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6월 계엄령 계획문서 입수

「1987년 6월 민주화시위 진압 계엄령」 군부 반대로 취소
당시 특전사령관 閔丙敦 장군 증언 및 군사기밀 자료 문건 입수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1987년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의 「6ㆍ29 민주화 선언」이 있기 10일 전인 6월19일, 전국적인 규모로 번지던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기위한 계엄령 준비 명령이 군에 내려졌으나 군부(軍部) 반대로 무산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내용은 月刊朝鮮이 최근 입수한 「작전명령 제 87-4호」(군사2급비밀) 제하의 비밀 문건과 당시 특전사령관이던 민병돈(閔丙敦) 장군의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그동안 6월19일 군에 내려진 명령은 위수령(衛戍令)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민병돈(閔丙敦) 장군은 月刊朝鮮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1987년 6월19일 주요 지휘관들에게 계엄령 준비 지시가 내려졌으나, 군이 강력하게 반대해 이를 취소시켰다』고 말했다.

「작전명령 제 87-4호」 비밀 문건에는 「11군단장을 부산·경남 지구, 9군단장을 충남북 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이라는 명령문이 있다.

육군본부가 작성, 참모총장 명의로 주요 지휘관들에게 6월19일 배포된 이 비밀 문건은 급하게 작성된 듯 내용을 첨가하거나, 별첨으로 작성된 전투편성표에 부대 배치도 변경 등을 手記(수기)로 작성하고 있다.

「작전명령 제87-4호」는 날짜는 적시하지 않은 채 군의 임무를 「육군은 현 임무를 수행하면서 '87년. 6월0일0시부로 소요진압작전을 실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계엄령 준비명령이 1987년 6월 당시 전국적으로 번지던 대규모 시위 진압을 위해 내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민병돈 장군은 『특전사ㆍ수방사 같은 주요 부대에 명령이 하달되었다며 그냥 군대가 움직인다면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장군은 『당시 보안사 보안사 처장인 장석규 준장과 손수태 대령 등 일단의 준장 및 영관 장교 등 비교적 소수의 장교들이 반대 건의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민장군은 『군부의 계엄령 반대 건의를 당시 보안사령관인 고명승(高明昇) 장군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당시 소수 장교의 계엄령 반대 건의가 대통령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지휘통제력을 가진 특전사령관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도 잘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전명령 제 87-4호」에 포함된 작전개념 항목에서는 ▲26사단, 3특전여단, 해병 2개 연대를 11군단에 배속 ▲9사단을 9군단에 배속 ▲7·11특전여단을 31사단에 배속 ▲706 특공연대를 39사단에 배속 ▲20사단, 30사단, 1·5·9특전여단, 701·705·708특공연대를 수방사에 배속 등의 부대 이동을 지시하면서, 「전, 후방 경계부대는 '87.6. . 시부로 진도개 둘과 동일한 경계태세를 유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부산지역에서 운용될 예정이던 26사단, 대전 지역에서 운용될 예정이던 9사단 등 전방 부대의 이동 지시가 눈길을 끈다. 경계태세 「진도개 둘」은 對간첩 작전과 같은 수준의 경계 명령이다.

위수령(衛戍令)은 일정지역에서경찰력만으로 치안유지가 어렵게 됐을 때 시ㆍ도지사의 요청으로 군부대가 출동, 단순한 치안유지 활동을 벌이는 명령이다. 계엄령은 헌법에 근거해 계엄이 선포된 지역 내에서 군이 사법, 행정 등을 완전 장악, 통제하는 명령이다. 계엄이 발령되면 군은 언론·출판·집회 및 결사·신체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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