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청년 몇이 記者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미국의 제재가 북한 핵실험 원인이 아닌가? 북한의 핵은 자위용이 아닌가?”
記者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고 되물어 보지만 출처를 대지는 못한다. 좌경 선동가들 궤변을 귀동냥한 것일 게다. 한명숙 같은 자는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의 제재와 일관된 금융압박이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2006년 10월11일, 국회 본회의 긴급현안질의)”고 말했었다.
미국의 소위 對北압박이 북한의 핵실험 원인이 됐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북한의 역사는 곧 핵개발 역사다. 김일성은 이미 1955년 핵물리학연구소를 설립했고, 1963년 소련에서 연구용원자로 IRT-2000을 도입했다.
북한의 본격적 핵개발은 1979년 시작됐다. 그 해 함경남도 영변에 5MW 원자로 건설을 착공하여 86년 완성했고 89년 200MW 원자로를 만들었다. 이들 원자로는 소련과 중국도 모르게 추진한 것이다. 핵무기 생산이 목적이었고 그를 위한 高爆(고폭)실험에 나섰다.
북핵문제는 89년 9월15일 프랑스 상업위성 SPOT 2호에 영변 핵시설 사진이 폭로되자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89년, 이때는 미국의 압박이건 제재건 특별한 게 없었던 시기다.
오히려 미국은 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영변 핵시설 포기의 대가로 2000MW 경수로 제공을 약속했다. 電力(전력) 생산과 무관한, 즉 핵무기 개발이 목적인 영변 핵시설 3개의 용량(5MW + 50MW + 200MW)을 포기하고 대신 그 8배에 달하는 2000MW를 얻어간 것이다. 북한 입장에선 최고의 거래였다.
북한은 애당초 핵포기 의사가 없었다. 경수로 건설은 받아먹고 몰래 핵무기 개발도 진행했다. 미국은 94년 북한의 핵시설 공개 이후 10년 넘게 끌려 다녔다. 2005년 한국, 미국 등 여섯 나라가 참여한 6자회담에서 “북한의 핵무기 파기”를 약속한 9·19공동성명을 채택하는 정도였다.
북한은 결국 2005년 9월15일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계좌 동결과 관련해 트집을 잡더니 2006년 10월9일 핵실험에 나섰다. 이후 좌익들은 “북한을 핵실험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던 결정적 요인은 미국의 對北금융제재에 있었다.(2006년 10월13일 임종석 전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칼럼 中)”고 떠들어댔다. 미국의 對北금융제재를 받고 화난 북한이 ‘1년 만에’ 핵을 개발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이었다.
2.
북한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청년은 또 이렇게 물었다.
“그래도 북한 핵실험의 직접적 원인은 미국 對北금융제재 아닌가?”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싶은데 미국이 괴롭혀 어쩔 수 없이 핵무장을 했다는 요지다.
북한이 60년간 체제의 운명을 걸었던 핵무기 개발의 원인을 1년 전 對北금융제재로 돌리는 것은 황당한 소리다.
이른바 방코델타아시아(BDA) 계좌 동결은 미국 재무부가 2005년 9월19일 9·19합의 채택 4일 전인 같은 달 15일 애국법(Patriot Act) 311조에 의거,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를 ‘돈세탁 주요 우려 대상(primary money laundering concern)’으로 지정하고 같은 날 재무부 홈페이지에 공지한 것이다. 9월29일 BDA 경영권을 잠정 인수한 마카오 당국은 BDA 계좌 중 불법행위와 관련된 50개 계좌(북한은행 20개, 북한기업 11개 북한인 9개, 마카오기업 8개 마카오인 2개)를 동결했다. 이때 인출이 막혀버린 북한의 자금은 2,500만 달러, 한국 돈으로 300억 원이 채 안 됐다.
북한정권과 남한의 좌익은 BDA 계좌 동결을 9·19합의에 불만 품은 미국 강경파 음모로 몰아붙였다. 9·19합의 공동성명 채택 4일 전인 9월16일 발표됐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 북한은 그 해 11월9일 BDA 문제를 이유로 9·19합의는 물론 6자회담 자체를 파토 내 버렸다.
그러나 미국이 9·19합의를 깨려고 BDA제재를 한 것도 아니고 북한이 BDA 제재를 이유로 핵실험을 한 것도 아니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뿐 아니라 BDA 수사 과정을 들여다 볼 때 더욱 명료해진다.
첫째, BDA 수사는 6자회담 개최 한 달 전부터 진행됐다. 둘째, BDA 수사 과정은 9·19합의문 채택 한 달 전인 8월26일부터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UPI·월스트리트 저널 등 언론에 낱낱이 보도됐다. 셋째, 더욱이 미국 재무부가 BDA를 웹사이트에 공개한 날자는 9·19합의문 채택 6일 전인 9월15일이다. 넷째, 중국 정부가 9·19합의문 채택을 처음 추진한 것 역시 9월16일이다.
요컨대 북한은 BDA 제제가 언론에 공개된 상황에서 이를 알고서 또는 알고도 그 심각성을 모른 채 9·19합의에 동의했고 9·19합의를 파기한 10달 뒤인 2006년 10월9일 핵실험에 나섰다.
BDA 제제는 미국이 위폐제조·마약밀매·대량살상무기(WMD) 확산을 통한 테러지원 등 북한의 불법행위로부터 자국 금융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이것이 북한의 핵실험 원인이 됐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 억지일 뿐이다.
미국의 제제와 압박이 핵실험 원인이 됐다는 것은 남한 좌파의 억지와 300억 원도 안 되는 달러 인출이 안 돼서 휘청거리는 북한의 취약한 체제를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다. 북핵 담당대사를 지낸 이용준 前외교부 차관보는 영화 같은 BDA 사건 수사 상황을 자신의 책 ‘게임의 종말’에서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BDA는 오랜 함정수사의 결과였다. 무기·위조지폐·마약·위조담배 등 미국에 밀반입 범죄조직 위장 잠입해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오던 한 FBA 수사관은 2005년 8월 미국 북동부 애틀랜틱시티 앞바다 호화요트 ‘로얄 참(royal Charm)’호 선상에서 딸의 위장결혼식을 개최하고 범죄조직 구성원과 거래처 요인을 하객으로 초청했고, 이 중 59명이 FBI에 체포됐다. 이에 앞서 FBI요원은 하객 중 두 명으로부터 위조지폐를 구입하고 대금을 지불하는데, 그들로부터 대전차미사일·AK-47 기관총 등 불법무기 구입 계약을 체결하면서 그가 지불한 대금이 마카오 BDA 게좌에서 입금된 것을 확인한다. 이로부터 BDA 불법 금융활동에 대한 내사가 시작됐다. FBI는 그 과정에서 북한이 BDA에 수십 개 계좌를 보유하고 은행 측 협조 하에 위조지폐와 불법자금 세탁 정황을 파악한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는 8월26일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UPI·월스트리트 저널 등 언론에 낱낱이 보도됐다”
이후 미국이 주도한 對北제재는 2006년 7월5일 대포동 미사일에 대한 UN안보리 결의 1695호, 2006년 10월9일 1차 핵실험 이후 UN안보리 결의 1718호, 2009년 5월25일 2차 핵실험 이후 UN안보리 결의 1874호이다. 이들 제재는 북한의 도발을 ‘규탄(condemn)’하고 북한의 핵무기·미사일 등 교역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제재는 북한의 핵실험 이후 나온 것이니 북한 핵실험 원인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美제재로 北핵실험 나왔다”는 어느 청년
- 金成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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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28, 11: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