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통일신라 헌강왕 6년(880)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 9월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경주)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하고는 아뢰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
그만큼 통일신라시대 경주가 경제적으로 윤택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밥을 짓는데 나무를 사용치 않고 숯을 이용했다는 것은 하나의 산업(産業)으로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기록이 또 하나 있다. 일본 승려로서 당나라에 유학한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에도 나온다. 산동반도 일대의 신라방에서 살았던 신라 사람들이 숯을 구워서 팔았다는 기록이 나주 나온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좀 더 구체적이다. 
금(金)으로 치장한 저택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저택들을 쇠 금(金)자에 들 입(入)자를 써서 금입택(金入宅)이라고 불렀다. 기록에는 서른아홉 개의 금입택(金入宅) 이 있었다고 나온다. 귀족들의 대저택은 금입택이라고 불렀지만 금입택에 못지않은 기와집들이  경주에 즐비했다고 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경주내에 있던 금입택(金入宅)은 이름까지 붙여져 있었다. 남택, 북택, 본피택, 양택, 지방택, 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양상택, 한기택, 김양종택, 유야택, 교남택 등등이다. 특히 재매정택은 김유신 장군의 본가를 지칭한다. 또 계절마다 머무는 집이 달랐다고 전하고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별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금(金)으로 치장한 저택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일본 교토의 금각사(金閣寺)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명칭은 로쿠온지[鹿苑寺(녹원사)]이지만, 금박을 입힌 3층 누각의 사리전(舍利殿)이 긴카쿠[金閣]라는 명칭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어 흔히 긴카쿠지[金閣寺]라고 불리게 되었다.

교토의 금각사: 금각사(金閣寺)는 본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시대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1397년에 지은 별장이었으나, 그가 죽은 뒤 유언에 따라 로쿠온지라는 선종(禪宗) 사찰로 바뀌게 되었다.
화려하고 개방된 신라시대와 피폐하고 폐쇄된 조선시대
학자에 따라서는 신라 경주가 전성기 때 인구 20만 명의 대도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당시 인구 20만 명의 도시는 지금으로 말하면 1000만 대도시에 해당한다. 그 후 조선시대까지 '인구 20만 대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경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현재의 서울처럼 경주 서라벌도 신라의 모든 산물(産物)이 모이는 곳이었다. 게다가 신라의 경주는 통일신라시대엔 아라비아 상인까지 왕래하는 곳이었다. 처용설화에도 아라비아 상인의 왕래를 전하고 있고 《삼국사기》 헌강왕 때는 좀더 구체적이다. 괴이하게 생긴 사람들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다. 학자들은 이들을 아라비아 상인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그에 비해 조선은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피폐의 길로 갔다. 조선시대 도성(都城)은 기와집보다 초가집이 많았다. 구한말의 사진을 봐도 초가집이 많다. 통일신라시대 경주에 기와집 지붕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건물의 규모도 신라시대보다 조선시대의 규모가 작다. 단일 건물 규모로는 신라 황룡사터가 가장 컸다.

서울대병원에서 바라본 창경궁 전경
조선시대 궁궐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경복궁은 대원군 때 중건되었고 창경궁은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나 인조2년 이괄의 難(난)때 모든 전각이 또 불탔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고 지금까지 견디어 온 건물이 창경궁의 명정전이다. 그런데 명정전의 크기는 대궐의 전각이라고 보기에는 사실 작다.
조선시대 건물이 작은 이유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으로 건물 규모를 제한한 이유도 있다. 명정전의 단일 건물의 면적은 일본의 유명 사무라이의 저택보다 작다. 중국의 귀족 저택보다 작은 것이 조선의 궁궐의 전각과 대전(大殿)이다. 신라시대의 큰 건물보다도 작은 것이 조선의 궁궐 규모다. 쪼그라든 조선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가난한 것이 마치 善(선)한 것인양 행세하는 유교적 위선이 조선을 망조들게 했다.  그 피폐한 朝鮮(조선)의 DNA가 그대로 이어진 곳이 바로 '북조선(北朝鮮·북한)'이다. 오늘날 좌파의 사고방식의 코드는 바로 조선시대의 코드다. 그 점에서 북한과 좌파의 코드는 같다.
화려하고 개방된 신라와 대한민국, 그에 비해 피폐하고 폐쇄적인 조선과 북한이 한반도에 공존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