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고요한 안식에 빠져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공동묘지, 집요하게 내린 장맛비가 묘지 하나를 무너뜨리면서 사건은 시작됐습니다.
김희숙(고인의 부인): 꿈에 영감님이 서 있는데 한복을 잘 입고 지팡이 짚고 있어. ‘어디 갔다 오세요’ 그랬더니, ‘잔칫집에요’ 그래요.
진행자: 꿈자리가 묘하다 했더니 37년 전 죽은 남편이 돌연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희숙(고인의 부인): 아이고 올 것이 왔구나. 결국은……. 하여튼 무서워. 나는 엄마라 아이들 다칠까봐. 아들 셋, 딸 둘. 아이들 다칠까봐 제일 무서웠어.
진행자:남편이 시신이 세상에 나오면 아이들에게 화가 미친다고 굳게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난 8월1일 묘지이장을 앞두고 남편이 마침내 세상에 나왔습니다.
<골반만 주세요. 한쪽만 올려줘 봐요>
진행자: 묵직한 세월의 무게를 간직한 남편의 유골은 놀랍게도 부식을 피해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이 유골에서 뜻밖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오른쪽 두개골에 뚜렷하게 새겨진 함몰골절의 흔적입니다. 남자는 37년 전 추락사 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두개골에 남겨진 이 원형의 함몰골절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이윤성 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글쎄, 시나리오는 여러 개가 있거든요. 여러 개가 있는데….
진행자: 이 두개골 골절을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각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이정빈 명예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때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지. 100% 맞습니다.
김이석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경험과 교과서에 의해서 추락을 먼저 우선순위로 잡아야 하지 않나.
권일훈 소장(‘ㅅ’ 법의학연구소): ‘추락’의 상황에서 발생한 그런 자연스러운 손상으로 보인다.
윤일규 교수(순천향대학교 신경외과): 함몰 골절이 어떤 형태냐 하는 쪽으로 우리가 착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겁니다.
진행자: 미처 못 다한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듯 오랜 세월의 침묵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 남자의 유골, 그것은 대체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 걸까?
장호성(고인의 차남): 항상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었죠. 아,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하는 건 알아야 될 것 아니에요.
진행자: 이것은 한 경기도의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유골을 똑같이 재현해서 만든 모형 뼈입니다. 사망자는 57살의 남성.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등산도중에 일어난 실족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묘한 상처들이 보입니다. 여기, 두개골 오른쪽에는 지름이 6cm정도 되는 둥글게 함몰된 흔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엉덩이뼈를 보시면 왼쪽과 달리 여러 조각으로 부러져 있는 게 보입니다. 상처는 둘 다 오른쪽으로 나있고, 오른쪽 머리와 오른쪽 엉덩이를 제외하고 다른 곳은 깨끗합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37년만에 지상으로 불려나온 이 유골은 자신의 뼈에 쉽지 않은 수수께끼를 남겼습니다. ‘난 왜 죽었는가?’ 하지만 누구도 그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 유골의 주인이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故장준하, 서슬 퍼런 유신시절 재야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던 인물입니다. 사실 취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적잖은 고민을 했습니다. 37년이 지난 지금 그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사망사건의 유골이 세상에 나왔고, 그 유골에 의심스러운 흔적이 있다면 시대가 어땠든 진실은 꼭 밝혀져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가족의 마음은 이름난 정치인이건, 소시민이건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심, 조심, 조심해요>
진행자: 이 산을 다시 찾은 게 얼마만인지 모릅니다.
장호성(고인의 차남): 제가 아버지하고 등산을 참 많이 다녔어요. 아버지랑 등산 많이 다니고 마지막…. 제일 멀리 갔던 건 설악산.
진행자: 등산이 취미였던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산을 오르던 까까머리 소년은 어느덧 중년의 신사가 다 됐습니다.
장호성(고인의 차남): 아버님 시신이 누워 계신 데가 저 자리였고.
진행자: 이 자리에서 아버지 시신을 거두며 울음을 삼켰던 그날을 그는 마치 어제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호성(고인의 차남): 돌아가셨다고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그냥 그대로 누워 계시니까. 아, 아버지 주무시나? 여기서 주무시나? 이런 생각이 저도 들었어요. 떨어져서 추락했다는 사람이 어디 뭐 한 군데 찢어지거나 긁히거나 아무 외상을 볼 수가 없었어요. 아무 외상이 없었어요.
진행자: 아버지가 추락했다는 곳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높이 14m의 벼랑입니다. 그런데 이 벼랑에서 발을 헛딛었다는 아버지의 몸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상처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구르거나 찢긴 흔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이곳에서 추락한 걸까. 어린 그가 가슴에 품었던 이 의문은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았습니다.
장호성(고인의 차남): 客死하고, 凍死하고 죽은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 대한 기록은 다 남아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추락사, 그 다음부터 아무도 말 못 했어. 아무도 말 못 했어. 저희 식구들은 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그냥 37년 동안 있었던 거예요.
진행자: 1975년 아버지의 죽음이 그저 불운한 변사사고로 일간지 한 귀퉁이를 장식한 그 해는 유신독제체제의 절정기였습니다. 反독제∙維新철폐를 외치며 누구보다 정권에 날선 비판을 해왔던 장준하 씨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對日외교∙越南파병 정책에 강하게 맞섰습니다. 무엇보다 일제시대 광복군 투사였던 그는 일본군 장교로 몸담았던 박정희 前 대통령의 이력을 강하게 문제 삼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다 일정 자격만 갖추면 모두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박정희 씨만큼은 이 땅에서 대통령을 시켜선 안 될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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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한홍구 교수(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하고 숙명의 라이벌이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장준하가 누구입니까. 1950년대, 60년대 우리나라 지성계를 대표하던 잡지였던 〈사상계〉의 발행인이잖아요. 그걸 20년 끌고 온 사람 아니에요. 대한민국 톱클래스의 지식인이죠. 1974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던 장준하 씨는 維新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금지한 이른바 긴급조치1호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됩니다. 징역 15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잠시 풀려난 그는 당시 在野인사들과 함께 은밀히 거사를 준비 중이었다고 합니다.
백기완 소장(現 통일문제연구소, 1993년 촬영): 한 30명이 긴급조치9호를 때리는[반박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또 한편으로는 大衆운동으로 反戰평화대회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故계훈제(민주화 통일 운동가, 1993년 촬영): 그 중대한 성명을 8.15를 전후해서 하려고 그랬죠. 그때 마침 윤보선 씨가 하계휴가로 어디 시골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래서 15일경엔 못 하고, 그러면 언제 하느냐 그래서 (8월)22일경에 하자.
진행자: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겨냥하는 대규모 시국선언을 불과 5일 앞두고 장준하 씨가 사망한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우연이었을까. 우리는 장준하 씨가 사망한 그날의 상황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5년 8월17일 약사계곡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에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들어섭니다. 장준하 씨도 그 사이에 끼어있었습니다. 40분가량 산을 오르던 이들은 한 계곡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밥을 짓는 사이 장준하 씨가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습니다.
김희로(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선생님, 오늘 날도 덥고 건강도 안 좋은데 올라가지 말고 여기서 쉬었다 갑시다.” 그러니까 이렇게 산을 쳐다봐요 이렇게. “꼭 뒷동산 같네요. 내 잠시 갔다 올 테니까 김 선생님이 밥을 지어 놓으세요”라고 그래.
진행자: 장준하 씨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일행 중 한명이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갑작스런 비보가 들려온 건 회원들이 막 점심을 먹으려던 찰나였다고 합니다.
김희로(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1시 반쯤 됐을까, 그쯤 돼서 용환이가 뛰어와서 거기로 뛰어 올라오면서 선생님이 落盤(낙반)하셨다고 아주 긴박하게 얘기를 해.
김용덕(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뭐 앞이 안 보이더라고 까맣더라고 별이 반짝반짝하는 게 전혀 누구 사람 분간도 못 할 정도로 내가 그때는 당황했다고 그 때.
진행자: 사고 직후인 이때 장준하 씨의 시신을 목격했던 산악회 회원들은 유족들의 진술과 상당부분 일치합니다.
김용덕(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다른 데 상처가 없어요. 내가 그 당시에 봤고 코에서 무슨 누르스름한 물 나오는 거.
김희로(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아주 얼굴도 곱고 상처는 피 조금 고인 거 외에는 다른 게 없었어요. 옷차림도 뭐 특이할 만한 게 없었어요. (찢어지고 그런 것) 없었어요.
진행자: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일행 중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김희로: (김용환 씨는) “선생님 안되겠습니다 돌아갑시다” 그랬대요. 그러니까 (장준하 씨는) “내가 먼저 건너갈게” 그러더니 그 소나무, 문제의 소나무 그걸 잡고 뛰다가 떨어지셨다는 게 걔(김용환) 말이거든요.
진행자: 장준하 씨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격자는 장준하 씨의 선거운동을 도와주며 인연을 맺은 오랜 지인이었습니다. 그는 장준하 씨가 가파른 벼랑에서 소나무에 의지해 하산하던 중 그만 추락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장준하 씨가 추락했다는 벼랑은 높이는 대략 14m, 경사 70도가 넘는 곳으로 상당히 가파른 지형입니다. 현장을 본 회원들은 사고가 난 것이 무리도 아니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김희로: 渴水期(갈수기)에는 물이 졸졸졸 흘러요. 그리고 파란 이끼가 끼어 있어요. 그러면 거긴 적어도 빙판 이상으로 미끄러운 데예요.
김응식(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저는 떨어져서 안 돌아가셨겠나 하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보니까 물이 흘러가지고 바위가 굉장히 미끄럽더라고요. 왜냐하면 뇌진탕 같은걸 충분히 일으킬 수 있는 곳이더라고요.
진행자: 당시 시신을 검안했던 의사는 두개골 오른쪽에 생긴 골절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밝혔습니다. 미끄러운 절벽에서 추락을 하면서 머리를 부딪쳐 사망에 이르렀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실족사라는 그의 사인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장준하 씨의 유골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유골에 생긴 골절은 딱 두 군데, 두개골과 엉덩이뼈에 생긴 골절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 두 군데에만 골절이 생긴 것이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김기용 과장(‘ㅇ’ 병원 신경외과): 목이 부러져야 해요 사실은. 목뼈가 부러지거나, 어깨뼈가 부러지면서 완충하거나, 쇄골이 부러지거나. 더구나 골반하고 머리만 딱 두 군데만 골절이 온다는 것은 아주 난센스[비상식]죠.
황지효 교수(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정형외과): 정형외과적으로도 안 맞네요. 이 당시에 나이는 몇 살이었죠? 57세 정도면 사실은 이 골반 골절, 우리가 통상적으로 50세 이상부터는 좀 뼈가 많이 약해진다는 표현을 하거든요. 추락사로 보기에는 골절이 너무 없고요. 다른 데.
진행자: 피해자가 추락으로 인해 머리와 엉덩이뼈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될 경우, 머리를 지지하고 있는 목뼈와 지면에 닫는 어깨뼈, 그리고 갈비뼈까지 동시에 골절이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망한 장준하 씨의 나이를 감안하면 다른 뼈는 모두 멀쩡한데 두개골과 엉덩이뼈만 부러졌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얘기 입니다. 함몰된 것 같은 두개골의 골절모양이 예사롭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이 골절은 마치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테두리가 뚜렷한 원형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호 주임교수(전북대학교 법의학교실): 가만히 있는 물체에 가서 부딪힐 때는 움직이는 머리는 속도와 방향이 있어요. 그래서 가서 부딪히더라고 그렇게 정확히 원형처럼 부딪히는 것은 상당히 드물어요.
진행자: 통상 추락할 때 생기는 골절 모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추락해서 사망한 한 피해자의 두개골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추락해서 생긴 골절은 이렇게 금이 간 부위가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입니다. 추락할 때 받는 충격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달걀을 떨어트렸다고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달걀을 떨어뜨리면 지면에 닿는 접촉면에서부터 그 주변으로 넓게 금이 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추락했을 경우 이렇게 선명하게 원형을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장준하 씨의 머리에 이런 골절이 생긴 이유는 대체 뭘까.
이정빈 명예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그럼 때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건 무슨 뭐 블런트[뭉툭한]한 것에 맞았네요. 
이호 주임교수(전북대학교 법의학교실): 머리가 움직인다기보다는 머리는 고정돼 있고 둔기가 와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진행자: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등산도중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故장준하 씨의 죽음은 어쩌면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장준하 씨의 유골과 1975년 사건 당시 작성 된 사체의 검안소견서 사진들을 토대로 법의학, 신경외과, 해부학 등 국내 전문가 88명에게 자문을 요청했고 이들 중 공식적으로 답변을 해온 29명의 전문가들과 함께 장준하 씨의 사인에 대해 보다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우선 14m 높이에서 추락했는데 206개로 이뤄진 우리 몸의 뼈 가운데 오로지 오른쪽 두개골과 오른쪽 엉덩이 두 군데만 함몰이 되었다는 것은 법의학적으로 결코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른쪽 두개골에 생긴 뚜렷한 원형 함몰골절도 추락한 시신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양의 상처라고 합니다. 하지만 추락으로도 이런 모양의 두개골 함몰골절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전문가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추락한 장소나 상황에 따라 수천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먼저 가격의 가능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가격이 이뤄졌다면 그것은 단 한차례, 이 과정에서 실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두 번, 세 번 잇따라 가격을 한 것이라면 상처의 모양은 지금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뚜렷한 하나의 원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름이 6cm 가량의 원형 테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둔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단서는 틀림없이 장준하 씨의 유골 안에 있습니다. 법의학자 이정빈 교수가 둔기의 실체를 찾아 나섰습니다. 장준하 씨의 경우처럼 테두리가 뚜렷한 골절은 둔기의 모양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합니다.
이정빈 명예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일반적으로 보면 두개골을 쳤을 때 흉기 모양이 깨진 모양과 거의 비슷하게 남습니다.
진행자: 예를 들어 이렇게 끝이 날카로운 일자형 둔기로 충격을 가할 경우 그 접촉면은 그 둔기와 비슷한 일자형 골절이 생기게 됩니다. 뼈에 생긴 골절의 모양이 둔기의 모양을 상당부분 반영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모양이 다른 여러 가지 둔기들을 이용해서 실험한 결과 먼저 둔기의 모양이 좁혀졌습니다. 망치와 같은 원형의 둔기입니다.
이정빈 명예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이대로 반영이 되는 거예요.
진행자: 크기는 다르지만 망치로 충격을 가했을 때 생긴 모양은 장준하 씨의 두개골에 남은 골절과 상당이 유사합니다.
이정빈 명예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원형이다. 이것[골절함몰]의 지름을 가진 물체이다. 둔기는 지름 6cm 원형으로 좁혀졌습니다. 단 1970년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던 물건이라야 합니다. 우린 오래된 철물점을 찾았습니다. 수많은 공구들 중 지름이 6cm에 달하는 건 공사현장에서 흔히 쓰는 해머들입니다.
강영기(철물점사장): 산골짜기 같은 데서 돌 쌓는 사람들이 쓰는 이런 것. 이런 식[손잡이 없이 헤드만 이용]으로 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게 돌멩이, 석축 쌓는 사람들이 쓰는 것이고. 75년도 그때도 이런 것은 많이 있었으니까.
진행자: 주로 끝에 각이 져 있는 해머들 사이에 끝이 둥근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시절 주로 산에서 돌을 다듬는 용도로 사용된 물건이라고 합니다. 단면의 크기도 유골에 남아있는 흔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쉽게 이해하기 힘든점이 하나 있습니다. 산중에 누군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을까.
이정빈 명예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유영철이 12명 살인할 때 해머 안 가지고 다녔나. 이거에요. 손잡이가 이만하잖아요. 이거 이만큼.
진행자: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가지고 다니며 범죄에 사용한 해머입니다. 손잡이가 긴 해머자루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짧은 망치자루를 실리콘으로 접착시킨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휴대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두개골의 골절을 가격으로 볼 경우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윤일규 교수(순천향대학교 신경외과): 맞아서 골절이 생겼다면 골반 골절은 설명이 안 돼. 그렇잖아요. 이 골반 골절은 두개골 골절과 같이 왔다고 봐야 해요. 둔기에 의해서 맞았다면 그때는 골반 골절이 생길 수가 없잖아요.
진행자: 우리 몸에서 가장 단단한 뼈 중 하나인 엉덩이뼈는 사람의 힘으로는 부러트리기 힘든 부위입니다. 엉덩이뼈가 부러진 것으로 보아 추락은 틀림없이 있었다고 봐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윤 교수는 두개골 골절 또한 추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윤일규 교수: 이렇게 (몸통이) 위를 보면서 약간 우측으로 돌아서 떨어졌다는 생각은 들더라고. 그런 상태로 뒤로 떨어져서 바닥에 볼록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혀도 그렇게 쏙 들어갈 수 있고.
진행자: 추락하면서 둔기와 크기가 비슷한 돌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보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구체적인 자세까지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권일훈 소장(‘ㅅ’ 법의학연구소): 우측 측와 위라고 이야기하죠. 그렇죠? 우측 옆으로 이렇게, 우측 옆이면서 약간 뒤쪽으로 떨어지는 그런 자세의 추락. 이런 식으로 떨어지는 거죠. 이게 이렇게 됐으면. 이쪽 뒤쪽이 충격 받고, 팔 뒤쪽도 충격 받고, 엉덩이, 대퇴 저쪽 편도 함께 떨어지는.
진행자: 추락할 때의 자세를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골절의 테두리 모양입니다.
권일훈 소장(‘ㅅ’ 법의학연구소): 이것[함몰 골절]의 형태가 지금 비교적 정확하게 인상이 돼 있다. 전체적으로 이렇게 골절에 경계선이 잡혀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이런 형태의 물체가 거의 직각에 가깝게 충돌이 일어났다.
진행자: 마치 도장을 찍은 것처럼 이렇게 깔끔한 원형의 골절이 남았다는 것은 피해자가 추락할 때 머리에 정확히 직각으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이 경우, 장준하 씨는 구르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한 번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권일훈 소장(‘ㅅ’ 법의학연구소): 외상의 분포, 정도를 봤을 때 크게 몇 번 구르고 이런 상황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굴렀다면 정말 얼굴 안면, 광대뼈, 턱, 손등, 손목, 무픞 이런 데에 찰과상이 같이 있을 가능성이 높겠죠.
진행자: 만약 추락으로 머리와 엉덩이에 골절이 생겼다면 가능한 추락자세는 크게 네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누운 자세로 살짝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체 머리와 엉덩이가 동시에 지면에 부딪혔을 경우입니다. 둘째, 추락하면서 머리를 먼저 땅에 부딪히고 엉덩이가 지면에 닿게 되는 경우. 또는 추락하는 도중 머리를 바위와 같은 물체에 직각으로 부딪히고 지면에 닿게 되는 경우입니다. 마지막으로 엉덩이가 먼저 땅에 닿고 머리를 부딪쳤을 가능성입니다. 이렇게 자세만을 놓고 보면 추락하면서도 이런 골절이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계산에 넣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는 빠져있는 배경이자 장소, 장준하 씨가 추락한 실제 지형입니다.
권일훈 소장(‘ㅅ’ 법의학연구소): 법의학은 한 마디로 손상을 해석하는 학문입니다. 현장을 면밀히 살펴보니까 이런 형태의 외상을 만들어 낼만한 어떤 물체, 바위라든지 나무라든지, 아니면 다른 무슨 중간 물체들이 없다. 먼저 수사가 뒷받침이 돼야 되겠죠.
진행자: 우리는 다시 사고가 일어난 약사계곡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장준하 씨는 바로 이 벼랑을 통해 산을 내려오다 붙잡고 있던 소나무를 놓치면서 계곡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높이 14m, 경사 75도의 이 벼랑에서 구르거나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고 반듯하게 누운 자세로 추락하는 게 가능할까. 지난 2004년 홍익대 최형연 교수팀이 이 벼랑을 무대로 추락실험을 시도했습니다. 토목기사가 직접 측량한 지형정보를 입력하고 장준하 씨의 체형과 똑같은 인체모델도 만들어 냈습니다. 먼저, 사람과 장기의 형태가 비슷한 돼지를 이용해서 추락실험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시뮬레이션으로 예상한 결과와 실제 실험이 거의 흡사하다는 데이터를 손에 넣었습니다. 
최형연 교수(홍익대학교 기계시스템공학과, 2004년 촬영): 실제 낙하시험을 수행했고 마찬가지로 돼지 사체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해서…….
진행자: 이것은 목격자의 증언대로 장준하 씨가 소나무를 붙잡고 있다가 떨어졌다고 가정하고 시뮬레이션 한 결과입니다. 실험결과 무려 23차례나 구르거나 부딪혔습니다. 머리는 물론 등과 다리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추락의 자세는 절벽을 마주보고 추락하는 경우, 절벽에 등을 대고 추락하는 경우를 포함해 모두 12가지로 분류됐습니다. 여기에는 전문가들의 의견처럼 누운 자세로 떨어지는 경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이 모든 경우에 적어도 머리에만 3번 충격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사망 당시 장준하 씨의 모습을 찍은 실제 사진입니다. 그의 몸에는 분명 구르거나 미끄러진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윤일규 교수(순천향대학교 신경외과): 사고라면 반드시 본인을 그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여러 행태가 나타납니다. 물건을 잡든지 상처를 입으면서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발을 먼저 짚으면서 발목이 나간다든지 안 그러면 위험하니까 손을 짚으면서 손이 나간다든지 이런 흔적이 없습니다. 사지가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많이 움직이거든요. 전혀 없잖아요. 추락은 추락이되 본인의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진행자: 추락하는 동안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팔을 뻗거나 머리를 감싸는 등 방어 동작을 취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장준하 씨에겐 이런 반응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윤일규 교수(순천향대학교 신경외과): 그러면 이 사람은 떨어지는 순간에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지적∙의식 수준이 아니었다는 소리예요.
진행자: 추락 전에 이미 의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윤일규 교수(순천향대학교 신경외과): 이것은 다른 타인에 의해서 추락 지점에서 거의 수직으로든, 추락 지점하고 거의 수직이 되는 부분에서 떨어졌다는 소리거든.
진행자: 의식을 잃은 체 반듯하게 누운 자세로 추락했다면 추락하는 과정에 틀림없이 제3자의 개입이 있었을 거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둔기로 가격했을 것이라 보는 전문가들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호 주임교수(전북대학교 법의학교실): 어떤 형태로든 자구력 상실 상태, 예를 들면 뇌가 수면 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자구력 상실 상태가 된다면 머리 움직임이 거의 없죠. 도장을 찍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도장을 찍으려는데 움직이는데 원형이 제대로 찍히겠어요?
진행자: 가격이 이뤄지기 전에 장준하 씨는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피해자가 조금만 움직이거나 빗맞아도 테두리가 뚜렷한 원형대신 이렇게 불규칙한 형태의 상처가 남기 때문이다.
윤일규 교수(순천향대학교 신경외과): 그 상황은 결국 본인의 정신을 잃게 할 수 있는 외부의 요인이 분명히 존재한다.…….
진행자: 우리는 미국의 전문가에게도 자문을 구했습니다. 편견을 배제하기 위해 장준하 씨에 대한 일체의 정보도 주지 않고 오로지 뼈와 사고현장의 지형만을 제공했습니다.
에릭 바틀링크 교수(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법의인류학과): 추락하면서 보호하려 했던 부상이 보이지 않아요. 그 정도 높이에서 추락한 전형적인 피해자들 모습과는 달라요. 아주 특이한 경우예요.
진행자: 추락으로 보기엔 매우 독특한 사례라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그는 의미심장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에릭 바틀링크 교수(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법의인류학과): 추락할 때 이 사람이 의식이 없거나, 죽었거나, 독극물에 중독됐다면 수평으로 추락했을 겁니다.
진행자: 독극물과 같은 외부요인을 검토해 봐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당시 장준하 씨의 시신에는 묘한 상처가 하나 있었습니다.
故조철구 박사(1975년 장준하 사체검안, 1993년 촬영): 왼쪽 팔엔가 주사 자리가 있어요. 그것도 (사진을) 좀 찍어 달라 이러고, 그다음에 뒤를 보니까 바른[오른]쪽 엉덩이엔가 거기에도 주사 자리가 있어서 그것도 찍어 달라 했고.
진행자: 시신에 남아있던 이 주사바늘의 정체는 뭘까. 혹시 사고 전에 병원치료를 받았던 것은 아닐까.
김희숙(故장준하 씨 부인, 1993년 촬영): (병원에 가서 주사 맞은 적) 없어요. 병원에 가신 적 없어요. 내과에 입원했다가 나와서 한 번도 병원에 안 가셨어요. 당일에도 안 가시고.
진행자: 가격이냐, 추락이냐 팽팽히 맞서던 전문가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교집합을 이뤘습니다. 이 유골의 골절이 가격에 의한 것이든, 추락에 의한 것이든 장준하 씨는 그 이전에 이미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사체에서는 의문의 주사자국이 발견이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의 섣부른 추리는 경계하고자 합니다. 당시 부검이 이뤄지지 않아 이 주사바늘의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적할 단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장준하 씨가 추락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유일한 목격자의 증언입니다.
<1975년 사건 발생 후 김용환 육성녹음: 나무 윗부분을 잡으셔가지고 어떻게 잘못 뛰셨는지 기억이 안 나고 제가 여기서 보았을 때 나무가 휘는 것은 봤어요.>
진행자: 목격자 김용환 씨의 진술은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앞서 보셨듯이 장준하 씨의 유골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목격자의 진술은 뭔가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 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사고가 있었던 1975년 8월 장준하 씨는 유신체제를 겨냥한 거사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 무렵[1975년 8월16일, 사건 발생 하루 전] 한 남자가 서울에 있는 호림산악회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김용환 씨였습니다.
김희로(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그 때는 김용환 씨가 자기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내려가서 어느 조그마한 학교 선생을 한다고 그러더구만. 그런데 방학 때 왔어요, 그 때. 웬일이냐 그랬더니 방학 때가 돼서 선생님 좀 뵐 겸 왔다고.
진행자: 김 씨는 1967년 장준하 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할 당시 지구당에 찾아와 자원봉사를 하다가 4년 전 당을 떠났던 인물입니다.
김희로(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내일 (장준하) 선생님이 산에 가는가?” 하고 그걸 제일 첫 번째로 와서 물어본 거예요.
진행자: 장준하 씨가 종종 등산을 함께 온 이 산악회는 일요일인 이튿날 약사계곡으로 등반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김 씨는 장준하 씨가 그 산행에 참가하는지를 묻고 돌아갔다는 겁니다. 이튿날[1975년 8월17일 오전8시30분] 포천으로 향하는 관광버스가 상봉동에서 장준하 씨를 태운 그 때 김 씨는 버스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약사봉 계곡 입구에 일행이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30분. 날이 더우니 오늘은 계곡에서 놀다가자며 사람들이 짐을 푼 것이 12시 경입니다. 장준하 씨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습니다. 이 모습이 일행이 살아있는 장준하 씨를 본 마지막 순간입니다.
김희로(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선생님이 “지금 산에 갔다 온다” 그러고 올라가셨다고 하니까 그 뒤에 “같이 갔다 오겠다”고 (김용환이) 따라 붙었어요.
진행자: 김용환 씨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10분 후 등산로 한편에서 김용환 씨는 장준하 씨를 만났습니다. 이 때 장준하 씨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1975년 사건 발생 후 김용환 육성녹음: 한참 올라가니까 군인들이 두 사람이 서있어요. (어디서 군인을 만나셨어요?) 여기 가는데 한 10분 정도. (10분 되고).>
진행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군인은 김 씨를 제외하고 장준하 씨를 본 유일한 목격자일겁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 후 어디에서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목격자 김 씨의 진술에 따르면 여기서부터 장준하 씨와 김 씨 두 사람의 등반이 시작됩니다. 40분가량 등산을 한 두 사람은 정상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합니다.[오후 12시50분 경]
<1975년 사건 발생 후 김용환 육성녹음: 야산과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서 선생님이 거기서 식사를 하고 가자 그러니까. 샌드위치를 만들어 오셔서….>
진행자: 다시 하산을 시작해서 문제의 벼랑에 도착한 것이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의 일입니다. 목격자 김 씨에 따르면 장준하 씨는 김 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사코 가파른 벼랑을 통해 하산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장호성(故장준하 씨 차남): 다른 데에서는 모르겠지만 산에 대해서만큼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하고 산을 많이 다녔는데 산에 다닐 때마다 “진짜 조심해라”(라고 하셨다). 굉장히 조심성이 많으신 분이예요. 그렇게 무모하신 분은 아니었어요.
김희로(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김용환 씨가) 도저히 자기는 못 내려오겠다고 “선생님 돌아갑시다”라고 그랬대. 그러니까 “내가 먼저 건너갈게” 그러더니 소나무, 문제의 소나무 그걸 잡고 뛰다가 떨어지셨다는 게 그 사람의 말이거든요.
진행자: 김 씨는 장준하 씨가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오다가 추락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한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소나무의 존재는 장준하 씨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당시 사건조사를 위해 현장에 파견됐던 의정부지청 검사도 사고지점의 소나무가 살짝 휘어져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플래시로 떨어졌다는 지점을 비췄더니 절벽에 비스듬히 나있는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휘어져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높이가 12m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OO 당시 사건담당검사, 1993년〈월간조선〉인터뷰 中>
진행자: 사건은 그렇게 단순 실족사로 종결됐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온 사람이 한명 있었습니다. 장준하 씨의 시신을 검안했던 의사입니다.
故조철구 박사: 사실 양쪽 손을 다 보니까 똑같이 주먹을 이렇게 쥐고 이랬거든. 그래서 억지로 그 주먹을 펴서 봤어요. 그랬더니 이 손 안에는 아무 상처가 없어. 깨끗해.
진행자: 그런데 이 소나무의 존재가 논란이 되자 김 씨는 갑자기 자신의 진술을 뒤바꿨습니다.
<저는 장준하 씨가 실족∙추락할 때 소나무를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김용환 진술 中, 1998년 포천경찰서 재조사에서>
진행자: 김 씨의 증언에서 이 소나무가 슬그머니 사라진 겁니다. 나아가 김 씨는 자신은 그러한 말은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소나무가 휜 것을 본적이 없고, 휜 소나무가 있다는 말을 지금까지 한 적이 없습니다. -김용환 진술 中, 2004년 의문사위 조사에서>
진행자: 이것은 과연 사실일까. 1975년 장준하 씨의 장례식장에서 녹음 된 목격자 김 씨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5년 사건 발생 후 김용환 육성녹음: 나무 윗부분을 잡으셔가지고 어떻게 잘못 뛰셨는지 기억이 안 나고, 제가 여기서 보았을 때 나무가 휘는 것은 봤어요.>
진행자: 사건직후 김 씨는 분명 나무가 휘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그 때 김 씨가 갑자기 진술을 뒤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김 씨의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면 사건현장에서 휘어진 소나무를 봤다는 담당검사의 이야기는 뭘까. 우리는 현재 변호사로 개업한 당시 수사담당 검사를 찾았습니다.
<서OO 변호사님 혹시 계세요?/네, 계신데요./지금도 계신가요?/장준하 선생님 사건 때문에 그런 것 아니에요? 의정부에서 검사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제가 이것에 대한 의사 전달을 변호사님께 연락을 드렸었는데 일절 인터뷰는 거절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아시고 돌아가 주세요.>
진행자: 그는 장준하 씨 사건에 관해서라면 일체 할 말이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목격자 김 씨의 묘한 행적은 그 후로도 계속됩니다. 김 씨는 사고 당일 회원들과 같이 장준하 씨 시신을 수습한 후, 자신은 포천이동지서에 신고를 하러 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날 경찰서에 근무를 섰던 경찰관은 모두 네 명.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경찰에 신고를 하러 온 것은 김 씨가 아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용환이 거짓말하고 있는 겁니다. 목격자가 있었다면 당연히 실황조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와 같은 업무를 한 적이 없고 목격자라는 이가 그 시각에 이동지서에 들른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이OO 당시 포천이동지서경찰관, 2004년 의문사위 진술 中>
진행자: 그날 경찰에 신고를 하러 온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김응식(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가다가 신고를 하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가서 내려오다 신고를 했죠.
진행자: 같이 산행을 했던 김응식 씨였습니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왔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던 김 씨는 자정 무렵에나 다시 나타났습니다. 사라진 8시간동안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가 장준하 씨와 함께 있었던 한 시간 삼십여 분 간 이 산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해발 838m, 그때만 해도 이 산에서 잘 닦인 등산로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김용덕(약사봉 등산 동행, 1993년 촬영): 어디 머리나 디밀겠나. 그 길이 있겠어요? 그쪽으로는 길도 없어요.
오영(당시 인근 군부대 수사과 근무, 1993년 촬영): 일반적으로 알려진 등산코스도 아니에요. 오히려 장준하 씨가 거기서 사고를 당하셨기 때문에 알려진 곳이죠.
진행자: 이 산은 사건발생 불과 10일 전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등산로도 없는 길을 따라 단 40여분 만에 정상을 넘었고 다시 10여분 만에 실족지점인 계곡 위쪽에 도착을 한 셈입니다. 추락한 장준하 씨를 구하기 위해 김 씨는 이 벼랑을 한달음에 달려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김 씨가 말하는 동선을 직접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산행에 참가한 팀은 경력 20여년이 넘는 배태랑들로 꾸려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지점까지는 일단 같이 가서 한 팀은 정상으로 향하는 최단 등산로를 찾는 겁니다.>
진행자: 이들은 먼저 정상으로 향하는 최단경로를 찾아 나설 겁니다. 오전 11시 등반이 시작됐습니다. 산세가 험한 편이지만 전문 산악인답게 거침없이 산길을 오릅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오직 위로만 방향을 잡고 온 끝에 오전 11시46분(에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정상까지는 정확히 46분이 소요됐습니다. 장준하 씨와 김 씨가 여기까지 오는데 걸렸다는 40여분을 얼추 따라잡은 셈입니다. 여기서 다시 사고가 난 계곡으로 이동해 봤습니다. 하산길은 훨씬 가파르지만 아직은 걸어서도 이동할 만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장준하 씨가 하산길로 택했다는 이 장소는 수직에 가까운 벼랑입니다.
김준규(전문 산악인, 25년 경력): 여기 장난이 아니에요. 그래서 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안전벨트를 해야 해요.
진행자: 장비에 몸을 묶고도 한발 내딛기가 아찔한 지형입니다.
이주인(전문 산악인, 20년 경력): 지금 카메라 한번 돌려 보세요. 여기서부터 쭉 돌려보세요. 어떤 길로 하강이 가능한가. 하강은 불가능합니다. 암벽을 앞에 두고 전문 산악인들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바위는 곳곳이 미끄러운 물이끼로 뒤덮여있습니다. 한발 잘못 내딛으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지는 상황. 장준하 씨는 정말 이 길을 고집했던 걸까.
김교주(전문 산악인, 30년 경력: 우리가 줄을 설치하는 데까지는[정상부터 계곡 입구까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능할 순 있어요. 저도 왔으니까. 그런데 거기서부터는 줄이 없으면 저 같으면 다시 올라갔겠죠.
진행자: 산악인들은 한눈에도 위험천만한 이 벼랑을 하산길로 택한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이주인(전문 산악인, 20년 경력): 어느 정도의 등반 수준인지 모르겠지만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 하느냐는 좀 의아하네요. 조금이라도 산행 경력이 있다고 하시는 분이 이 등산로를 선택한다는 거는 좀 의문이 간다는 거죠.
김준규(전문 산악인, 25년 경력): 미끄러운 벨리[계곡] 구간에서부터는 무조건 추락이에요. 저희도, 전문가라도 장비 없으면 절대 못 내려가요.
진행자: 장비 없이 이곳으로 내려온다면 추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실족했다는 장준하씨보다 더 놀라운 건 이 길을 한달음에 달려 내려왔다는 목격자 김 씨입니다. 그것도 등산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말입니다.
<떨어지는 것을 봤으니까……. 어떤 정신으로 내려왔겠습니까. 선생님이 떨어지셨는데……. 정신없이 미끄러지면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용환 진술 中, 1993년 장준하 사인규명 조사위원회에서>
진행자: 김 씨의 말은 대체 어디까지 사실일까. 장준하 씨의 가족들은 지난 37년 동안 김 씨의 입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장호성(故장준하 씨 차남): (김용환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얘기밖에 한 게 없어.
김희숙(故장준하 씨 부인, 1993년 촬영): 하늘이 도우시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겠지.
진행자: 적어도 그날 그가 목격한 게 뭔지 뒤바뀐 진술속의 진실은 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 달라는 것이 가족들의 소원입니다.
김희숙(故장준하 씨 부인, 1993년 촬영):  37년이 됐는데, “나는 이렇게 밖에 못 봤다. 이렇게 했다더라.” 이렇게 확실하게, 정직하게 자기가 얘기만 해주면 된다. 그 사람은 언제나 마음 아프게 살 것 아니에요. 안 그러겠어요? 자나 깨나 늘 마음이 아플 거란 말이야. 그런데 왜 그런…….
진행자: 장준하 씨의 아내는 평생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을 김 씨가 오히려 안쓰럽다고 이야기합니다. 장준하 씨의 유골이 자신의 진술과는 다른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는 것을 목격자 김 씨는 알까. 우리는 가족들을 대신해 김 씨를 직접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교직을 은퇴한 후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찾아간 그의 시골집에 김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를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혹시 김용환 선생님이시죠?>
진행자: 마침내 37년의 세월을 넘어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김용환 씨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산 모형을 가리키며)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산악회 회원들이 장준하 씨와 목격자 김용환 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바로 여기입니다. 김 씨는 장준하 씨가 산을 올라가다가 이 지점에서 군인들을 만났고,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서 정상 부근에서 조금 내려온 이 지점에서 샌드위치를 함께 먹었다고 했습니다. 같이 등산을 온 일행들에게 점심식사 준비를 부탁했던 장준하 씨가 동료들을 두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듭니다. 김 씨는 이 계곡을 따라 하산하던 중 사고지점에 도착을 했습니다. 장준하 씨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은 이곳입니다. 김 씨는 장준하 씨와 자신이 함께 걸었다는 이 길을 안내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계곡으로 가는 길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수차례 재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그는 단 한 번도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 벼랑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그날 두 사람이 장준하 씨가 추락했던 지점까지 산행을 했던 것은 과연 사실일까요?
김용환(사고 당시 동행자): 그러니까 다 종결된 거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그러니까 난 거기에 답변할 그런 의무 없어. 뭐를 하려고 그러는 얘기야 무슨……. 뭐가……. 뭐가……. 뭐가……. 빨리 가시오. 가세요. 아니, 얘기할 게 없어요. 나한테 이렇게 하는 것은 즉, 다시 말하자면 선생님을 욕하는 거와 똑같다는 얘기요.
진행자: 장준하 씨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그는 벌컥 역정을 냅니다. 그 일에 관해서 자신이 말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한 가지뿐이라고 합니다.
김용환(사고 당시 동행자): 말려도 안 듣는 거예요. “내가 혼자 올라왔으니까 빨리 내려가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그것도 못 막은 거예요. 주저앉았어. 내가 주저앉기도 했어. 그런데도 먼저 뛰어서 넘으시는 거예요. 본래 성격이 후퇴를 안 하시는 분이야. 산에 가더라고 어렵다고 안 가시고 그러는 성격이 아니시라고.
진행자: 막무가내로 벼랑에 발을 내딛은 건 장준하 씨였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런 장준하 씨를 말리지 못한 것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김용환: 누구에게도 난 당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생님을 잘 못 모셨다는 것, 그런 양심의 가책은 어떻게 할 수 없는걸. 정말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내가 뭐 신입니까? 어떻게 해. 막지를 못한 걸……. 참 그것도 운명이라 할까. 어쩔 수 없는 그런 운명의 장난을 어떻게 뭐로 풀라는 겁니까.
진행자: 김 씨는 그것이 장준하 씨의 운명 이였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입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장준하 씨의 유골과 김 씨의 진실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린 이 사고에 대해 조금 묘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군인 한 사람을 만난 적 있습니다.
오영(당시 인근 군부대 수사과 근무, 1993년 촬영): 제가 그때 했던 일이 속보계라고 해서 사건이 나면 바로 기초자료를 만들어서 상급부대로 보고를 하는 역할을 했어요. 검문소에서 저를 찾아왔고, 갔더니 빨리 나가봐야 할 데가 있다고 해서 지프차를 타고 그 현장에 갔습니다. 그날 아마 제가 현장에 도착한 게 밤 11시 반쯤 됐을 거예요.
진행자: 그런데 현장조사를 담당했던 그에게 다음날 은밀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오영(당시 인근 군부대 수사과 근무, 1993년 촬영): “민간이 사고이고, 그런 걸로 종결을 지어라”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죠. 그 건은 그걸로 종결짓고 모르는 일로 해라.
진행자: 석연찮은 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장준하 씨의 죽음에 관해 강한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간 후 기자들은 남모를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장봉진(당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 기자, 1993년 촬영): 본사에서 빨리 들어오라고 야단이 났다는데, 왜 그러냐고 하니까 대충 설명을 해주더라고. 그 기사 때문에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송석형(당시 동아방송 기자, 1993년 촬영): 고인(장준하 씨)의 댁에 가서 아들, 부인과 만났는데 부장한테서 무전기로 연락이 오는 거예요. 취재는 무조건 중단하고 이유는 묻지도 말고 무조건 철수하라는 거예요. 동아일보 기자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그때부터는 언론도 굳게 침묵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는 이 모든 일에 정부기관이 개입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고상만(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사건이 발생한 날 중앙정보부 요원이 포천 약사봉에 굉장히 많이 방문을 했어요.
진행자: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장준하 씨를 위해분자로 분류하고 그의 개헌운동을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장준하 씨가 사망한 시점은 이 보고서가 작성된 뒤 불과 4개월 후였습니다. 의문사위에서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사건 당일의 중앙정보부 자료공개를 끈질기게 요구해왔습니다. 그런데…….
고상만(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전화를 받고 (중앙정보부가) 현장에 왔다고 하는 8월17일 밤 9시 이후의 보고문이 전부 없어요.
진행자: 중앙정보부는 장준하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해 왔습니다. 가족들과의 대화부터 그의 장례식장을 방문한 조문객단의 명단, 심지어 조의금 내역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건당일에 대해서는 등반도중 추락했다는 간략한 보고서가 전부입니다. 지금의 기무사에 해당하는 보안사령부의 움직임도 묘했습니다. 현장에 파견됐던 보안부대장은 현장에 있었던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고상만(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그 사람(보안부대장)의 당시 운전병을 저희가 어렵게 찾아냈고, 그 운전병을 통해서 “사건이 일어난 1975년 8월17일에 자신이 보안부대장을 싣고 사건현장을 방문한 사실이 있다”라는 진술을 얻었어요. 그래서 그 진술을 가지고 보안부대장에게 재조사를 요청하니까 오자마자 바로 “사실은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진행자: 105보안부대장이 그날 보안사령관에게 긴급한 보고를 올린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다음날 진종채 국군보안사령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단 둘이 만났습니다. 의문사위에서는 기무사측에 당시 보안사령부의 기록공개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야심차게 출범했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은 거기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상만(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권력이 바뀌었을 뿐 정보기관은 바뀌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은 매일 신문에 나오는 누군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진행자: 故장준하 씨의 유해는 아직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인을 밝히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벽에 가로막혀있습니다. 이 방송을 준비하는 동안 무척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장준하 씨의 유골에는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또 다른 실마리가 얼마든지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자문을 요청한 88명의 전문가들 중에 공식적으로 의견을 밝힌 사람은 29명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하던 결국에는 정치적 공방에 이용될 것이기 때문에 침묵을 지킨 것입니다. 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이제 와서 과거를 들추느냐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진실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고 장준하 씨의 유골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정치 공방만 아니었다면 유족들은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전문가들의 의견을 훨씬 더 풍부하게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1993년 이미 두 차례의 방송을 통해 장준하 씨 사망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방송이 나간 후 한동안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진상규명 불능. 정보기관에서 번번이 사건관련 문서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장준하 씨는 유신체제를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도 조사해 보고를 했고 사건 직후 대통령을 만난 사실도 드러났는데 관련문서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여기까지 오는데도 우리 사회는 너무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이제라도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벽을 거두고 지난 37년 동안 장준하 씨의 유족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녹취-정리/金玧珽 <조갑제닷컴> 인턴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