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진 목사 "從北문제 관련, 새누리당 오버한다"

"약한 종북도 있고 중도 종북도 있고 꼴통 종북도 있다"
인명진 목사

1. 한나라당(現새누리당) 윤리위원장을 지난 인명진(印明鎭) 목사가 이한구 의원을 중심으로 한 새누리당의 ‘從北의원 배제’ 주장에 대해 “잘 다듬어지지 않은 유치한 전략”이라고 비난했다.
 
印씨는 12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 “종북 문제와 관련해서 새누리당이 좀 너무 오버하고 있는 것 같다. 종북이라는 기준이 애매하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印씨는 이어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모 행사에 참석해 “대한민국 헌법에서 용인할 수 없는 사람이 국회에 못 들어오도록 하는 게 준법국회의 기본”이라고 밝힌데 대해 李 의원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이한구 원내대표죠. 이 분이 뭐 차츰 간첩으로 드러날 사람이 있다. 이런 말을 했는데 이거 정말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게 짐작으로 그랬다면 굉장히 신중치 못한 발언이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이 이게 이렇게 말을 막 해도 되는가...(중략)...(간첩이 있다면) 이분이 수사당국에 제보를 해야 돼요. 간첩신고 포상금도 있거든요. 제보해야 돼요 그래가지고 수사해야지 말만 그렇게 해놓으면 국민들이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국회의원 볼 때마다 이 사람인가 저 사람인가 뭐 그럴 것 아니에요.”

종북의원의 검증 문제와 관련해서도 印씨는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검증할 건가? 또 누가 검증할 건가? 누가 아주 정확하게 확실한 그런 입장을 가지고 객관적 입장을 가지고 저 사람 종북이다 아니다 구분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르고 같은 종북이라 하더라도 같은 보수라 하더라도 중도보수도 있고 꼴통보수도 있는 것처럼 같은 종북이라 하더라도 약한 종북도 있을 것이고 중도종북도 있을 것이고 꼴통종북도 있을 것이고 이 검증한다는 것, 사람의 생각을 뭘로 잰다는 것, 판단한다는 것,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괜히 쓸데없는 분란만 일으키는 일이다.”

印씨는 또 “몇 사람 설사 종북의원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그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저렇게 될 나라가 아니지 않나”라며 “새누리당 150석 과반수나 되는데 자기들만 똑바로 잘 나라 지켜도 제대로 되는 거에요, 나라가”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쓸데없는 얘기 때문에 낭비하지 말고 국회나 빨리 열라. 지금 민생 문제,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데 법률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다는 것 아닌가? 이거나 열심히 국회의원들이 해줬으면 좋겠다”라며 從北인사들의 국회 입성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음을 드러냈다.

그는 이어 “(종북 문제) 정치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국민들이 이제 판단할 것이다. 서서히 국민들이 안다. 국민들을 우리 믿어야 된다. 국민들이 바보인가...(중략)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너무 논란 만드는 것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印목사, '해방신학'에 기반 둔 <도시산업선교회> 출신
  
2. 左派 언론에서 보수적 교계 인사로 거론되어온 印씨는 예장통합 출신으로 ‘해방신학’에 기초한 '도시산업선교회'(이하 '도산')에서 1972년부터 12년 동안 총무로 재직했었다.  도산은 손학규 민주당 前 대표, 김문수 경기도지사, 오종세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등 수 많은 재야-노동 운동가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印씨는 긴급조치 1·4호 위반, 9호 위반, YH사건, 김대중 내란예비음모사건 등 여러 시국(時局)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한 차례 국외로 추방된 경력을 갖고 있다. 1997년 대선에서는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쳐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여권과 인연의 고리를 건 것은 1987년 대선국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DJ)·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다. 그는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대변인을 맡은 인연으로 양김씨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야권 후보 문제를 놓고 재야가 ‘비판적 지지파’(비지)와 ‘후보 단일화파’(후단)로 양분될 때 그는 후단 편에 섰다.

“YS와 인간적 관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아직 군부가 시퍼렇게 살아 있고, 비록 오해였지만 DJ에 대한 국민의 거부반응이 존재했기 때문에 YS로 단일화 하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이었다. YS가 먼저 하고 그 다음 DJ가 하는 패키지를 만들었다. 뒤에 할 사람은 70% 지분을 갖고 당을 장악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민주화세력의 10년 집권 플랜을 만들었다.”

당시 후단 입장에 섰던 재야인사는 그와 이재오(注: 남민전 사건 연루자) 특임장관, 고 조영래 변호사(注: 민청학련 사건 연루자, 전태일 평전의 저자)  등 소수였다. 그 인연으로 그는 3당 합당 후 집권한 YS정권의 외곽세력이 됐고, 그 맥을 이은 한나라당에 ‘소금 역할’을 하기 위해 윤리위원장을 맡았다.(출처: 2011년 발행 <주간경향> 936호 인용)》

한편, 印씨는 2006년 10월24일 한나라당 윤리 위원장직 취임 시부터 김근태(사망) 당시 열린당 의장의 ‘개성춤판’에 대해 “인간적 실수”, “잠깐 실수한 것”, “그럴 수 있는 일” 등으로 감싸주며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너그러움(?)을 보여줬었다. 
 
그는 그러나 김정일과 左派정권에 맞서 앞장서 싸워 온 김용갑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는 광주 ‘6·15민족통일대축전행사’를 “해방구”에 비유한 발언과 10·26재보선 불공정 공천에 항의, 무소속후보자를 지원한 문제 등을 문제 삼으며 집요한 공세를 펼쳤었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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