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
IMF의 재미 있는 통계를 소개한다. 1960년과 1980년의 1인당 국민소득(GDP=국내총생산 기준)을 비교한 자료이다. 1985년의 미국 달러가치로 환산한 수치를 기준으로 했다.
1960년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04달러(1985년 미국 달러 기준)였다. 당시 태국은 943 달러, 필리핀은 1133달러, 말레이시아는 1420달러, 아프리카의 아이보리 코스트는 1120달러, 방글라데시는 952달러, 모잠비크는 1153달러, 잠비아는 965 달러, 앙골라는 931달러로서 우리보다 잘 살았다. 그때 우리보다 못살던 곳은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1인당 국민소득이, 태국은 한국의 약4분의 1, 방글라데시는 한국의 약25분의 1, 필리핀은 한국의 약9분의 1이다. 아프리카보다도 못살던 대한민국이 44년만에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일류국가 문턱까지 발전했다는 이야기이다.
朴正熙 통치 18년간과 거의 겹치는 1960-80년 사이 20년간의 경제성장률을 보면 한국은 242%, 일본은 241%였다. 세계 180여개 국가 가운데 우리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올린 나라는 싱가포르(325%), 홍콩(288%), 보츠와나(263%), 대만(255%), 사우디 아라비아(254%) 정도였다. 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보츠와나는 다이아몬드, 사우디는 석유자원으로 경제를 일으킨 경우이다. 위의 자원富國을 제외하면 일본, 한국, 홍콩, 대만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秀급'이다.
1980-90년의 10년간, 즉 全斗煥-盧泰愚 정권 시절의 세계 각국 경제성장률을 살펴보면 한국이 연평균 10.1%로서 세계1위였다. 1980-2000년의 20년간을 잡으면 鄧小平식 개혁이 시작된 중국이 1위, 한국은 2위이다. 지난 40년간 쿠데타, 대통령 암살, 민중봉기 등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세계 최고수준의 경제성장률을 올린 그 원동력과 바탕을 만든 사람이 朴正熙였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생산성이 높고 효율적인 CEO였다는 이야기이다.
청탁을 함께 들여마시는 균형감각과 포용성
CEO 朴正熙의 리더십 비결에서 비교적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분야는 人事이다. 어떤 사람들을 골라 어떤 일을 주고 어떻게 부렸으며 어떻게 평가했는가 하는 부분을 말한다. 그런 인사의 본질을 알려면 朴正熙의 인간관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他人에 대한 인간관은 그 자신의 인간됨을 반영한다. 따라서 인간 朴正熙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부분을 먼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1. 朴正熙는 흔히 '淸濁(청탁)을 같이 들여마시는 사람', '북처럼 크게 치면 크게 작게 치면 작게 울리는 사람'이란 평을 받았다. 朴正熙의 인간적 본질을 잘 나타낸 것이 그의 國葬(국장) 때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이 장엄한 곡은 독일 철학자 니체가 쓴 同名의 책 서문을 음악화한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썼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그런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朴正熙는 질풍노도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더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들을 다 껴안고, 삼키겨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군 장교 시절에는 무능력자로 보일 만큼 물질적인 욕심이 없어 陸英修(육영수) 여사를 고생시켰다. 그는 남들한테는 자신과 같은 청렴함을 강요하지 않았다. 상대를 평가할 때 청렴함보다는 능력을 기준으로 하려고 했다. 물질적 욕심이 별로 없었던 사람이 역사상 가장 큰 國富(국부)를 만들어낸 비밀은 청탁을 가리지 않고 마셔버리면서도 인간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의 마지막 쪽에서 그는 유언과 같은 다짐을 했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본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그 유언대로 그는 죽을 때 서민의 그 소박하고 순수한 정신을 간직하고 있었다. 국군병원에서 그의 시신을 만진 의사들은 '시계는 허름한 세이코이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지고 혁대는 해져 있어 꿈에도 대통령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가슴을 관통한 총탄으로 등판에서는 피가 샘솟듯하고 있을 때도 그는 옆자리에서 시중들던 두 여인에게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빨리 피해'라는 의미를 담아 '난 괜찮아'라고 말했다고 한다(김계원, 신재순 증언). 죽을 때까지 그가 지켜갔던 순수한 의식은 잡념과 위선의 포로가 되지 않게 했고, 사물과 인물을 있는 그대로, 실용적으로, 정직하게 보고 이용하도록 했다.
눈물 많은 超人 또는 土種
2. 그는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호쾌한 영웅도, 電光石火(전광석화)의 천재도 아니었다. 그는 부끄럼 타고 눈물이 많은 超人(초인)이었다. 그는 한국인의 애환과 염원을 느낄 줄 알고 역사의 맥박과 숨결을 읽을 줄 안 토종 한국인이었다. 민족의 恨을 자신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근대화로써 그 恨을 푼 사람이었다. 鐵拳(철권) 통치를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서민정신을 견지했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서민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현실속에 뿌리내린 사람이었다. 국민들의 염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밀고나간 정책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국민들의 참여를 동원할 수 있었다.
3. 이런 소박성과 순수성은 朴正熙의 이념인 自主의 토양이 되었다. 그는 사물과 인물을 바라볼 때 자신의 主見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남의 장단에 춤을 추기를 거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1945년 이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야'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조선조 양반계층의 사대주의를 경멸했던 사람도 드물다.
朴正熙는 서구식 민주주의는 한국과 같은 前근대의 토양에는 맞지 않으니 그것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변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빵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가능하게 될 것이며 통일도 국민국가 건설의 과정속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보았다. '先건설, 後민주'의 근대화 전략은 성공했고 이는 개발도상국의 모범이 되었다. 국가와 國富(국부)의 건설 이전에 자유를 먼저 누리려고 했던 필리핀, 파키스탄과 같은 나라에서는 자유도 빵도 얻지 못했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한 나라는 실패하였고 미국에 맞서 인권탄압, 민주파괴자란 욕을 먹으면서도 인권과 민주의 물질적 바탕을 만드는 데 먼저 국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朴正熙는 성공했다. 朴正熙는 1972년부터 7년간 언론자유와 선거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약하였으나 배고픔을 해결함으로써 한국인의 인권 신장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4. 朴正熙는 상충하는 두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강직성과 잔情, 단순성과 복잡성, 현실과 이상, 公的인 규율성과 私的인 소탈함이란 양면성을 조화, 통합, 선별적으로 이용하면서 유연하게 사람과 사물을 다루었다. 성공한 인간, 조직, 국가의 공통점은 각기 상충하는 요소를 통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와 몽골제국은 전쟁에선 무자비했으나 통치에서는 너그러웠다. 고구려는 野性(야성), 조선조는 知性(지성)만 강조했으나 신라는 야성과 지성을 함께 갖추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통일대왕인 文武王의 그 명칭대로 文과 武의 통합된 힘에 의해서 이뤄졌다. 양면성과 상충성을 질서 있게 균형잡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는 상황대처 능력이 뛰어나고 폭 넓게 인간과 자원을 동원하므로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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