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과 통제, 이념과 전쟁에 절망하다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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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이들은 고난의 나날을 감내해야 했다. 처절한 이념논쟁으로 남북이 총부리를 맞대던 때에 잘못 선택한 길로 들어서거나 판단착오로 가족과 생이별을 한 언론인과 문인이 많았다.
정 교수는 한국언론사의 연구범위를 북한 언론에까지 넓혀 해방공간과 6·25 전쟁기의 언론을 분석했다. 유감스럽게도 북한은 언론과 문학을 선전선동 도구로 활용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 《노동신문》과 《민주조선》이 열심히 ‘관보’ 노릇을 했다.
심지어 시인 임화(林和)를 비롯한 남로당 계열 지식인들은 남한에서도 그랬지만 북으로 올라가서도 언론과 문학을 무기로 남조선의 ‘해방’을 외치며 혼신을 다했지만 비참한 말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육탄과 폭약이 ‘국가의 가장 고귀한 자본인 인간’의 생명을 무수히 살상하고 인간노력의 결정인 문화재를 여지없이 파괴함은 실로…>(김진섭의 <아즉은 염려없다> 중에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0년 1월 6일자 학예란에 기고한 글로 김진섭(金晋燮)은 일본 헌병대에 불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고, 신문사 간부들은 차례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당시는 2차 대전의 불길이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이란 점이 필화사건을 부추겼던 것이다.
정 교수는 “총독부의 언론탄압은 민족언론의 수난사라는 시각에 고정시킬 것이 아니다”고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군국주의 일본 본토에서도 통제는 시행되었고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