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지지자와 호남인들도 박정희의 維新체제 긍정이 더 많다!

동아일보 여론조사. 모든 계층에서 압도적 우세. 유신체제 긍정이 68%, 부정 26%.
오늘 동아일보가 리서치 앤 리서치에 의뢰, 발표한 大選 관련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朴正熙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모든 연령층, 모든 이념층, 모든 학력층, 모든 소득층에서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심지어 민주통합당 지지자들도 긍정((53%)이 부정평가(43%)보다 더 높았다.

이해찬과 박지원과 좌파매체가 주도하는 역사논쟁이 敗着임을 증명한 통계이다.

*유신체제에 대한 긍정평가는 약68%, 부정 평가는 약26%였다.
*특히 19~29세 남자들은 71%가 긍정하였다. 군대가 한국 現代史 교육을 강화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광주 전라도에서도 약55%가 유신 체제의 경제발전을 긍정했다.
*자신을 진보성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55%도 긍정 평가였다.
*블루칼라 노동자들도 약69%가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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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시절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자료
趙甲濟

대학생의 질문: 朴正熙 대통령이 1972년 10월17일 소위 유신조치를 통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다음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은 제2의 쿠데타로서 영구집권을 획책한 것이 아닌가? 이 기간에 야당과 언론과 노조의 활동이 탄압을 받았다.

필자의 답변: 유신조치는 불법적으로 憲政(헌정)을 중단시킨 점에서 朴 대통령의 두 번째 쿠데타였다. 그가 1979년 10월26일 피살될 때까지 정치적 자유와 언론 자유가 제약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법률과 정치적 측면에서 평가하면 부정적일 것이다. 역사적 평가는 법적 측면을 포함하여 國政(국정)에 대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므로 7년의 유신 기간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입체적으로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이 기간 중 3차 5개년 계획(1972~1976년)이 추진되었다. 이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1%였다. 1977년은 10.3%, 78년은 11.6%, 79년은 6.4%였다. 이 7년간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맞아 경제에 큰 타격을 받고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나라들도 많았다. 朴 대통령은 야당과 언론의 견제를 덜 받는 상황을 만들어 國力(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했다. 유신기간은 중화학공업 건설 시기와 일치한다. 투자비가 많이 드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오일쇼크 기간 중에 추진했고,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이로써 한국은 동남아의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한때 우리보다 앞섰던 나라들을 멀리 따돌리고 개발도상국의 선두에 나섰다.

維新기간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전자, 조선, 종합제철, 석유화학, 자동차, 기계공업은 오늘의 한국을 세계 10大 경제대국으로 만든 기반이 되었다. 중화학공업을 바탕으로 한 自主국방력 건설도 성공하였다. 한국인들이 장기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한국이 一流국가를 꿈 꿀 수 있도록 만든 것이 維新체제이다.

유신기간 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19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年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 데 반해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한국 다음이 칠레로서 11.8%였다. 칠레에서도 이 기간 중 피노체트가 군부 쿠데타로 등장하여 박정희式 모델을 참고하여 이 나라를 개혁하고 있었다. 오일쇼크 같은 큰 경제위기가 닥쳐오면 개발도상국에선 강력한 지도력이 요긴하게 쓰인다. 세 번째 임금 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당시 국민당의 계엄령 통치가 계속되던 대만으로서 11.5%였다. 같은 독재라도 사회주의式 독재는 경제위기 극복에 실패한다. 아직 개방으로 나가지 못하던 중국의 연평균 임금 상승률은 1.3%에 불과했다.

維新(유신)기간에 한국이 貧益貧富益富(빈익빈부익부)를 보여 계층간 소득격차가 커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다르다. 소득 下位계층 20%에 대한 上位계층 20%의 소득 비율을 보아도 한국, 대만, 일본은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평등한 나라로 꼽혔다. 유신기간 한국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올랐고, 소득격차도 상대적으로 낮은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77년 7월1일부터 시행된 의료보험은 세계적 성공사례이다. 朴 대통령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없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朴 대통령은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라고 확신하고 민주주의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정지시킨 뒤 경제발전에 國力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 이때 이뤄진 경제의 토대와 안보의 울타리가 1980년대 민주화의 소용돌이를 견디게 했던 것이다. 역사는 박정희를 한국 민주주의의 2大 건설자로 평가할 것이다. 또 한 분은 물론 이승만 建國(건국)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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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議제도란 미명下에 非능률 감수”
1972년 7월 17일.

이날 朴 대통령에게는 제헌절 경축사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금명간 憲政(헌정)을 중단시킬 조치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관례대로 헌법수호를 강조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날 그는 憲政의 낭비적 요소를 비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헌정 제도를 운영해오는 과정에서 과연 代議(대의)제도의 이름으로 非능률을 감수했던 일은 없는지, 자유만을 방종스럽게 주장한 나머지 사회기강의 확립마저 독재라고 모함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가 마치 분열과 파쟁을 뜻하는 것으로 본의 아니게 착각한 일은 없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朴 대통령은 민주제도를 형식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내실적 차원에서 짜임새 있고 능률적으로 운영해야 하고, 이것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지나놓고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새 헌정질서를 모색하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朴 대통령이 유신선포 직전에 확정한 유신헌법의 핵심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국가기관의 頂上(정상)에 놓고 여기서 대통령을 間選(간선)한다는 것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법안을 검토할 때 朴 대통령은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대통령 후보의 정견발표와 찬반토론이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이어서, 이는 ‘선출이 아니라 추대가 아닌가’라고 그는 곤혹스러워했다.

심의과정에서 李厚洛의 중앙정보부 팀은 남북대화를 물고 들어가면서 강하게 나왔다. 그들은 북한 측에 대하여 한국의 국론이 단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朴 대통령은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도 이 건의를 받아들였으나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김정렴 증언).

1972년 10월 16일.

이날 오후 6시. 金鍾泌 국무총리는 필립 하비브 駐韓 미국대사에게 다음날 朴 대통령이 발표할 비상조치의 내용을 통보했다(같은 통보는 駐韓 일본대사에게도 이뤄졌다). 金총리는 이 내용을 앞으로 24시간 비밀에 부쳐줄 것을 요청했다. 하비브는 수 시간 뒤 美 국무성으로 긴급電文(전문)을 보냈다.

<이 비상조치는 朴 대통령에게 적어도 12년을 더 현직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 기간 중 반대와 불만은 더욱 약화될 것이다. 만약 이 조치가 시행된다면 한국은 완전한 권위주의 정부로 변모할 것이다. 朴 정권이 북한과 대화하는 데 국내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 오버도퍼 前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쓴 《두 개의 한국》이란 책에는 하비브 대사가 대사관 측이 朴 대통령의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지 못한 데 대하여 화가 났었다고 썼다. 그는 朴 대통령이 비상조치의 발표일을 잡은 것도 미국을 바보로 만들기 딱 좋게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 3주 전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질서를 중단시켰지만 미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 마르코스와 朴正熙는 닉슨 대통령이 再選(재선)을 노리고 선거전에 돌입해 있는 시점을 잡았다. 닉슨은 베트남戰 휴전협상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닉슨은 선거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데 마르코스나 朴 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공개적으로 개입하여 말썽거리를 만들 여유가 없었다.

하비브는 電文에서 “가장 강경하고 즉각적인 조치만이 朴 대통령의 예정된 비상조치를 막을 수 있지만 다음 몇 시간 안에 그런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의무는 아니다. 그렇지만 朴 대통령은 이번 조치로써 그와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큰 문제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번 조치에 대해서 논평할 때는 한국의 국내문제에 대해서 무관함을 명백히 하면서도 극히 우회적 표현을 해야 할 것이다”고 건의했다.

美 국무부는 하비브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대신 朴 대통령에게는 다음과 같이 항의하도록 훈령했다.

<한국 정부가 이처럼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미국 정부와 의견 교환을 하지 않은 것은 미국이 역대 한국 정부, 특히 現 정부에게 제공했던 지원과 희생을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美 국무부는 또 하비브에게 지시했다.

<만약 귀하가 ‘미국은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것은 국내문제이므로 결정권은 朴 대통령에게 있다”고 답하라>

美 국무부는 비상조치에 즈음한 朴 대통령의 성명서가 美中 화해와 이에서 비롯된 국제정세의 流動化(유동화)를 비상조치의 한 이유로 지적하고 있는 데 대해서 크게 우려했다.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은 金東祚(김동조) 駐美 한국대사에게 항의하여 이 대목을 빼도록 요청했다.

1972년 10월 17일.

이날 아침 朴 대통령은 崔圭夏·朴振煥 등 특별보좌관들을 서재로 불러 저녁에 발표될 비상조치 발표문을 읽고 있었다. 李厚洛 부장이 들어오더니 “미국대사관에서 발표문 중 ‘미국과 중공의 접근’이 이번 조치의 한 원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삭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라고 보고했다.

“내가 뭐 거짓말했나?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 답답해서….”

金正濂 비서실장도 “각하, 그 대목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래, 빼줘!”

좀 있으니 일본대사관에서도 비슷한 주문이 들어왔다. 朴 대통령은 “그것도 빼줘!”라고 말하더니 “호네누키노곤냐쿠다”(뼈가 없는 곤냐쿠다. 곤냐쿠는 구약나물의 지하뿌리를 반죽한 다음 끓는 석회유와 섞은 뒤 물에 넣어 익힌 식품)라고 중얼거렸다.

유신선포로 알려진 1972년 10월 17일의 대통령 특별선언은 비상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회를 해산하며,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열흘 이내에 새 헌법안을 공고하며, 그 한 달 이내에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朴 정권은 전국 비상계엄도 선포했다. 그 뒤 새 헌법안도 계엄下에서 찬반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이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나는 入社 2년짜리 기자로서 이 뉴스에 접했을 때 그야말로 느닷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5·16 군사혁명은 尹潽善 대통령마저 “올 것이 왔구나”라고 할 정도였고, 서울 시민의 과반수가 혁명을 지지한 것으로 여론조사가 나올 정도로 외부의 혼란이 무르익은 가운데서 일어났었다. 10월유신은 그런 가시적인 요인이 전혀 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 이건 朴正熙의 독재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에 대한 이런 선입견이 그 후 7년간 朴 정권을 따라다녔다.

이날 朴 대통령이 읽은 특별선언문에도 왜 이런 엄청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

진행 중이던 남북대화에 대비한 한국의 체제 정비 필요성, 파쟁을 일삼는 정당과 국회에 대한 불신,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만으로는 헌정중단의 당위성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朴 대통령의 다른 연설과 비교해서 이 연설은 내용상 힘이 없었다. 다만, 끝 부분의 한 줄이 그의 비장한 각오를 드러낼 정도였다.

<나 개인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입니다>

이날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은 盧載鉉(노재현) 육군참모총장. 그 직후 朴 대통령은 육군보안사령관 姜昌成(강창성) 소장을 불렀다. 朴 대통령은 “이 친구들을 잡아 넣고 철저히 조사해”라면서 명단을 건네주었다. 李世圭, 趙尹衡, 趙淵夏, 李鍾南, 姜根鎬, 崔炯佑, 朴鍾律, 金漢洙, 金祿永, 金敬仁, 羅碩昊, 金相賢, 洪英基, 尹吉重, 李基澤, 朴漢相, 金東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姜昌成은 “朴 대통령이 한 사람씩 짚어가며 문제점과 비리를 이야기했다. 나는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 尹吉重, 李基澤, 朴漢相, 金東英, 金相賢, 趙尹衡, 李世圭는 온건하니 제외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李世圭하고 趙尹衡은 절대로 안 돼”라고 잘랐다. 金相賢은 그대로 넘어갔다가 한 달 후 유신비판 발언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군부대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 야당의원들은 주로 金泳三·金大中의 측근이었거나 朴 대통령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를 국회에서 폭로한 이들이었다. 비리혐의라고 했지만 朴正熙의 私感(사감)이 많이 개재된 수사지시였다. 수사관들은 “金大中의 자금출처와 조직계보를 대라”는 식으로 다그쳤다.

이때 일본에 나가 있던 金大中은 국내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자기 수첩의 1972년 12월 19일자 난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金相賢-너무 아파서 만 원까지도 자백. 나의 정치 자금 캐는 것. 안방까지, 부의금 명단. 운전사 고문.

趙윤형 태도 의연: 나에게 격려. 玉斗-제일 强, 李泰九 씨 全裸 고문>

1972년 10월 21일.

朴 대통령은 사이공에서 귀임한 하비브 駐韓 미국대사를 면담했다. 하비브 대사는 사이공에 가서, 베트남 휴전案(안)을 가지고 와 베트남의 티우 정부를 설득하고 있던 키신저를 만나고 온 뒤였다. 하비브는 朴 대통령에게 막바지에 접어든 베트남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을 보고했다.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 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우려를 표명했다.

“휴전案에 침략자인 월맹군의 철수는 규정하지 않고 외국군의 철수만 규정한 것은 불공평하다. 월맹과 베트콩과 베트남을 묶는 연립정부案의 성격이 애매하다. 국제감시에 대한 규정도 불안전하다. 따라서 이 案은 공산당의 침략을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되어 베트남 정부를 약화시키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티우 대통령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에 대해서는 강한 힘만이 그들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게 할 수 있다. 만약 이 案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베트남은 1년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2년 10월 23일.

駐베트남 한국대사 柳陽洙(유양수)는 본국의 훈령으로 일시 귀국하여 일차로 朴 대통령에게 베트남 휴전협상 건을 보고 올렸었다. 이날 새벽 金正濂 비서실장으로부터 柳 대사에게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오전 9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朴 대통령은 하비브로부터 통보받은 휴전案을 柳 대사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걱정을 티우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柳 대사는 朴 대통령이 하비브로부터 받은 휴전案이 자신이 그 며칠 전에 朴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첩보 내용과 너무 달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신선포 7일째인 朴 대통령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워 가면서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걱정과 다짐이 오고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다 좋지만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미국의 국론이 저렇게 분열되어 수습을 못 한다면 미국에 대한 자유세계의 신뢰는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베트남을 보라! 자주국방을 하려면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선 국력의 낭비를 막아야 한다. 효율의 극대화, 국력의 조직화가 유신선포를 한 이유이다.”

朴 대통령은 자기 말에 취해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朴 대통령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柳 대사가 대통령 집무실을 나올 때 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1972년 10월 27일.

이날 朴 대통령이 발표한 ‘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은 유신선포를 만들어낸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당당하게 밝힌다.

<남의 민주주의를 모방만 하기 위하여 귀중한 우리의 국력을 부질없이 소모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몸에 알맞게 옷을 맞추어서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신념을 갖고 운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헌법 개정안은,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안정과 번영의 기조를 굳게 다져나감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규범임을 확신합니다>

朴 대통령은 이날 담화문에서 유신체제라고 불리게 될 새 제도를 ‘능률적인 민주적 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날 국무회의는 사실상의 쿠데타인 이번 조치를 ‘10월유신으로 개념화하여 모든 유신작업을 진행할 것’을 의결했다. 崔圭夏가 座長(좌장)으로 있던 특별보좌관 일동이 그렇게 건의했던 것이다.

이 作名(작명)에 주로 관계했던 분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던 철학자 朴鍾鴻(박종홍)·林芳鉉(임방현) 두 특보였다. 중국의 고전인 詩經(시경)에 나오는 ‘周雖舊邦(주수구방)이나 其命維新(기명유신)이라’는 문구(周나라는 오래된 나라이나 국정혁신으로 그 생명력이 새롭다)에서 ‘維新’, 또 공자가 편찬한 <書經(서경)>에 나오는 ‘咸與維新’(함여유신: 다 함께 참여하자)에서 ‘維新’을 따왔다.

維新이라 하면 한국인에게는 일본의 성공한 근대화 개혁인 ‘明治維新’이 너무 강하게 기억되어 아무리 중국의 고전을 들먹여도 일본적인 것, 무단적인 것, 따라서 非민주적인 것이 연상되었고, 이것이 일본 육사 출신 朴 대통령의 이미지와 중첩되었다. 維新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공통된 가치관으로서 뿌리 내리기에는 너무 고루하고 딱딱한 명사였다. 維新의 모토인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는 朴 대통령의 뛰어난 작명이었지만.

육군보안사령관 출신인 金載圭 중장은 당시 제3군단장이었다.

“유신헌법案이 나왔을 때 나는 세 번이나 읽었지. 읽는 데 분통이 터지더라고. ‘더러운 놈의 나라, 이게 무슨 헌법이야, 독재하는 거지’라고 고함을 지르고 책을 내던졌더니 애 엄마가 놀라 깨더군”

이는 金載圭가 처형되기 하루 전 면회온 동생(恒圭)에게 한 말이다.


역사 평가의 기준

*후발국 중에서 민주화를 먼저 하고 경제개발에 성공한 나라가 있나?
*후발국 중에서 경제발전을 먼저 하고 민주화에 실패한 나라가 있나?
*민주주의를 도입한 지 30년 되는 나라가 전쟁중임에도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여 성공한 나라가 있나?
*링컨이 박정희 자리에 있었다면 100% 민주주의를 하였을까?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사유재산권이 말살된 적이 있나?
*역사 평가는 누가 하는가?
*후대의 역사 평가 기준은 헌법이 유일한 기준인가?
*소멸한 헌법제정권력에 대한 사후의 헌법적 판단은 제한이 없는가?
*민주주의는 하느님인가?
*유신에 대한 헌법적 역사 평가를 요구하는 이들이 헌법을 무시하는 이들이라면 이게 유효한가?
*건국의 정당성과 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역사논쟁을 할 자격이 있는가?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역사관 논쟁을 하라!
*비상시 국가와 민주주의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역사 평가의 기준: 객관성과 공정성, 종합적, 문명발전의 기준.
*역사발전의 원리: 자유-부국강병-민주화. 시장경제가 민주주의의 요람.
*자유와 평등, 경제와 민주 선후 관계
*대한민국 성공 모델을 누가 만들었나. 이승만-박정희인가, 김영삼-김대중인가.
*20세기 10大 인물
*성장이 불평등과 불만을 줄인다. 그래서 민주화가 가능하다.
독재의 여러 종류
*왜 사우디, 베네수엘라는 부자이면서도 민주화가 안 되고 자원빈국이 되었나. 공짜의 해악.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게 민주주의의 뼈대를 만드는 것이다.

21세기형 유신 '대한민국 리네베이션'이 필요하다. 보수는 보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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