때 그랬다. 나는 全대통령으로부터 ‘反對담당‘비서관의 낙인이 찍혔지만 그가 나의 목을 자르지는 않았다. 나는 理性의 편에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며 외교적 詐欺/방종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職業官僚였던 내가 벼슬의 사다리를 타는 데 열중하며 그런 것에 눈을 감아 삼갔었어야 할 나의 ’反對‘가 이따금씩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내가 언제 어디서도 거역 못하는 내 運命의 일부인 성싶다.
16. 내가 청와대에서 좌시 못하고 反對해야 했던 첫 외교적 詐欺/방종은 1981년-1983년 사이에 벌어진 한국의 對日100億불 경협[공공차관/ODA]요구事件이다. “100億불에서 한 푼도 못 깎는다”고 말한 한국 외무장관 盧信永에게 일본 外相 ‘소노다’가 “내 평생 돈 빌리려 온 자가 한 푼도 못 깎는다고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응수했던 笑劇의 진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본首相 ‘나까소네’의 1983년 1월 12일 방한으로 - ODA 100억 불이 결국 18억 5천만 불로 줄어 1981년 전까지 매년 3억 불 받던 것을 7년에 걸쳐 받기로 - 은폐하고 끝낸 그 무모했던 외교적 詐欺/방종! 나의 ‘反對’는 끝내 한국의 망신을 막지 못하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 허사가 되고 말았다.
17. 나의 집요한 反對가 부질없는 徒勞가 되어 급기야 한국외교의 최대/最惡의 不祥事로 둔갑한 사건이 1983년 10월 9일 발생했다. 내가 청와대를 떠난 지 근 7개월 만이었다. 北조선의 金正日이 감행한 것으로 알려진 랑군(Rangoon)폭탄테러는 4명의 한국정부 각료를 포함한 17명의 南韓사람들의 생명을 무참히 앗았다. 내가 청와대에 남았었더라도 저지하지 못했을 그 慘事는 - 한국의 ‘직업외교’가 극렬하게 떨친 타성적 詐欺/방종의 소치로 - 세계외교사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왜 全대통령은 버마[미얀마]를 방문했나? 하나의 자명한 답은 나온다. 버마가 ‘비동맹’의 태두라는 것! 그 진정한 내막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그것을 그 당시에 알았고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은 - ’對日100억 불 笑劇의 진원처럼 - 全대통령과 한 두(?) 명의 당시 최측근뿐이고 그나마 그 한 두 명도 버마 방문의 동기와 목적에 관해 진솔하게 같은 소리를 낼 리 만무하다.
한국 외무부가 - 그 방문의 진짜 동기와 목적에 관해 - 그 당시에 작성한(?) 문서를 그 문서고(diplomatic archives)에 보관할 형편이 아닌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한국헌법 제82조[“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한다]”]는 아주 민감한 대외정책에 관한 한 거의 死文에 가깝다. 대통령이 그런 것에 서명한 문서는 거의 요식에 속하는 것뿐이다.
나는 駐싱가포르 大使 때 全대통령의 1986년 9월 26일자 주재국 수상 李光耀 앞 친서를 전달 않고[反對하고] 반송한 사건 때문에 - 억울하게 그러나 싱겁기 짝이 없는 - 징계性 ‘시말서’를 써야 했다. 왜?
문제의 ‘친서’는 - 그 해 9월 초 아프리카 찜바브웨 “하라레(Harare of Zimbabwe)에서 개최된 제8차 비동맹頂上會議에서 귀국 [싱가포르] 대표단이 아국[한국] 정부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준 데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 事實 아닌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싱가포르 정부가 ”한국을 지지한 적이 없다“고 한국대사관 차석에게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외무부는 나에게 ‘대통령이 서명한 친서이니깐 그대로 전달하라”고 명령했으나 나는 그것을 서울로 돌려보냈다. 화근은 소위 비동맹外交의 詐欺/방종이었다.
나는 랑군의 慘事를 부른 한국의 ‘비동맹鬼神‘을 추방해야 했고 실없는 짓으로 한국 대통령의 威信이 실추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한국의 소위 비동맹外交! 그것은 한국의 외교적 詐欺/방종 중에서 치유 불가한 악종 痼疾과 같았다. 全대통령은 랑군爆彈테러 약 1년 전인 1982년 여름 대한항공의 보잉-747機 전세기로 소위 비동맹外交를 위해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내가 그의 外交비서관이었을 때이다. 나는 그 같은 목적의 아프리카 방문을 反對했고 더군다나 레이건(Reagan) 미국 대통령의 전용기가 보잉-707機이었던 시절에 한국 대통령이 보잉-747機를 타는 것에 극구 反對했다. 그러나 나의 反對는 약발이 서지 않았다.
왜 全대통령은 버마를 방문했나? 아무리 소리 질러 물어도~물어도 파묻힌 答은 안 나온다. 1982년 8월 22일 아프리카 가봉(Gabon)의 수도 리브르빌 공항에서 생긴 망측한 해프닝은 잊어서 안 될 중대한 警鐘(경종)이었다. 누가 왜 1982년 봄에 문제의 가봉 방문을 계획했나? ‘그’ 답은 간단히 나올 수 있다. 全대통령과 나를 포함한 수행원들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나라의 군악대가 한국 대통령을 위해 연주한 ‘애국가’는 ‘동해물과…’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것이 아니고 ‘아침은 빛나라…’고 소리를 내는 北조선 것이었다. 全대통령은 당연히 그 소리를 ‘랑군爆彈테러의 ‘豫報’로 알고 사무치게 기억했어야 했다.
한국의 소위 非同盟외교는 1975년의 非同盟리마(Lima)외상회의 逸話로 외무장관 金東祚(1917-2004)를 욕보이며 하차시켰다. 朴正熙는 1975년 그 당시 그가 주재한 ‘水曜안보회의’ 도중 한국이 非同盟회원국으로 가입되었다는 ‘낭보’를 접한 지 불과 30분 내에 ‘한국은 실패하고 北조선이 가입됐다’는 보고를 받고 大怒한 적이 있다. 그 외교 아닌 ‘外交‘와 誤報로 외무장관/外務部차관이 경질되었다. 그 당시의 외무部차관은 5共의 첫 외무장관으로 발탁된 직업관료로 랑군爆彈테러 때 ’情報총책’이었고 5共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 盧信永이다. 그는 비동맹의 본산 印度에서 첫 공관장을 지냈고 장관이 된 익년 봄 ‘이례적으로’ 아프리카에서 한국의 재외공관장회의를 주재했다.
나는 全대통령에게 미국의 熱烈한 동맹국인 한국의 소위 非同盟외교는 無理手이고 대통령이 “一喜一悲”할 것이 못 된다고 누차 설명했고 그는 내 말을 들을 때마다 ’납득‘했다. 그런 그가 1982년과 1983년에 연거푸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거느리는 者가 그의 權府에 끼인 ’毒素‘로 심심찮게 당하는 낭패로 볼 만하다. 自古로 권력의 중심부에 파고드는 ‘英物’은 집요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적 동물’ 중에서 나오니깐…
18. 나는 1987년 1월-2월 사이에 한반도에서 홍콩을 거쳐 동남아 싱가포르에 이르기까지 東아세아를 떠들썩하게 만든 엽기적 사건 때문에 당시의 외무장관 崔侊洙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이유는 ‘외무본부의 훈령을 이행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관련된 사건의 핵심은 한마디로 한국의 情報당국과 외무부가 한 殺人犯의 거짓말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던 것에 대한 나의 ‘反對’이었다. 그 때에도 나에게 억울하나마 같잖은 견책이 떨어졌다.
사건 자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가) 홍콩에 체류하던 한국인 尹태식(1958년생)이 1월 초(?) 홍콩에서 그의 妻 한국 여인 김옥분(수지金, 1952년생)을 살해한 것 (나) 尹은 1월 4일 홍콩으로부터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北조선의 拉致기도로부터 빠져나왔다’고 거짓말 한 것 (다) 한국 측은 남북 간의 宣傳경쟁에 尹의 거짓말을 惡用한 것 (4) 한국정부의 관계당국은 한국에 송환된 尹을 ‘反共투사’로 만든 대신 피살자 金씨를 간첩으로 조작해 피살자 가족을 괴롭힌 것 (5) 우여곡절 끝에 尹은 2001년 징역 15년6월을 선고 받아 복역 중인 반면 피살자 가족은 2003년 8월 14일 피살자의 누명을 벗기며 42억 원의 국가배상을 명령하는 대법원 판결을 받은 것 등이다.
나는 오랫동안 언론에 보도된 ‘수지金 사건’으로 내가 직접 피해를 본 것은 없다. 다만, 그 당시에 방콕에서 개최될 亞阿법률자문회의(AALCC) 한국정부 수석대표로 내정된 내가 그 불미한 사건 때문에 회의 참석을 자진 포기해 서울 외무부가 怒한 부수적 에피소드가 생기기는 했지만…
나는 그 당시 외신을 포함한 언론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그 가증스런 사건이 결국 개인에 의한 殺人과 국가권력에 의한 捏造(날조)로 판명됨에 따라 한국이 국제적으로 망신당한 것을 잊지 못한다. 가소로운 외교적 詐欺/방종이 저지른 그 수치스러운 사건 말이다. 그 당시 駐싱가포르 英國대사는 나에게 ‘대통령이 파견한 特命全權大使를 누가 소모품으로 쓰나(expendable)?’고 빈정댔다. 한국 정부가 그런 말을 부끄러워하고 새겨 담으면서 ‘불상사’를 막는 교훈으로 삼았을 만은 하다.
나는 - 직업외교관으로서 犯罪의 예방이나 처벌과는 무관하게 살아왔지만 - 不義에 저항하며 詐欺/방종을 묵인하지 않는 나의 잠재적 正體만은 버릴 수 없었다.
19. 나는 北核의 철폐를 위한 한국외교[‘北核외교’]의 한 현장을 비에나(Vienna)에서 지켜보기 시작한 1989년부터 이날 이때까지 역대 남한 정권의 멍청하고 위태로운 반역적 자세(a foolish, dangerous, treacherous stand)를 일관성 있게 反對해 왔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외교가 國家安保의 근본을 저버리거나 타협하는 발상이나 행위를 용인하지 못한다.
나는 일생을 통해 가장 끈질기게 그리고 모질게 내가 반대한 무모한 北核외교를 내 명을 다할 때까지 - ‘生命保險’처럼- 반대해야 할 것으로 1993년 봄에 내다보았다. 내가 1993년 2월 20일 “北韓의 핵무기와 동북亞細亞의 안보”라는 제목을 붙여 쓴 꽤 긴 글의 서두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북한은 그 적대국가들로부터 당장의 양보를 얻어내고 있으므로 북한이…특히 앞으로 닥쳐올 어려운 시기에 대비하여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일종의 保險에 들어두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핵무기의 야망을 결코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고 시작했다. 근 19년 전에 쓴 글에 한 字도 지금 고칠 것이 없다.
나는 그 글을 쓸 때 北이 무기용 플류토늄 생산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보고 未久에 핵무기국가(a nuclear-weapon state)로 부상할 것을 예상했다.
나는 北核에 ‘끝’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北核’외교를 수행해야만 낭패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 생각을 지난 20여 년 동안 추호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나는 北조선을 그 ‘支邦(a province of China)’으로 간주하는 全體主義국가 中國이 그 한반도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평양의 共産王朝가 자멸하지 않는 한 그 ‘끝’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北核은 - 내가 駐오스트리아 대사로 부임하던 1989년 봄에 처음으로 국제외교 무대에 공개적으로 오른 이후 - 22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반도와 동북아의 安保는 물론 세계정치의 난제로 남아 있다. 아직도 그런 ‘끝’을 향한 변화의 낌새가 나타날 조짐은 어디에도 없었던
나는 1991년 12월 16일 지금으로부터 근 20년 전에 盧泰愚 정권의 개념 없고 어리석은 ‘北核외교’ 자세를 강하게 反對했다. 그 때에도 北核외교가 지금처럼 ‘그것이 南北정상회담의 실현을 가로 막거나 그 실현에 장애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정치적 誘惑’의 볼모로 잡혀있었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 그런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 아마도 한국외교에서 전무후무할 재외공관장의 심각한 ‘경고’를 한국정부의 최고 요로[대통령비서실장/안기부장/대통령 외교안보보좌관/외무장관/국방장관/부총리겸 통일장관/주미대사/주유엔대사]에 보냈다. 나는 그 때문에 “건의하는 것은 좋으나…정부의 ‘위계질서’로 지켜야 할 규범…‘용어’의 표현” 등을 빌미로 잡은 외무장관 李相玉으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내가 北核을 ‘保險’에 비유하는 글을 쓴 때부터 15년이 지나가는 사이에 北의 잔학한 독재정권은 엄청난 현찰을 포함해 갖가지를 南으로부터 뜯어먹으면서 두 번이나 核실험을 강행했다.
나는 사실상의 국고강탈로 2000년의 소위 ‘남북정상회담’을 매수한 전 대통령 金大中의 현대판 “逆謀”를 강하게 反對한 글을 월간조선 2002년7월호에 썼다. 나는 北의 核능력을 결정적으로 키운 金大中의 ‘6.15선언‘反逆에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나는 - 지난 10여 년 동안 “北核이 南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自衛用으로 일리가 있다”고 거짓말하거나 北을 두둔하는 放縱(방종)을 떨더니 - 金大中의 죽음을 國葬으로 처리한 李明博정권의 쓸개 빠진 짓을 증오했다. 2010년 3월 26일 北의 天安艦 격침과 11월 23일 北의 延坪島 포격에 속수무책이던 南의 불쌍한 모습에 서글픔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南의 軍隊가 종이호랑이로 내는 咆哮(포효) 소리에 내 귀를 막지 못했다. 나는 ‘퍼주어도’ 당하고 ‘안 퍼주도’ 당하는 南의 가련한 신세를 개탄해 왔다.
나는 - 한국의 고질이던 소위 비동맹外交가 冷戰의 종식에 따라 랑군의 悲劇 같은 현상적 單幕劇(단막극)을 연출하고 끝난 것과 달리 - 北核이 앞으로 ‘눈에 보이게~안 보이게’ 또한 ‘알게~모르게’ 계속 南을 난경으로 몰아 어이없을 대가를 강요할 것으로 보고 한국의 반역적 ‘北核외교’에 대한 경계를 한시도 풀지 않았다.
20. 나는 지금부터 4년 전 오늘 2007년 11월 22일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李明博[MB]을 희대의 권력형 반역자 金大中의 ‘養孫’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의 ‘햇볕反逆‘이 孫子에게 전이되어 야기될 한국의 ’안보危害’를 심각하게 우려한 나머지 BBK명함을 깠다.
나에게 관련된 BBK[Bob-Bora-Kyungjoon]의 가장 중요한 일차적 직접적 核心은 BBK에 관련된 MB의 거짓말과 그의 犯罪혐의가 아니었다.
21. 나는 2007년의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MB가 “BBK와 나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전혀 관계가 없다”고 발언하는 등 BBK로 거짓말 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와의 오랜 관계 때문에 문제의 명함을 깔 수는 없었다.
나는 2007년 10월 13일 오전 종로구 안국동에서 MB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때 내가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MB가 大選에서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특히 그날 대화에 오른 화제(특히 입에 오른 爲人들의 됨됨이)에 대한 나의 실망과 BBK를 둘러싼 그의 캠프 분위기 등으로 나의 그의 대한 認識과 信賴(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햇볕계승’ 공언 때까지는 내가 그를 버리지 않았다.
22. 그러나 나는 MB가 10월 30일 블룸버그(Bloomberg) TV와의 인터뷰에서 ‘햇볕정책을 버리지 않겠다“고 公言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그 公言을 와전된 것이라고 나중에 변명했지만 그 强度나 文脈으로 보아 나는 그의 변명을 믿지 않았다.
나는 MB가 ‘햇볕’의 病菌(병균)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캠프에 소위 左派 성향의 적잖은 사람들이 모인 것과 더불어 그가 그 후에 ’新한반도 구상‘이니 ’非핵․개방?’ 등으로 내놓은 탁상공론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자유언론의 旗手로 ‘햇볕‘의 규탄에 앞장서온 영원한 기자 趙甲濟가 말한 대로 나는 - 2007년 11월 19일 용산전쟁기념관에서 개최된 한 모임을 위한 행한 연설에서 - MB의 ‘햇볕계승‘ 공언을 ”대한민국과[의] 결별 선언“으로 간주하고 그가 ”대한민국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규탄했다.
23. 내가 BBK명함을 까게 된 단 한 개의 가장 중요한 직접적 理由는 그의 ‘햇볕계승’이 초래할 한국의 ‘안보危害‘ 때문이었다.
나는 2006년 10월 9일 평양이 과시한 그 核능력의 후과와 남한의 안보에 대한 그 임팩트를 MB가 사실상 묵과하는 것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나는 盧武鉉과 金正日 간의 2007년 10.4선언 이후에 보여준 MB의 회색적 의심스러운 태도에 결정적으로 실망하면서 大選 직전에 ’盧명박‘이란 이름으로 빈정거림을 샀던 그의 태도에 극도로 자극을 받았다.
24. 나는 MB의 ‘햇볕계승’ 공언 이후 그에 대한 나의 태도가 루비콘江을‘전속력으로’ 건너가는 것을 통제할 자제력을 상실했다.
나는 盧武鉉의 ‘異腹동생‘ 鄭東泳의 친북 노선을 우려한 것은 물론이고 MB의 당선에 의한 ‘햇볕’시대의 연장을 상상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1989년 비엔나에서 시작된 나의 北核 경험 이후 2007년까지 18년 동안 내가 ‘햇볕’을 反對하기 위해 보낸 시간과 바친 노력이 한줌의 낙엽으로 짓밟힐 것 같은 꼴에 한없이 분개했다.
나는 특히 내가 公職者로서 살아 온 내 발가벗은 ‘알몸‘과 내가 ‘反햇볕 논객’으로서 펼친 내 ‘영혼‘을 꽤 잘 아는 MB가 나를 무시했다는 背信感이 분출하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25. 나는 결국 - 國家安保 다음으로 BBK명함을 까야 할 중요한 이유로 - MB가 거짓말하며 권좌에 올라 한국의 ‘法治와 민주주의’에 미칠 국가적 後患을 좌시할 수 없었다. 보통사람(the people)이 아닌 국가최고지도자의 거짓말로 나라가 부서지는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나의 腦裏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국가최고지도자가 국가를 다스리는 우선순위는 첫째 安保(생명) >둘째 法治(정의)와 민주주의(자유) >셋째 經濟(생존/복리 >넷째 文化藝術과 스포츠(오락) 등이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특히 法治는 그 핵심이 正直과 正義이고 민주주의의 선결적 조건이다. 그러니깐 거짓말(不正)을 방치하면 법치가 안 되는 동시에 민주주주의가 안 된다. 따라서 법치가 아닌 選擧민주주의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似而非민주주의(phoney democracy)이다.
나는 MB의 거짓말과 범죄혐의에 대한 疑惑이 갈수록 짙어지는 것을 보고 나라가 거짓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직감했다. 특히 MB가 11월 5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말한 것에 -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BBK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대통령직을 걸고 책임지겠다” - 촉발되었다. 물론 나는 그 以前인 그의 6월 7일자의 - “BBK와 나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전혀 관계가 없다” - 발언을 되씹고 되씹으면서 이 일[BBK거짓말]이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고 BBK명함을 깠다.
26. 나는 문제의 명함을 깐 직후에 격노한 MB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나(sosa)와 그가 나눈 33분 동안 가진 [2007년 11월 22일 1657-1720/1722-1732] 대화의 거의 대부분은 아래와 같다:
MB: 불나비처럼 왜 시시비비하나? 27년 동안 사귄 친구인데 이회창에게 붙었나? 경상도 사람끼리 그럴 수 있나? 너가 누구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나? 너가 그럴 수 있나?…[수차례 반복!]
sosa: 개인적 사감은 없다. 거짓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나의 자식이라도 거짓말 하는 사람은 쳐버린다. 너의 대북정책 특히 10.4선언 이후…그것이 뭐냐? 너의 노선 수정을 위해 나는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 너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 아닌가?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너는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본다. 지지율이 높으니깐 노선 수정을 하면서 대통령 되는 쪽이 더 낫다. 내가 10월 13일 당신을 만났을 때 준 one-page paper를 읽어 봤나?
MB: 글쎄 대강 보고 누군가에게 줬다.
sosa: 그러니깐 너는 안 되겠다. 나는 오랫동안 관찰하여 곰곰이 머리를 짜서 그렇게 만들어 줬는데 … 너는 나를 뭐로 보나? 나는 가진 것이 쥐꼬리만 한 명예밖에 없다. 당신은 부자 아닌가! 내가 6~7년 전에 뭐라고 말했나? 돈 많은데 대통령 하지 말라고 한 것 말이다… 기억 나나?
MB: 좌우간에 너가 이럴 수 있나? [계속 전화를 끊지 못하게 같은 말로 기가 차다는 듯이 분개하는 어조로 실망을 표시했음]
sosa: 나는 당신이 서울시장 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보았고…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동안 너를 위해 음으로 좋게 말해 왔다…
MB: 그런데 왜 이렇게 나오나? 끝까지 밀어 줘야 할 것 아닌가?
sosa: 그러다가 바뀐 것은 10.4선언 이후다… 너의 주변에 빨갛거나 분홍색깔 사람들이 너무 많다…그래서 걱정이 태산이다…대통령이 되면 제 몸이 제 몸 아니지 않나! 너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갈지 뻔하다. 그래서 걱정이 태산 같다. 大義를 위해 내 스스로를 던지기로 했다.
27. 한편, MB의 ‘햇볕계승’ 공언으로 일주일 이상 消沈해 있던 나에게 뜻밖의 한 ‘救援兵’이 나타났다. 그이가 ‘反햇볕’의 기치를 내세우고 세 번째로 대선에 출마한 李會昌[HC]이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에 네 번 한나라당 전 총재 HC를 만났다. 내가 확실히 그에 관해 아는 것은 그의 확고한 對北觀과 강직한 성품이다. 나는 2001년 6월 26일 그의 조찬 초청을 받아 처음 만난 그와 對北정책 등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그 해 초 1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쓴 나의 졸고 “햇볕정책 正道로 가야 한다”와 3월 13일자 “‘[김정일의]答訪’이 어려워지는 까닭”을 평가했고 나는 그의 대북관을 포함한 외교적 시각과 판단을 믿을 수 있었다. 나는 그 후 계속 그의 대외관계에 대한 입장에 변화가 없는 것에 안심했다.
나는 HC의 성공을 돕기로 작심하고 ‘지하에서’ 그를 지지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설사 그가 다시 실패하더라도 한국의 正統애국 세력의 중심으로 ‘反햇볕 민주주의’의 구심점이 되기를 바랐다.
28. 결국 ‘나의 BBK’는 허사가 되었다. 그러나 MB는 BBK검찰과 BBK특검을 잘 만나 성공했다.
BBK는 2007년 대선 결과에 따라 정치적으로는 ‘일단’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BBK가 - MB에 대한 직접 訊問을 생략한 BBK검찰 및 해괴한 삼청각 晩餐(만찬)조사를 벌인 BBK특검이 MB의 범죄혐의를 무혐의로 처리한 것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걷잡을 수 없이 계속되는 잠재적 의혹 및 미스터리를 타고 - 무언가 야릇한 것을 창출해 낼 가능성이 적지 않다. BBK는 법적으로 끝난 부분도 있고 끝나지 않은 부분도 있으나 그 두 가지가 상호 교차하면서 한국의 예측 불가한 정치에 접목될 때 언제 어떤 식으로 괴상한 것을 자아낼 지 알 수 없다.
나는 BBK명함을 까면서 "온 나라가 거짓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경고했다. 그 결과 경이적으로(phenomenally)'나타난 것은 - 특히 保守言論의 對국민사기극 연출과 自由言論의 실종 속에서 美國쇠고기/천안함과 연평도/에너지外交 등의 거짓말이 집요하더니 - 권력형 저축은행詐欺가 불거진 후에 터진 FTA허풍과 괴담이다. 이런저런 거짓말/詐欺와 의혹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BBK는 지하로부터 民草들의 허기를 경이적으로' 채워주는 '糧食'이 되었다. 권력이 맘대로 박멸할 수 없는 풍자와 냉소로 국민적 不信을 輸送하는 '나꼼수'가 從北악당을 위해 무슨 꼼수를 부릴 지 제대로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BBK의 핵심은 거짓말이다. BBK명함이 BBK를 향해 쏜 小銃이었다면 중앙일보 등의 BBK인터뷰는 大砲이었고 BBK동영상은 원자폭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셋이 모두 BBK검찰과 BBK특검의 위력을 당하지 못했다.
MB가 스스로 ”BBK를 만들었고 BBK로 이익금까지 냈다”고 자랑한 동영상과 MB가 “BBK와 나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전혀 관계가 없다”고 잡아뗀 공언 중 어느 것이 진짜인 지를 분간 못한 한국의 어린民主主義가 불쌍하다.
한국의 제왕적 檢察은 그 동영상에 나타난 MB를 도플갱어(Doppelganger)로 보았나? 2012년 大選의 막이 오르기 전에 답이 나와야 하는데…
 필자 약력: 1940년 경남 마산市에서 출생․ 4.19혁명 공로자․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外交] 합격․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대학원 외교학과 수료․ 空軍중위 예편․ 독일/월남/영국/제네바/뉴욕에서 근무․ 外務部 재외국민과장/조약과장/국제기구조약국장/외교정책기획실장․ 대통령政務[외교안보]비서관․ 駐유엔대표부 차석대표․ 駐싱가포르/오스트리아/IAEA/필리핀大使․ 外務部大使․ 2000년 외교통상부 사직․ 경희대학교/명지대학교 초빙교수[독일 Bonn대학교 대학원 修學. 미국 Harvard대학교 CFIA 펠로우. 일본 慶應義塾大學 방문교수]․ 자유평론가
왜 나는 BBK명함을 깠나?
- 李長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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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22, 2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