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북부 체험기

창을 여니 스컹크가 엉덩이를 실룩대며 달아난다.

1.
차를 타고 미국 서북부 곳곳을 돌았다. 18일. 기자 생활 10년 만에 가장 오랜 휴가다. 이틀만 쉬어도 불안한 ‘체질'이지만 시애틀 지역의 자연은 거부할 수 없었다.

지리산 숲속 같은 페더럴웨이(Federal way) 숙소, 밤중에 창을 여니 스컹크가 엉덩이를 실룩대며 달아난다. 이곳도 나무들이 빼곡한데 몇 십 분, 아니 몇 분만 달려도 원시림이 펼쳐진다. 스틸레이크(steel lake)·솔트워터(salt water) 공원 등 거대한 호수인지, 좁다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공원도 지천에 널렸다.

레돈더비치(redondo beach)를 따라선 화이트, 블랙, 멕시칸, 아시안 다양한 인종들이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요트를 타고,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여름과 겨울 온도 차가 크지 않은 탓에 12월 수영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동화에나 나올듯한 형형색색 집을 따라 트인 바닷길은 걷기가 어렵다. 뛰고 또 뛸수록 상쾌함이 밀려온다. 말로만 듣던 “러너스하이(runner's high)”가 이것인가 싶었다.

 
(니스퀄리의 매)

숙소에서 30분 달려 니스퀄리(Nisqually national wildlife refuge)라는 거대한 철새도래지를 찾았다. 이곳은 지도로 본 규모만 일산 호수공원 10배는 됨 직했다. 반나절 기러기 떼와 놀고 새끼 오리 떼를 보며 잘생긴 매와 대머리 독수리를 쫓아 걸어가도 3분의 1을 다 보지 못했다. 곱게 늙은 미국 할머니에게 “한국에서 왔다”며 말을 붙이니 “그 나라를 잘 안다. 지도자(김정일)가 죽지 않았냐?”며 말해 박장대소했다. 한국과 북한의 차이를 잘 몰랐던 모양이다.

시애틀 지역은 사계절 수영도 하지만 스키도 즐긴다. 멀리 萬年雪 뒤덮인 마운틴레이니어(Mt. Rainier)가 우뚝 서 있고 그 옆 마운틴 크리스탈(Mt. Crystal) 스키장도 이름난 곳이다. 스키장 옆에는 입장료도, 주차료도 받지 않는 천연 눈썰매장이 붙어 있다. 7살짜리 아들과 깎아지른 눈밭을 10분 넘게 올라간 뒤 눈썰매를 함께 타고 내려오는 기분은 환상이다! 처음엔 건너편 설경이 어른거리다 이내 눈앞이 눈으로 범벅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들과 아빠의 비명 소리뿐이다. 그렇게 십 수 차례 오고 가니 몇 시간이 훌떡 지났다. 나중엔 비가 후둑후둑 오는데 마냥 즐겁다.

미국식 福祉(복지)의 절정은 도서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출을 빼고는 외국인이든,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인근 도서관 3곳을 가 봤는데 제일 작은 도서관 역시 상당한 크기였다.

서부 개척 마지막 관문이 되었던 미국 북서부 지역은 모든 것이 풍요롭다. 식당도 많지만 서브웨이(subway) 같은 곳에서 6불짜리 샌드위치를 먹으면 두 사람 먹기도 양이 벅차다. 샌드위치 하나에 넣는 야채는 물론 쇠고기, 돼지고기, 칠면조 등 한국서 먹던 것과 양과 질이 다르다.

햄버거 같은 음식 말고도 전 세계에서 자유를 찾아온 이들은 음식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큰 맘 먹고 20불짜리 일본식 뷔페식당에 갔더니 별천지가 따로 없다. 동경에 가서도 비싸서 못 먹어본 일본식 사시미 종류가 미국사람 체형처럼 큼지막하게 놓여 있다. 초밥 요리도 서울의 이름난 식당서 먹었던 것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육고기든 물고기든 원료가 풍부하니 일본서 아끼던 재료를 마음껏 사용해 솜씨를 뽐내는 것 같았다.

2.
미국식 풍요는 ‘절대적 풍요’도 있지만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어서 생기는 ‘상대적 풍요’도 있다. 널 직한 1층 건물로 이뤄진 페더럴웨이 다운타운에 가보면 똑같은 품목이 비싼 가격에 팔리는 고급형 매장인 트레드죠(tread joe), 저렴한 가격에 팔리는 월마트(walmat), 아주 염가에 팔리는 로스(Ross), 굿윌(Goodwill) 등 다양해서 가죽 잠바 하나를 사도 형편에 맞춰 살 수 있다. 워낙 땅이 넓어 다른 사람 신경 쓸 일이 없으니 고급형 매장에 가서 100만 원 짜리 잠바를 살 수도 있고 월마트에 가서 10만 원짜리를 살 수도 있고 로스에 가서 5만 원 짜리를 살 수도 있다.

모든 물건이 그렇다. 고급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람도 있고 은색 테이프로 창문을 때운 차를 타는 사람도 많다. ‘넓은 공간의 힘’이 이런 것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나에게 편한 게 좋다는 대륙 마인드는 여기서 나오는 것 같았다. 다양한 인종이 만들어내는 雜種文化(잡종문화) 역시 승수효과를 만들어냈다.

한국적 고통의 주범이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남과 비교해 생기는 ‘상대적 빈곤’인 점을 고려해 본다면 부러운 일이다. 질투·시기·당파·분열 같은 한민족 특유의 陰性(음성)에너지 역시 마찬가지다. 나보다 더 가진, 더 잘난, 더 높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생기는 르쌍치망(反感·반감, 꼬인 마음)은 반도를 넘어 대륙과 초원으로 뻗쳐야 풀리게 될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막히고 휴전선마저 꽉 막힌 한국이 열리면 미국에서나 볼 수 있던 ‘절대적 풍요’와 ‘상대적 풍요’ 모두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호방하고 자유롭고 자연스런 대륙적 마인드는 길을 잇고 공간을 넓히면 생기는 법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마음껏 놀다온 15일은 한국에 대해서 더욱 간절한 마음을 품게 하였다. 60년 척박한 땅에서 만들어 온 한국의 성취는 기적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세대의 기적적 성취는 평양을 지나 만주와 시베리아로 이어지는 넓은 공간, 이어진 길에서 역사의 정상적 발전의 궤도를 밟아야 한다.

3.
내가 머문 페더럴웨이는 물론 타코마, 시애틀 등에는 초등학교 한 학급에 미국인 반, 한국인 반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실제 어느 반엘 가나 몇 명은 한국인 아이라 한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도 있지만 치열한 경쟁, 왕따와 같은 한국의 殺人的(살인적) 교육환경 때문에 고향을 잠시 떠난 이들이다.

사람들 속 얘기를 들어보면 부잣집 아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평범한 샐러리맨 아빠 밑에서 1년에 두세 번 가족이 만나는 견우·직녀 가족도 많다. 한국서 남편이 보내온 달러로 골프를 치면서 사는 아내도 있지만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1달러도 아껴서 자식을 위해 쓴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하버드 대학에 간 홍 아무개처럼 출세시키겠다는 원대한 목표보단 망가진 한국의 교육을 피해서 온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교육의 정상화’ 운운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풀 길은 휴전선 以南(이남)에서 찾을 수 없다. 영어의 중요성, 치열한 경쟁이 문제가 된다고 북한처럼 한글전용이나 좌파가 말하듯 경쟁을 없애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요, 위선적 쑈일 뿐이다. 반미·친북 흉내 내는 자들일수록 자식들은 미국에 보내는 일이 많은 것은 단적이 사례다.


미국 보잉사 내 플라잉뮤지엄

‘교육의 정상화’ 역시 해법은 공간의 확대와 길의 연결에 있다. 북한을 열고 7천만 민족과 북방의 잡다한 민족이 섞이다 보면 미국서 보았던 것처럼 국민들 모두 모두 나름의 살 길을 찾게 될 것이다. 한국 어머니들과 자식들의 고통의 시작을 보라! 좁은 땅에 갇혀 앞집 순이, 뒷집 철이, 옆집 돌이 성적표를 비교하며 비롯하지 않는가? “비교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남성적 발상은 현실에선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경험측상 부잣집 어머니건, 가난한 집 어머니건, 많이 배운 어머니건, 적게 배운 어머니건 다르지 않았다.


(숙소 근처 솔트 워터 공원 원시림)

가방끈이 사회의 계층을 정하고 IMF 이후 중산층 약화로 상하 간 계층 이동이 경직돼 가면서 비교해서 생기는 상대적 박탈감·상대적 빈곤·상대적 고통이라는 農耕민족 특유의 遺傳病(유전병)은 깊어져 버렸다. 해법은 하나. 공간의 확대, 길의 연결뿐이다. 자유통일로 대한민국의 활로가 트이면 남들과 비교해 생기는 상대적 박탈감·상대적 빈곤·상대적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사람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 規模─經濟)’다.

한국은 지금 거대한 不滿(불만)의 용광로처럼 변하고 있다. 20~40세대는 물론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시한폭탄을 내버려 두다간 언젠가 안에서 곪아 터져 버릴 것이다. 이미 망한 사회주의 모델을 따르는 한국의 여론이 그렇다.

벼랑으로 몰려가는 한국을 누군간 막아야 한다. 어딘가 퇴로를 뚫어야 한다. 북한정권을 정리해 북한주민을 살리는 자유통일은 공간의 확대, 길을 연결해 대륙과 초원으로 가자는 것이다. 활동반경·생존공간·생존권역, 규모의 경제 무어라 부르건, 우리 삶의 경계가 커지면 해결될 일들이다. 휴전선 이남서 아등바등해봐야 묘책이 안 선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시애틀 하늘과 땅. 이곳에서 7천만 민족의 블루프린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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