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단 사건의 主犯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선관위에 제출된 경찰 자료엔 前科(전과)기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의혹이 일고 있는 강종헌(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은 密入北(밀입북) 혐의를 부인해왔으나, 최근 이를 뒤집는 증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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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장 씨 |
강종헌은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13년을 복역한 인물이다. 그는 1988년 출소 후, 일본으로 추방돼 북한정권을 추종해온 反국가단체 한통련(在日한국민주통일연합)과 利敵단체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간부 등을 지냈다.
당시 사건 판결문은 “피고인 강종헌은 1969년 고교 재학 시부터 1971년 2월 모국 유학 시까지 재일지도원 김영일, 기무라, 하시모도, 다카하시 등에게서 주체사상 등 교양을 받고 포섭되었다”고 記述(기술)했다. 또 ▲1973년 8월, 북괴 공작선에 승선해 한 차례 북한을 방문, 공작금을 수수하고 ▲김일성 회갑 축하선물로 노래를 작사ㆍ작곡하고 맹세문을 작성하여 하시모도에게 제공, 고무ㆍ찬양한 혐의도 있었다.
강종헌은 2012년 1월1일字 <민족21>과의 인터뷰에서 1973년 密入北한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제가 방북했다고 되어 있는데 저를 거물급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방북과 노동당에 입당하는 내용 등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1심 재판 때는 방북사실을 인정했었다’는 질문에 “수사관들이 공작선을 타는 지점, 접선 방법, 북으로 들어가는 항로와 항구, 평양 교외 아지트의 위치와 거기서의 생활내용, 교육받은 내용과 구경한 장소를 모두 구체적으로 상세히 가르쳐줬다”고도 했다.
김현장 씨, 강종헌의 傳言 바탕으로 密入北 폭로
그러나 金鉉獎(김현장) 씨는 편지에서 옥에서 같이 지내며 강종헌에게 들었다는 密入北 당시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너(注: 강종헌)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학교(이름은 잊었지만)를 졸업하였다. 공작선을 타고 평양에 가서 초대소에서 지도원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때 마침 캄보디아 시아누크가 평양에 왔고 김일성 주석이 베푸는 특별공연이 있었는데, 너의 지도원이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여 따라 나섰는데 바로 그 시아누크 환영축하 공연장이었으며, 안내한 지도원이 말하기를 ‘주석님이 와 계시니 오늘은 멀리서나마 보는 것으로 하고 다음 기회에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여 약 20m 떨어진 좌석으로 안내되어 김 주석을 보고 왔다고 했지.”
金 씨는 또 강종헌이 裁判廷(재판정)에서 보여준 행동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비겁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사실대로 조선노동당의 당원임을 떳떳하게 밝히기로 하였고 재판 과정에서 당당하게 혁명가답게,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유학생의 신분으로 남한에 들어와서 활동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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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때 발족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가 2010년 작성한 ‘재일동포 강종헌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 사건’ 조사보고서에는 강종헌 密入北과 관련된 판결문 일부와 진실위의 조사개요가 수록돼 있다. 2010년 진실위는 ‘일부 재심 권고’ 결정을 내렸고, 2011년 강종헌은 서울고등법원에 再審을 청구, 현재 審理(심리)가 진행 중이다.
“가혹행위는 인정되나 범죄 자체가 조작됐다고 단정할 수 없어”
진실위 조사보고서에 나온 사건 판결문에는 강종헌이 1973년 8월3일 日本 니가타 카시와자키에서 北 공작선에 乘船(승선), 密入北했다고 되어있다.
“‘1973년 8월3일 니가타 카시와자키 해수욕장 부근에서 북괴공작선 승선하여, 8월6일 청진항에 도착’하였고, ‘사상교양, 노동당입당, 당증(번호) 7217번을 교부 받고, 김중린과 회합, 남한정세를 보고하고, 공작임무, 공작금 500,000엔을 받고 8월23일 일본 가시와자키 해안 도착’하였다는 것이다. 또, 강종헌은 1973년 11월26일 서광태에게 방북사실과 노동당 입당사실을 말하고, 2. 9. 및 2. 10.에 걸쳐 서광태를 통해 전성환, 황혜헌, 송군식, 장무환 등에게 강종헌이 (북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왔다’고 말하게 하여 정체를 계속 위장하였다는 것이다.”
강종헌은 1심에서 이 같은 혐의를 인정, 死刑(사형)을 선고 받았었다. 그러나 1976년 11월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계속 가해지는 고문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쓰라는 대로 쓰는 도리밖에 없었다”며 기존의 주장을 뒤집었다.
그는 1977년과 1980년에도 再審을 청구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강종헌은 이때 日本 북해도의 한 민박집에서의 숙박기록, 홋카이도 여행 중 母親(모친)에게 보낸 편지지와 봉투, 일본에서 가져온 선물을 반박자료로 제시했다.
진실위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再조사했다. 그 결과 ▲강종헌이 일본 체류 중 묵었다는 민박집의 숙박기록에 나가지마[永島, 注: 강종헌의 일본식 이름(永島宗憲)의 姓으로 추정]로만 기재돼, 나가지마와 강종헌이 동일인인지 여부를 알 수 없고 ▲母親에게 보낸 편지는 他人(타인)이 부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수사 기관에서 방북한 것으로 범죄사실을 조작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진실위는 그러나 “수사기록, 관련 기록, 관련자 진술을 종합해보면, 강종헌이 장기간 보안사에서 불법 구금되어 수사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상당한 강도의 가혹행위를 당하였음이 인정된다”며 수사 과정에서의 일부 문제점은 인정했다.
1973년 시아누크 訪北과 강종헌 密入北 시기 겹쳐
<조갑제닷컴>은 金鉉獎 씨의 傳言대로, 강종헌의 密入北 시기에 시아누크도 訪北(방북)했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1973년 7월21일字 <경향신문>(下)은 “시아누크가 20일 3주일간의 북한 방문을 위해 열차편으로 평양을 향해 떠났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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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7월21일字 <경향신문> |
 
캄보디아 國家원수였던 시아누크는 1970년 론 놀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 亡命(망명)을 감행했다. 이때 중국의 주은래와 북한의 김일성은 시아누크에게 망명지를 제공했다. 특히 북한과 캄보디아는 1964년 修交(수교)를 맺은 이래, 현재까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시아누크는 김일성 생존 시 자주 북한을 방문, 김일성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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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8월13일字 <동아일보> |
金鉉獎 씨는 2012년 5월16일 <조갑제닷컴>과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시아누크가 북한에 갔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고, 강종헌의 傳言만으로 알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金 씨는 “다만, 강종헌이 밀입북했다는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