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분노


한 개인의 분노와 정의감으로써 세계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다가 광산업자가 된 사람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부모는 엄하게 아들을 교육했다. 루터는 '엄격하고 가혹한 가정을 피해 수도원으로 도망쳤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가 선택한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원도 엄격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곳에서 루터는 자신을 채찍질하듯이 苦行했다.
스물네 살에 그는 神父가 되었다. 작센 공국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강사가 된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교황 레오 10세였다.

1517년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사원을 완공할 경비를 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팔도록 했다. 면죄부를 산 사람은 지은 죄를 용서받을 받을 뿐 아니라 죽은 뒤 연옥에 빠져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증을 교황으로부터 받는 것이었다. 교황은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 알프레히트에게 면죄부 판매권을 맡겼다. 알프레히트 대주교는 요한 테첼이란 사람을 판매인으로 지정했다.
독일의 중심부에 있던 강국인 작센의 選제후(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영주) 프리드리히는 이 면죄부를 작센에서 팔아선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독일인의 돈이 이탈리아로 흘러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판매인 테첼은 작센 공국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접경지역 가까이 와서 면죄부를 팔았다. 작센 사람들이 국경선을 넘어가 면죄부를 사 오곤 했다. 비텐베르크 사람들은 면죄부를 사 와서 루터 신부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이 과연 효력이 있는지 물었다.

평소부터 로마 교황청의 부정 부패에 분노하고 있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지켜보면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루터는 교황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황이 하느님만 갖고 있는 권능을 사칭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善行(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 기부하는 것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인간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서 세운 공덕의 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그는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거대한 권위로서의 교황청을 일종의 사기집단으로 본 셈이다.

그는 신부와 같은 司祭 직업도 필요없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람들은 모두가 司祭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예수)과 인간 사이에는 司祭가 끼여선 안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근거로 성경 말씀을 내세웠다. 그는 성경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각을 담은 루터의 95개조 문서가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의 이단적 주장에 열렬한 찬성과 신랄한 반론이 쏟아졌다. 루터는 그 성격이 공격을 당할수록 더 강해지는 편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이 수도사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령을 내렸다. 종교재판에 걸어 화형시킬 것이 뻔했다.
루터는 작센공국의 영주인 프리드리히측에 편지를 보내 독일 제후들이 독일의 신민을 이탈리아로 넘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청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프리드리히는 이에 동의했다. 독일을 근거로 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도 프리드리히에게 루터를 잘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루터는 독일민족주의에 호소하여 이탈리아 교황의 명령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때 독일사람들은 '독일어를 쓰는 우리는 같은 민족'
이라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윌 두란트는 '역사속의 영웅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의 헨리8세(영국교회를 만들어 카톨릭에 대항한 왕)가 카톨릭의 교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 대한 교황의 압력을 거부하였던 것처럼 루터도 반란의 기치를 신학의 사막에 꽂지 않고 독일의 민족정신이라는 풍요한 토양에 꽂았다. 개신교가 승리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민족주의가 깃발을 흔들었다>

루터의 반역이 성공하여 개혁으로 불리게 된 데는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독일 사람들의 지지, 그리고 독일영주들에 의한 루터 보호가 있었다.

독일영주들의 보호조치로 해서 루터를 소환할 수 없게 된 교황은 체면을 구긴 셈이다. 타협안으로 교황은 루터를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던 카예탄 추기경 앞으로 불러 그의 주장을 취소시키라고 명령했다. 루터는 카예탄을 만나러 갔으나 이단사상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묵살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루터의 주장을 담은 문서들이 인쇄되어 돌아다니자 많은 대학생들, 상인들, 문학인들이 루터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후원금을 보내자는 운동도 일어났다. 루터는 인쇄술의 도움으로 드디어 민중의 마음을 잡은 것이다. 고무된 루터는 1520년에 '槪要(개요)'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교황을 정면 공격한다.

<로마는 자주빛 옷을 입은 바빌론이요,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회당이다. 우리가 도둑을 교수대로, 강도를 칼로, 이단을 불로 처형하면서 어떻게 이들 추기경과 교황, 그리고 로마라는 소돔의 온갖 하수구를 공격하지 않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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