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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용 목사가 1946년 좌우합작위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부터 안재홍, 김붕존, 김규식, 가운데 줄 왼쪽 두번째 인물이 강원용 목사이다./평화포럼 |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설립한 인물은 강원용(姜元龍) 목사(1917년 10월30일~2006년 8월17일)로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 출신이다.
농민의 자녀였던 姜목사는 1931년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만주 용정 중학으로 진학, 이곳에서 문익환(문성근 민통당 최고위원의 父親)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1940년 일본의 명치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 활동을 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후 귀국, 서울로 돌아와 경동교회를 설립했다. 1946년 이후 김규식과의 인연으로 김규식-여운형 등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7년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암살된 뒤 김규식 등이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했다.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1949년 김재준 목사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54년 캐나다 마니토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1956년)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했다. 1959년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전신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를 설립, 산업사회와 종교 등의 주제로 강의,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개최했다. 이후 종교간 대화, 페미니즘 운동, 노동 운동 등에 나섰다.
姜목사는 노무현 정권이후 1967년 발생한 민비련(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비롯, 1974년 인혁당 재건위(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등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자 이들 사건에 대해 “100% 사실이라거나 100% 조작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양쪽 다 똑같은 흑백논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꼬투리를 잡힐 만한 게 있으니까 잡혔는데, 朴정권이 그 꼬투리를 침소봉대해서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만들어냈다는 게 이런 사건들의 공통점”이라며 “100% 사실이거나 100% 조작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양쪽 다 똑같은 흑백논리”라고 주장했다.
현재 대화문화아카데미로 단체 명칭이 바뀌어 운영되고 있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는 남재희(前노동부장관), 송월주(前조계종 총무원장), 윤후정(前이화학원 이사장), 이어령(前무화부장관), 이홍구(前국무총리, 중앙일보 고문), 정의숙(前이화여대 총장), 정원식(前국무총리) 등의 인사들이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김필재(金泌材)/spooner1@hanmail.net
[관련자료] 강원용 목사가 배출한 ‘페미니스트’ 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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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숙 現민통당 대표와 강원용 목사 |
크리스찬아카데미는 주로 노동, 여성, 농민, 학생, 교회단체 회원을 수강생으로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강사로 참여하면서 합숙 세미나와 강의 등 정규교육과 함께 현장 방문 및 교육, 소그룹 운용, 활동평가회로 후속교육을 했는데, 이 교육의 간사로 활동했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이다. 크리스찬아카데미는 가장 활동이 왕성했던 70년대 중후반까지 아카데미 교육을 이수한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의 큰 흐름을 형성했다.
<주> 아래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주요 여성 인사들의 명단이다.
▲정계: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김상희 민주통합당 원내부대표, 김희선-김경천-이미경-홍미명-이은영-이경숙 열린우리당 의원, 최순영 前민주노동당 의원, 이영순 前민주노동당 여성위원장, 이영순 前서울시 의원
▲학계: 신인령 前이화여대 총장,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여성학), 이상화 이화여대 교수(철학), 김경애 동덕여대 교수(여성학), 손덕수 前대구효성가톨릭대 교수(사회복지학)
▲기타: 이정자 녹색미래 공동대표, 서명선, 박인덕 前한국여성개발원 원장, 김근화 (사)여성자원금고 이사장, 이현숙 前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차명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사장, 신혜수 성매매추방범국민운동 대표, 정강자 前여성민우회 대표, 김윤옥 前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이종경 前대한YWCA연합회 사무총장, 차경애 대한YWCA연합회 실행위원, 김금래 동부여성발전센터 소장, 최연수 前크리스찬아카데미 바람과 물 연구소 관장
[관련기사] 親日-親北으로 점철(點綴)된 ‘몽양 여운형의 생애’
소련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우리말로 옮긴 여운형. 여운형이란 인물과 그가 주도한 건준(建準)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정국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1945년 8월10일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 내의 일본인 생명과 재산이 위협 받게 될 것을 우려해 송진우(宋鎭禹)에게 국내 치안유지의 모든 권한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를 거절했으며 김준연(金俊淵)도 동일한 교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러한 宋鎭禹와 金俊淵의 거절에 놀란 총독부는 제3의 인물로 1945년 8월15일 아침 8시 여운형을 정무총감 관저로 급히 초대, 조선이 해방을 맞아 정치적 공백기에 처했을 때의 치안유지의 협력을 요청했다. 여운형은 이를 즉석에서 쾌히 승낙했다.
이때부터 ‘치안유지의 협력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여운형은 그 날로 좌익계의 정백(鄭栢), 최용달(崔容達) 등과 함께 建準을 조직하고 동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建準의 깃발아래 1945년 8월30일까지 145개의 建準 지방위원회가 결성됐다. 조직기반이 취약한 여운형은 남로당의 당수 박헌영(朴憲永)과 제휴, 建準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여운형은 建準 결성 후 ‘건국치안대’를 조직 했는데, 이 치안대는 9월2일자로 建準에 통합됐다.
그러나 建準이 좌경으로 변질되자 건준부위원장 안재길 및 민족진영 인사들은 建準을 사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1945년 9월3일 2차 개편대회를 열고 이강국(李康國)을 비롯한 골수 공산주의자들을 간부로 등용한 뒤,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과 연합했다. 같은 해 9월4일 건준은 박헌영, 여운형, 정백 등 4명에 의한 인공설립준비위원회를 거친 뒤, 9월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人共)을 선포했다.
建準은 人共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1945년 9월6일 해외에서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민족진영 인사들 가운데 李承晩을 주석으로, 金九를 내무장관에 정해 놓는 등 일방적으로 내각 명단을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욱이 인공의 중앙인민위원회의 내각구성원을 살펴보면 전체인원 52명 가운데 72%인 38명이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종오著, ‘변질되어가는 한국사의 진상(上)’, 43페이지)
이것만 봐도 여운형의 건국(建國)구상과 행적은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전위역할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운형은 또 일제치하에서 입건되어 서울지방법원 재판과정에서 일본을 위해 헌신(獻身)하겠다는 ‘충성서약’을 한 친일(親日) 세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대동신문’ 1946년 2월 17, 18일자에 따르면 여운형은 1943년 2월 6일 일본 검사에게 제출한 진술서에서 “일본을 위해 대(對)중국 공작을 할 수 있으니 기회를 달라”며 한시(漢詩)까지 지어 충성을 맹세했다.
시의 내용은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砲煙彈雨又經筆·포연탄우우경필) 나라 위해 젊은 목숨 바치기를 청하네(爲國請纓捨一身, 위국청영사일신) 천억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千億結成共榮日, 천억결성공영일) 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太平洋水洗戰塵, 태평양수세전진)”이다. 여기서 ‘천억’은 일본이 중심이 된 동양을 말한다.
또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년 9월 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에서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2000만 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1950년 11월 UN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도 그를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조병옥(趙炳玉) 박사는 ‘나의 회고록’(도서출판 해동, 1986, 163~164페이지)에서 여운형의 親日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여운형, 안재홍 두 사람은 일정말기에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전에는 항일파요, 민족적 지도자로 관록을 가진 여운형, 안재홍씨 두 분은 영국령 싱가폴이 함락되고 필리핀의 마닐라가 일본에 의하여 점령당한 후 미-영 연합국이 패전하고 일본이 승리한다고 오산한 나머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끼(小磯國昭)에게 불려가서 소위 대동아전쟁에 협력할 것과 황국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만약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여기에 그 증거로서 매일신보에 실린 담화와 논문과 사진들이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보시오. 누구의 필적이며 누구의 사진인가를(이하 생략)”
이기하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 급조’와 한국일보사가 1987년 발행한 ‘한국의 정당’에는 여운형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한인(韓人) 제1호’라며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대의원, 임정 외교부장관과 노동청년단장을 역임하는 한편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뒤, 이르쿠츠크 재건공산당 상해지부당원, 소련 공산당 한인(韓人) 제1호 입당, 조선공산당 해외부원, 中共黨江蘇省黨입당 활동 중 상해에서 일본 영사경찰에 체포, 본국에 압송되어 3년간 복역 후 中外日報 사장 등을 거치며 활동하다가 권태석(權泰錫)을 만나게 된다…….(중략) 그러나 얼마 후 日本世話會 주선으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여운형의 약속으로 일본인 대표로부터 70만원의 거액을 받고 사태가 수습됨으로써 건준 활동은 재개했다.”
한민성의 ‘추적 여운형’(갑자문화사, 1982년, 100페이지)에는 여운형이 처음부터 ‘대한민국’이란 국호(國號)를 극력 반대하고 ‘조선공화국’을 주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여운형의 족적이라면 한 마디로 말해서 소련공산당의 세계적화 공작에 뛰어들어 그 주구(走狗)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적화 공작에 앞장서서 그 하수인으로서 죽는 날까지 놀아났다. 일급 하수인답게 그의 당적(黨籍)도 화려하다. 즉 상해파, 고려공산당원 이르크츠크파 공산당원, 소련공산당원, 조선공산당원, 중국공산당원, 중국국민당원(중국 적화 공작을 위해 침투), 장안파 공산당의 비밀당원 공산분자들이 일야(一夜)에 날조(捏造)한 소위 인민공화국의 부주석, 인민당 당수, 가짜 김일성파인 사회노동당위원장, 북로당계인 노동인민위원장 등으로 소련공산당 지령에 따라 조국과 민족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공산당원답게 공산당을 위해 광분하였다.”(‘추적 여운형’, 갑자문화사, 1982년, 187페이지)
현대공론(이현택, 1988년 9월호 432~433페이지)에 게재된 ‘여운형의 딸들은 왜 서울에 올 수가 없는가’에는 월북(越北)한 여운형 일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몽양의 유가족들이 생존의 보호막을 찾아 월북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가슴 속에서 통곡한 사람은 여운구 씨의 선친인 여운홍 씨였다. 1985년 가을 이산가족 방문단이 평양에 갔을 때 여연구 씨가 인민회의부의장으로 환영회장에 나왔었다는 것이 공식적 확인이었다. 그 밖에는 단편적인 미확인자료이지만 큰 누님(장녀) 난구(鸞九)는 이미 연로했으니까 알 길이 없고, 둘째 연구는 무슨 단체의 사무총장, 그리고 4남 붕구(鵬九)는 수산업 관계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3남 영구의 소식은 전혀 모르겠다고 여운형 일가의 최근 상황까지 밝히고 있다.”
이처럼 여운형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정국을 올바른 길로 수습해야 할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越北해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그의 딸 여연구(1996년 사망)는 생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북한 정권에 충성을 바쳤다.
여연구는 문익환, 유원호 등의 방북을 알선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운형을 순수한 민족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은 국민의 역사의식을 오도(誤導)하는 극히 위험스러운 행위다.
김필재(金泌材) spooner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