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최보식이 만난 사람' 유성옥(55)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은 국가 정보기관에서 對北 정보분석 업무만 26년을 맡았고 협상을 위해 여덟 번 訪北한 적도 있다. 그는 올 초 國情院(국정원) 산하 이 연구소 소장으로 옮겼다. 그는 인터뷰를 위해 국정원의 사전 승인을 받았고 열흘간 준비했다고 한다.
인터뷰 기사는 김정은의 북한을 읽는 데 핵심적인 고급 정보를 담고 있었다.
*"김정은은 노회한 김정일보다 훨씬 무모할 수 있다”
*"(북한군 총참모장 리영호가 제거된 것은) 북한의 '선군(先軍)정치'하에서 군은 당(黨)보다 우위의 권력을 행사해왔다. 이를 견제할 조치로 민간인 출신 최룡해(62)를 軍 총정치국장으로 임명하고, '軍內 서열 1위'로 발표했다. 또 軍이 장악해온 외화벌이 사업권도 내각으로 옮겼다. 리영호가 어떤 불만스러운 언동을 표출하다가 포착된 것으로 보인다."
*"총정치국장 최룡해는 장성택이 발탁하였다. 그는 김일성과 함께 활동한 '혁명 1세대' 최현(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이다. 1990년대 중반 장성택(66)이 黨 청년부장을 할 때 산하 청년 조직 책임자로 인연을 맺었다."
*"장성택은 '수양대군'이 될 수 없다. 김정은·김경희·장성택은 공동 운명체다."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는 2004년 프랑스에서 유방암으로 52세에 쓸쓸하게 숨졌다. 김정일은 내연 관계인 비서 김옥을 다섯째 부인으로 맞았다. 이런 바람둥이 아버지를 김정은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부인을 데리고 다니고 고영희 복원 사업을 하는 데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 심리가 깔렸다고 본다."
*"손을 올리는 각도라든지 끌어안는 동작이 김일성 그대로다. 외모만 닮아서 이렇게 될 수는 없다.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빌리기 위해 모방 훈련을 했을 것이다."
*"김정은은 1984년생 스물여덟 살이다. 북한에서는 1982년생으로 발표한다. 김정일이 1942년생, 김일성은 1912년생, 北은 이렇게 딱 떨어지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神格化 작업을 위해 출생부터 조작한다. '김정은' 이름을 가진 북한 주민도 이미 다 改名시켰다."
*"(김정은은) 생산성을 높여 주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면 자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진다. 김정은이 4·15 기념행사(김일성 생일 100주년)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자'고 연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와서 다시 '고난의 행군'을 강요하면 주민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발빠르게 개혁·개방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미국의 제재가 안 풀리면 국제사회의 지원과 투자가 어렵다. 열쇠는 북한이 핵(核)을 포기하느냐에 달렸다. 몇 달 전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헌법을 그렇게 고쳤다면 핵 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개혁·개방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데, 핵을 고집하는 한 개혁·개방은 불가능하다. 이게 김정은의 딜레마다."
*"북한에서 300여개의 장마당이 활성화된 까닭은 배급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우리 정부가 지원해준 쌀은 주민들에게 배급해줬다. 쌀 지원이 끊기자 북한 정권은 '어렵지만 참아라. 곧 대미(대한민국 미곡)가 올라온다'며 주민들을 달래왔다. 그게 안 통하자 '너희가 알아서 벌어먹어라'며 장마당을 허용한 것이다. 對北 압박조치가 역설적으로 북한의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과거 정권에서는 돈과 물품을 갖다주면서 '남북 대화를 해달라'고 사정했다. 북한을 스포일(spoil)시키고 잘못 길들였다."
*"김정은은 가벼운 행보로 '깜짝 쇼'를 많이 할 뿐 북한 장래를 위한 진지한 고민과 신중함이 보이지 않는다. 어떨 때는 유화적이고 어떨 때는 도발적이다. 냉탕 온탕을 오가는 것은 전략적인 접근을 안 한다는 뜻이다. 김정은 정권은 오래가기 어렵다고 본다."
,,,,,,,,,,,,,,,,,,,,,,,,,,,,,,,,,,,,,,,,,,,,,,,,,,,,,,,,,
북한이 8월말 북경에서 있었던 日北간 정부 간 회담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를 본회담 의제에 포함하는 방안을 수용했다는 日측 주장에 대해 허튼소리라며 부인했다고 일본 국영 NHK가 5일 북한 외무성의 성명을 인용, 보도했다.
북한 외무성은 성명에서 "일본이 계속 불순한 정치적 목적만을 추구한다면 朝·日 정부 간 대화가 이어지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일본에 일본인 납치 문제가 아니라 현재 북한에 있는 일본인의 유해 송환 문제를 우선 협상 의제로 두라고 요구했다고 NHK는 보도했다.
,,,,,,,,,,,,,,,,,,,,,,,,,,,,,,,,,,,,,,,,,,,,,,,,,,,,,,,,,
한국이 통일되거나 안정되고 강력한 나라가 되어야 韓日관계가 좋아진다. 韓日관계가 좋았던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반도의 주인이 된 7세기말 이후 약100년간, 그리고 박정희가 주도한 경제개발이 성공한 1960년대 이후이다.
신라의 불교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통일 직후인 8세기 중반기의 景德王代였다. 불국사, 석굴암, 聖德大王神鐘을 만들도록 한 이가 경덕왕이다. 일본도 이 무렵 나라(奈良)를 수도로 하고 불교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일본 聖武天皇은 서기 743년에 화엄종의 本寺로서 東大寺를 건립하도록 지시한다. 745년부터 공사가 본격화되었다. 일본의 國力이 총동원된 대사업의 핵심은 금동불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盧舍那大佛이라 불리는 금동불상이 완성되어 준공식을 갖기로 한 것은 서기 752년이었다.
이해 정월 일본은 사신을 신라 景德王에게 보내 東大寺 大佛의 開眼式(개안식: 완성한 부처에 눈을 그려넣는 행사)이 4월에 있을 것임을 통보했다. 신라는 그해 3월22일 일곱 척의 배에 700여 명의 사절단을 태워 大宰府(후쿠오카 북쪽)에 도착시켰다. 이들중 370명은 나라(奈良)까지 가서 開眼式을 마친 大佛에 참례했다. 이 大佛은 높이가 16m나 되고 무게는 300t을 넘었다.
신라 경축사절단은 貿易商이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부러워하는 많은 물건을 가져갔는데 일본 조정은 귀족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신라 물건을 사들였다. 그 구매신청문서가 買新羅物解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현존한다. 구매신청이 들어온 물건은 향료, 염료, 안료, 약품, 서적 등으로 실제 팔린 것은 약200점이다.
2012년 여름의 포항~교토(마이즈루) 바닷길 교류는 1260년 전 신라인들의 東大寺 방문을 想起시킨다. 7~8세기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지금의 韓日 관계와 비슷하다. 한반도가 신라의 의하여 통일되어가는 과정에서 일본은 처음엔 신라와 敵對的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통일이 완성된 다음엔 우호관계로 돌았다.
일본은 663년 百濟 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약3만 명을 파병, 白村江 해전에서 羅唐 연합군에 패배하였다. 672년 親신라적인 天武天皇이 壬申의 亂으로 집권하고, 신라가 唐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두 나라는 가까워진다. 신라와 일본은 거의 동시에 唐에 대한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상호 교류를 늘린다. 서기 668(文武王)~779년(惠恭王) 사이 신라는 47회에 걸쳐 遣日本使를 보내고, 일본은 이 기간 25회 遣新羅使를 보낸다. 일본은 통일국가를 만들어가는 신라를 연구하여 古代국가를 완성하는 데 참고로 하였다. 신라-일본 관계가 좋았던 데는 한반도가 신라에 의하여 통일됨으로써 안정기에 들어갔고, 두 나라가 불교를 共有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이 북한정권을 흡수, 자유통일하면 한반도가 안정되고, 한국과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제도를 共有함으로써 항구적인 친선관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포항은 신라 때 韓日 교류의 창구였다. 오늘의 포항제철은 韓日 협력의 상징이다. 포항과 교토 두 도시를 잇는 바다의 뱃길은 1260년 전 신라 사절단 東大寺 방문의 意義를 되새기게 한다.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두 나라가 협력하면 親善관계는 더욱 굳어질 것이다. 한국인들은 '통일되고, 변영하고, 자유롭고, 강력한 한반도'를 꿈꾼다. 통일신라와 대한민국처럼 개방적이고 강력한 정권이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때 진정한 韓日 우호가 가능할 것이다.
1급 對北전문가의 결론: "김정은 정권은 오래가기 어렵다고 본다."
- 조갑제닷컴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12-09-07, 1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