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유쿠그(Tonyuquq)가 박근혜에게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자유통일론 - history making(6)
1.
정치인은 하나같이 “서민과 중산층”을 역설한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붕어빵 경제’란 말을 만들어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챙기는 일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시장경제주의와 산업화 정신 승계·反포퓰리즘·큰 시장 작은 정부》를 명시한 정강·정책도 公正(공정)경쟁과 친서민 기조로 바꾼다 한다. 이제는 성장이 아닌 분배의 시대란 말일까? 금배지들은 ‘복지’·‘상생’·‘균형’ 같은 단어를 극락 가는 염불인양 끝도 없이 떠들어댄다.

서민과 중산층 삶을 챙기는 게 리더의 절대적 과제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공정경쟁’·‘친서민’의 현란한 구호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없애려는《시장경제주의와 산업화 정신 승계·反포퓰리즘·큰 시장 작은 정부》같은 우파적 가치가 공정경쟁·친서민을 해치고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망치는 건 더더욱 아니다.

피 흘려 배운 역사의 교훈은 명쾌한 것이다. 自由(자유)·市場(시장)·法治(법치), 이를 뼈대로 한《시장경제주의와 산업화 정신 승계·反포퓰리즘·큰 시장 작은 정부》같은 우파적 흐름이 빈곤을 없애고 빈자도 없앴다. 공정경쟁·친서민, 서민과 중산층 삶이 보장된 것은 自由·市場·法治가 확산된 결과인 것이다.

중남미, 사회주의 국가처럼 붉은색 구호만 날리는 화려한 시네마폴리티카(극장정치)는 평등도 자유도 이루지 못했다. 대중의 계급적 미움·증오·분노를 자극한 체제는 안에서 박살나 버린다. “평등을 앞세운 사회는 평등도 자유도 달성치 못했고 자유를 앞세운 사회는 보다 큰 자유와 평등을 달성할 것”이라는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지적은 이미 입증된 명제다.

2.
自由·市場·法治란 자연의 이치다. 에너지란 안에서 고이면 썩고 밖으로 돌아야 한다. 에너지가 안에서 썩지 않고 밖으로 도는 것, 이것이 自由(자유)이고 인간은 누구나 새처럼 자유를 꿈꾼다. 그래서 자유는 모든 생명 있는 것이 쫓는 우주의 본질적 가치다. 에너지·힘·기, 세계정신과 절대정신, 종교적 명칭의 무어라 부르건 역사는 자유를 향해 진보했다.

市場(시장)은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에너지를 나누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 自生的秩序)다. 국가와 국가로 확장된 시장은 貿易(무역)이라 부른다. 法治(법치)는 하이에크가 지적하듯 시장과 무역의 순환이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다.

우파는 자유·시장·법치의 역사적 경험에 충실한 ‘눈이 밝은’ 이들이다. 좌파란 무언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지난 날 1000번이 맞았어도 다음번에 틀릴 수 있다고 우기는 강팍하고 고집스런 자들이다.

자유는 ‘확산’과 ‘연결’을 본질로 한다. 국가는 언제나 두 가지 고민에 직면해왔다. ‘공간의 확대와 길의 연결’이라는 外向的(외향적) 발산, 주어진 공간과 주어진 길을 잘 닦자는 內向的(내향적) 수렴.

나라가 잘 살기 위한 선택은 예외가 없었다. 내향이 아닌 외향. 수렴이 아닌 발산. 닫힌 이념과 닫힌 사회의 저주를 깨 버릴 때 세상은 활기가 넘쳤다. 에너지 순환이 되고, 기가 돌고, 힘이 나서 세계정신과 절대정신이 움직였다. 균형·형평·평등 같은 관념적 구호는 뜬구름 같은 것이다. 폐쇄된 소규모 그룹에 약간의 효용이 있을지 모르나 개방된 무대에서 여지없이 부서질 껍데기 들이다.

3.
구한말 조선을 4차례나 방문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이라는 책을 쓴 비숍(Isabellar Bird Bishop. 1831년 ~ 1904년) 여사는 1890년대 조선의 모습을 불결함·게으름·무기력·무관심·부패와 미신이 가득 찬 곳으로 묘사한다.

“나는 부산이 처참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조선마을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점을 알았다. 좁고 더러운 거리에 진흙을 발라 창문도 없이 울타리를 세운 오두막집, 밀짚지붕, 그리고 깊은 처마, 마당으로부터 2피트 높이의 굴뚝이 솟아 있었고 가장 바깥에는 고체와 액체의 폐기물이 담겨 있는 불규칙한 개천이 있다. 더러운 개와 半裸(반라)이거나 全裸(전라)인 채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때 많은 어린애들이 두껍게 쌓인 먼지와 진흙 속에 뒹굴거나 햇볕을 바라보며 헐떡거리거나 눈을 끔벅거리기도 하며 심한 악취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서울의 냄새가 자장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대도시인 수도가 이토록 불결하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비틀어진 小路(소로)의 대부분은 짐 실은 두 마리 소가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으며 한 사람이 짐을 실은 황소를 겨우 끌고 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이다. 그 길은 그나마 물구덩이와 초록색의 오수가 흐르는 하수도로 인해서 더욱 좁아진다. 하수도에는 각 가정에서 버린 고체와 액체의 오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불결함과 악취 나는 하수도는 반나체 어린애들과 피부병이 오른 채 눈이 반쯤은 감긴 큰 개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그들은 햇살에 눈을 껌뻑거리며 이 하수도에서 뒹굴고 있다.”


더 나아갈 빛이 없는 사회는 썩는 법이다. 조선은 淸貧(청빈)의 그럴싸한 구호와 人倫(인륜)의 화려한 깃발만 있을 뿐 백성의 울부짖음과 눈물만 그득했다. 비숍여사는 “관아의 형벌 방법은 벼슬아치들이 죄인을 잔인하게 채찍질하고 죽도록 때리는 것이다. 죄인들의 괴로운 부르짖음은 영국 선교관과 인접한 방까지 들려온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거의 모든 관아가 악의 소굴로 되고 있다.”며 조선의 관아를 ‘惡의 소굴’이라고 불렀다.

열린사회·열린이념으로 가지 못한 조선조는 구호와 깃발로 덮은 부패한 시체 같았다. 2차 대전 이후 막스·레닌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다시 민중주의·포퓰리즘으로 갈아탔지만 극동의 칸막이 저주는 아직도 21세기 한국을 떠돌고 있다. 그것이 ‘복지’·‘상생’·‘균형’ 같은 정치적 유행어들이다.

4.
정글의 법칙은 바뀌지 않는다. 외향적 발산-자유의 길을 걸을 때 나라는 발전했고 내향적 수렴-평등의 길을 걸을 때 쇠락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신명 나게 돌아다녀야 사는 법이다. 집안에서 식구끼리 싸움 나면 만사 불통이다.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은 가정 뿐 아니라 국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계급과 계급의 갈등을 자극한 사회는 고꾸라졌다.

지난 60년 한반도는 역사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았다. 輸入代替(수입대체)가 아닌 輸出指向(수출지향), 內向的 수렴이 아닌 外向的 발산의 길을 걸었던 한국은 성장의 길을 걸었다. 반면 국가의 테두리 내에서 有産者(유산자)와 無産者(무산자), 친일파와 빨치산, 공동체 내 선을 그어 적대적 숙청의 길을 걸었던 북한은 안에서 썩어갔다. 북한은 우리 민족 핏속에 흐르는 인사이더(insider) 기질과 조선조 주자학, 20세기 공산주의가 만나서 태어난 극단의 극이다.

이승만·박정희는 면면히 흘러온 선대의 저주를 끊으려 했었다. 불결함·게으름·무기력·무관심·부패와 미신이 가득 찬 이 땅을 세계에서 손꼽힐 살만한 나라로 바꾸어 놓았다. 그 당시 정책에 이러저러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이승만·박정희는 내향적 수렴이 아닌 외향적 발산, 닫힌사회를 열린사회로 이끌고 간 자유의 화신이었다. 그리고 마음엔 백성의 눈물을 닦고 울부짖음을 그치려 한 사랑이 있었다.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서 소박한 그러나 빛나는 이념의 길을 따라 걸었다.

대통령을 꿈꾸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승리의 길을 벗어나 달린다.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선 자유·시장·법치의 가치를 더 크게 키우고 휴전선 이북에 이 가치를 확산해 통일하는 것이다. 선대가 입증한 것이고 역사가 증명한 것이다. 남한 땅에서만 오순도순 평등하게 살아보자는 朴위원장에게 돌궐의 명장 톤유쿠그(Tonyuquq)의 명언이 절실해 보인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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